18. 시범경기(4)
B 게임.
스프링캠프 초반 인원이 많을 때 주로 하는, 구단 간의 합의하에 성립되는 비공식 연습게임.
정식 시범경기가 아니기에 중계도 없고 기록에도 남지 않지만, 어쨌든 스프링캠프와 기간과 장소가 겹치다 보니.
“세상에! 완전 꽉꽉 찼네요!”
인기가 좋거나 화제가 되는 선수가 출전하는 경우 만석이 되기도 하지. 바로 지금처럼.
“저 시범경기 선발 출전은 처음이에요!”
“이거 시범경기 아니다.”
“그렇군요!”
2036 드래프트로 입단해 이제 막 마이너리그 첫 시즌을 마친 특급 유망주, 조나단 라틀리프 역시 이번 B 게임의 스타팅 라인업에 들었다.
아마 관중석을 물들인 다저스 유니폼 중 일부는 조나단을 보러 왔겠지.
8회 대수비로 출장해 2이닝 동안 제법 탄탄한 3루 수비를 선보였으니까.
“캐치볼 하러 가자.”
그래도 저 관중을 끌어모으는 데 가장 공을 많이 세운 건 내가 아닐까.
한눈에 보기에도 내 유니폼을 펼쳐 든 사람들이 많은 걸 보니.
“Koo!”
“Koo, 진짜였어······?”
몸을 풀러 나갔는데, 생각보다 격렬한 반응은 없었다. 오히려 조금 낯을 가리는 것 같기도 하고.
요 며칠간 전국적으로 타자로서의 내가 화제에 오르긴 했지만, 직접 보면 느낌이 다를뿐더러.
그라운드에서 왼손에 글러브를 낀 채 캐치볼을 하는 나를 목격하는 건 또 처음일 테니.
“Hey, Koo! 좌투수가 글러브를 끼는 손은 오른손이야!”
“마이너 애송이들이랑 놀더니 그것도 까먹은 거냐?”
물론 오클랜드 팬들은 그런 거 없고, 신나서 야유를 보내기 바빴다.
“뭐 이 자식들아? 뒤질래?”
“저 가난뱅이 XX들 지금 우리 Koo한테 뭐라 그런 거지?”
그러자 언제 낯을 가렸냐는 듯 다저스 팬들이 폭주하기 시작했다.
이제야 좀 우리 팬 같네. 고향에 온 듯한 편안함이다.
고함과 육두문자를 배경음악 삼아 캐치볼을 이어가며, 박도현에게 말을 걸었다.
‘야, B 게임 이거 말만 들어봤지 직접 뛰는 건 처음이거든? 넌 어떠냐?’
[나도 한 번밖에 안 해봐서 기억이 가물가물하긴 한데······ 아.]
말끝을 흐리던 박도현은 갑자기 떠올랐다는 듯 덧붙였다.
[그건 알아둬. 니가 생각하는 것보다 경기가 훨씬 개판일 수 있다.]
* * *
오늘 경기에서 내 역할은 유격수에 7번 타자.
중립 구장에서의 경기지만 우리가 홈팀을 맡기로 해서 지명타자는 없고, 8, 9번 타자는 포수와 투수.
그러니, 감독님의 의중은 이번 경기에서는 수비력을 보여주라는 거겠지.
훈련 상황만으로는 정확한 수비 능력을 파악하기 힘드니까.
굳이 유격수로 기용하는 이유도 대충 짐작은 된다.
실전 경기에서 유격수 수비를 일정 수준 이상 해낼 수 있으면, 내야 어느 포지션에서도 최소한 실책 머신은 되지 않을 거고.
다저스의 주전 유격수 카일이 시범경기보다는 훈련으로 컨디션 조절을 하는 걸 더 선호하는 편이기도 하니까, 그만큼 자리가 남지.
“Koo! 어디 한번 보여줘 봐!”
“설마 저딴 팀의 유망주 놈들 상대로 실책 저지르는 건 아니겠지?!”
2루와 3루 사이에 자리를 잡으니 팬들의 목소리가 쏟아진다.
오클랜드가 약팀이긴 해도, 몇 년간 탱킹과 리툴링을 통해 팜은 제법 튼튼하게 만들었을 텐데.
오늘 방심해서 헛짓거리라도 하는 선수는 그대로 굿바이겠네.
팬들뿐 아니라 다저스와 오클랜드 구단 관계자, 혹시 데려갈 선수가 있나 호시탐탐 노리고 있을 타 구단 스카우터들, 각종 언론에서 온 기자들까지.
보통 유망주라면 그런 사람들 신경 쓰느라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할 수 있지만, 솔직히 그럴 나이는 지났지.
“플레이 볼!”
다저스와 마찬가지로 라인업의 대부분을 유망주로 채운 듯, 하나같이 낯선 이름뿐인 오클랜드의 첫 타자가 들어왔다.
당연히 우리 팀의 선발 투수도 유망주였고.
투수가 와인드업하는 순간, 언제든 달려갈 수 있도록 몸의 중심을 낮추고 타자의 방망이를 노려봤지만.
“볼!”
초구는 터무니없는 곳으로 들어갔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공을 돌려받은 투수는 연이어 힘차게 공을 뿌렸지만.
“볼!”
“볼!”
아래, 바깥쪽, 위쪽. 아주 로케이션을 골고루 가져갔다.
저게 하이 패스트볼인지 심판 대가리에 꽂으려는 건지 헷갈릴 지경이었는데, 다행히 포수가 유망주치고는 공을 아주 잘 잡아냈다.
“후······.”
마스크 속 표정이 여기서도 보인다.
특급 유망주였다면 저렇게 빡쳤다는 티를 내는 대신 마운드를 방문했을 텐데, 그건 좀 아쉽네.
“볼!”
결국 몸쪽으로 반 개쯤 빠지는 공이 들어가며, 선두 타자 스트레이트 볼넷.
긴장한 몸을 잠깐 풀어주면서 다음 타자가 들어오기를 기다리는데.
뜬금없이 원정팀 덕아웃에서 코치가 나와 심판에게로 가더니.
[Pinch Runner!]
1회부터 대주자를 기용해버렸다.
뭔 상황인가 싶어 멍하니 쳐다보는데, 심지어 1루로 가던 1번 타자가 다시 타석으로 돌아가 타격 준비를 시작했다.
‘이런 거구나?’
B 게임에서는 양 구단의 합의만 있다면 선수 기용이 자유롭다. 아웃되거나 출루한 타자를 저렇게 다시 세워도 되지.
졸지에 같은 타자를 연속으로 상대하게 된 투수는 심기가 불편해 보인다.
타자가 타이밍을 읽기 쉬워졌으니 투수한테는 손해지.
근데 읽을 만한 공을 하나도 안 던졌으면서 뭐 그리 성을 내냐.
“볼!”
흔들린 멘탈은 크게 튀는 바운드 볼을 만들어냈다.
몸을 날려 폭투를 막아낸 포수가 결국 마운드를 방문했다.
투수가 좀 흔들리는 것 같아 나도 내야수들과 함께 가봐야 하나 싶었는데, 포수는 시간을 오래 끌지 않았다.
“한 번만 더 사인 무시하고 네 X대로 던진다면 내가 방출되는 한이 있더라도 네 X알을 반드시 잡아 뜯어버리겠어.”
그러더니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미트로 투수 엉덩이를 툭 쳐주고는 자리로 돌아간다.
사인을 개무시하고 던졌는데 저걸 다 받아냈다고?
내 안에서의 포수에 대한 평가가 초특급 유망주로 정정되었다.
메이저 투수가 장난으로 푸는 포수 길들이기 썰을 진짜로 실천한 모양인데, 저러면 처맞아도 싸지.
“아웃!”
“아웃!”
포수의 협박이 효과가 있었는지, 라인드라이브성 타구를 1루수가 거의 제자리에서 잡아내며 더블 플레이가 완성됐다.
오클랜드는 1번 타자에게 세 번째 타석을 선사하는 대신 2번 타자를 내보냈고.
“아웃!”
포수 파울 플라이가 나오며 타구를 건드려볼 기회도 없이 1회 초 수비가 끝났다.
* * *
B 게임에 출전하는 선수들은 유망주뿐만이 아니다.
오프 시즌에 마이너리그 계약, 혹은 염가 계약으로 업어 온 선수들을 세워보기도 하지.
오늘 오클랜드가 마운드에 올린 선발 투수도 마찬가지다.
적어도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한 적은 있지만, 이미 전성기가 지난 노익장 투수는.
“베이스 온 볼스!”
다저스의 선두 타자를 볼넷으로 내보내더니.
따아악―!
“넘어가나?! 넘어······ 악!”
커다란 타구를 내주며 다저스 덕아웃을 설레게 했지만, 아쉽게도 펜스 바로 앞에서 타구가 잡혔고.
따악―!
3번 타자가 안타를 때려내면서 1사에 1, 3루 상황이 되었다.
대기 타석에서 나와 씩씩하게 걸어가는 4번 타자는 조나단 라틀리프.
“조나단! 지난번 경기처럼만 해!”
“이 늙은이를 애리조나도 모자라서 마이너 구장까지 발걸음하게 만들 셈이야?! 내년엔 네가 LA로 와야지!”
관객들은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열렬한 반응을 보였다.
그럴 만도 하지. 시범경기에서 대타로 2타석을 나와 1타수 1안타 1볼넷. 무려 10할 타자님이시니까.
앞선 타자들보다 조금 긴 투구 동작을 가져간 끝에 투수가 초구를 던졌고.
“파울!”
조나단은 오른쪽 관중석에 떨어지는 큼지막한 파울 타구로 자신의 파워 툴을 뽐냈다.
낯선 타자가 초구를 저렇게 때려내면 투수로서는 간담이 서늘하지.
아마 유인구로 타자가 어떻게 대처하는지를 보려고 들지 않을까.
후우웅!
투수의 선택은 몸쪽 아래로 떨어지는 슬라이더였고.
조나단의 방망이는 시원하게 허공을 갈랐다.
“스윙! 스트라이크!”
스윙 두 번으로 투 스트라이크.
여기서 투수는 타자가 생각할 시간을 주면 안 된다.
이런 상황에서는 신중하게 고른 결정구보다 그냥 아무거나 빨리 던지는 게 더 효과가 좋을 수 있다.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하이 패스트볼에 배트가 나오면서 삼구삼진.
더블 플레이만큼은 아니지만, 중심타선으로서는 상당히 아쉬운 결과였다.
“아······.”
“괜찮아, 조나단! 10할 타자는 너무 완벽해서 인간미 없어!”
“그럼, 그럼! 5할이 딱이지!”
다저스 팬들은 타자들이 들으면 게거품을 물 만한 위로의 말을 보냈지만.
“하······.”
조나단은 고개를 떨군 채 덕아웃으로 돌아왔다.
[제대로 말렸네.]
안타까워하는 박도현의 말에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잔머리를 굴릴 줄 모르는 투수는 절대로 메이저리그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타자의 생각이 복잡해지거나 대처가 매끄럽지 못하면 아무리 특급 유망주라고 해도 잡아먹히기 마련이지.
물론 반대의 경우도 성립할 수 있다.
그것마저 역이용하려고 일부러 약점을 가장하는 타자에게 넘어가거나, 아니면―
“베이스 온 볼스!”
유인구에 자신이 붙어서 남발하다가 저렇게 카운트 싸움에서 불리해지거나.
이제 2사 만루.
준비를 마친 뒤, 6번 타자의 뒤를 이어 대기 타석으로 나갔고.
오늘 경기를 통틀어 가장 요란한 반응이 뒤따라왔다.
“Koooooo!”
“어디 방망이 솜씨 좀 보자!”
“포기하지 마! 제발 마운드로 돌아가 줘, Koo!”
“작년까지 투수였던 놈한테 설마 처맞는 건 아니겠지?!”
다저스 팬, 오클랜드 팬 할 것 없이 아주 난장판이 따로 없었다.
게다가 프레스석의 기자들은 물론, 일반 관중석에서까지 온갖 카메라 플래시가 펑펑 터진다.
배트 링을 끼우고 연습 스윙을 시작하니, 대기 타석 근처 관중석에서는 환호성까지 터져 나온다.
[긴장 풀고, 하던 대로만 해.]
관심이 과하면 자기 플레이를 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조금 전 조나단도, 사실 저 정도 투수의 공에 삼구삼진을 당할 만한 타자는 아니니까.
그런데, 부담은 나만 느끼는 게 아니다.
상대 투수한테는 대기 타석에서 스윙하는 내 모습이, 적어도 다른 타자 유망주들과 똑같아 보이지는 않을 거다.
나와 승부를 해야지, 나를 보러 온 사람들이나 나를 찍으러 온 기자들과 승부하려 들면 안 되는데 말이야.
물론 멘탈이 단단한 선수라면 신경 쓰지 않거나, 오히려 기회라고 여기며 평소보다 좋은 활약을 선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퍼억!
“힛 바이 피치! 주자 1루로!”
커맨드가 급격히 흔들리면서 초구에 밀어내기를 허용하는 걸 보면, 최소한 그럴 걱정은 안 해도 되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대기 타석 밖으로 한 걸음 내딛었고.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
“Koo!!! Koo!!! Koo!!!”
다저스 팬들은 발광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드라마틱한 사연을 가진 선수에게 주어진, 2사 만루라는 드라마틱한 기회.
팬들은 타자로서의 나를 접할 기회가 없었으니 당연히 근거도 없지만, 그래도 야구팬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내가 뭔가 해줄 거라고 기대하는 게 당연하다.
그 와중에 투수는 혹시라도 교체 사인이 나오지는 않나 덕아웃을 힐끔 쳐다보고 있는데, 당연히 그럴 리가 없다.
애슬레틱스의 코칭스태프 입장에서 나는 다저스의 스타팅 라인업의 타자 중 투수 다음으로 만만할 테니까.
설령 나 대신 아주 위협적인 타자가 나왔더라도 교체는 꿈도 못 꿀 일이다.
애슬레틱스는 이 선수를 육성하는 게 아니라 평가하기 위해 이 자리에 세웠으니까.
타석에 들어가 루틴을 시작하면서 관중석이 조용해지자, 투수의 눈을 살필 여유가 생겼다.
적어도 나를 다른 타자들과 똑같이 여기지는 않을 거고. 아주 만만하게 보거나, 아니면 쓸데없이 두려워하거나. 둘 중 하나겠지.
‘끝났네.’
이 타자를 죽여버리겠다는, 만루 상황의 투수에게 당연히 있어야 할 투지가 하나도 안 보인다.
와인드업을 하는 투수를 보며, 덕아웃과 대기 타석에서 계속 맞춰온 타이밍에 따라 하체의 움직임을 정확히 멈췄다.
선택지는 완전히 벗어나거나, 가운데로 몰리거나. 단 두 개뿐.
그리고 그건 투수의 손끝에서 공이 떠나는 순간 알아낼 수 있는 것들이었다.
“흐읍!!!”
공이 배트와 만나기도 전부터, 나는 이미 결과를 예감하고 있었다.
따아아아악―!
모든 관중이 한순간에 숨을 멈추고 타구에 집중했고.
쭉쭉 뻗어나간 타구가 담장을 넘어가자, 경악과 환희에 찬 함성이 그라운드에 쏟아졌다.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
투수의 운명을 직감했기에, 쓸데없이 배트를 던지거나 환호성을 지르는 등 자극하지는 않았고.
그저 앞만 바라보면서 세 개의 베이스를 빠르게 돌아, 마지막 홈플레이스를 밟았다.
비공식이라고는 하지만, 0에서 1로 타율이 껑충 뛰어오르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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