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경쟁의 시작(8)
[3루 들어가는 카일 캠프, Koo는 3루 근처에서 아웃됩니다! 원아웃 주자 3루!]
[지금은 Koo의 과감한 런다운 플레이를 칭찬해야겠네요. 경험이 적은데도 불구하고 메이저리그 내야수들을 상대로 침착하게 시간을 잘 끌었어요.]
[디백스 내야수들, 파이팅을 외치며 다시 본인 자리로······ What?! 아웃! 3루심이 3루 주자 카일 캠프에게 아웃 판정을 내립니다!]
[리플레이 나옵니다! 3루 도착한 카일 캠프, 자책하는 모습인데요. 아! 3루 베이스에서 발이 떨어진 상태에서 태그가 이뤄졌습니다!]
[3루 코치가 못 본 건가 싶었는데, 지금 보면 2루수가 3루수에게 잽싸게 공을 건네는 순간 포수가 지나가면서 절묘하게 가리고 있어요. 아마 약속된 플레이였을 겁니다.]
[사실 이건 3루 주자 카일 캠프가 전적으로 잘못했다고 봐요. Koo가 아웃되자마자 타임을 외쳤어야죠! 안 그러면 엄연한 인플레이 상황입니다!]
[Koo, 카일 캠프에게 다가갑니다. 덕아웃으로 데려가야겠죠? 플레이를 계속 이어가야······ 아니?! 아니, 지금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죠?! 위로해주려고 다가간 Koo를 밀쳐냈어요! 벤치 클리어링인가 싶어 재빨리 뛰어나오던 로버트 켈리, 상황을 파악하고 그 자리에 굳어버렸습니다!]
[아, 지금 관중들의 반응이 격해지고 있는데요. 그라운드에 오물이 쏟아집니다. 경기 잠시 중단될 듯 보입니다.]
[물론 저게 바람직한 행동은 아닙니다만, 지금 카일의 행동은 선을 넘었어요. 야구는 팀 게임입니다. 서로의 실수를 보완하면서 좋은 플레이를 만들어가야 하죠. 그런데 이건 지금 본인의 실수를 동료에게 화풀이하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 * *
야구라는 스포츠에는 무슨 짓을 해도 죽어라 안 풀리는 날이 꼭 있다.
잘 친 타구가 호수비에 막히거나, 주루 판단 미스로 허무하게 아웃당하거나, 시프트에 걸려 병살을 당하거나.
그걸 알기에, 좋게 위로해줄 생각은 없어도 괜찮다는 말 정도는 해주려고 했는데.
“저리 꺼져!”
이건 아니지.
애새끼도 아니고. 지가 3루 올 시간 벌어주느라 X 빠지게 뛰어다닌 사람한테.
“야, 뭐야? 너네 왜 그래?”
저거 봐. 디백스 3루수도 식겁했잖아.
카일도 아차 싶었는지 이제 와서 내 눈치를 슬슬 보는데, 나한테만 변명한다고 해결될 일은 아닌 것 같다.
“야 이 XXXX!!! 너 지금 Koo를 밀친 거야?!”
“너는 X발 양심이 없냐? 니가 X 같이 플레이해놓고 왜 Koo한테 화풀이야!!!”
“너 때문에 Koo가 흔들려서 다음 타석에 홈런 못 치면 책임질 거야?! 내 생에 마지막일지도 모를 내추럴 힛 포 더 사이클인데!!!”
결국 분노한 관중들이 3루 쪽으로 쓰레기를 던지면서 경기가 중단됐으니까.
쫓겨나듯 덕아웃으로 돌아가는 길, 카일은 주심으로부터 경기 지연 행위에 대한 구두 경고를 받았다.
그러나 아마 그 경고는 크게 의미 없을 거다.
“카일, 방금 상황에 대해 뭔가 내가 더 알아야 할 게 있나?”
내가 다저스에서 겪어온 그 어떤 순간보다도 냉랭해진 분위기 속에서 감독님은 카일을 몰아세웠다.
몇 년 전인가, 로버트 경기에서 누가 실책해서 퍼펙트 깨졌을 때보다도 심각하다.
“······아쉬운 마음에, 제가 3루 들어가고 나서 미처 타임 요청을······.”
“그 얘기가 아니라는 걸 자네도 잘 알 텐데.”
3루에서 아웃당한 본헤드 플레이도 혼나야 마땅하지만, 그것 가지고 분위기가 이 정도로 개판이 되지는 않는다.
자신의 실수를 남한테 책임 전가한 상황. 그것도 팬들 앞에서.
혼나는 수준이 아니라 구단 자체 징계를 먹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심각한 문제다.
“변명할 말이 없다는 것으로 받아들여도 되겠나?”
“······.”
“알겠어. 카일, 자네는 오늘 덕아웃으로 들어올 수 없어. 클레망, 다음 이닝부터 유격수 수비를 맡아줘야겠다.”
“알겠습니다, 감독님.”
“Koo랑 사인 맞춰보도록. 랜디가 1루수로 들어가고.”
마치 자신이 없는 것처럼 경기로 돌아가는 감독님과 동료들을 보며 카일은 고개를 떨궜다.
본인이 저지른 짓이 있으니까, 사실 이 정도면 굉장히 관대한 처사다.
문제는 이 정도로 넘어가지 않을 사람이 덕아웃에 있다는 거고.
“Hey, 우리 잠깐 얘기 좀 해야겠는데.”
덕아웃 바깥으로 나가려던 카일에게 누군가가 어깨동무를 했다.
전날 선발 등판했던 로버트.
출입문이 닫히는 바람에 카일의 반응은 볼 수 없었지만 뻔하지 뭐.
그래도 헤드기어는 안 챙겼으니까 주먹은 안 쓸 거다. 아마도.
* * *
8번 타자 헨리가 삼진으로 물러나면서, 득점 없이 이닝 종료.
감독님이 제리 대신 이틀 휴식을 취한 셋업맨 고든을 마운드에 올리면서, 제리의 오늘 경기 성적은 4이닝 9피안타 2사사구 4K 6실점이 되었다.
“하······.”
이렇게 털리는 게 당연히 처음은 아니지만, 불미스러운 상황까지 겹치다 보니 유독 힘겨워 보인다.
“아웃!”
“아웃!”
“스트라이크 아웃!”
그래도 고든이 삼진과 땅볼, 뜬공을 하나씩 엮어내며 12구 만에 삼자범퇴로 이닝을 끝내며 분위기 반전의 예열을 마쳤고.
6회 초 공격, 지난 이닝 7구밖에 던지지 않은 디백스의 두 번째 투수가 여전히 마운드를 지켰다.
“스트라이크 아웃!”
다음 이닝도 맡기 위해 그대로 타석에 오른 고든이 자동 삼구삼진으로 내려왔지만.
“세이프!”
“베이스 온 볼스!”
자신감이 뿜어져 나와 쉽게 카운트를 잡으려다가 안타를 맞고, 곧바로 겁을 집어먹고 볼을 남발하는.
경험 적은 투수의 전형적인 루징 패턴을 선보인 끝에 교체됐다.
세 번째 투수는 커리어 후반부를 애리조나에서만 보내고 있는 베테랑 불펜.
그러나 성적보다는 투수조의 기강을 잡아주기를 기대하며 데리고 있는 몸값 저렴한 베테랑이 늘상 그렇듯.
클러치 상황에서 여지없이 에이징 커브의 여파를 드러냈다.
따악―!
3번 타자 루카스의 역전 적시타가 터지면서, 스코어 7대 6으로 한 점 앞서 나간 다저스는.
“베이스 온 볼스!”
R.H.가 볼넷을 얻어내면서 기어이 만루를 만들어내고야 말았다.
결국 아웃카운트를 하나도 잡지 못한 채 강판되고, 디백스가 오늘 경기 네 번째 투수를 올렸는데.
‘어우······ 세게 나오시네.’
부진과 부상으로 골골거리는 디백스의 베테랑 불펜 중 유일하게 연봉 값을 제대로 하는 선수.
마무리 투수 케빈 클락을 6회 초 1사 만루 상황에 올리는 초강수를 뒀다.
오늘 나뿐만 아니라 다저스 타선이 제법 뜨거운데, 이번 이닝이야 막는다 쳐도 얼마나 끌고 가려고 이러는 걸까.
“스트라이크 아웃!”
아무리 무모해 보이는 승부수라도 당장의 목표만 이루면 절반 정도는 성공한 거나 마찬가지.
시작부터 투 스트라이크에 몰렸던 클레망이 커트를 해내며 버텼지만, 결국 삼진으로 물러났다.
이제 2사 만루. 타자는 오늘 3타수 3안타를 기록한 나.
“볼 끝이 죄다 더러워. 포심이건 슬라이더건.”
클레망은 딱히 반갑지 않은 감상을 전해주고는 덕아웃으로 돌아갔다.
케빈 클락의 주 구종은 포심과 슬라이더.
다른 변화구의 구사 비율을 합쳐도 20%가 안 되니, 사실상 투 피치 투수라고 봐도 되겠지.
“Koo!!! Koo!!! Koo!!! Koo!!!”
“홈런 칠 수 있지?! 칠 수 있다고 말해!!!”
“부담 갖지 마! 아냐!! 조금은 가져도 돼!!! 긴장 좀 한다고 사람 죽냐?!”
확실하게 도망칠 수 있는 찬스에, 메이저리그의 역사를 통틀어 20번도 나오지 않은 내추럴 사이클링 히트가 걸린 타석.
인지부조화가 오는 듯 오락가락하는 응원을 보내던 팬들도 승부에 들어가자 조용해졌다.
“볼!”
몸쪽 깊숙이 들어오는 패스트볼에 배트를 내려다 겨우 멈췄다.
유리한 카운트로 출발하자 팬들이 기세등등한 환호성을 내질렀지만, 내심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사실은 존을 벗어난다는 확신이 없었으니까. 건드리면 파울 아니면 땅볼이라는 확신만 들었을 뿐.
“스트라이크!”
방금 전과 구분하기 힘든 코스로 들어오는 패스트볼.
이제 몸쪽 패스트볼이 들어오고 빠지는 걸 구분하기 어려워졌다.
투 스트라이크에서 이쪽 공이 또 들어오면 죽이 되던 밥이 되던 휘두르는 수밖에 없겠지.
“파울!”
말이 씨가 됐다.
나도 모르게 몸이 패스트볼 타이밍을 잡고 있던 걸까.
빠르게 날아온 3구는 바깥쪽 슬라이더였고, 자세를 무너트리면서 겨우 파울을 만들었다.
투수의 카운트.
“파울!”
떨어지는 슬라이더를 걷어내고.
“볼!”
초구와 2구보다는 확실히 빠진다는 생각에 지켜봤던 몸쪽 패스트볼로 볼을 얻어내고.
“파울!”
허를 찌르듯 바깥쪽으로 빠지는 패스트볼을 어설프게 건드려서 다시 파울.
‘저 양반 저렇게 던지고 안 지치나?’
공 하나하나에 온 힘을 다하는 듯, 하나같이 위력이며 코스가 까다롭다.
지금 디백스의 불펜 상황이 그리 여유롭지가 못하니, 멀티 이닝 소화를 전제로 한 피칭을 선보일 줄 알았는데.
다음은 어디에 타이밍을 맞춰야 하나, 이번 타석에 홈런 못 치고 다음에 쳐도 내추럴 사이클링 히트로 인정되나, 슬라이더가 오면 그냥 밀어친다는 느낌으로 가야 하나······.
복잡한 생각을 떨쳐내지 못한 채 7구를 맞으려던 그때.
투수가 처음으로 포수의 사인에 고개를 저었다.
그걸 보고서 한 가지 가능성에 생각이 미쳤다.
‘덕아웃과 투수가 원하는 결과가 다를 수 있다.’
팀 입장에서야 시범경기 한 번 지는 것보다, 나에게 사이클링 히트를 허용하는 게 더 후유증이 클 거다.
그렇다면 홈런을 억제하는 바깥쪽 슬라이더 위주의 승부를 지시했을 거고.
반면 지금 마운드에 올라온 투수는 메이저리그에서 오랫동안 마무리 자리를 지켜 온 선수.
볼넷의 가능성을 만드는 투구가 그리 달갑지는 않았을 거다.
게다가 디백스에서 오랫동안 뛴, 덕아웃의 플랜이 마땅찮다고 여기면 자기 판단대로 할 수 있는 위치의 투수니까.
‘패스트볼 타이밍.’
어차피 모 아니면 도. 헛스윙이나 땅볼이 되더라도 상관없다.
틀렸으면 어떻게든 컨택만이라도 한다.
그런 생각으로 맞이한 7구.
쐐애애액!
‘또 이 느낌이다.’
머릿속 스윙 궤적과 공의 궤적이 맞물리는 느낌.
다만 지금까지는 그 타이밍이 어딘지 어긋난 듯해, 궤적을 수정해야 했다면.
지금은 이 이상 맞아떨어질 수 없는, 하나의 점에서 정확한 타이밍에 맞물리는 기분.
후우우웅!
몸쪽 패스트볼은 구위에 어지간히 자신이 있지 않고서야 던질 수 없는 공이다.
조금이라도 어중간하게 들어갔다가는 정타가 나오기 십상이니까.
하지만 몸쪽 승부를 들어가지 못한다는 건 그만큼 피칭 플랜이 반으로 줄어든다는 것과 마찬가지.
타자가 예상치 못한 타이밍이나, 아니면 안쪽과 바깥쪽을 오가며 타자의 혼을 쏙 빼놓은 뒤 던져야 하는 것이 몸쪽 공.
이미 몸쪽 공에 대한 대응을 머릿속에서 충분히 한 타자에게는, 그 위력이 급감한다.
따아아아아아악―!
스윙을 마친 순간, 내 선택이 옳았음을 알 수 있었다.
그랜드슬램으로 스코어 11대 6.
[히든 업적 달성!]
[단타, 2루타, 3루타, 홈런! 누군가는 단순한 4타수 4안타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것이 순서대로 그라운드 위를 수놓는다면 이야기가 다르죠. 당신은 팬들의 염원을 한 단계씩 차곡차곡 모아왔고, 결과는? 멋지게 터트렸습니다!]
[‘재능 뽑기권’이 지급되었습니다.]
“Koo!!! Koo!!! Koo!!! Koo!!!”
4타석 만에 만들어낸 내추럴 사이클링 히트에 다저스 팬들은 거의 광란 상태가 되었다.
내가 베이스를 모두 밟고 홈으로 들어오고 나서도 쩌렁쩌렁하게 들려오는 Koo 콜.
이번엔 거리낌 없이 팬들에게 화답해준 뒤 덕아웃으로 돌아왔지만, 보상으로 받은 재능 뽑기권이 뭔지 물어볼 시간도 없었다.
베테랑들이 나를 개판이 된 덕아웃 분위기를 끌어올리기 위한 희생양으로 삼았으니까.
“Koo!!! Koo!!! Koo!!! Koo!!!”
팬들의 콜에 리듬을 맞춰, 헬멧뿐만 아니라 온몸에 쏟아지는 손바닥 세례.
“아! 뼈 맞았어! 헬멧만 때리라고 헬맷만! 야! 방금 엉덩이 찌른 놈 누구야?!”
감독님은 내가 흥분 상태에서 수비를 나가다 부상이라도 입을까 염려했는지 6회 말에 대수비를 투입했고.
랜디를 뜬공으로 잡아내며 이닝은 마무리했지만, 나에게 사이클링 히트가 걸린 그랜드슬램을 허용했다는 게 케빈 클락에게는 어지간히도 충격이었나 보다.
7회 초 마운드에 오른 케빈 클락은 아웃카운트 하나를 겨우 잡을 때까지 2실점을 했고.
불펜진의 정신적 지주나 마찬가지인 그의 대량 실점에 흔들렸는지, 하나같이 대폭발 방화쇼를 선보이기 시작했다.
[안타! 안타입니다! 유진 리빙스턴! 시범경기에서의 긴 부진을 깨는 2타점 적시타!]
[클레망 파로의 쓰리런 홈런! 아직 8회의 첫 아웃카운트가 잡히지도 않았는데 디백스 마운드가 다시 한번 교체됩니다!]
나오는 투수마다 안타와 사사구를 허용하며 7회에 4점, 8회에 5점을 허용했고.
다저스의 불펜들도 실점하긴 했지만, 최종 스코어 20대 8.
덕아웃과 관중석에서 동시에 축제가 벌어졌다.
그 축제에 참여할 수 없는 건 오직 한 사람뿐이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