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경쟁의 시작(4)
[2사 주자 1루, 카운트는 0―2! 대타 안드레아 니헤트, 불리한 카운트에서 3구 맞습니다. 높게 들어오는 공에 배트······ 맞았어요!]
[좌익수와 유격수, 3루수. 멀리 뻗지 못한 타구를 세 명의 야수가 뒤쫓습니다. 유격수 Koo! 떨어지는 공 안전하게 잡아냅니다!]
[오늘 5회 초 교체 투입되어 3타수 1안타, 결승 홈런을 때려낸 Koo가 마지막 아웃카운트를 잡아내면서 오늘 경기 마무리됩니다!]
내 솔로 홈런에 더해, 7회 교체 투입된 랜디의 적시 2루타가 터지면서 컵스와의 경기는 3대 1의 스코어로 끝났다.
그러나 기자들이 관심을 가진 건 우리가 몇 대 몇으로 이겼는가 따위가 아니었다.
“아쉬운 플레이가 나왔고, 피드백 과정에서의 언쟁이 발생했습니다. 그 언쟁이 건강한 방향으로 흘러가도록 유도하는 것이 코칭스태프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감독님은 입장상 4회 말 덕아웃에서 벌어진 소동에 대해 최대한 둥글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기자들이 그런 입장을 딱히 고려해줘야 할 이유는 없었다.
“플레이에 대한 건강한 언쟁이라고 하셨는데, 로버트 켈리 선수가 니콜라스 셰인 선수의 머리에 헤드기어를 씌운 것도 언쟁이라고 봐야 할까요?”
“평화적인 의사소통 수단을 찾으려는 시도의 일환이라고 봅니다.”
“그렇다면 둘 중 한 명만 덕아웃에서 내보낸 이유는 무엇입니까? 니콜라스 셰인 선수는 불공정한 처사라고 반발하던데요.”
“두 선수를 떨어트려 놓고 차분히 생각할 시간을 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투수보다는 야수를 교체 투입하는 게 경기 운영 면에서 유리하다고 판단했죠.”
경기에 나가 뛰는 동안에는 거기까진 생각이 미치지 못했는데, 만약 내가 연달아 실책을 범하면서 무너졌다면 감독님 입장이 난처해졌겠구나 싶다.
오늘 경기의 MVP는 내야수들의 실책으로 여러 번 위기를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5이닝 1실점으로 호투한 로버트.
감독님의 입장을 고려해 발언 수위를 조절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할 말을 안 하고 넘어가는 사람은 아니다.
“실책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플레이에 대해 책임감 없는 모습을 보이는 건 용납할 수 없습니다.”
기자들은 덕아웃에서 정확히 어떤 언행이 오갔던 건지 꼬치꼬치 캐물었지만, 로버트의 대답은 먼저 했던 말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자 한 기자는 질문의 방향을 틀었다.
“그렇다면 반대로, 자신의 플레이에 책임감을 가진다는 건 어떤 건지 예를 들어주실 수 있나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로버트는 뜬금없이 내 이름을 꺼냈다.
“5회 초, Koo가 불규칙 바운드를 잡아낸 플레이가 떠오르네요. 그 플레이는 좋은 결과를 낳았지만, 설령 Koo가 타구를 잡아내지 못했거나 아예 바운드를 읽어내지 못했더라도 저는 칭찬했을 겁니다.”
타구의 움직임에 야수가 개입하는 순간, 처리 실패 시 실책으로 기록될 확률은 대폭 올라간다.
일부 야수들이 안타성 코스의 타구에 소극적으로 대처하는 이유다.
그리고 이것이 습관으로 굳어진 선수는 그 어떤 투수의 신임도 얻지 못한다.
“Koo의 수비 경험이 부족하다고 해서 안일한 플레이를 넘어가 줄 수는 없지만, 자신의 수비 범위를 책임지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나오는 실수는 괜찮습니다.”
“저, 그런데 그 전의 상황에서 Koo가 최선을 다했는데도 실책이 나왔을 땐 실망하지 않으셨나요?”
눈치 없는 기자의 질문에 로버트는 눈을 부릅떴다.
“빠져나가는 공을 잡아내는 건 칭찬해야 마땅하지만, 다 잡은 공을 떨어트리는 건 아니죠. 그건 그냥 정신 빠진 플레이였습니다.”
어째 조용히 넘어가나 했다.
잠시 후 인터뷰 플레이스에서 나는 ‘정신 빠진 플레이’에 대한 기자들의 질문에 시달려야 했다.
* * *
[Koo, 경기 중 실책에 대해 “투수 시절의 습관이···” 교정 가능할까?]
[허슬 플레이와 기본기 부족, 유격수 Koo는 ‘양날의 검’]
[“타구의 스핀이 눈에 들어와 불규칙 바운드 예상” 재능 입증한 Koo, 남은 것은 담금질뿐]
[Koo의 어처구니없는 실책, 투수 본인이 자처했나?]
역대급 트롤링과 역대급 호수비가 한 이닝에 공존한 컵스전의 5회 초 수비를 두고 수많은 기사들이 쏟아졌다.
누군가는 덕아웃 분위기를 뒤숭숭하게 만들었던 로버트를, 그런 상황에서 정식 경기 유격수 출전 기록이 없는 나를 대수비로 투입한 감독님을 비판하기도 했지만.
내가 빠른 타구를 안정적으로 처리하기에는 아직 수비력이 부족하다는 사실은 대체로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당장 같은 팀의 유격수가 수비로 먹고사는 카일이다 보니 더 비교되는 감도 있고.
[샌디에이고 파드리스(1969~2037), 오클랜드 애슬레틱스(1901~2037), 시카고 컵스(1876~2037, New!). 다음은 누구냐?]
└ 뭐야? 얘네가 왜? 지구도 다 다르고 공통점이 없는데······.
└ 저런, 요새 시범경기를 안 챙겨보는 모양이구나? 직전 시즌까지 투수였던, 심지어 메이저리그에 올라오지도 못했던 내야수에게 농락당한 팀들이야.
└ 안 그래도 X 같은데 부채질하고 있네. 파드리스는 여기에 끼워놓지 마라. 적어도 우린 그 X만한 아시안 놈한테 홈런은 안 처맞았으니까.
└ 너네 마무리 후보 Koo한테 견제 5번 하고도 2루 뺏기고 나서 견제구 입스 왔다며? 그리고 왜 멀쩡한 이름을 놔두고 아시안이라고 하지? 너네 직장 동료한테도 아시안이라고 부를 수 있어?
└ 애슬레틱스는 사정이 다르지. B 게임이잖아. 그 투수 같지도 않은 놈도 바로 방출했고!
└ 트리플 플레이 얘기는 쏙 빼놓네? 왜, 더블 A 주루 코치들까지 싹 다 내보내지 그러냐?
└ 컵스는······ 컵스는······ 3타수 1안타 정도면 무난하게 막은 거 아닌가······?
└ 그치? 더블 플레이 당한 것도 Koo가 잘한 거지 딱히 우리가 못한 건 아니잖아?
샌디에이고와 오클랜드에 이어, 내 이름이 금지어로 지정된 팬 커뮤니티가 하나 더 늘긴 했는데.
앞서 두 번의 경기가 너무 임팩트가 컸던 걸까. 생각보다 반응이 격렬하지가 않더라.
온라인 여기저기를 싸돌아다니며 놀려먹기 바빴던 다저스 팬들도 얌전히 우리 팬 커뮤니티에 틀어박혀 있었고.
[근데 이러면 Koo는 어떻게 되는 거야? 유격수로 키우기로 한 건가?]
└ Koo는 마이너 옵션도 있잖아. 더블 A나 트리플 A에서 내야 여기저기 돌려보면서 시험해보지 않을까?
└ 나는 마이너에서 주전 유격수로 박아놓고 꾸준히 수비 연습을 시키는 게 낫다고 봐. Koo가 리그 평균 유격수만큼만 수비를 해주면 카일을 팔아버려도 괜찮을 거야.
└ 카일 정도면 주전으로 쓸 팀이 꽤 되니까 5선발급 투수 정도는 데려올 수 있겠지?
└ 아니, 나는 다저스를 응원한 지 얼마 안 됐는데, 카일이 주전 유격수 아니야? 왜 주전 유격수를 자꾸 팔아야 한다는 거지?
└ [(혈압주의) 카일 캠프 망언 모음. list] 여기 링크 들어가서 정독하고 와.
└ 오케이. 다 읽었어. 그래서 Koo가 쓸 만한 유격수가 되려면 얼마나 걸릴까?
지금부터라도 나를 유격수로 키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여론이 슬슬 생겨나고 있다.
현시점에서 내가 보여주는 가능성이 웬만한 특급 유망주 수준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카일이 업보를 많이 쌓아둔 탓이 더 크지.
어쨌든 다저스에 내가 필요하다는 여론이 자꾸자꾸 퍼져나가는 건 감사한 일이지만, 그게 유격수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이유는 간단하다.
‘지금 내 수비 실력으론 빅리그 유격수로 뛸 수 없으니까.’
솔직히 말하면, 구단에서 로스터 문제 때문에 나를 내려야만 하는 상황이 아닌 이상 기존 백업 내야수를 밀어낼 자신은 있다.
주전과 백업의 실력 차이가 적은 게 강팀의 조건이라고 하지만 그건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고, 다저스 내야진도 마찬가지다.
타격과 수비 중 뭔가 하나가 아쉬운 선수들, 혹은 아직 설익어 경험치를 더 먹여야 할 선수들.
나와 비슷한 기회를 부여받고 있는 이런 선수들과 비교하자면, 임팩트면에서나 스탯면에서나 한 발짝 앞서가고 있지.
그런데, 유격수는 쓸만한 수비력을 갖추는 데 너무 오래 걸리는 포지션이다.
다저스가 나를 차기 유격수 자원으로 낙점했다면, 마이너에서 한 시즌 정도 굴리면서 수비를 갈고닦도록 하겠지.
어떻게든 백업 자리를 차지해서 주전 선수를 밀어내려던 내 계획에 차질이 생긴다.
[LA 다저스, 스프링캠프 3차 컷오프··· 내야수 니콜라스 셰인 등 총 7명 마이너 캠프로 이관]
그나마 다행인 건, 컷오프를 통해 몇몇 내야수가 정리되면서 출전 기회가 늘어났다는 것.
상대 팀들과의 싸움과 개막 로스터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내부에서의 싸움이 공존하는 스프링캠프 기간은 그렇게 하루하루 흘러갔다.
* * *
[2사 주자 3루 상황. 타석에는 지난 5회 초 대타 투입되어 선발 제롬 웨스트에게서 안타를 뽑아낸 Koo.]
[볼 카운트 1―2. 방금 굉장히 날카로운 몸쪽 유인구를 잘 참아냈지만, 여전히 투수의 카운트입니다.]
[투수 와인드업, 던집니다! Koo의 스윙에! 걸렸어요! 투수 혹시나 하면서 뒤를 돌아보지만! 좌익수는 점핑 캐치를 시도하지만! 소용없어요! 넘어갔습니다! 이번 스프링 트레이닝 2호 홈런!]
[방금 공은 커브로 보이네요! 커브를 결정구로 쓰며 수없이 많은 삼진을 빼앗아 온 Koo에게 저렇게 밋밋하게 떨어지는 커브를 던지다니요!]
[저 타격 자세를 보세요! 부드럽게 밀어친 타구로 홈런을 만들었습니다! 다저스가 거포 내야수의 계보를 이어갈 새로운 조각을 발견한 것 같네요!]
캔자스시티 로얄스와의 원정 경기.
4대 0의 스코어에서 교체 투입된 나는 3타수 2안타 1홈런을 기록하며 점수 차를 7대 0까지 벌리는 데 일조했다.
5회 말부터 기존 백업 1루수 랜디를 대신해 무난한 1루 수비 실력을 선보이기도 했고.
특히 오랜만에 선발 출장한 카일의 악송구를 받아내는 장면이 다저스 팬 커뮤니티에 올라오면서, 언제나처럼 카일이 고슬고슬하게 볶이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그러나 모든 경기에서 좋은 활약을 펼치는 선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격언처럼, 나한테도 영 풀리지 않는 경기가 찾아왔다.
[8구째를 맞이하는 Koo, 포수 체크스윙! 스윙 인정되면서 Koo가 지난 타석에 이어 헛스윙 삼진으로 물러납니다!]
[아쉬운 듯 3루심을 쳐다보는 Koo. 그러나 판정에 번복은 없습니다. 이제 영봉패를 면할 수 있는 기회는 아웃카운트 2개뿐입니다.]
[0―2로 몰린 상태에서 시작한 승부였는데, 그래도 풀카운트까지 잘 끌고 왔어요. 삼구삼진으로 끝난 지난 타석보다는 좋은 승부였다고 봅니다.]
클리블랜드 가디언스와의 경기에서 6회 말 대타 투입된 나는 2타수 무안타 2삼진으로 침묵했다.
첫 타석은 지난해 아메리칸 리그 사이 영 상을 받은 클리블랜드의 에이스 미첼 페르난데스에게 영혼까지 탈탈 털렸지.
분명 전광판에는 포심으로 떴는데, 테일링이 아주 그냥 말이 안 나오더라. 내추럴 커터인 줄 알았다.
수비에서는 기존 유틸리티 내야수를 대신해 3루수를 맡았고.
그립을 생각하지 않고 던졌다가 송구가 너무 크게 휘어지는 바람에 1루수가 잡지 못하는 실책을 저질렀다.
지난 경기에서는 커브를 받아쳐서 홈런 때리고, 이번 경기에서는 커브 그립으로 송구했다가 실책 내고.
로버트가 선발 등판하는 날이었으면 또 탈탈 털렸겠지.
그렇게 꾸준히 기회를 받으며 시범경기 일정을 소화하고는 있는데.
[슬슬 선발 출장을 할 타이밍이 올 만도 한데······?]
‘때가 되면 내보내 주겠지.’
의아해하는 박도현에게 무심한 척 대답하긴 했지만, 쫄리는 건 마찬가지였다.
아직은 기회를 꾸준히 주고 있지만, 메이저리그 스프링캠프라는 곳이 원래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기회를 붙잡아야만 하는 곳이니까.
나 말고 다른 선수에게 기회를 주는 게 낫겠다고 판단하면 그대로 밀리는 거지.
“오늘 경기 선발 라인업이다. 다들 확인하도록.”
슬슬 조바심이 날 듯 말 듯하던 그 타이밍에, 내 첫 선발 출장이 결정되었다.
6번 타자. 수비 포지션은 2루수.
그리고.
“아, Koo. 오늘 경기 잘 부탁해.”
7번 타자는 유격수 카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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