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경쟁의 시작(6)
1회 말 애리조나의 공격.
병살이 나오며 기세가 한풀 꺾이긴 했지만, 그래도 선취점을 얻어낸 다저스는 다시 분위기를 끌어올리며 나갈 준비를 했다.
“Koo, 너랑 함께 그라운드로 나가려니까 기분이 좀······ 묘하네.”
오늘 경기의 선발 투수는 제리 헤이즈택.
내가 띄엄띄엄 출전하다 보니, 타이밍이 안 맞아서 제리와 함께 수비를 소화한 적은 없다.
제리 타석에 대타로 나간 적만 있었지.
지난 2036시즌 선발로만 28경기 등판해 13승 5패 ERA 3.26.
이번 시범경기에서는 3경기에 등판해 3.67의 ERA를 기록하는 중.
장기계약의 마지막 해를 맞이한 로버트 대신 에이스 역할을 맡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
“앞으로는 익숙해져야 할 거야.”
안 그러면 내가 메이저리그에서 살아남지 못했다는 뜻이니까.
제리는 대답 대신 특유의 치명적인 척하는 미소를 짓고는 마운드로 올라갔다.
위풍당당했던 그 모습과는 달리 첫 출발은 좋지 못했다.
따아악―!
아예 초구 패스트볼을 노리고 나온 듯, 망설임이 전혀 없는 벼락같은 스윙.
무사 2루의 실점 위기 상황으로 이닝을 시작했다.
“아웃!”
루키 시절 제리였다면 이런 상황에서 흔들렸겠지만, 이제는 에이스를 바라보는 5년 차 투수.
주자가 일찍 스타트를 끊었는데도 동요하지 않고 침착하게 자기 공을 던졌다.
카일이 자기 앞으로 날아온 땅볼을 처리하는 동안 주자는 3루에 들어갔다.
어차피 3점의 리드를 안고 있으니, 희생플라이로 한 점을 내주더라도 큰일은 아니다.
안타가 나오더라도 다음 타자에게 병살을 유도한다는 생각으로 낮게 제구를 가져가면 되고.
하지만.
따악―!
노 볼 투 스트라이크 상황에서 결정구로 던진 커터가 맞아 나가는 건 생각보다 타격이 크다.
3루 주자가 홈인하면서 1대 0, 1사 주자 1루.
“괜찮아! 괜찮아! 원 아웃!”
타자가 커터 타이밍을 읽긴 했는데, 안타를 만들어낸 건 운이 좀 따랐다고 본다.
공의 위력 자체가 워낙 세서 배트 중심부에 맞히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1루에 도착한 타자가 기뻐하는 한편 가슴을 쓸어내리기도 했고.
안타 맞은 투수 입장에선 그런 게 눈에 절대 안 들어오겠지만.
‘A―2 포메이션.’
제리가 마운드에서 심호흡을 하며 다음 타자와의 승부를 준비하는 사이, 덕아웃에서는 시프트 사인을 내보냈다.
3루수가 유격수 위치로 이동하고, 유격수와 2루수는 뒤로 물러나서 1―2간을 커버한다.
장타력이 있는 당겨치기 위주 좌타자를 상대하기 위한 시프트.
“볼!”
그러나 시프트라는 것은, 홈런이나 볼넷이 나오면 쓸모가 없어진다.
스트라이크를 던지지 못한 채 맞이한 3―0의 카운트. 결국 주전 포수 헨리가 마운드를 방문했다.
시프트 때문에 거리가 멀어져서 들리지는 않았지만 대충 넌 미래의 에이스니까 쫄지 마라 등신아, 뭐 그런 얘기겠지.
경기가 재개되기 전, 언제 어느 방향으로든 뛰쳐나갈 수 있도록 온 신경을 기울였다.
지금처럼 존 안에 무조건 넣어야만 하는 상황이라면 그만큼 공이 가운데로 몰리기도 쉽고, 빠른 타구가 나올 확률도 그만큼 올라가니까.
따악!
예상대로 빠른 타구가 나오긴 했다.
다만 시프트의 반대 방향이었을 뿐.
타자가 가볍게 밀어친 타구는 3루수 키를 훌쩍 넘겼고, 안전하게 원바운드 캐치를 선택한 좌익수가 3루를 향해 돌진하는 1루 주자를 잡아내기 위해 공을 뿌렸지만.
“세이프!”
3루수가 커버를 들어가는 타이밍이 어그러지면서 1루 주자는 3루에서 세이프.
“후······.”
제리는 땀을 닦아내며 포수에게 공을 건네받았다.
사실 추가점이 안 나온 것만 해도 다행이라고 봐야지.
공이 몰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상대 타자가 그걸 노려서 기술적으로 잘 밀어낸 거다.
시프트 적중 실패로 평범한 땅볼이 안타로 둔갑하는 경우도 간혹 나오는데, 그게 아닌 게 어디야.
투수 입장에서 그럴 땐 진짜 멘탈이 터진다.
‘포메이션 A―3.’
그래서였을까.
비슷한 유형의 5번 타자를 맞아, 덕아웃에서는 다시금 시프트 사인을 냈다.
조금 전과 거의 비슷하지만, 3루 주자를 의식해 3루수의 위치를 왼쪽으로 약간 당기고.
나와 카일은 혹시 일어날지 모를 더블 플레이를 위해 약간 앞으로 나온 형태.
“스트라이크!”
“볼!”
그나마 멘탈이 좀 잡혔는지 제리는 초구 스트라이크로 시작했다.
2구도 볼이 되긴 했지만, 배트가 나왔어도 이상하지 않은 좋은 유인구였다.
그렇게 다시 분위기를 되찾아오는가 했더니.
딱―!
커터를 받아 때려 만들어낸, 1―2루간 빠른 땅볼 타구.
나와 카일 사이 절묘한 위치로 굴러오는 타구가 눈에 들어오자마자, 힘차게 발을 내디디며 2루 베이스를 가리켰다.
““2루!””
문제는 나와 카일의 콜이 겹쳤다는 것.
스타트도 거의 같은 타이밍이었고, 카일 쪽이 2루 베이스에 가깝긴 하지만 이미 스타트에 들어간 이상 큰 의미는 없는 차이였고.
둘 중 누구 하나가 2루로 가지 않으면 1루 주자를 잡아낼 수 없는 상황.
‘에이 씨!’
역동작에 걸려 넘어질 뻔하면서도, 최대한 빠르게 뒤돌아서 주자를 곁눈질하며 2루 베이스를 향해 뛰었다.
1루로 던질 수 있냐 없냐는 나중에 생각할 문제다. 일단 지금 막 카일이 던지는 저 공을 받아내는 게 먼저지.
‘미친······!’
마음이 급했는지, 송구가 2루 베이스 옆을 빠져나갈 듯한 코스로 날아온다.
놓치면 주자 올 세이프.
1루 수비 시 악송구를 잡아낼 때처럼, 한쪽 다리를 2루 베이스에 힘주어 디디고는 다리를 쫙 찢으며 글러브를 뻗었다.
“아웃!”
공이 글러브에 들어오는 걸 확인하자마자 2루심이 아웃을 선언했지만.
나는 1루 쪽을 돌아보지도 못한 채 고관절을 붙잡고 쓰러졌다.
* * *
[카운트 1―1. 제리 헤이즈택, 던졌습니다! 주자 올 스타트! 당긴 타구가 시프트 방향으로 향하고! 이 정도면 무난하게······ 아아아!!!]
[스타트가 겹쳤어요! 유격수와 2루수 겹쳤습니다! 2루수 Koo가 급하게 2루 커버! 잡을 수 있나요?!]
[카일 캠프, 2루 들어가는 Koo를 확인하고 이제 막 송구합니다! 주자는 바로 근처! 앗! 여기서 악송구가······! 잡았어요!!! Koo가 다리를 찢으면서 유격수 카일 캠프의 악송구를 잡아냅니다!!!]
[1루 주자는 아웃! 타자 주자는 1루에 멈췄고! 3루 주자 홈인! 스코어 3대 2! 이제 투아웃에 주자 1루입니다! 방금 어떤 상황이 일어난 거죠?!]
[시프트 상황에서 야수 사이로 오는 공은 콜을 한 야수가 처리하는 게 정석인데, 리플레이를 보면 스타트 타이밍이 똑같아요. 아마 콜이 겹쳤을 겁니다. 그래도 Koo의 좋은 판단력으로 아웃카운트 하나는 잡았습니다만······ Koo가 지금 쓰러져 있네요?]
[카일 캠프, 쓰러진 Koo를 일으켜 세워주고 있습니다. 격려하는 것 같죠? 일어난 Koo, 부상당한 곳이 없나 체크하는 모습입니다. 관중들의 격려가 쏟아지고 있네요!]
[허슬 플레이도 좋지만, 부상은 항상 조심해야 합니다. Koo는 가뜩이나 내야수로 전향한 지 얼마 안 된 선수니까요. 아, 투수 코치 마운드를 방문하고 있습니다. 교체일까요? 우선 지켜보도록 하겠습니다!]
* * *
갑작스런 혹사에 고관절과 주변 근육이 화끈거렸지만, 부위가 부위이다 보니 문지를 수도 없었다.
통증이 좀 줄어들기를 기다리는데, 눈치 없이 카일이 일어나라고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붙잡고 일어나는데.
“Koo, 조금만 집중하자. 네가 2루 커버를 일찍 들어갔으면 더블 플레이로 끝낼 수 있었어.”
사과라도 하러 왔나 했더니, 어처구니없는 소리나 하고 있었다.
콜이 겹친 상황에서는 누가 양보해야 할지 빠르게 판단하기가 어려우니, 이런 상황에 대한 사전 조율이 필요했는데.
미리 이야기를 나누지 않은 건 양쪽 다 책임이 있는 문제였다.
게다가 지가 송구를 거지같이 해서 쓰러져 있는 사람한테 할 소리는 더더욱 아니지.
“괜찮아, 카일. 우리 앞으로 이런 상황이 오면 어떡할지 얘기를 좀 해 둬야겠다.”
그러나 나는 카일을 들이받는 대신, 고관절 상태를 확인하는 스트레칭을 하며 씩 웃어줬다.
지금으로선 X랄맞은 송구로 동료에게 부상을 입힐 뻔한 카일의 책임이 더 부각되는 상태.
여기서 내가 급발진하면서 분위기를 개판으로 만들면 이 상황에 대한 책임 소재가 모호해진다.
“그 거리에서 그딴 X 같은 송구를 날려?! 니가 그러고도 유격수야?!”
“카일!!! 개자식아!!! Koo가 부상당한 거기만 해봐라!!! 네놈의 XX털을 죄다 뜯어서 XX에 넣은 다음 XXXX!!!!”
내가 자기 뜻대로 반응하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관중들의 야유와 욕설에 기가 질려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카일의 표정이 병살을 쳤을 때처럼 거무죽죽해졌고.
마운드로 올라온 투수 코치가 내야수들을 불러 모았다.
“Koo, 다치진 않았나?”
“괜찮습니다.”
양쪽 다리를 들었다 내렸다 하며 상태를 확인시키자 투수 코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카일, 복잡한 상황이었다는 건 알지만, 조금만 집중해줬으면 좋겠다.”
“······죄송합니다. 미안해, Koo.”
“아냐, 콜이 안 맞은 건 공동 책임인데 뭘. 신경 쓰지 마.”
우리의 사이좋은(?) 모습을 확인한 투수 코치는 내야수들한테서 고개를 돌려 본인의 임무에 집중했다.
상대 안타에는 운이 많이 따랐다, 투아웃이 됐으니 타자한테만 신경 쓰면 된다, 하여튼 제리의 멘탈을 회복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노력이 크게 효과를 볼 것 같진 않았다.
‘카일의 실책으로 실점이 나오면 제리가 흔들리는 징크스.’
물론 주자를 아웃시켰으니 실책은 아니고 야수선택으로 기록되겠지만, 카일의 송구는 명백한 실책성 플레이.
표면적으로는 이미 화해했고, 가끔 로버트나 클레망의 주선으로 식사 자리를 갖는 등 사적으로 만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제리와 카일은 서로 좋은 관계가 아니다.
어쨌든 서로 팀의 주전 선수이기에 팀 케미스트리를 위해 티만 안 낼 뿐이지.
투수가 야수에 대한 신뢰가 부족해지면 던질 수 있는 공의 선택지도 줄어들뿐더러, 머릿속에 생각도 많아지는데―
따아아아악!
메이저리그 타자들은 그런 상태의 투수가 던진 공 정도는 가볍게 넘겨버릴 수 있다.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의 역전 투런포.
심상치 않은 타격전의 예고편이었다.
* * *
홈런을 맞고 나서 영혼이 빠져나간 듯 무력해지는 투수는 메이저리그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제리는 6번 타자에게 볼넷을 내줬지만, 곧바로 삼진을 잡아내면서 추가 실점 없이 이닝을 끝냈다.
상대에게나 우리에게나, 무척이나 힘겨운 1회였다.
그래도 두 팀의 선발 투수 중 더 힘든 시간을 보낸 사람이 누구인지 묻는다면, 그건 제리겠지.
초구 병살로 이닝을 끝내며 투구 수 20개 안쪽으로 끊어낸 애리조나와 달리 제리는 30구를 넘게 던졌으니까.
그래서였을까.
“아웃!”
“아웃!” “아웃!”
8번 타자, 포수 헨리가 볼넷을 골라 나갔지만, 제리의 번트 타구가 높이 떠오르며 아웃됐고.
리드오프 말릭이 설욕의 안타를 뽑아내며 1사 1, 3루 찬스를 만들었지만, 3루수 켄이 병살을 때리며 추가 득점은 없었다.
아직 2회인데 벌써부터 병살이 두 개나 나오니, 덕아웃 분위기는 좋을 리가 없었다.
곧바로 이어진 애리조나의 2회 말 공격.
8번 포수와 9번 투수를 연속 삼진으로 잡아냈을 때만 해도 다시 분위기를 끌어올리나 했지만······.
따악!
[좌익수 루카스 에머런, 라인선상으로 달려가서 공을 잡았고! 유격수 카일 캠프에게 송구하지만! 던질 수 없습니다! 주자 2루!]
[아······ 제리 헤이즈택. 투 아웃을 잘 잡았지만 여기서 또다시 장타를 허용하고 맙니다.]
따아악―!
따악!
테이블 세터로부터 출발해 3타자 연속 안타로 추가 2실점.
2회가 끝나기도 전에 제리의 투구 수는 50개를 훌쩍 넘겼다.
이 정도로 흔들리는 건, 조금 전 카일의 실책성 플레이가 준 영향이 아직까지 남아 있다기보다는―
‘하필이면 커터를 맞은 게 컸어.’
안타를 맞는 게 기분 좋은 투수야 없겠지만, 상당수의 투수는 특히 결정구가 맞아 나갔을 때 큰 타격을 입는다.
자신이 가장 믿을 수 있는 공에 배신당하는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이럴 땐 결정구를 던질 때의 감각이 엉망이 되는데, 다른 구종으로 아웃카운트를 잡아가며 조금씩 감각을 되찾아가는 게 정석이다.
상대 타자들이 그 꼴을 그냥 두고 보지 않는다는 게 문제지.
“아웃!”
1회에 제리의 멘탈을 붕괴시켰던 5번 타자를 내야 플라이로 잡아내면서 2회를 마쳤지만, 이미 불펜은 가동되기 시작했다.
“Hey, Guys. 조금만 더 집중하자고.”
3회 초 공격에 들어가기 전, 1루수 클레망이 선발 야수들을 불러모았다.
“우리 이제 2회 끝났어. 경기 끝나려면 한참 남았는데, 이렇게 무기력하게 굴다간 이번 시범경기 최다 점수 차 경기를 팬들 앞에서 선보이게 되지 않을까?”
이번 시즌 시범경기 최대 점수 차가 저 멀리 그레이프푸르트리그에서 벌어진 11대 1인가 그럴 거다.
뭔가 웃으면서 하는 말이지만 베테랑답게 묘하게 뼈가 있었다.
“우리 개막하면 자주 볼 놈들인데 벌써 호구 잡히고 싶진 않지? 다시 쫓아가자구. Let’s Go!”
“Dodgers!”
아마 클레망도 크게 의식하고 한 말은 아닐 거다. 그저 야수들이 집중력을 잃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 꺼낸 거겠지.
그런데 야구라는 게, 이따금 생각 없이 한 말이 그대로 이뤄지는 경우가 있다.
딱!
“세이프!”
3번 타자의 내야 안타.
따아악!
4번 타자의 중전 안타.
“베이스 온 볼스!”
5번 타자 클레망이 얻어낸 볼넷이 겹쳐지면서.
“Koo!!! Koo!!! Koo!!! Koo!!!”
결국 내 앞에 무사 만루 밥상이 만들어지고야 말았다.
홈 덕아웃에서는 교체의 기미가 보이지 않고, 불펜도 이제 막 준비를 시작한 상태.
타석에는 오늘 첫 타석에서 안타를 때려낸 나.
사실 이미 안타를 허용한 시점에서 요즘 유행한다는 '투같새 라인'에 이름을 올린 건 확정됐지.
이 상황에서 나를 거른다? 그럼 팬 커뮤니티 하나가 또 폭발하는 거고.
승부에 들어갔다가 안타를 맞는다? 저런, 그때도 폭발하는 건 마찬가지다.
나를 잡아내는 것 외에 아무것도 고를 수 없는 상황.
이 상황에서 과연 투수는 어떤 공을 던질까?
'박도현 너무하네.'
표정을 숨기는 게 너무 힘들다. 지금까지 해온 모든 지옥 훈련들보다 훨씬 더.
'이 재밌는 걸 너 혼자 즐겼다 이거지?'
이윽고, 투수가 와인드업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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