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신 들린 천재 타자-28화 (28/200)

28. 새로운 재능

[‘Natural Hit for the Cycle!’ Hyun―Ki Koo의 놀라운 도전, 위대한 결과를 만들다!]

경기가 끝나고, 그날 밤이 채 지나기도 전에 내 이름이 또다시 미 전역을 떠돌아다녔다.

사실 그전까지는 ‘플루크가 좀 오래 가네’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지.

그런데 사이클링 히트잖아. 그것도 그 보기 힘들다는 내추럴이잖아.

이 정도 임팩트를 보여줬으면, 이제는 플루크라고 해도 메이저리그에서의 모습이 기대가 되기 마련이다.

당장 오늘 경기에서의 내 모습을 분석한 전문가들(자칭 포함)의 글이 수없이 올라왔다.

[‘Infielder’ Hyun―Ki Koo 정밀분석!]

[디백스전 4안타 중 3개가 몸쪽 공 공략··· Koo, 좋은 타자의 조건은 이미 갖췄다!]

물론 그런 활약에도 아직 타자로서의 나를 인정하지 않고, 나를 상대한 투수들이 수준 미달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예를 들면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팬들이라거나.

[Koo에게 3피안타 허용한 호세 리카르도, “변명의 여지가 없다. 내가 부족했다.”]

[디백스 팬덤, SNS서 ‘#You_Guys_Just_Thrower’ 운동 전개! 도 넘은 팬문화 이대로 괜찮은가?]

[돈 라슨 디백스 감독, “케빈에게 Koo와 어려운 승부하라 지시한 것 맞아··· Koo는 놀라운 타자”]

솔직히 팬 커뮤니티 반응이 궁금하긴 했는데, 경기 끝나기 전에 일찌감치 분탕들에게 점령당해서 이렇다 할 반응이 없었다.

일반 야구 커뮤니티에서는 지금껏 나한테 당해온 팀의 팬들이 협공을 펼치느라 바빴고.

[(긴급) 사람을 찾습니다. 파드리스와 애슬레틱스를 놀려대던 디백스 팬들이 갑자기 전원 실종되었습니다. 사례금으로 혼자 보기 아까운 좋은 영상 하나 첨부합니다! (링크)]

└ 이런 XXXX 너 어디 사냐 &$#@

└ 한 놈 검거 완료!

└ 오늘 Koo가 홈런 때리는 장면이잖아? 저놈 저거 부들거리는 거 보니 디백스 팬이네. 여기 있을 시간에 애리조나로 가서 너네 쓰로워들 줄빠따나 때리지 그래?

└ 저런 Koo가 2타수 무안타 하게 만든 팀 누구?? Koo한테 삼구삼진 뺏은 투수 누구?? ‘진짜’ 마무리 투수는 누구??

└ 정답! 시카고 컵스!

└ 컵스 너네는 도대체 왜 온갖 곳에 다 끼어들려는 거야? 좀 부르면 오라고! 가서 염소나 키워!

메이저리그 팬들은 디백스를 조롱하는 한편, 뜬금없이 포텐을 터뜨린 내야수를 보유하게 된 다저스를 부러워했는데.

정작 다저스 팬 커뮤니티의 반응은 그리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그거야 물론 팀의 내야진을 통솔하고 투수에게 믿음을 줘야 할 주전 유격수의 돌발 행동 때문이지.

[진짜 아직도 억울해서 살 수가 없다! 카일 그 XX놈의 개뻘짓 때문에 내추럴 힛 포 더 사이클을 제대로 못 즐겼잖아! 내 눈으로 직접 볼 기회는 다신 없을지도 모르는데! (사진)]

└ 너는 그래도 직접 보기라도 했지! X발 나는 나초 통 던졌다가 퇴장당하는 바람에 직접 보지도 못했다고!

└ 아무리 수비 잘하면 뭐 해? 저렇게 팀 케미스트리를 망치는 선수가 다저스 유니폼을 입는 꼴은 도저히 못 봐!

└ 카일을 팔아버린 다음 클레망을 다시 주전 유격수로 세우면 안 될까? 그리고 Koo를 1루에 박아놓는 거지!

└ 아······ 그건 좀······.

└ 너 그거 노인 학대야. 아메리칸리그 가서 지명타자로 말년 편하게 보내도 되는 거 다저스에서 연장 계약까지 하면서 붙잡고 있는 건데, 그랬다간 클레망이 구단 사무실에 총기난사를 해도 무죄 판결을 받을걸?

└ 재작년에 그 XXX놈이 약 빨고 운전하지만 않았어도 이딴 걱정은 할 필요도 없는 건데······ 오늘따라 Park이 너무 그립다.

└ 아······.

└ Park이 풀타임 첫 시즌 개막전에서 리버스 내추럴 사이클 달성하는 거 내 눈으로 직접 봤는데······.

카일을 성토하던 대화의 흐름이 뜬금없이 박도현에게 옮겨 가면서, 내 사이클링 히트는 금방 묻혀 버렸다.

원래 잘한 것보다는 잘못한 것에 관심이 쏠리기 마련이니 충분히 그럴 수 있지.

카일이 워낙 밉상 이미지를 쌓아둔데다, 곧바로 사과하는 대신 기자들을 피해 버스에 올라타며 더 활활 불타는 것도 있다.

심지어 MVP 인터뷰에서까지 내 사이클링 히트에 대한 질문은 세 개에 그쳤을 정도다.

기분이 어떻냐, 타석에서 어떤 전략을 가져갔냐, 마지막 타석에서 의식했냐 등등. 나 대신 구단 직원 아무나 데려다 앉혀도 적당히 대답해 낼 수 있는 질문들.

어김없이 상대가 진짜 물어보고 싶었던 건 나중에 나왔다.

“Koo, 당신은 오늘 정말 놀라운 활약을 선보였지만, 최고의 하루였다고 하기엔 약간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죠.”

이런 질문에 어떻게 대답해야 하나 짧은 시간이나마 고민을 많이 해봤다.

솔직히 여기서 카일을 담가버리는 건 쉬운 일이다. 그냥 눈 딱 감고 즙 한 번만 짜면 된다.

오늘 일은 물론, 과거의 인종차별 발언들까지 줄줄이 소세지마냥 엮여서 부관참시를 당한 끝에 트레이드로 팔려나가겠지.

그런데, 카일을 담가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과연 나만 할까?

팀 케미스트리를 중요시하는 감독님과, 주전 유격수치고는 똥값의 FA 계약을 제안할 정도로 카일을 마뜩찮아 하는 단장님.

아마 카일은 오늘 일로 이 두 사람에게 미운털이 제대로 박혔을 거다.

“우선, 오늘 플레이 중 보여드린 실망스러운 모습에 대해 다저스의 일원으로서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다저스의 일원’이라는 말에 알게 모르게 힘을 주면서, 정중하게 사과했다.

내 반응이 예상 밖이었는지 리포터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렇겠지. 나는 투수 시절 경기를 말아먹은 뒤에도 이렇게 저자세로 나온 적이 없으니까.

“Koo, 사과해야 할 사람은 당신이 아니지 않나요?”

“아뇨. 아직 카일과 이야기를 나눠보지 못해 어떻게 된 일인지 파악하지는 못했지만, 저는 이 문제에 저희 선수단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고 봅니다.”

아마 이 인터뷰를 보고 있는 선수들은 대부분 그게 무슨 개소리냐며 반발하겠지. 솔직히 나도 그럴 거고.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딴 짓을 저지른 건지 알고 싶지도 않지만, 그래도 커버를 쳐 줘야 하는 이유가 있다.

“저는 카일의 행동이 단순한 화풀이였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전의 플레이에서의 아쉬움이 좋지 않은 방향으로 표출됐을 뿐이죠. 우리는 여러 차례의 좋은 찬스를 붙잡지 못했고, 정교하지 못한 플레이도 선보였습니다.”

찬스를 놓친 것도 카일이고, 정교하지 못한 플레이도 카일이 한 거지만.

상대가 그걸 언급하기 전에 빠르게 말을 이었다.

“카일의 아쉬움은 단순한 아웃카운트 하나가 아니라, 그런 만족스럽지 못한 플레이가 쌓이고 쌓여 만들어진 겁니다. 그래서 이 문제의 책임을 카일 개인에게 전가하는 건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해요.”

시간상 인터뷰도 슬슬 끝나갈 때.

추가 질문이 나오지 않도록, 살짝 긴 대답을 단호하게 끝맺었다.

“앞으로는 아쉬운 플레이, 서운한 점에 대해 더 솔직한 대화를 나누고자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지금보다 더 단단한 동료가 될 수 있을 겁니다. 다시 한번 사과의 말씀 드립니다.”

마무리 인사와 함께 인터뷰는 그대로 끝났다.

이 정도면 내가 할 도리는 다 했다고 봐도 되겠지.

라커룸으로 돌아갈 채비를 하던 도중 리포터에게 붙잡혀 이런 소리를 들었을 정도니까.

“세상에, Koo. 혹시 은퇴하고 나면 정치를 하려고 했나요? 솔직히 지금이 경기 끝난 지 30분도 안 됐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구단이 써준 대본을 읽는 줄 알았겠어요!”

원정 라커룸으로 돌아가는 길.

혼자 인터뷰 스페이스 근처를 뽈뽈거리며 잘 놀다 돌아온 박도현이 물었다.

[야, 너 그런 기특한 생각을 하고 있었어? 나는 니가 카일을 되게 띠꺼워하는 줄 알았는데.]

‘뭔 소리야. X나 싫어하는데.’

얘 좀 봐. 큰일 날 소리 하고 있어.

내가 만약 아직도 투수였다면, 동료한테 책임을 떠넘기는 저딴 놈은 절대 내 등 뒤에 두기 싫었을 거다.

‘이렇게 여론을 좀 잠재워 놔야 구단이 카일을 빨리 팔아 치우지.’

사실 대체자가 딱히 눈에 안 들어와서 그렇지, 다저스가 카일을 팔려면 못 팔 것도 아니다.

타선이 강하고 수비가 부족한 팀이라면 충분히 주전감이고, 계약 기간도 짧고, 연봉도 합리적인 유격수.

다만 멘탈 문제로 평가를 왕창 깎아먹은 데다, 이번 사건으로 트레이드 칩으로서의 가치가 더 떨어졌겠지.

이렇게 커버를 쳐주면서 이 사건을 무마시킬수록 구단이 카일을 더 빨리 팔아치울 수 있을 거다.

설령 내 계산대로 일이 안 돌아가더라도, 나한테는 손해 볼 게 전혀 없지.

팀 스피릿을 강조하는 선수를 싫어하는 구단은 없으니까.

‘미친놈······. 인생 X나 계산적이야······.’

박도현이 질색했지만, 사실은 얘가 너무 순진한 거다.

에이전트가 데릭이 아니었다면 클레망처럼 호구 수준의 장기계약을 맺었을지도 모르겠다.

* * *

메이저리그 시범경기는 당연히 한국에서도 중계하지만, 내가 출전한 경기를 중계한 건 이번이 처음이라고 한다.

사실 그동안은 교체 출전이 대부분이었으니까, 다저스 경기를 중계하긴 했는데 내가 출전을 안 했던 거지.

그렇게 처음으로 중계한 경기에서 내추럴 사이클링 히트.

블래스 신드롬에 걸린 이후로 한국 커뮤니티 댓글은 안 읽어서 모르겠지만, 인터넷이 아주 뒤집어졌다고만 데릭에게 전해 들었다.

내가 재활 중일 때 다시 메이저리그 마운드를 밟기는 어려울 거라고 저주에 가까운 분석을 하던 원로니 전문가니 하는 사람들이 뭐라고 할지 참 궁금하다.

그러나 한국에서 가장 처음 온 연락은 그런 인간들보다 훨씬 중요한 분들이 건 전화였다.

[현기야, 경기 봤어. 너무 멋있더라, 정말.]

“감사해요, 어머니.”

다저스에서 선수 생활을 할 때나, LA의 재활 센터에 다닐 때 쭉 살았던 박도현의 집.

그 집에서 내가 계속 살도록 해주신 박도현의 부모님이었다.

[이제 숙소 들어갔니? 오늘 넘어진 데 다치진 않았고?]

“어휴, 끄떡없죠. 지금 가게 영업시간 아니세요?”

[어, 브레이크 타임이야. 좀 이따 다시 준비해야지.]

아버지가 자주 집을 비우던 어린 시절의 나를 친자식처럼 보살펴 주신 분들.

만약 내가 끝내 야구를 그만두지 못하고 아등바등 선수 생활을 이어나갔다면, 그건 이분들 때문이었을 거다.

박도현이 출전하는 경기를 챙겨 보는 게 인생의 낙인 분들이었으니까.

[도아도 현기 많이 보고 싶어 했는데, 지금은 마침 학원 갔네.]

“통화야 나중에 하면 되죠. 저 시즌 끝나고 한국 가면 얼굴도 보고.”

[그래. 작년 겨울은 내내 바빴다며? 올해 시즌 끝나면 엄마 가게 놀러 와. 도현이 있는 데 와서 인사도 하고.]

박도현의 유해는 한국으로 옮겨져 가족 묘지에 안치되었다.

다저 스타디움에서 유망주를 찾던 시절의 박도현이 떠돌던 장소는 사실 추모 공간이었지.

“······네, 그럴게요.”

어머님 아들 지금 제 등 뒤에서 피자 한 판 혼자 다 처먹으면서 손가락 쪽쪽 빨고 있어요, 라고 말하지는 못한 채 전화를 끊었다.

[아, 잘 먹었다. 이게 인생이지.]

“행복해 보이네.”

얘네 부모님도 박도현이 이런 식으로나마 행복하게 지내고 있다면 만족하실 거다.

박도현이 무슨 짓을 했는지는 몰라도 묘하게 맛없어진 피자를 두어 조각 먹고 치운 뒤, 경건한 마음으로 오늘의 메인 이벤트를 준비했다.

“재능 뽑기권 그거 지금 쓸 수 있냐?”

[그럼. 당연하지.]

내추럴 사이클링 히트를 달성하면서 받은 재능 뽑기권.

재능 하나를 뽑는 데 1만 포인트가 필요하다는 걸 생각하면 굉장히 중요한 기회다.

[‘재능 뽑기권’을 사용하셨습니다.]

안내 음성과 함께, 처음 ‘체력은 근력’을 뽑았을 때처럼 수십 장의 카드가 허공에 줄줄이 늘어섰다.

잠깐의 고민 끝에 가운데 부근에 있는 카드 하나를 집었다.

선택한 카드는 빛나며 떠올랐고, 나머지 카드들이 사라졌다.

[B등급 재능 ‘몸쪽 공은 다 내꺼’를 획득하셨습니다.]

D등급 재능 ‘체력은 근력’도 유용하게 써먹고 있는데, 이번에는 B등급 재능이 나왔다.

일단 이름만 봐도 몸쪽 공에 관련된 능력치를 올려주는 재능 같은데, 타자로서는 상당히 쓸모가 많아 보이기도 하고.

상세 설명을 보려던 찰나, 갑자기 허공에 떠 있던 카드가 조각조각 찢어지기 시작했다.

이게 뭔 상황인가 싶어 멍하니 허공을 쳐다보는데, 다시 안내 음성이 흘러나왔다.

[이미 유사한 재능을 보유하고 있음이 확인되었습니다.]

[획득한 재능을 재구성합니다.]

찢어진 카드 조각들이 한데로 뭉치더니, 새로운 카드 하나가 눈앞에 떠올랐다.

[A등급 재능 ‘몸으로 말해요’를 획득하셨습니다.]

B등급 재능이 뜬금없이 A등급 재능으로 바뀌었다.

어안이 벙벙한 상태에서 상세 설명을 확인했다.

[몸으로 말해요(A등급) ― 상시형]

○ 몸쪽 공에 대한 선구안이 비약적으로 상승합니다.

○ 몸쪽 공을 타격했을 때 타구의 질이 보정됩니다.

○ 빈볼과 위협구가 날아오는 타이밍을 직감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뭐야, 이거?!]

박도현이 입을 떡 벌리더니 내 얼굴과 카드를 번갈아 쳐다본다.

‘니가 관리하는 시스템이잖아. 이런 게 있다고 왜 말 안 해줬어?’

[이건 원래 가지고 있던 재능이랑 융합되는 거니까! 투수가 원래부터 이런 재능을 갖고 있었을 거라고 누가 생각이나 해 봤겠어?!]

카드로 뽑은 재능과 비슷한 재능을 원래부터 가지고 있었다면, 대체되는 게 아니라 보완해서 더 좋은 재능으로 만들어준다.

재능 하나를 뽑기가 어려운 만큼 이런 점에서는 후한 모양이었다.

‘아, 그러면 지금까지 그게······.’

몸쪽 공에 스윙을 가져갈 때 위화감이 든다거나, 딱 맞아떨어진다는 느낌.

극도의 집중 상태에서 발생하는 건 줄 알았는데, 그게 재능의 일종일 줄은 몰랐다.

[예상 밖이긴 한데, 어쨌든 좋은 일이야. 혹시 너한테 이것 말고도 다른 재능이 또 있다면 이렇게 융합되는 경우가 또 있을지도······ 너 왜 그래?]

혼자 주절주절 떠들어대던 박도현이 내 표정을 들여다보더니 물었다.

‘내가······ 투수로서 공을 던질 때는 그런 위화감을 한 번도 못 느꼈단 말이야?’

공 하나하나에 집중해서 느낄 틈이 없었던 걸지도 모르지만, 타석에서 몸쪽 공을 마주했을 때처럼 분명한 위화감은 단 한 번도 느낀 적이 없다.

‘그러면 나······ 혹시 투수 쪽 재능은 없었던 거 아냐?’

아니지?

내가 그래도 메이저리그 3선발까지 했던 놈인데.

사실은 타자를 했어야 했다, 뭐 그런 뻔한 얘기 아니지?

눈 피하지 마. 대답하라고 이 자식아. 피자 그만 처먹고.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