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시범경기(5)
실전 경기에서의 첫 홈런.
뭔가 벅찬 감정이 주체가 안 될 줄 알았는데, 생각했던 거랑은 조금 달랐다.
당연히 기쁘긴 기쁘지. 그런데 일단 아무리 주목받고 있다고는 해도 연습 경기니까. 보상 포인트 같은 것도 없고.
함께 들어온 주자들끼리 하이파이브를 나눴지만, 막상 덕아웃으로 들어오고 나서는 서먹해졌지. 당장 메이저 캠프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리싸움을 하는 중이니까.
“Koooooo! 미쳤어요! 홈런이라니!!!”
좀 전까지만 해도 풀이 죽어 있던 조나단만 신나서 방방 뛰며 헬멧 쓴 머리를 마구 두드린다.
얘만 이러니까 폭행당하는 것처럼 보였는지, 그래도 다들 쭈뼛쭈뼛 다가와서 몇 대 때려준다.
“Koo!!! Koo!!! Koo!!!”
그렇게 덕아웃 분위기가 다시 차분해질 때까지도, 내 이름을 연호하는 소리는 끝나지 않았다.
심지어 심판이 이쪽을 쳐다보며 눈치를 줄 정도의 큰 소리로.
“인사라도 하고 와, Koo. 저 사람들 너 나갈 때까지 저럴 것 같아.”
오늘 경기의 감독 대행을 맡은 벤치 코치가 내 등을 떠밀었다.
사실 방금 홈런으로 투수 하나의 말년 커리어를 박살낸 거나 마찬가지여서 웬만하면 가만히 있으려고 했는데, 지금 이러는 게 더 민폐 같더라.
“와아아아아아아!!!”
“이거였어! 내가 원하던 게 X발 이거였다고!!!”
“Koo!!! Koo!!!”
덕아웃 밖으로 나가 사방을 바라보며 손을 한 번씩 흔들어주니, 경기장이 뒤집힐 듯 시끄러워진다.
투수 쪽을 안 쳐다보려고 했는데 고개를 돌리면서 눈에 들어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 X 같은 팀은 저딴 걸 투수라고 데려와?!”
“투수한테 그랜드슬램이나 처맞는 새끼가 아직 거기 서고 싶냐?!”
모든 걸 놓아버린 듯 고개를 떨군 채, 오클랜드 팬들의 비난을 그저 듣고만 있다.
1회에 5실점 했으면 바꿔줄 법도 한데, 원정팀 덕아웃에서는 아무런 움직임이 없다.
[마음 약해지고 그러는 건 아니지?]
8번 타자가 타석에 들어가는 걸 멍하니 쳐다보고 있으니 박도현이 다가와 묻는다.
‘미쳤냐?’
여기 있는 선수 중 기회 하나하나가 간절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마이너리그에서 투수로 뛰던 때도 상대 타자의 기회를 빼앗으며 메이저로 올라가려고 아등바등했지.
그렇게 생각하며 흥분을 가라앉혔고, 8번 타자가 내야 뜬공으로 아웃되는 걸 보며 글러브를 챙겼다.
이때 평정을 되찾은 상태에서 그라운드로 나간 건 신의 한 수가 되었다.
경기가 개판일 수 있다는 박도현의 말이 2회 초 수비에서도 이루어졌으니까.
* * *
2회 초 선두 타자.
1번 타자가 타석을 두 번 소화하면서 3번 타자가 나왔다.
덕아웃에서 지시했던 건지, 아니면 본인 판단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초구에 기습번트를 댔고.
재빨리 3루수 뒤로 커버를 가면서도 저 정도면 조나단이 충분히 처리할 수 있으리라 예상했지만.
타이밍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조나단은 자기 쪽으로 굴러오는 타구를 한 박자 늦게 붙잡았다.
“아~!”
마음이 급한 상태에서 완벽한 플레이가 나올 리 없었다.
1루로 공을 뿌리자마자 본인도 머리를 감싸 쥐었을 정도로 어처구니없는 악송구.
“세이프!”
1루수의 발이 베이스에서 떨어지면서 번트 안타가 됐지만, 지금은 추가 진루를 막은 것만 해도 잘한 일이다.
“괜찮아, 괜찮아! 나이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듯 손뼉을 치며 내야수들의 집중을 유도했지만, 속은 영 개운치가 않았다.
긴장이 풀어질 수 있는 5점 차. 게다가 조금 전 삼구삼진으로 의기소침해졌을 3루수 쪽을 노린 번트.
나를 포함해 경력이 다소 부족한 내야진을 흔들려는 의도가 뻔히 보였으니까.
“심판! 대주자 내보내겠습니다!”
오클랜드는 조금 전까지 유격수 수비를 보던 선수를 대주자로 내보냈다.
선수를 자유롭게 넣었다 뺐다 할 수 있는 B 게임이라 가능한 기용.
게다가 타석에는 ‘나 힘 좀 써요’라고 시위하듯 배트를 붕붕 돌리는 거구의 4번 타자.
포수가 덕아웃을 힐끔 쳐다봤지만, 마운드 방문 사인은 나오지 않은 모양이다.
“흐읍!”
기합과 함께 세트 포지션으로 던진 초구가 타자의 방망이와 부딪혔고.
딱!
애매한 타격음과 함께, 오늘 경기에서 처음으로 수비 상황이 찾아왔다.
조금 느린 땅볼을 마중 나가서 글러브로 건져낸 다음, 곧바로 2루수에게 던졌다.
사실 블래스 신드롬이 송구에도 영향을 미치는 게 아닌가 걱정하기도 했다.
연습 때는 제구가 어느 정도 되는데, 실전에서는 못 써먹을 수준이 되는 패턴도 많으니까.
그러나 내 송구는 의도한 대로 2루수를 향해 정확하게 날아갔고, 더블 플레이를 확신한 순간―
“세이프!”
정신을 차리고 보니,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엎어져 있는 2루수 옆으로 공이 데구르르 굴러가고 있었다.
‘이게 뭔······.’
주자가 2루심에게 타임을 요청하고, 인플레이 상황이 해제되자마자 박도현에게 물었다.
‘야, 이거 내 송구가 잘못된 거냐?’
정식 경기라면 리플레이 상황이 전광판에 나올 텐데, 지금은 뭐가 문제인지 알 수 없었다.
박도현이 고개를 저었다.
[아냐. 이거 그냥 쟤가 글러브질 잘못해서 떨어트린 거야.]
태그가 필요한 상황도 아니고, 베이스 밟고 포구만 잘하면 되는 상황에서 2루수의 치명적 포구 실책이 나왔다.
나라 잃은 듯한 표정으로 나와 2루수를 번갈아 쳐다보는 투수에게 일단 미안하단 표시를 보낸 뒤.
“내야수들! 정신 놓지 말고 집중해!”
선두 주자 출루 상황보다는 좀 더 단호하게 외쳤다.
유격수로는 통산 첫 출전이지만, 어쨌든 이 중에서 메이저리그에서 뛰어본 건 나뿐이니.
내야수들의 멘탈이 흔들려서 자꾸 이상한 플레이가 나오면 결국은 내 책임으로 돌아갈지도 모른다.
아직 점수 차가 커서 그런가, 코칭스태프의 방문은 없었고.
혼자 심호흡을 하며 멘탈을 가다듬은 투수는 타석으로 다가오는 5번 타자와 마주했다.
겨우겨우 집중을 유지하고는 있지만, 솔직히 나도 침이 바짝바짝 마른다.
‘여기서 실책 한 번만 더 나오면 진짜 게임 터질 수도 있다.’
그딴 생각은 하지를 말았어야 했는데.
딱―!
1루 선상 쪽으로 흐르는 빠른 땅볼 타구.
타구가 빠져나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중계 플레이를 대비하려는데.
“와아아아아아!!!”
1루수가 몸을 날려 타구를 잡아냈다.
자세가 불안정하니 2루까진 무리고, 타자 주자는 잡아낼 수 있는 상황.
그러나 의기양양하게 몸을 일으킨 1루수의 표정은 이내 당혹으로 물들었다.
“1루!!! 1루!!!”
텅 빈 1루를 가리키며 목청껏 외쳤다.
그제야 엉거주춤하게 서 있던 2루수와 투수가 몸을 날렸지만, 이미 늦어도 한참 늦었다.
“세이프!”
투수의 베이스 커버 실책.
2루에 주자가 있으니 거리상 2루수가 커버하기는 무리였고, 투수가 타구를 보자마자 1루로 뛰었어야 했다.
3루수, 2루수, 투수. 3연속 실책성 플레이로 무사 만루.
“이 XXX들이 지금 장난해?!”
“어떻게 수비를 제대로 하는 X끼가 한 명도 없어!!!”
관중들의 욕설과 비난이 아득해지는 내 머릿속에 날아와 꽂힌다.
숨이 턱턱 막히고, 뒷목이 저릿저릿하고, 내 눈치만 보고 있는 내야수 일동에게 뭐라 퍼붓고 싶은데 입은 안 열리고.
“억! 어억······!”
내 건강을 걱정해서였을까.
한동안 조용하던 시스템 메시지가 갑자기 나타났다.
[돌발 미션 발생!]
[동료 내야수들의 놀라운 수비로 인해 무사 만루가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나 고작 이런 경기에서 멘탈이 터져버린다면 메이저리그에서 살아남을 수 없겠죠? 동료들을 다독이면서 이 상황을 최소한의 출혈로 막아냅시다!
미션: 2실점 이내로 이닝 종료
보상: 무실점 시 1,000포인트, 1실점 시 700포인트, 2실점 시 300포인트
실패 시: 500포인트 차감]
시스템 메시지만 보면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해진다.
이 모든 게 현실이 아니라 그저 야구 게임을 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덕분에 지금 상황을 조금 냉정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무사 만루에 2실점.’
나름 합리적인 세금이다. 5점을 앞서고 있기도 하니, 지금 내야수들을 향해 죽일 듯 야유를 퍼붓는 팬들도 최소한의 납득은 하겠지.
그러나 문제는, 실점이란 건 내가 온전히 컨트롤할 수 없는 영역이라는 거다.
막말로 투수가 만루 홈런이라도 맞아버리면 아무것도 못 하고 게임 오버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받아들일지 말지 고민하는데, 덕아웃에서 코치가 나와 투수를 교체했다.
약간의 시간이 생긴 상황.
두말할 것 없이 미션을 수락한 다음, 내야수들을 불러 모았다.
“Hey, guys.”
“예!”
마지못해 대답은 하는데, 목소리가 시원찮다.
“내가 진짜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데······ 왜 다들 인생 끝난 것마냥 죽상 쓰고 있냐?”
질책으로 생각했는지 다들 고개를 푹 숙인 채 입을 다물고 있다.
가장 가까이 있는 놈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야, 너네 중에 솔직히 투수 하던 놈이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거 보고 X 같다고 생각했던 놈 있지?”
한 박자 늦게 “아닙니다!”라고 대답이 나오긴 했는데, 얼굴 다 기억해야겠다.
어떻게 한 놈도 바로 부정하지를 않냐.
“나 지금 이 기회 공짜로 받은 거 아니다. 메이저에서 해온 게 있으니까 그래 한번 해봐라, 하고 경기도 내보내 주고 그런 거지. 그런데!”
한 명 한 명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말을 이었다.
“니들도 똑같아. 마이너에서 X나 잘했으니까 여기 부른 거고. 지금 이렇게 수비 조졌어도 이번 시즌 작년만큼만 하면 내년에 여기 또 부를걸?”
어차피 본인들도 여기서 잘해봤자 개막 엔트리에 들어갈 일이 없다는 건 알고 있다.
이런 유망주들은 경험을 쌓게 해주기 위해 부르는 거고,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내려가는 거다.
이걸 몇 년 정도 반복하면 본격적인 경쟁의 기회가 생긴다. 아니면 마이너에서 박도현만큼 활약하던가.
“이게 무슨 원코인 게임인 줄 아냐? 메이저리그도 162게임이야. 한 경기에서 실수 좀 했다고 남은 기회 다 날려버릴 거야? 대답 안 해?”
“아닙니다!!!”
“그럼 빨리 니들 자리로 가서 Fuckin’ 수비할 준비나 해!”
마침 새로 올라온 투수도 슬슬 어깨가 데워진 것 같으니, 내야수 놈들을 제자리로 돌려보냈다.
심판이 준비를 끝냈냐는 질문에 투수가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관중석까지 들릴 정도로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쳤다.
“Let’s Go!”
“Dodgers!!!”
내야수들의 목소리에 활기가 돌아왔다.
실수에 실수가 겹쳐서 멘탈이 갈려나갔을 뿐, 원래 다들 한가닥 하는 선수들이니까.
이 정도 해줬으면 최소한 지금까지처럼 정신 나간 수비는 안 할 거다.
“플레이 볼!”
물론 그건 그거고. 미션은 미션이다.
투수가 와인드업을 하기가 무섭게 머릿속으로 주문을 외웠다.
‘제발 삼진! 제발 삼진! 제발 삼진!’
투수가 3연속 삼진으로 잡아주기를 바라는 양심 없는 기도에 야구의 신이 노했던 걸까.
“볼!”
“볼!”
볼 두 개가 연속해서 존을 벗어나는 걸 보며 남몰래 식은땀을 훔쳤다.
생각해보니까 투수가 제구 망해서 밀어네기 볼넷 세 번 내주면 그대로 끝나는 거였다.
부디 그것만은 피하게 해달라는 처절한 기도만큼은 들어준 건지.
딱!
타자가 배트를 휘둘러 타구를 만들어냈다.
위치는 3―유간이지만 내 쪽으로 약간 치우쳤다. 그러나 문제는 타구의 높이와 속도였다.
배트와 공이 부딪힌 순간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면서 타구 방향으로 첫발을 뗐고, 위치를 포착한 다음 도약을 준비했다.
‘놓치면 X 된다!’
달려온 가속력을 다리에 끌어모아 힘차게 뛰어올랐다.
시야각 때문에 결과가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촉감으로만 성공 여부를 알 수 있는 두려운 시간이 지나고.
글러브 안에 묵직한 촉감이 느껴지자마자 다시는 놓치지 않겠다는 듯 힘을 주었다.
“아웃!”
공이 담긴 글러브를 확인한 3루심이 주먹을 흔들었고.
“백! 배애애액!”
애슬레틱스의 3루 코치가 다급히 외쳤지만, 타구가 3―유간으로 날아가는 걸 보자마자 이미 모든 주자는 스타트를 끊은 상태였다.
공중에서 이미 오른손에 꺼내쥔 공을, 착지와 거의 동시에 노 스텝으로 3루수 조나단을 향해 던졌고.
“아웃!”
베이스를 밟은 조나단은, 3루 근처에서 허망한 표정으로 넘어져 있는 2루 주자를 태그했다.
“아웃!”
라인드라이브―포스아웃―태그아웃.
트리플 플레이로 이닝 종료.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믿을 수 없는 결과를 마주한 다저스 팬들이 관중석에서 날뛰었다.
“Koo!!! Koo!!! Koo!!! Koo!!!”
만루 홈런을 쳤을 때처럼 내 이름을 연호하는 팬들에게 손을 흔들어준 뒤.
나한테 달려드는 내야수들의 머리를 헝클어트리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내야 수비 경력은 내가 제일 X밥이야! 내가 할 수 있으면 니들도 다 할 수 있어!”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