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경쟁의 시작(5)
LA 다저스의 필릭스 오브라이언 감독.
그의 하루 일과는 야구 포럼과 다저스 팬 커뮤니티를 돌아보는 것으로 시작된다.
2031년에 부임해 어느덧 6년 차를 맞이한 만큼, 팀을 이끌어나가는 데 있어 여론을 참고하려는 목적은 아니었고.
온라인상의 여론에 따라 기분과 컨디션이 왔다갔다 하는 일부 선수들을 케어하기 위해서였다.
[진지하게 말하는 건데, Koo와 카일에게 주전 유격수 경쟁을 시켜야 하지 않을까? Koo는 카일의 수비를, 카일은 Koo의 타격을 서로 배울 수만 있다면 다저스 내야진은 Park의 시대만큼이나 단단해질지도 몰라!]
상당한 호응을 받은 한 게시물을 본 오브라이언 감독은 눈썹을 찌푸렸다.
겉으로야 좋은 말이다. 그러나 이건 사실 커리어 하이가 2할 6푼대에 불과한 카일의 타격 실력을 비꼬는 거다.
바로 작년까지 투수였던 선수보다 실력이 딸린다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주전감은 아니지. 절대 아냐.’
구현기가 타석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건 맞다. 프런트에서 요구하지 않았더라도 꾸준히 기용했을 정도로.
그러나 수비는 아직 많이 부족하다. 번뜩이는 재능은 있지만 안정성이 모자라다.
주전 야수는 투수에게 굳건한 믿음을 줄 만큼의 수비력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 오브라이언 감독의 지론이었다.
문제는 카일이 멘탈은 약한 주제에 이런 글은 또 빠짐없이 찾아본다는 것.
이럴 땐 지난번 경기나 훈련 상황에서의 좋은 플레이를 찾아내서 무조건 칭찬을 퍼붓는 게 답이다.
“어제 그 수비는 대체 뭐야? 전성기 A―ROD가 살아 돌아왔다고 해도 믿겠어! 아직 살아 있다고? 어쩌라고! 그 인간이 팔에 주사를 꽂은 그 순간부터 전설은 이미 뒈졌어!”
이런 정신 나간 립서비스를 듣고 멘탈이 회복되는 선수가 있다는 것을 그는 메이저리그 감독이 되고 나서야 처음 알았다.
아무튼 그날도 칭찬할 거리를 찾기 위해 카일이 수비 훈련을 진행하는 모습을 눈에 불을 켜고 주시했는데.
그런 노력이 무색하게도, 훈련 후 개인 면담을 요청한 카일은 이렇게 말했다.
“스프링 트레이닝에서의 루틴을 바꿔 볼까 합니다.”
“어떻게?”
“경기 출전 시간을 늘리고 싶어요.”
경기 감각을 더 빨리 끌어올릴 필요성을 느꼈다, 새로 합류한 선수들과도 호흡을 맞춰보고 싶다 등등, 뭐라뭐라 떠들어대긴 했는데.
인터넷에서 떠돌아다니는 헛소리에 휘둘리고 있다는 게 뻔히 보였다.
몇 년에 걸쳐 굳어진 루틴을 손대는 건 득보다 실이 많을 확률이 높다는 걸 본인도 알 테니까.
“자네가 루틴을 바꾸고 싶다면 나로선 막을 순 없지. 하지만 신중하게 생각하고 말한 거였으면 좋겠어. 자네는 이번 시즌도 우리 팀의 주전 유격수를 맡아줘야 할 중요한 자원이니까.”
그러니까 그딴 헛소리 신경 쓰지 말고 하던 대로 하라는 뜻을 담아, 오브라이언 감독은 친절하게 말해줬고.
아닌 척하면서도 카일의 콧대가 하늘을 찌를 듯 올라갔다.
“주전으로 뛰고 말고는 저에게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팀을 위해 생각한 끝에 결정했을 뿐입니다.”
주전 경쟁에서 밀려나 백업으로 뛰어도 상관없다고 진심으로 생각하는 선수는 없다.
설령 있더라도 저런 말은 안 한다.
“자네 뜻이 그렇다면 알겠어. 대신 갑작스럽게 출전을 늘리면 부상 위험도 있으니까, 이번 주엔 이렇게 3경기 출장하는 거로 하고 후반에는 교체를······.”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만류할 도리도 없는 일이었다.
미우나 고우나 이번 오프 시즌에 2년간의 연장 계약을 맺은 선수.
본인의 고집을 들어주되, 최대한 컨디션에 지장이 가지 않도록 조절하는 게 최선이었다.
“감사합니다, 감독님.”
“그래, 좀 이따 보자고.”
카일이 볼일을 마치고 사라지자, 오브라이언 감독은 이마를 쓸어올리며 한숨을 쉬었다.
실력과 인성, 둘 다 카일의 상위 호환이었던 박도현의 존재에 너무 익숙해져 있던 걸까.
“차라리 그 헛소리가 진짜였으면 좋겠네.”
구현기의 현재 타격 성적이 플루크가 아니고, 기적적으로 뭔가 깨달음이라도 얻어서 쓸 만한 수비를 갖추게 된다면.
주전 유격수로 쓰지 말아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
자신이 좋아하고 잘 따르는 선수라도 실력이 모자라면 아무 거리낌 없이 선발 라인업에서 배제할 수 있는 오브라이언 감독에게 그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 * *
시범경기 일정이 반환점을 돌아선 시점에서 첫 선발 출장 기회가 찾아왔다.
상대 팀은 같은 내셔널리그 서부지구의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수비 집중 훈련에서 2루 수비를 소화하긴 했지만, 정식 경기 출전은 이번이 처음이다.
지금껏 포지션이 겹치지 않도록 출전시키는 걸 보니, 아직까지는 평가의 일환이라고 보는 게 맞겠지.
“시프트 사인은 다 외웠지?”
키스톤 콤비를 맞춰야 할 카일은 국민의례를 하러 그라운드로 나가기 전에 따로 부르더니 이런 헛소리나 하고 있다.
뭔가 그 특유의 재수 없는 미소를 짓고 있어서 상대하긴 싫은데, 그래도 일단 대답은 해줬다.
“당연하지.”
애리조나가 당겨치기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은 극단적인 풀 히터 3명이 중심타선을 이루고 있는 팀이니만큼, 오늘 경기에서 시프트 비중이 좀 높을 거다.
“다행이네. 모르는 거 있으면 언제든 물어보고.”
그러더니 내 어깨를 두드려주고는 그라운드로 뛰어간다.
차라리 전처럼 대놓고 깐족거리면 받아치는 맛이라도 있을 텐데,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으니까 짜증만 난다.
‘설마 나 대신 유격수로 나왔다고 기분 좋은 건 아닐 거 아냐.’
온라인에서 나를 카일 대신 유격수로 세우라는 건 일종의 밈에 가깝다.
내가 워낙 시범경기에서 호조를 보이고 있고. 또 카일이 쌓아둔 업보가 많아 보니 놀리려는 의도가 크지.
실제로 내가 메이저리그 개막전에서 카일 대신 유격수로 나가면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향으로 커뮤니티가 폭발할 거다.
애초에 나는 지금 주 포지션도 지정받지 못한 채 뺑뺑이 돌고 있는데.
주전 자리를 확정지은 카일로선 애초에 나를 의식할 필요도 없지.
‘그걸 다큐로 받아들이는 거면 그냥 등신이지. 안 그러냐?’
[······글쎄.]
실제로 루키 신분으로 개막전에서 카일을 밀어내본 전력이 있어서일까. 박도현은 딱히 공감하진 않았다.
“플레이 볼!”
1회 초 다저스의 공격.
마운드에 오른 건 올해로 메이저리그 3년 차를 맞이한, 애리조나 선발진의 한 축을 차지하고 있는 젊은 투수.
“아웃!”
오늘은 리드오프 중견수로 출장한 말릭을 중견수 플라이로 잡아내긴 했지만.
아웃당한 말릭도 그렇고, 덕아웃에서 지켜보던 선수들도 그렇고. 뭔가 상대하기 어렵다는 인상은 느끼지 못한 듯했다.
“할 만 한데?”
타이밍이 안 맞아서 뜬공이 나왔을 뿐, 구위나 제구면에서 컨디션이 최상이라고는 보기 어려운 상태.
다저스 야수들이 벗어나는 공은 최대한 지켜보고 타이밍이 맞으면 휘두르는 전략을 가져가면서, 연달아 안타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따악―!
“세이프!”
2번부터 5번까지 4타자 연속 출루를 기록하면서, 두 명의 주자가 홈을 밟았다.
1사에 주자 1, 3루 상황에서 6번 타자인 내 차례가 돌아왔고.
대기 타석에서 나와 타석을 향해 걸어가는 내게 이제는 꽤 자연스러워진 팬들의 응원이 날아들었다.
“Koo!!! Koo!!! Koo!!! Koo!!!”
박수와 함께 리듬을 맞추는 등 그새 나름 체계가 잡힌 응원을 등에 업은 채, 연신 땀을 닦아내는 투수를 마주했다.
나에게 진루나 안타, 홈런을 허용했던 투수들이 인터넷에서 조리돌림당하는 걸 본 적이 있다면 신경을 안 쓸 수가 없겠지.
앞선 타자들을 상대할 때처럼 제풀에 제구가 흔들릴 수도 있다는 생각에, 조금 소극적으로 임했더니.
“스트라이크!”
“볼!”
“스윙! 스트라이크!”
하필이면 나랑 상대하면서 제구가 안정됐는지, 어느샌가 불리한 카운트에 놓여 있었다.
초구는 지켜봤고, 급격히 가라앉는 포크볼에 재빨리 배트를 거뒀지만 스윙이 인정됐지.
지난번 클리블랜드의 마무리 투수한테 체크스윙 삼진 당했을 때보다 덜 돌아갔던 것 같은데.
하지만 이건 번복되지 않는 판정이다. 미련을 털어내지 않으면 나만 손해다.
“볼!”
그 와중에 투수는 터무니없는 바운드볼을 던지면서 카운트의 균형을 맞췄다.
다음 공으로 무엇이 올지 생각하면서 루틴을 가져가려던 찰나, 3루 코치가 작전을 하달했다.
1루 주자에게 걸린 히트 앤 런.
발이 빠른 주자인 만큼 추가 진루를 노려볼 만하다고 생각했나 보다.
이러면 복잡한 생각은 지우고, 배트에 공을 갖다 맞히는 것만 생각하면 된다.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세트 포지션에 들어가는 투수의 손끝을 관찰했고.
“런! 런!”
내야수의 콜에 투수의 눈썹이 움찔하는 게 눈에 들어왔다.
오프 스피드 볼이라는 증거다. 만약 저게 연기라면 그냥 삼진 당해야지.
분석 자료에는 투수가 주력 변화구로 너클 커브를 사용한다고 나와 있었기에, 그쪽에 무게를 두고 스윙을 가져갔다.
실제로 상대해본 적은 없지만, 덕아웃에서 계속 타이밍을 맞춰왔던 너클 커브의 궤적에 맞춰 공을 끝까지 지켜보며 배트를 휘두른 순간―
따악―!
타구의 방향을 확인하자마자 3루 주자는 홈으로 쇄도했고.
중견수가 재빨리 달려와서 공을 붙잡았지만, 스타트가 빨랐던 1루 주자가 3루에 도착하는 걸 막아낼 방법은 없었다.
작전 성공으로 스코어 3대 0. 주자는 다시 1, 3루.
[시범경기에서 안타를 기록했습니다.]
[20포인트가 지급됩니다.]
[현재 포인트: 7960]
포인트도 어느덧 재능을 뽑을 수 있는 1만 포인트의 80% 고지에 거의 다다랐다.
볼넷 혹은 사구, 낫아웃 출루는 10, 안타는 20, 2루타는 30, 3루타는 40, 홈런은 50.
이것도 모으고 모으면 꽤나 쏠쏠하다 보니 한 타석 한 타석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와아아아아아아아!!!”
“Koo!!! Koo!!! Koo!!! Koo!!!”
투수로 뛸 때도 팬들은 지금처럼 응원을 보내줬지만, 타자로 뛰어보니 느낌이 확실히 다르다.
냉정히 말하자면, 마운드 위에서 팬들의 함성은 머릿속에서 지워야 할 소음에 불과했다.
내 역할을 마치고 마운드에서 완전히 내려오고 나서야 팬들의 응원에 화답할 여유가 생겼다.
그런데 타자는 일단 출루하고 나면 팬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여유가 생긴다.
특히 지금처럼 상대 코칭스태프가 마운드로 올라온 상황이라면 더더욱.
“Koo!!! 다음 타석에선 큰 거 한 방 날려줘!!! 그래줄 수 있지?!”
“다저스의 주전 유격수에 어울리는 선수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카일은 아니야!!! Koo!!! 얼른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해줘!!!”
물론 가끔 저렇게 응원이라기엔 한이 좀 심각하게 맺혀 있는 목소리도 드문드문 들리지만.
투수 교체는 없었고, 타석으로 들어오는 건 조금 전 일부 팬의 야유의 대상이 되었던 카일.
물론 스포츠 선수에게 인성은 중요하지만, 그걸 덮을 수 있는 실력이 있다면 어느 정도 무마할 수는 있는데―
딱!
"아웃!"
"아웃!"
최대한 빠르게 달려봤지만 결국 더블 플레이로 이닝 종료.
“야!!!! 어떻게 매 경기 이럴 수가 있어?!”
“쟤 좀 빼라고!!! 차라리 랜디를 유격수로 세워라!!! 홈런 보는 맛이라도 나게!!!”
이렇게 찬스 상황에서 병살로 맥을 탁 끊어버린다면 야유를 피하기가 힘들지.
경기 전과는 달리 폭삭 늙어버린 듯한 카일은 고개를 푹 숙인 채 터덜터덜 덕아웃으로 돌아갔고.
한풀 꺾인 분위기는 경기에 새로운 국면을 만들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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