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경쟁의 시작(3)
[1사에 주자 1, 2루. 로버트 켈리, 3이닝 연속 득점권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타석에는 오늘 1타수 무안타, 컵스의 4번 타자 비센테 라미레즈.]
[지난 이닝 선두 타자로 나서서 볼넷으로 출루해 동점 득점을 올렸는데요, 이번 시범경기 OPS가 1.017에 달하는 만큼 투수로서도 신중한 승부에 나설 것으로 보입니······.]
[네, 초구 타격! 전혀 신중하지 않았던 이 승부, 빠른 타구가 3―유간 애매한 위치······ 잡았어요! 유격수 Koo의 슬라이딩 캐치! 3루에 던져 2루 주자를······ Oh, My!]
[He drop the ball!!! 빠른 타구를 건져낸 Koo가 3루에 공을 던지지 못하고 떨어트립니다!]
[뭔가 문제가 있었던 걸까요? 투수 로버트 켈리, 더블 플레이를 예상했는지 박수를 치던 그 자세 그대로 굳어버렸습니다!]
구현기의 예상치 못한 실책에 LA 다저스 중계진은 탄식을 내뱉었고.
곧이어 조금 전 상황이 리플레이되자 그들 나름대로 분석하기 시작했다.
[네, 여기서 슬라이딩 백핸드 캐치! 여기까지는 문제없습니다. 그 후의 상황을 봐야겠죠?]
[네, 아······ 타구를 글러브에서 꺼낸 뒤 뭔가 손가락의 움직임이 보여요. 손에 땀이 많이 났거나, 그립을 바꾸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립이요? 보통 글러브 안에서 포심 혹은 무심 그립을 잡은 뒤 빼내지 않나요?]
[정확히는 모르겠는데, 아마 변화구 그립을 잡았던 게 아닐까 싶어요. 단순한 기본기 부족이라면 차라리 다행이지만, 입스의 일종이라면 곤란합니다.]
[아······ 로버트 켈리, 유격수 Koo를 향해 실망한 듯한 시선을 보냅니다. 아주 기초적인 부분에서 실수가 나왔으니까요.]
[실책은 아쉽지만, 그래도 투수한테 사과부터 하는 자세는 보기 좋습니다. 젊은 야수들이 실책 이후 자책하거나 짜증부터 내는 경우가 간혹 있는데, 그러면 투수는 뒤를 믿고 자기 공을 던질 수가 없어요.]
[다시 고개를 돌리는 로버트 켈리, 이제 5번 타자 시어도어 윌슨을 상대합니다.]
* * *
우투수 재전향을 위한 오른손 투구 연습.
내야 수비에 빠르게 적응할 수 있게 해줬지만, 반대로 이런 괴상한 습관을 만들어주기도 한 양날의 검.
이유야 어찌 됐건, 지금 중요한 건 내 실책으로 이닝 종료 찬스가 날아가고 만루 위기를 맞이했다는 것.
“후······.”
박수를 치려던 로버트는 슬그머니 손을 내리더니, 앞서 실책한 유격수를 향했던 그 포즈로 나를 쏘아보았다.
무슨 맹수가 쏘아보는 것마냥 절로 오금이 저린다.
그 양반은 저걸 보고도 용케 개길 생각을 다 했네.
“죄송합니다!”
사과는 했지만, 아무 반응 없이 다시 타자를 향해 돌아보는 로버트.
‘정신 차려야지. 정신.’
어차피 본인 멘탈부터 다스리기 위한 행동이고, 경기 끝나면 또 제대로 사과해야겠지만.
막상 내가 실책을 하고 나니, 로버트의 저런 태도가 마치 이미 지나간 플레이는 어쩔 수 없다고 말해주는 것처럼 느껴진다.
지난 오프 시즌 초반, 수비 훈련에서 실책이 무더기로 나왔을 때 트레이너도 강조했었지.
‘잘해야 한다는 압박감은 입스의 지름길이다.’
그립의 정확도가 떨어지는 습관을 무조건 고쳐야만 한다고 다짐하며 플레이에 임한다면, 진짜 입스로 굳어질지도 모른다.
설령 교정에 오래 걸리더라도, 그전까지는 내가 잘할 수 있는 걸 보여줄 생각을 해야지.
이닝의 첫 타자를 맞이한다는 생각으로 마음을 다잡으며, 무게중심을 낮추고 타자의 방망이에 온 신경을 기울였다.
“볼!”
“볼!”
그러나 로버트에게도 두 이닝 연속 실책은 타격이 컸던 걸까.
초구와 2구가 연달아 벗어나고, 3구에 타자가 애매하게 방망이를 내밀었지만 스윙 판정은 나오지 않았다.
주자 만루에 3―0의 카운트. 무조건 스트라이크가 필요한 타이밍.
딱!
‘정타는 아니다!’
재빨리 2루 방향으로 첫 걸음을 뗐지만, 타구보다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몸을 움츠리는 로버트의 모습이었다.
다행히 강습 타구는 아니었지만, 옆구리 쪽으로 빠져나오는 빠른 타구.
나보다 스타트가 늦었던 2루수가 잡기는 어렵고, 내가 놓치는 순간 센터 쪽 빠져나가는 안타가 될 게 분명했다.
“2루!”
마주 달려오는 2루수에게 베이스를 가리키며 커버를 지시한 뒤, 타구의 바운드를 관찰하며 포구 지점을 물색하던 그 순간.
타구가 마운드 뒤편을 맞고 크게 바운드되었고.
스핀을 잔뜩 먹은 타구가 튀어 오르는 게 눈에 들어오자마자, 나는 달리던 방향을 틀었다.
2루 베이스 뒤쪽이 아닌 앞쪽으로.
“흡!”
기합과 함께 슬라이딩에 들어갔고.
바운드된 공이 지면에 떨어지기 직전에, 글러브를 끼지 않은 오른손을 뻗었다.
글러브에서 공을 빼다가는 늦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으니까.
쭉 뻗은 오른손에 공이 담기자마자, 바닥에 미끄러지면서도 몸을 2루 쪽으로 돌렸고.
2루수의 글러브를 끝까지 보며, 토스하듯 공을 넘겼다.
혹시라도 3피트 라인에 걸칠세라 한 번 더 구르면서 2루수의 송구가 어떻게 됐는지는 볼 수 없었지만.
“아웃!”
2루심의 콜이 들려온 순간, 안도의 함성을 내질렀다.
일단 나는 살았다.
[시범경기에서 놀라운 수비를 선보였습니다.]
[50포인트가 지급됩니다.]
[현재 포인트: 7520]
* * *
[카운트 3―0. 주자 만루.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투수 로버트 켈리, 와인드업합니다. 떨어지는 공에 타자는 방망이를 냈고! 앗! 이 타구가 투수 강습······ 피했습니다!]
[주자 올 스타트! 2루수는 베이스에 들어갔고! 유격수 Koo, 타구를 쫓아······ Koo?! 이게 맞나요?! 이게 맞나요?!]
[Koo가 급격히 방향을 틀었는데! 그 상태 그대로 슬라이딩! 베어핸드 캐치! 2루수 글러브에 토스! 투 아웃!!!]
[2루수 토니 필립스! 1루를 향해 공을 던졌고! 1루에서! 아웃!!! 쓰리 아웃!!!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서 다저스의 내야진이 더블 플레이를 만들어냅니다!!!]
[컵스 덕아웃에서 비디오 판독을 요청했지만, 사실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거예요. 도대체 상황이 어떻게 된 거죠?!]
[리플레이 나옵니다. Koo가 여기서 타구를 확인하더니 갑자기 방향을 틀어요. 원래대로라면 2루 베이스 뒤쪽으로 달리는 게 정석인 상황인데 말이죠.]
[그런데 Koo가 슬라이딩을 하는 순간, 타구가 불규칙 바운드를 일으키면서 마치 마법처럼 Koo의 오른손으로 빨려 들어갑니다!]
[Koo가 이번 스프링캠프에서 마법 같은 장면들을 우리에게 여러 번 선보이기는 했지만, 진짜 마법사는 아니죠. 타구를 읽은 겁니다. 타구가 마운드 뒤쪽에 맞으면 불규칙 바운드가 일어나기 쉬운데, 그 방향을 정확하게 읽어낸 거라고요!!!]
[말씀드리는 순간 결과 나옵니다. 아웃!!! 키스톤 콤비가 기쁨의 포효를 내지르고 있습니다!]
* * *
2루수가 침착하게 1루로 송구하면서, 조금 아슬아슬하긴 했지만 실점 없이 이닝이 끝났다.
상대 팀이 비디오 판독을 요청한 덕분에 숨도 못 돌린 상태에서 선두 타자로 나가는 건 면했고.
조금 전 상황을 되짚어 볼 여유도 생겼다.
[어려운 바운드였는데 용케도 읽었다?]
박도현이 감탄했다.
리플레이 화면으로 보기엔 마치 의도한 것처럼 오른손에 공이 정확하게 들어갔는데, 사실 굉장히 아슬아슬한 상황이었다.
우연히 타구의 스핀이 눈에 들어오면서 그 방향으로 공이 튈 거란 생각은 했다.
하지만 공이 얼마나 튈지, 튀어 오른 공이 다시 바운드를 일으키기 전에 잡아낼 수 있을지까지는 알 리가 없었다.
확신한 건, 원래 뛰던 방향으로 계속 뛰었으면 무조건 잡을 수 없는 타구였다는 것뿐.
“아웃!”
비디오 판독 결과가 나오자, 옆에 서 있던 2루수가 환호하면서 나를 껴안았다.
“우린 살았어!!!”
시크한 척 마운드를 내려가던 로버트의 어깨가 움찔하는 게 눈에 들어왔지만, 못 본 척하기로 했다.
사전에 예정되어 있던 투구 수 70개를 훌쩍 넘긴 로버트의 역할은 여기까지.
1, 2루 상황에서 내가 했던 실책을 딱히 걸고넘어지지 않은 채 얌전히 아이싱을 받는 로버트를 보며, 야수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5회 말 선두 타자로 나가기 위해 준비하는데, 벤치 코치님이 나를 잠시 호출했다.
“출루에 성공하면 그린라이트를 줄 거야. 오늘 경기 내내, 선행 주자가 없는 상황이라면 계속.”
본격적으로 주루 능력을 평가해보겠다는 뜻이 담긴 그 말에 곧장 수긍했지만, 한편으로는 긴장이 되기도 했다.
동점 상황에서의 도루 시도는 양날의 검이니까.
성공하면 득점권 찬스가 만들어지지만, 실패하면 팀의 분위기에 찬물을 제대로 끼얹는 거지.
[출루부터 하고 생각해야 하는 거 알지?]
하긴 타석에 들어가기도 전부터 김칫국부터 마실 필요는 없다.
컵스의 두 번째 투수는 메이저리그 경력이 10년 가까이 되는 베테랑 불펜.
아메리칸리그 소속 팀에서 주로 뛰다가 작년에 트레이드되어 컵스에 왔는지라 직접 만나본 적은 없는데.
전성기가 지난 투수들이 대개 그렇듯, 강력한 구위보다는 허를 찌르는 피칭으로 상대를 괴롭히는 지능형 투수라는 건 알고 있다.
“Koo!!! Koo!!! Koo!!! Koo!!!”
홈 경기에서 타석에 들어서는 건 또 처음인지라, 관중들이 다시 내 이름을 연호했다.
솔직히 발음하기가 쉬워서 자주 외쳐주는 것도 없지 않아 있겠지만, 선수로서는 고마운 일이다.
투수는 불쾌한 듯 코를 찡그리며 땀을 닦아냈는데, 연기력은 그다지 뛰어난 편이 아닌 모양이다.
상체로는 부산 떠는 주제에 발로는 마운드를 차분히 다지고 있으면 타자가 속아 넘어가겠냐고.
“플레이 볼!”
B 게임에서 홈런을 때려내긴 했지만, 주전 선수가 출전한 경기가 아니었으니.
컵스 입장에서 나는 여전히 ‘쉬운 타자’의 범주에 들어가겠지.
보통 이런 타자에게는 카운트 싸움을 빠르게 가져가는 게 정석이지만, 초구는 무조건 기다리기로 마음먹었다.
‘영웅 스윙을 기대하고 있다.’
일부러 감정을 내비치려 드는 것도 그렇고. 게다가 아까 팀을 위기에서 구해내는 호수비를 선보였으니 자신감이 하늘을 찌를 거라고 생각하겠지.
그리고 연습 투구하면서 이쪽 덕아웃을 힐끔힐끔 쳐다보던데, 벤치 코치와 내가 대화하는 모습을 봤다면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는 걸로 오해할 수도 있고.
“볼!”
긴가민가한 코스로 빠져나가는 서클 체인지업.
고개를 갸웃한 투수가 포수에게 공을 돌려받은 뒤 2구를 던졌고, 이번에는 하체에 힘을 실으며 스윙 동작에 들어갔지만―
“볼!”
실제 스윙으로 연결하지는 않았다.
절묘하게 떨어지는 체인지업. 초구 서클 체인지업과 타이밍이 비슷하게 맞물리는 것 같아 포기했는데, 괜찮은 선택이었다.
나름 좋은 공을 뿌렸는데도 2―0, 타자의 카운트.
이번엔 표정으로는 평정을 가장했지만, 투구에 들어가기 전보다 마운드를 다지는 동작이 격해졌다.
조금 더 적극적으로 임해보자는 스탠스로 접근한 3구.
“파울!”
몸쪽 깊은 패스트볼을 건드려 파울을 만들었다.
이제 카운트는 2―1.
슬슬 본격적인 싸움에 들어가도 괜찮을 타이밍.
“흐읍!”
와인드업 후 힘차게 공을 뿌리는 모습을 보며, 패스트볼에 타이밍을 맞춘 것은 옳은 선택이었다는 걸 느꼈고.
존 중앙에 방망이가 지나가도록 스윙을 이어 나가는데, 타이밍이 어긋나는 느낌이 들었다.
묘하게 몸쪽으로 밀려나듯 움직이는 게 느껴진다고 해야 하나.
‘커터.’
구질을 파악한 즉시 머릿속의 스윙 궤적을 수정했다.
지난 오프 시즌, 내셔널리그에서 손꼽히는 제리의 커터에 몇 번이고 당해 왔고.
훌리안과의 특훈으로 좀 더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배트 컨트롤을 갖게 된 나에게 이 정도 수준의 커터는―
따아아아아악!
놓쳐서는 안 될 먹잇감에 불과했다.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
“Koo!!! Koo!!! Koo!!! Koo!!!”
[시범경기에서 홈런을 기록했습니다.]
[50포인트가 지급됩니다.]
[현재 포인트: 7570]
홈팬들의 함성을 배경음악 삼아 베이스를 전부 돌아 덕아웃으로 돌아온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미친 새끼! 미친 새끼!”
“도대체 이 자식이 왜 투수를 하고 있었던 거야?!”
“저기 투수 좀 봐! 저놈 좀 있으면 울겠다!!!”
“그린라이트 주니까 뛰기 귀찮다고 그걸 넘겨버려?!”
“악! 윽! 그만!”
헬멧 위로 쏟아지는 무수한 손바닥 세례였다.
중간에 코치님 목소리도 들렸던 것 같은데, 기분 탓인가.
예상치 못한 홈런으로 한 걸음 앞서나가게 된 덕아웃의 분위기가 끝도 없이 달아오르던 그때.
“Hey. Koo.”
세레머니에 끼어들지 않은 채 지정석에 가만히 앉아 있던 로버트가 내 이름을 부르자, 분위기가 순식간에 차분해졌다.
말없이 나를 바라보며 손짓하는 로버트에게 장비를 벗어놓을 새도 없이 총알처럼 뛰어갔다.
“부르셨어요, 로버트?”
호수비로 실점도 막았고, 속죄포까지 쏘고 왔는데 설마 대놓고 갈구려는 건 아니겠지.
팔짱을 낀 채 나를 위아래로 스윽 훑어보는 로버트의 눈빛에 주변에 있던 누군가가 침을 꿀꺽 삼킨 그 순간.
로버트는 한쪽 입꼬리를 올려 씩 웃고는 빈 텀블러 하나를 내 쪽으로 던지더니, 그걸 재빨리 받아 드는 내게 냉장고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얼음 꽉꽉 채워 와. 게토레이 파란 놈 하나랑.”
경기가 끝나기 전, 로버트가 실책을 저지른 선수에게 웃음을 보였다.
그의 메이저리그 경력을 통틀어 처음 일어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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