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경쟁의 시작(1)
무사 만루에서의 트리플 플레이는 실낱같이 이어지던 애슬레틱스의 집중력을 산산조각내 버렸다.
다저스는 2회에 올라온 투수에게서 2점을 더 빼앗았고, 라인업에 올라온 모든 선수가 그라운드를 밟은 뒤 애슬레틱스는 협의를 통해 7회 말 공격 없이 경기를 끝냈다.
최종 스코어 9대 2.
선발 야수 중 유일하게 4타석을 소화한 나는 세 번째 타석에서 안타를 추가하며 3타수 2안타 1볼넷을 기록했다.
그러나 타석에서의 활약은 커뮤니티에서 별 관심을 얻지 못했다. 1회 말 그랜드 슬램도 화제는 됐지만 금방 묻혀버렸고.
그보다 훨씬 임팩트가 큰 플레이가 나왔으니까.
[LAD―OAK, B 게임에서 트리플 플레이 등장!]
[Koo의 슈퍼 다이빙 캐치! 트리플 플레이를 만들다]
메이저리그에서도 많아야 1년에 10번이 채 나오지 않는 삼중살.
정규 게임의 중계 화면만큼 자세하게 찍히진 않았지만, 3루 근처의 한 카메라가 내 플레이를 나름 선명하게 담아냈고.
이 영상은 야구를 다루는 한 TV 프로그램에서 공개되었다.
“이걸 보시죠. Koo는 타구가 배트에 맞는 순간 대쉬를 시작했습니다. 그다음에 고개를 살짝 돌렸죠? 도약 지점을 확인한 겁니다. 어떤 사람들은 큰 키와 운동 능력으로 만들어낸 수비라고 하지만, 저는 이 야구 센스가 Koo의 가장 큰 무기가 될 거라고 확신합니다.”
대체로 비슷한 의견이 이어졌지만, 그 보기 힘들다는 애슬레틱스 원클럽맨 출신 해설위원은 참담함을 감추지 못했다.
“Koo의 플레이는 놀라웠습니다. 명백한 안타성 타구를 훔쳐낸 것도 모자라 상대의 분위기를 완전히 무너트렸죠. 그러나 애슬레틱스의 안일한 주루 플레이도 한몫했습니다. 투아웃도 아닌 노아웃인데, 상대 야수의 플레이를 확인하면서 달렸어야죠. 그렇다면 적어도 더블 플레이 정도로 끝났을 겁니다.”
엄청난 플레이를 선보였는데도 자꾸 아쉬운 점부터 눈에 들어오는 건 선수의 숙명일까.
녹화된 영상 속 내가 착지하는 순간, 박도현의 지적이 날아왔다.
[여기. 땅에 발 닿자마자 송구할 생각밖에 안 했지? 3루 주자 위치 보면 어차피 얘는 늦었어. 좀 더 안전하게 해도 되잖아.]
박도현의 지적에 고개를 끄덕였다.
팬들은 허슬 플레이에 열광하지만, 사실은 세이프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정확한 수비가 낫다.
정확하지만 느린 수비는 베이스 하나를 더 내주는 정도에 그치지만, 송구가 덕아웃에 들어가기라도 하면 두 베이스를 내줘야 하니까.
[타구를 잡아낸 건 진짜 잘했어. 근데 이건 실패해도 문제가 안 되는 거지만, 송구는 실패하면 문제가 돼.]
본능에 맡긴 수비는 아직 정확도가 떨어진다는 걸 새삼 느꼈다.
3루수 조나단이 까다로운 송구를 잘 받아내고 2루 주자를 침착하게 태그해준 공이 컸지.
“고마웠어요, Koo.”
그런 조나단은 B 경기가 끝난 이튿날, 결국 마이너리그 캠프로 이관됐다.
전날 경기에서 3타수 무안타 2삼진으로 침묵하기도 했고, 2회 초 악송구도 나왔지만, 그것 때문은 아니고. 그냥 내려갈 때가 된 거지.
본인도 그걸 아는지 생각보다 표정이 나쁘지 않다.
“내 자리 맡아 놔라.”
“무슨 소리예요! Koo는 개막 로스터까지 살아남아야죠!”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나 아직 마이너 옵션 하나 남았다.”
40인 로스터에 이름을 올리는 순간부터, 구단은 선수를 마음대로 마이너리그로 내려보낼 수 있는 3개의 옵션을 가진다.
옵션은 한 시즌에 하나씩 쓸 수 있는데, 선수의 서비스 타임이 5년을 넘어가면 자동으로 사라진다.
지난 시즌 내내 부상자 명단에서 보내면서 내 서비스 타임은 4년을 넘겼지만, 아무튼 이번 시즌까지는 나를 마음대로 내려보낼 수 있다는 거지.
“그러니까 내 걱정 말고 가서 열심히 해. 팜 디렉터한테 눈도장 찍어놔야 이번 시즌에 또 승격할 거 아냐.”
“옙!!!”
마이너 캠프로 가는 셔틀버스까지 배웅해준 뒤, 라커룸으로 터덜터덜 돌아갔다.
이제 유망주급 선수들은 거의 다 내려갔고, 26인 로스터의 자리를 두고 본격적인 경쟁이 시작되는 시점.
‘내려갈 때 가더라도, 들이받아는 봐야지.’
여기까지 살아남았다는 건, 적어도 구단이 나를 주요 관찰 대상으로 지정했다는 거니까.
* * *
좋은 활약을 선보였다고 해서, 항상 유쾌한 일만 벌어지는 건 아니다.
내 경기 영상이 온라인으로 퍼져 나간 뒤 이런 기사들이 슬슬 올라오기 시작했다.
[Koo의 예측 불가능한 활약, 온전히 본인의 힘인가?]
타이틀이야 문제 될 게 없지만, 내용이 선을 넘을락 말락 했지.
급격한 성장세를 이룬 선수들의 예시를 쭉 들어놨던데, 그중 태반이 약쟁이였으니까.
혹시나 해서 확인해보니 역시나 친 오클랜드 성향의 기자였다. 트리플 플레이가 어지간히도 열받으셨나 보네.
사실 온라인에서 도핑 얘기가 나온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투수 시절의 내가 1루로 뛰는 영상을 올리면서 의혹을 제기한 자칭 전문가들이 있었지.
[Los Angeles Dodgers @Dodgers]
어떤 투수는 투구 밸런스를 위해 빠른 발을 숨겨야 했죠.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군요!
구단 SNS에 하이싱글 A 시절의 내가 1루로 쇄도하는 영상이 올라오고 나자 그런 주장은 쏙 들어갔지만.
‘체력은 근력’으로 훈련 효과의 보정을 받기는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체질에 가까운 효과.
그 어떤 도핑 테스트를 가져오더라도 절대 걸릴 일은 없다. 안 그랬으면 박도현이 걸렸어도 진작에 걸렸겠지.
쓸데없는 일에 신경 쓰고 싶지 않았기에 바로 데릭에게 연락했다.
“Koo의 뜻이 그러시다면······ 할 수 없죠.”
데릭은 못내 아쉬워했다.
구단의 강요로 도핑 테스트를 해서 음성이 나온다면, 그건 에이전트에게 굉장히 큰 무기가 된다.
내가 도핑을 하지 않았단 걸 아는 데릭으로서는 불안해진 다저스가 먼저 요청하는 걸 기다려볼 만도 했지.
“야구에 집중하고 싶어서요.”
댓글 하나로 멘탈이 박살나는 경험을 해본 이후로는 문제가 될 소지가 있으면 빨리 차단해버리기로 했다.
반도핑 기구의 테스트는 피하는 게 어렵지, 받는 건 식은 죽 먹기였고.
2030년대에 접어들면서 정확도와 속도에서 놀라운 발전을 이룬 도핑 검출 기술 덕분에, 이틀 만에 언론에 결과를 뿌릴 수 있었다.
[Koo, 반도핑 기구 전수조사 대상 선정··· 경기력 향상 약물 검출 ‘Zero!’]
* * *
LA 다저스 스프링캠프 훈련장 내부 회의실.
테이블 위에는 선수들의 시범경기 성적과 훈련 결과표를 종합한 자료가 분류되어 있었다.
얼마간의 기회를 더 준 후 마이너로 내려보낼 선수들, 부상 등의 이슈가 없는 한 개막 로스터 포함이 확정된 선수들, 남은 자리를 두고 고민해야 할 선수들.
그리고 그 분류에서 따로 빼놓은 한 명의 선수까지.
“이제 이 선수에 대해 얘기해볼 때가 된 것 같습니다.”
LA 다저스의 마이크 올리버 단장은 따로 빼놓은 자료를 테이블 중앙으로 밀었다.
[Hyun―Ki Koo, IF(Infielder)]
Age: 25
Hit: ?
Power: ?
Field: ?
Arm: 70
Run: ?
스카우트 팀이 이런 리포트를 제출했다면 이게 무슨 장난질이냐며 화부터 내겠지만, 이것은 올리버 단장이 직접 내린 평가였다.
유일하게 확정할 수 있었던 툴은 어깨뿐.
부상이 아닌 정신적인 이유로 투수를 그만뒀기에 어깨에는 큰 문제가 없었고, 내야수로서의 우투 전환도 성공적이라는 것을 훈련과 경기를 통해 확인했다.
“다들 확인했겠지만, Koo는 도핑 검사 결과 음성 판정을 받았습니다. 이제는 육성 방향에 대해 구체적인 이야기를 나눠볼 수 있겠군요.”
선수가 자진해서 도핑 테스트를 요청한 시점에서 이미 반쯤 마음을 놓았지만, 입장상 결과가 발표되고 나서야 회의를 열 수밖에 없었다.
“타격은 어떻습니까?”
올리버 단장은 타격 코치를 지목했다.
“Park과 같은 인스트럭터에게서 배운 만큼 스타일이 비슷합니다. 하체를 제대로 활용해서 컴팩트하게 스윙하는데, 체격이 크다 보니 메이저 투수에게 적응만 한다면 홈런 타자가 될 수 있을 겁니다. 다만 표본이 너무 부족해서······.”
메이저리그 투수의 타격 툴을 진지하게 분석하는 타격 코치는 없다.
더구나 오프 시즌 동안의 훈련으로 기존의 모습과는 완전히 달라진 상태.
이번 스프링캠프의 모습만 보고 평가할 수밖에 없었다.
“수비는요?”
수비 코치가 고민이 된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타구 판단 센스가 탁월합니다. 주력도 좋아서 내야 어디에 세워도 자기 몫은 하는 선수로 발전할 가능성이 크죠. 문제는 기본기가 많이 아쉽다는 겁니다.”
“이번 B 게임에서의 트리플 플레이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제가 지금 말한 것을 요약한 듯한 플레이였죠. 놀라운 센스와 운동 능력으로 타구를 잡아냈지만, 3루 송구 과정에서 불안 요소가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어려운 건 잘하는데 쉬운 데서 헤맨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타격은 재능, 수비는 훈련.
야구계에서 오랫동안 내려오는 격언이었다.
수비에서도 재능은 확인했지만, 절대적으로 부족한 시간 탓에 완전히 무르익지는 않은 상태.
“수비 난이도가 상대적으로 낮은 코너 외야수는 어떻습니까? 어깨를 살리기에도 좋을 텐데요.”
“본인에게 물어봤는데, 외야 수비 훈련을 아예 진행한 적이 없답니다.”
선수 본인이 아예 내야수만 생각하고 있다는 뜻이다.
올리버 단장은 고개를 끄덕인 뒤, 1루 코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제출한 리포트에서 주루 툴을 70점으로 평가했던데요. 근거가 있나요?”
1루 코치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 체구에 발이 그렇게 빠르리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게다가 주루 센스도······.”
잠시 말을 멈춘 뒤, 태블릿에서 영상 하나를 재생해 건넸다.
“이건 리포트에 첨부한 영상 자료인데요, 상대 투수의 어깨나 다리의 움직임을 읽어내자마자 1루 혹은 2루를 향해 망설임 없이 출발하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부터라도 그린라이트를 주면서 본격적으로 평가해봐야 한다고 봅니다.”
발이 빠르다고 해서 무조건 도루에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상대 투수의 의중을 읽어내지 못한 상태에서의 도루는 주루사의 지름길이다.
본인이 투수 출신인 만큼, 그런 타이밍을 읽는 데 강점이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이야기를 종합하면 표본이 너무 없어서 평가가 불가능할 뿐, 툴 자체는 준수하다는 건데······.”
올리버 단장이 좌중을 둘러보며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Koo를 어떻게 육성하는 게 좋다고 봅니까?”
그러자 코칭스태프들은 여기저기서 손을 들고 자기 의견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포구 센스를 보면 1루수가 제격입니다. 포지션 경쟁자를 밀어낼 실링이 충분히 있어요.”
“타구 판단 센스가 너무 아깝지 않습니까? 조지의 뒤를 받쳐줄 백업 2루수가 적절할 것 같은데요.”
“내야 전 포지션을 충분히 경험시킨 다음 결정해도 늦지는 않지만······ 만약 문제가 없다면 유틸리티 플레이어로 활용해야죠.”
그렇게 시끌벅적해진 분위기 속에서,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던 벤치 코치가 손을 들었다.
“저는······ 물론 장기적으로 봐야겠지만, 주전 유격수를 맡길 만한 실링이 분명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근거가 뭐죠?”
올리버 단장이 흥미롭다는 듯 물었다.
“트리플 플레이가 나오기 이전의 무사 만루 상황은, 기록지에 나와 있듯 3연속 실책성 플레이가 만든 건데요. 투수 교체로 시간이 생기자마자 Koo가 내야수 전원을 불러모았습니다.”
“뭐라고 했는지는 못 들었나요?”
“예. 당시 마운드에 올라갔던 더블 A 투수 코치가 개입하지 않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다더군요.”
당시 B 게임의 의도는 선수들이 게임을 어떻게 풀어가는지를 평가하기 위한 것.
Koo가 뭐라고 말했는지는 신경 쓰였지만, 투수 코치의 판단 자체는 옳았다.
“다만 그 소집 이후 내야수들의 집중력이 확연하게 올라간 건 사실입니다.”
유격수는 내야 수비의 총사령관.
타고난 센스도 필요하지만, 선수들이 집중력을 잃지 않도록 카리스마를 발휘하는 것도 중요한 역량이다.
올리버 단장은 과거 구현기의 모습을 떠올려봤다.
투수조 안에서 군기반장 로버트를 비롯한 베테랑들과도 원만한 사이를 유지하고, 젊은 투수들의 구심점이 되었던 선수.
아직은 멀리 내다봐야 하겠지만, 만약 구현기가 리그 평균 수준의 유격수 수비력만 갖춘다면······.
“카일보다는 팀에 좋은 영향력을 행사하겠군요.”
SNS로 여러 차례 파문을 일으킨 주전 유격수 카일 캠프.
수비면에서는 조금 아쉽더라도, 팀의 분위기 면에서는 훨씬 나을지도 모른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올리버 단장은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
“Koo에게 시범경기 기간 동안 내야 전 포지션의 출전 기회와, 주루상의 그린라이트를 주세요. 설령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더라도요.”
“알겠습니다.”
어차피 40인 로스터에서 제외할 수도, 제외할 생각도 없는 선수.
지금의 좋은 페이스가 깨지는 순간이 오면, 그때부터 정밀한 분석과 평가가 가능해질 것이다.
“오늘 회의는 여기까지 해도 되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이따 뵙겠습니다.”
회의를 마친 뒤, 홀로 남은 올리버 단장은 구현기의 자료를 뒤적거리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문득 연봉 협상 테이블에서의 구현기의 모습이 떠올랐다.
방출하더라도 받아들이겠다고, 단호하면서도 예의 있게 말하던 그 모습.
“내 모가지가 날아갈 뻔했군······.”
만약 다른 팀에서 지금과 같은 모습을 보였다면 굉장히 곤란해졌을 것이다.
심지어 그게 다저스와 라이벌리에 놓여 있는 자이언츠였다면······ 뒷감당을 하기 힘들었으리라.
그러나 그런 미래는 오지 않을 것이다.
“내 눈이 틀린 게 아니었어.”
올리버 단장이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구현기의 재능은 아직 꺾이지 않았다.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올리버 단장은 그에게 기회를 더 부여할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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