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경쟁의 시작(2)
도핑 테스트 결과가 공표된 다음 날.
시카고 컵스와의 홈 경기에서 벤치에 앉아 출전을 기다렸다.
오늘 선발 투수는 내가 첫 출전을 했던 개막전에서도 선발로 등판한 로버트 켈리.
‘자네는 로버트의 타석에 대타로 들어가서 2루수 혹은 유격수 수비를 소화하게 될 거야.’
이번엔 전보다 좀 더 구체적인 언질이 있었다.
경쟁자들은 줄었지만, 그만큼 주전들의 출전 시간은 늘어났고.
주전 선수가 휴식을 취하는 포지션에서 후보들을 돌아가며 시험하는 모양이었다.
‘야수는 또 이런 식으로 돌림판을 돌리는구나. 신기하네.’
[투수도 비슷하지 않나?]
‘투수는 일단 불펜에다 몰아넣고 괜찮다 싶으면 선발로 세우는 편이라서.’
루틴이 어쩌고저쩌고, 배부른 소리를 할 정신은 없다. 특히 다저스처럼 뎁스가 두꺼운 팀이라면 언제라도 나갈 수 있게 알아서 준비해야지.
그래도 다양한 역할 소화를 강요당하는 야수보다는 투수가 나을지도 모르겠다.
“플레이 볼!”
컵스의 리드오프 타자가 타석에 들어섰고.
다저스의 선발 야수들이 타자에게 신경을 기울이는 모습을 멍하니 쳐다봤다.
양 팀 모두 라인업의 대부분을 주전으로 채운, 진짜 메이저리그 느낌이 나기 시작하는 시점.
‘아무리 그래도 키스톤을 후보 선수로만 세워도 괜찮나?’
주전 유격수 카일이야 본인 루틴 때문에 시범경기 출전을 꺼리니 어쩔 수 없다고 해도, 2루수의 수비 비중도 만만치 않은데.
내야의 센터라인 두 명을 백업, 그것도 오프 시즌에 데려온 초청선수로만 채워도 괜찮을지 모르겠다.
···이때의 나는 야구계의 오래된 격언을 잊어버리고 있었다.
괜찮을까 싶은 생각이 들면 대체로 안 괜찮다는 것을.
“스트라이크 아웃!”
“아웃!”
“아웃!”
1회 초는 삼자범퇴로 잘 막았다. 1회 말 공격에서도 오프 시즌 미네소타에서 FA로 데려온 선발 투수에게서 선제 솔로 홈런을 때려내며 기선 제압을 했고.
“스트라이크 아웃!”
2회 초 선두 타자를 삼구삼진으로 잡아낼 때까지만 해도 오늘 경기가 순탄하게 흘러갈 줄 알았다.
따악―!
“세이프!”
로버트는 다음 타자에게 안타를 허용했지만, 평소 레퍼토리대로 서클체인지업과 슬라이더를 엮어 유리한 볼카운트를 선점했다.
타자가 생각이 복잡해지는 틈을 노려, 존 아래쪽으로 땅볼을 유도하기 위한 투심을 던졌는데.
“아아······!”
덕아웃 여기저기서 탄식이 새어 나왔다.
유격수가 타구를 쫓아가며 슬라이딩을 했지만, 글러브 아래로 빠져나갔고.
재빨리 쫓아온 좌익수가 공을 잡았을 땐, 발 빠른 1루 주자가 이미 3루로 슬라이딩하고 있었다.
“괜찮아, 괜찮아! 침착해!”
누군가가 목청껏 외치길래 슬쩍 보니까 카일이 웃는 얼굴로 응원을 보내고 있다.
안타로 기록되긴 했지만, 카일처럼 수비가 좋은 유격수라면 처리할 수 있었을 거다.
다른 포지션 애들이 실책할 때도 그렇게 응원 좀 해주지. 포지션 경쟁자한테만 그러니까 속 보이잖아.
“스트라이크 아웃!”
최근 후반기에 무너지는 모습을 자주 보였다고는 해도, 로버트는 FA 계약 후 오랫동안 다저스의 에이스를 맡아 온 투수.
풀카운트까지 차분하게 승부한 끝에 7번 타자를 정확하게 제구된 몸쪽 투심으로 잡아냈고.
“아웃!”
8번 타자가 퍼 올린 타구가 중견수에게 잡히면서 실점 없이 이닝을 끝냈다.
아쉬운 수비로 위기를 맞았음에도 로버트는 딱히 내색하지 않았다.
시범경기 기간이기도 하고, 어떤 선수든 완벽할 수 없다는 걸 본인도 잘 알아서겠지.
3회 초에도 볼넷 하나를 내주긴 했지만, 실점 없이 마쳤고. 분위기가 묘해지기 시작한 건 4회 초 선두 타자를 상대하면서부터였다.
“베이스 온 볼스!”
풀카운트에서 결정구로 던진 공이 볼 판정을 받으면서 선두 타자 출루.
로버트는 1루에 안착한, 슬러거치고는 발이 꽤 빠른 컵스의 4번 타자를 자꾸 힐끔힐끔 바라봤다.
“세이프!”
견제구를 던져봤지만, 제법 거리를 벌렸음에도 여유롭게 세이프.
타자 상대로 초구를 던져 볼 판정을 받은 뒤, 다시 연달아 견제구를 두 번 던졌지만 주자를 잡아낼 순 없었다.
결국 다시 타자 쪽을 상대하기로 했는지, 빠르게 세트 포지션을 가져간 바로 그 순간.
“런! 런!”
1루 주자가 스타트를 끊었지만, 로버트는 이미 투구 동작에 들어간 뒤였다.
2구로 던진 체인지업이 타자가 휘두른 배트에 맞았고, 애매하게 느린 땅볼이 유격수 방향으로 흘렀다.
유격수 글러브에 공이 들어갔을 때, 이미 1루 주자는 2루 베이스 근처에서 슬라이딩에 들어간 상태.
눈으로 2루를 쫓으며 스텝을 밟던 유격수가 1루로 선회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아······!”
마음이 급했던 걸까.
유격수의 송구는 1루수가 잡을 수 없는 곳으로 날아가 버렸다.
2루에 들어가 있던 주자는 재빨리 상황 파악을 마치고 3루에 입성, 1사 2루로 막을 수 있던 상황이 무사 1, 3루로 바뀌었다.
“미안!”
벌써 두 번째 실망스러운 플레이를 선보인 유격수가 투수를 향해 사과와 진정하란 제스처를 보냈지만.
로버트는 아무런 대꾸 없이 글러브를 낀 손을 허리에 얹은 채, 무표정한 얼굴로 유격수를 3초 정도 바라봤다.
자신의 선발 등판 경기에서 어처구니없는 실책이 나왔을 때의 시그니처 포즈.
저건 실수한 선수 보라고 하는 게 아니다.
야수조 베테랑에게 보내는 ‘나 지금 X 같은데 네가 조질래, 내가 조질까?’라는 메시지다.
유격수는 슬그머니 손을 내리더니 자기 자리로 돌아갔고.
다시 평정을 되찾은 로버트가 6번 타자를 삼진으로 잡아냈지만.
따악―!
외야 한복에 떨어지는, 조금 애매한 플라이에 3루 주자가 출발하자 중견수가 바로 홈 승부를 들어갔고.
“세이프”
다저스 덕아웃에서는 바로 비디오 판독을 요청했는데, 원심 유지 판정이 나오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1대 1 동점.
“아웃!”
로버트는 다음 타자를 내야 플라이로 잡아낸 뒤, 성큼성큼 걸어 내려와 덕아웃으로 향했다.
이미 로버트와 함께 뛰어 본 기존 선수들이나 눈치가 빠른 초청선수들은 모두 숨죽인 채 로버트 근처로 다가가지 않았다.
한 사람만 빼고.
“할 말이 있으면 말로 하던가.”
실점의 빌미가 된 실책을 저지른 유격수가 중얼거리자, 근처에 있던 몇몇 선수들이 동시에 그쪽을 쳐다봤다.
당당하게 할 소리가 아니란 걸 본인도 아는지 기어가는 목소리였지만, 문제는 로버트의 귀가 엄청나게 밝다는 거다.
로버트가 천천히 다가와 자기 옆자리에 앉자, 유격수는 한순간 움찔했다.
“지금 그거 나한테 하는 소리야?”
어느새 근처로 다가온 클레망이 유격수를 바라보며 빛의 속도로 눈을 깜빡인다.
제발 입 닥치고 납작 엎드리라는 신호.
그러나 유격수는 클레망의 신호를 무시했다.
메이저리그에서 자리를 잡지는 못했어도 나름 30세를 넘긴 베테랑으로서 가오가 상하기 싫었던 건지.
아니면 군기반장이자 벤클킹으로 악명이 높은 로버트지만, 막상 만나 보니 생각보다 얌전해서 만만해 보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불만 있으면 괜히 담아두지 말고 직접 말하는 게 좋지 않겠어? 팀 분위기를 위해서라도······.”
그렇게 주절주절 떠들어댔지만, 로버트는 유격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고.
근처에 놓여 있던 헤드기어 하나를 집어 들더니, 유격수의 머리에 씌워주고는.
씩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라커룸으로 따라와. 이 X발 새끼야.”
주변에 있던 선수 대여섯 명이 우르르 달려들어 유격수와 로버트 사이에 끼어들었다.
덕아웃 앞 카메라에는 이미 빨간 불이 들어와 있었고.
슬쩍 감독님을 보니, 바닥에 펜을 내던지며 머리를 감싸 쥐고 있었다.
‘X 됐네.’
교체 투입을 예감한 나는, 서둘러 몸을 풀기 위해 배트를 들고 덕아웃 밖으로 뛰쳐나갔다.
* * *
로버트가 꼰대라는 건 자타공인의 사실이지만, 나는 로버트 정도면 꼰대 중에서도 상위 1%로 합리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투수조와 야수조의 영역이 나뉘어 있다는 걸 인정하고, 야수조 베테랑의 권위를 존중해서 웬만해서는 야수조 선수를 건드리지 않으니까.
게다가 뒤끝도 없다. 만약 누가 자신이 등판한 경기에서 연속 실책을 저지르더라도, 경기 끝나고 앞으로 조심하겠다고 사과만 잘하면 된다. 훈계 몇 마디 하고는 그대로 끝냈을 거다.
다만 지금처럼 일이 복잡해진 경우, 로버트는 결코 대충 넘어가는 법이 없다. 상대와 자신 중 누구 하나가 납작 엎드려 굴복할 때까지 절대 끝내지 않는다.
그리고 14년간의 메이저리그 선수 경력을 통틀어, 로버트는 아직 그 누구한테도 엎드린 적이 없다.
“와아아아아아아아!!!”
“로버트! 대가리를 날려버려!”
덕아웃에서 주먹싸움 직전까지 갔는데도 오히려 미친 듯이 환호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듯, 우리 팬들이 로버트의 이런 면을 또 싫어하지를 않는다.
남을 조지더라도 나름의 원칙에 따라 조지는 게 배드애스(Badass)적인 매력이 있다나.
주심이 우리 덕아웃으로 다가와 구두 경고를 전달한 뒤 경기가 재개되었고, 감독님은 그 자리에서 유격수를 교체했다.
자신만 교체되는 건 불합리하다며 반발했지만, 내가 보기엔 함께 교체해서 라커룸에 둘만 남겨두는 것보다 훨씬 인간적인 조치였다.
4회 말 공격이 삼자범퇴로 끝나면서, 내가 유격수 타석에서 대타로 나가는 일은 없었지만.
“Koo, 이번 이닝부터 유격수로 나가야겠다.”
“알겠습니다.”
주심이 선수 교체를 선언하고 전광판에 내 이름이 뜨자, 잠시 시들해졌던 관중들이 다시 열광하기 시작했다.
“Koo!!! Koo!!! Koo!!! Koo!!!”
그러고 보니, 정식 시범경기 출전은 이번이 네 번째인데 홈 경기는 처음이다.
마음 같아서는 손을 흔들어 인사라도 보내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 없었다.
기분이 언짢은 티를 팍팍 내는 로버트가 내 어깨에 손을 얹더니.
“Koo, 집중하자.”
굳이 한마디 남기고 마운드로 올라갔으니까.
내가 아는 로버트라면, 저건 아마 ‘집중 안 하고 수비에서 개짓거리라도 하면 죽여버리겠어’라는 말을 줄여서 한 거겠지.
‘실책하면 진짜로 X 된다.’
500포인트 삭감이 걸려 있던 무사 만루에서의 수비보다 훨씬 긴장한 상태에서 5회 초 수비가 시작되었다.
따아악―!
평정이 흔들린 탓일까. 로버트는 투수를 대신해서 들어온 선두 타자에게 장타를 허용했다.
펜스를 직격한 타구를 중견수가 빠르게 건져내면서 3루로 뛰던 주자는 다급히 2루로 돌아왔다.
다시 무사 2루의 위기 상황.
“스트라이크!”
“볼!”
“스윙! 스트라이크!”
투심만 연달아 세 개를 던져 투 스트라이크를 선점한 로버트는, 타자의 눈에 익었을 투심 대신 체인지업을 선택했고.
딱!
빠른 땅볼 타구가 내 쪽으로 다가왔고, 타구의 움직임을 주시하며 마지막 바운드가 일어난 순간 글러브에 담아냈다.
2루 주자를 묶어놓은 뒤, 1루로 송구하면서 원 아웃.
‘아슬아슬했어.’
글러브에서 공을 꺼내며 그립을 바꾸는 과정이 또 조금 늦었다.
의식을 하면 늦어지고, 의식을 안 하면 나도 모르게 다른 그립을 쥘지도 모르고.
그런 고민에 빠져 있던 것도 잠시.
“힛 바이 피치!”
몸쪽 슬라이더의 제구 미스로 타자의 발 끝에 맞으면서, 상황은 1사 1, 2루로 바뀌었다.
이런 상황에서 투수가 할 수 있는 선택은 땅볼로 병살을 유도하는 것.
“Let’s go!”
“Dodgers!”
어느 쪽으로 날아올지 모를 땅볼 타구에 제대로 대처하자는 뜻을 담아, 내야수들은 다 함께 구호를 외쳤다.
딱―!
그리고 정말로 땅볼 타구가 날아왔다.
3―유간을 꿰뚫는 코스로.
‘에이 씨!’
3루수 쪽에 미세하게 가까워 보이지만, 주자가 2루에 있는 지금 이 정도 타구에 3루수가 움직이기는 부담스럽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내가 처리해야 하는 상황.
타구의 궤적을 대충 예상한 뒤, 최소한 끊어내기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그 가상의 선을 향해 슬라이딩하며 손을 뻗었다.
“와아아아아아아!!!”
운이 좋게도 글러브 안에 공이 들어왔다.
빠르게 몸을 일으키면서 글러브 안에 손을 집어넣는데. 공을 잡는 느낌이 무언가 어색하다.
‘커브 그립······!’
훈련 때 가끔 나왔던, 송구가 필요한 상황에서 변화구 그립을 잡아버리는 안 좋은 습관이 또 나와 버렸다.
3루까지는 가까우니 그냥 던질까, 아니면 지금이라도 바꿔야 하나.
한순간의 망설임은 최악의 결과를 불러왔다.
“아······!”
투수 시절과는 달리, 내 손에는 로진이 묻어 있지 않았고.
손가락을 움찔하는 순간 공이 손에서 빠져나가 땅 위를 굴렀다.
황급히 다시 주워들었지만 이미 주자는 올 세이프 상태.
이번 시즌 시범경기를 통틀어 첫 번째 실책이, 절대 나와서는 안 되는 상황에서 나오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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