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신 들린 천재 타자-26화 (26/200)

26. 경쟁의 시작(7)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의 선발 투수는 지금 꿈을 꾸는 것처럼 정신이 약간 몽롱했다.

선두 타자 루카스에게 내야 안타를 허용했을 때까지만 해도 심각하게 생각하진 않았다.

1회 말과는 반대로, 이번엔 애리조나 쪽이 3점을 앞서 있는 상태이니.

게다가 다저스 타선이 2이닝 동안 병살타를 두 개나 쳐내며 알아서 자멸했으니, 부담 없이 승부를 들어갈 수 있었지.

따악―!

우익수 R.H.가 노림수를 가져갔는지 체인지업을 제대로 때려내면서 주자 1, 3루가 되자, 슬슬 위기감을 느꼈고.

자신의 심경 변화를 눈치챈 투수 코치가 마운드를 방문했다.

“잠깐 시간 벌어주러 나왔어. 긴장 풀어.”

“감사합니다.”

에이징 커브가 오면서 타율 자체는 만만해졌어도 여전히 28홈런을 때려내는 홈런 타자 클레망이 부담스럽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지만.

그는 선발 투수였다.

투구 수가 40개도 채 되지 않는, 동료들이 3점의 리드를 안겨준, 메이저리그의 선발 투수.

“자네가 해낼 수 있을 거라고 믿어.”

자신의 어깨를 토닥이는 투수 코치의 손에서 진심이 느껴졌다.

그의 팀은 나름 막강한 선발진에 비해 불펜진의 임팩트가 적었다.

심지어 핵심 불펜 중 두 명이나 부상자 명단에 올라 있고, 초청선수로 영입한 선수들도 제 몫을 못 하는 상태.

시범경기이기에 성적은 중요치 않지만, 같은 지구 팀 다저스에게 얇은 불펜진을 우르르 내보내 경험을 쌓게 해주는 건 막심한 손해였다.

그렇게 투수 코치가 내려가고, 억지로 자신감을 쥐어짜 5번 타자 클레망을 상대했지만.

“베이스 온 볼스!”

존 안에 넣을 작정으로 던졌던 초구와 2구가 볼 판정을 받으면서, 레퍼토리가 완전히 어그러지고 말았다.

“이 XXX들이 지금 장난해?!”

“컨디션이 X 같으면 내려달라고 말을 하던가!!!”

이닝을 시작할 때의 훈훈한 분위기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홈팬들의 야유는 견딜 만했지만.

“Koo!!! Koo!!! Koo!!! Koo!!!”

지금 막 타석에 들어오는 타자를 향한 일사분란한 응원은 자꾸 신경을 건드렸다.

일정한 리듬의 우렁찬 목소리가 자신의 투구 템포를 어지럽히는 느낌.

어쩌다 한 번씩 애틀랜타 원정에서 마주하는 토마호크 촙만큼이나 보기 싫었다.

‘진정하자. 작년까지 투수였던 놈이야.’

같은 선수에게 지난 타석에 이미 안타를 허용했다는 사실을 머릿속에서 최대한 지우려 노력했다.

너클 커브는 그가 구사할 수 있는 구종 중에서 타이밍만 예측한다면 가장 때려내기 쉬운 공.

주자 있는 상황에서 허를 찌르기 위한 그 선택은 결과적으로 실패했다.

포수는 바깥쪽으로 멀찍이 빼 보자는 신호를 보냈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의 확신에는 나름 근거가 있었다.

아무런 욕심이나 계산이 엿보이지 않는 저 흐리멍덩한 표정.

요즘 몇 경기 플루크로 좋은 성적을 내더니, 타석에서 집중하기는커녕 성의 없는 태도로 임하고 있었다.

마침내 포수가 원하던 사인을 제시했고.

그는 고개를 끄덕인 뒤 와인드업을 시작했다.

‘저딴 놈한테 두 번은 안 당하지······!’

최대 시속 93마일에 달하는 고속 슬라이더.

몸에 쌓이는 부담이 커서 자주 던지진 않지만, 위력은 확실한 구종.

같은 손 타자는 알고도 당할 수밖에 없는 그 공으로, 스트라이크 존 구석을 겨냥했고―

무심한 표정 그대로 스윙을 가져간 타자의 방망이에.

그의 승부구가 틀어박혔다.

따아아악―!

“와아아아아아아아아!!!”

넘어가냐 마느냐가 문제일 뿐, 제대로 맞은 타구에 그는 뒤를 돌아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홈을 밟는 주자가 한 명, 두 명, 세 명······.

“세이프!”

등 뒤에서 들려오는 콜이, 그에겐 그 어떤 환호와 야유보다도 선명하게 들렸다.

‘순······ 사기꾼 새끼들······.’

투수 출신이랍시고 만만하게 보는 순간, 저놈은 이빨을 드러내 상대방을 물어뜯어 버린다.

저놈은 그냥 다저스 타선에 흔히 보이는 강타자 중 하나다.

그것도 데이터라고는 X도 없어서 당장은 약점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 * *

[시범경기에서 2루타를 기록했습니다.]

[30포인트가 지급됩니다.]

[현재 포인트: 7990]

투수 분석 자료가 제대로 들어맞았다.

무사에 득점권 주자가 나간 상황에서 자주 던지는 고속 슬라이더.

헛스윙이 돼도 상관없다는 생각으로 히팅 포인트를 앞에 두고 빠른 타이밍에 스윙을 가져간 게 먹혔지.

“Koo!!! Koo!!! Koo!!! Koo!!!”

주자 일소 동점 2루타.

선행 주자가 없었다면 3루까지도 노려볼 만했던 깊숙한 장타에 관중석은 또 난리가 났다.

그래도 쏟아지는 환호가 진정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다음 타자가 타석에 들어오고 있었으니까.

이번 시범경기에서 7경기 출전해 20타수 3안타, 타율 0.150으로 침묵하고 있는 카일 캠프.

원래부터 시즌 초반부보다는 여름 이후 반등하는 편이고, 또 좋은 유격수 수비를 꾸준히 보여준다는 점에서 사실 문제 있는 성적은 아니지만.

“차라리 가만히 서 있다가 들어와!!!”

“감독 양반!!! 어줍잖게 작전 걸었다가 또 더블 플레이 만들면 죽여버릴 줄 알아!!!”

첫 타석에서의 전례가 있어서일까. 무사 2루인데도 사람들이 신뢰를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다.

여기서 한 방 때려내면 또 언제 그랬냐는 듯 태도를 바꿔 찬양하는 게 야구팬이라지만.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떨어지는 체인지업에 크게 돌아가는 헛스윙 삼진.

카일이 차라리 잘했다면서 박수는 보내는 관중을 노려보며 입술을 깨무는 게 2루에서도 보였다.

“아웃!”

포수 헨리가 내야 뜬공으로 아웃되고, 오늘 많이 흔들렸던 제리 대신 대타를 내보내는 게 아닐까 싶었지만.

“스트라이크 아웃!”

감독님이 제리를 계속 마운드에 올리는 걸 선택하면서 다저스의 3회 초 공격은 6대 6 동점으로 끝났다.

* * *

생각지도 못한 동점 덕분에 진정이 됐던 걸까.

3회 말 선두 타자에게 우전 안타를 허용하며 다시 힘겨운 싸움을 이어가나 했던 제리는.

“아웃!” “아웃!”

내 앞으로 오는 무난한 땅볼 타구를 유도해냈고.

이번에는 제때 2루 커버에 들어가 있던 카일이 1루에 송구하면서, 오늘 경기 애리조나의 첫 병살을 빼앗았다.

“스트라이크 아웃!”

애리조나도 선발 투수를 좀 더 끌고 가기로 마음먹었는지, 그대로 타석에 올라온 투수에게 삼구삼진을 뺏어내며 이닝 종료.

4회는 양 팀 모두 주자가 루상에 나갔지만, 추가 점수를 내지는 못하며 짧은 소강상태가 이어졌다.

그렇게 맞이한 5회 초, 다저스의 공격.

“Koo!!! 한 방 날려버려!!!”

“최소한 2루타는 쳐야 해!!! 안 그러면 카일이 또 더블 플레이로 너를 지워버릴 거니까!!!”

이닝의 선두 타자로 타석에 들어갔다.

애리조나 덕아웃에서는 이번 승부를 오늘 경기의 승부처로 볼 확률이 높다.

아직 투구 수 60개 정도로 여유는 있지만, 그건 이른 타이밍에 안타를 허용해서일 뿐. 이미 너덜너덜한 상태.

절대로 안타를 허용해서는 안 되는 선수에게 3안타를 헌납한다면, 더 볼 것 없이 내려야 한다.

땀을 닦아낼 여유도 없이 빠르게 투구를 가져가는 투수의 모습이, 나한테는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너 이미 많이 해먹었잖아. 대충 있다 좀 들어가라!’

너네 타자들도 우리 투수한테 많이 해먹었다. 그러니까 아직도 동점이지.

이미 여러 무기를 잃어버린 투수가 던지기 힘든 공을 노림수에서 제외했고, 패스트볼 타이밍으로 휘두른 배트가 몸쪽 높은 코스로 꽉 차게 들어오는 공과 부딪힌 순간―

따아아아악!

방망이를 집어던지고 1루를 향해 뛰면서, 1루심의 판단을 기대했다.

1루에 거의 도달한 시점에서 1루심은 한쪽 팔을 그라운드 안쪽으로 쭉 뻗었다.

페어볼 사인. 우익수는 아직도 타구에 도달하지 못했다.

‘3루까지 간다!’

중계가 어디쯤 왔는지 확인할 여유 따윈 없다.

1루를 지나, 2루를 지나, 금방이라도 송구가 도착할 것처럼 어설픈 연기를 하는 3루수가 밟고 있던 베이스를 향해 슬라이딩했고.

“세이프!”

역시나, 유격수는 3루 대신 포수에게 공을 뿌리고 있었다.

선두 타자 3루타로 무사 3루.

“으아아아아!!! Koo!!! 믿고 있었다구!!!”

“단타에 2루타에 3루타까지!!! 아주 메뉴가 다채로워!!! 여기 맛집이네!!!”

“Hey, Pitcher!!! 카일한테도 뭐 좀 더 내놔봐!!! 오늘 식사비는 내가 낼게!!!”

절호의 역전 찬스에 열광하는 팬들과 덕아웃에 화답을 보내는 동안, 상대는 결국 투수 교체를 선택했다.

투구 수에 여유가 있는 만큼 웬만해선 서운한 척이라도 할 텐데, 얌전히 내려가는 걸 보니 어지간히도 기력이 다 빨렸나 보다.

[시범경기에서 3루타를 기록했습니다.]

[40포인트가 지급됩니다.]

[현재 포인트: 8030]

아무튼 여유가 생겼으니, 오늘 경기 내내 조용했던 박도현을 불러 궁금한 걸 물어봤다.

‘야. 오늘 만약 ‘그거’ 달성하면 뭐 주는 거 없어?’

첫 타석에서 안타. 두 번째 타석에서 2루타. 이번에는 3루타.

타자로서 기록할 수 있는 아주 영광스러운 기록 중 하나까지 홈런 하나만 남겨둔 상태니까.

[더위 먹었냐? 벌써부터 김칫국물 들이마시고 있어.]

그렇게 핀잔을 주면서도, 대답은 잘 해줬다.

[이게 같은 업적을 세워도 시범경기랑 메이저리그에서 보상이 다르거든? 근데 지금은 좀······ 특별하잖아?]

단타―2루타―3루타―홈런, 네 종류의 안타가 순서대로 나오는 사이클링 히트는 ‘내추럴 사이클링 히트’라고 해서, 더 희귀한 기록으로 쳐 준다.

그 희소성을 인정해서, 비록 시범경기라고는 해도 뭔가 더 좋은 걸 줄 수도 있다 이거지.

물론 애리조나에서 너희 좋은 꼴은 못 보겠다, 하고 볼넷을 가장한 고의사구를 내줘버리면 말짱 꽝이지만.

너네 나한테 볼넷 줄 수 있어?

정말로?

‘어이쿠, 집중해야지.’

바뀐 투수가 연습구를 마치고 주심이 경기를 재개했다.

타석에는 오늘 하루종일 타석에서 삽질만 해댄 카일.

희생플라이나 땅볼만 나와도 역전이 가능한 상황이었지만.

“스윙! 스트라이크!”

어김없이 초구 스트라이크로 시작하는 승부.

오늘따라 유독 떨어지는 공에 정신을 못 차리고 배트를 휘두른다.

다시 3루 베이스를 밟고 2구를 지켜보려던 그때.

‘세이프티 스퀴즈 번트.’

덕아웃에서 사인이 나왔다.

어떻게든 홈으로 나를 불러들이기 위한 작전.

오늘은 감이 영 안 좋지만, 번트 작전 수행 능력이 좋은 타자인 건 분명하니까.

그렇긴 한데.

‘저렇게 결연한 표정 지으면 안 되지 않나······?’

작전이 나온 순간, 3루 코치님에게서 시선을 돌리던 도중 나와 눈이 마주쳤고.

그 순간 카일이 아주 잠깐 두 눈을 부릅뜨더니, 다시 투수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만약 들켰다면 견제구를 던지거나 해서 시간을 번 다음 사인을 다시 교환하겠지.

3루에서 아주아주 약간 리드를 벌리며 투수의 심경을 들여다보려고 했는데.

투수는 아무런 동요 없이 세트 포지션에서 투구를 이어갔고.

반응은 다른 쪽에서 튀어나왔다.

투구 동작에 들어간 상태에서, 3루수가 갑자기 뛰어나오며 전진 수비를 펼친 것.

“스탑! 스탑!”

3루 코치와 내가 동시에 작전 중지를 알렸지만.

이미 상체를 기울인 채 번트 모션을 가져가던 카일에게는 닿지 않은 모양이었다.

딱!

3루수의 전진 수비에 압박을 받은 카일의 번트 타구가 1루를 향해 굴러갔고.

“Run, Koo!!! Run!!!”

3루 코치의 지시가 떨어지자마자 홈을 향해 쇄도했다.

그러나 전진 수비는 3루수의 단독 판단이 아니라, 미리 정해놓은 포메이션이었던 듯.

3루수보다 한 템포 늦게 전진해 있던 1루수가 포수에게 공을 던졌다.

어차피 아웃은 확정된 상태.

그렇다면 카일이 최소 2루까지는 올 수 있도록 시간이라도 벌어야 한다.

“거기 3루 지키고 있어! 타자 계속 확인해!”

“간격 좁혀! 주자 라인 벗어나나 잘 보고!”

나를 잡아내려고 혈안이 된 주자들을 요리조리 피하며 최대한 시간을 끄는 런다운 플레이.

여기서 나를 놓치기라도 하면 그대로 역전 점수가 올라가니, 야수들은 카일이 3루까지 오는 걸 막을 수 없다.

“그냥 좀 잡혀라!”

“우리한테 진짜 왜 이래!”

내야수들이 울분을 터트릴 정도로 3루선상에서 시간을 끌다가, 3루 근처까지 도착한 카일을 확인하고 나서야 순순히 몸을 내밀었다.

“아웃!”

1사 주자 3루.

작전 실패로 아웃카운트가 올라갔지만, 여전히 득점권 찬스 상황을 유지한 것에 만족하면서 덕아웃으로 돌아가려던 찰나.

“아웃!”

믿기지 않는 소리에, 다시 뒤를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허탈한 표정으로 3루 베이스 옆에 쓰러져 있는 카일, 환호하며 제자리로 돌아가는 내야수들, 그리고 분노를 억누르며 카일에게 손을 내미는 3루 코치.

[야······ 쟤······ 어떡하냐······.]

3루 주자가 무보살 아웃을 당하는 최악의 본헤드 플레이.

역전 찬스가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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