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개막 로스터(1)
[마이크 올리버 LA 다저스 단장, “카일의 태도에 무척 실망했다. 그러나 Koo가 그에게 다시 ‘원 팀’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줬다. 그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경기 중 내분 유발’ 카일 캠프, 3일 근신+벌금 2,000달러 자체 징계]
[징계서 복귀한 카일 캠프, “나의 부족한 부분 깨달았다. 동료들에게 진심으로 사죄한다.”··· 반복되는 구설수, 다저스 칼날 빼들까]
카일은 사실상 기자들의 접근을 최소화하기 위한 3일간의 근신을 끝내고 복귀했다.
출근 후 훈련을 앞두고 모든 선수가 소집된 가운데, 카일은 앞에 서서 공개 사과를 해야 했다.
“정신적으로 미숙했고, 저 자신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태도였습니다. 저의 존재가 팀의 결속을 해친다는 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앞으로 달라지는 모습을 보여드리겠습니다.”
다들 마지못해 박수를 보내긴 했지만, 그 사과를 진심으로 받아주는 사람이 있을지는 모르겠다.
정말로 미안했으면 근신 기간 동안 따로 사과 문자라도 보냈겠지.
다른 사람이 받았는지는 모르겠는데, 최소한 나는 못 받았다.
자세한 내막을 모르는 팬 커뮤니티에서야 내가 카일을 이해하고 용서한 줄 알고 있었지만.
[나는 솔직히 Park에 비해서 Koo가 좀 차가운 사람이라고 생각했어. 멍청했지! 자기가 만든 찬스를 죄다 말아먹은 것도 모자라 화풀이 대상까지 됐는데, ‘동료니까 괜찮아’라고 감싸주는 그 배포라니!]
└ 지금 Koo의 성적이 제발 플루크가 아니었으면 좋겠어. 이대로만 활약해줘도 다저스 클럽하우스 리더는 Koo의 차지가 될 거니까!
└ 플루크면 뭐 어때? 대타나 대주자 요원으로만 남겨 놔도 카일보단 훨씬 좋은 영향력을 발휘할걸?
카일에 대한 다저스 팬들의 강경한 태도도 조금은 누그러지긴 했지만.
근신에서 복귀한 뒤로도 한동안 카일은 시범경기에 출전하지 못했다.
자세한 내막은 모르지만. 팬들이 진정할 시간을 벌기 위함이 반, 원래부터 시범경기 출전 횟수가 적은 것이 본인 루틴이었으니 원상 복귀한 것이 반 정도이지 않을까.
[LA 다저스, 스프링 트레이닝 5차 컷오프··· 6명 명단 제외]
여기에 더해, 기존 내야 백업을 밀어낼 만한 경쟁력이 없다고 판명된 초청선수들이 빠져나갔다.
주전 유격수의 부재, 백업 내야수의 탈락.
두 가지 조건이 뜻밖의 결과를 가져왔다.
“Koo, 오늘은 리드오프 유격수로 출장해줘야겠다.”
바로 내 유격수 출전이 늘어났다는 것이다.
* * *
솔직한 심정으로 내 유격수 수비에 대해 평가하자면, 회생 불가까지는 아니더라도 리그 최하위권이라는 건 분명하다.
[‘Shortstop’ Koo, 또다시 실책··· 연이은 기용 고집하는 다저스의 의향은?]
[다저스 오브라이언 감독, “Koo의 유격수 기용은 가능성을 확인하기 위한 절차다. 더 좋아질 거란 확신이 있다.”]
내추럴 사이클링 히트를 달성한 디백스전 이후 선발 4경기, 교체 1경기를 소화했고.
그중 3경기가 유격수, 2루수와 1루수가 각각 한 경기씩.
총 3번의 실책을 적립하면서 시범경기 통산 12경기 5실책.
공식 실책으로만 계산해도 시즌 67실책 페이스라는, 주전 내야수로서는 도저히 써먹을 수 없는 어마어마한 플레이를 보여주고 있지.
송구 시 그립을 의식하는 습관 탓도 있지만, 준비 기간이 너무 짧아서 기본기 자체가 부족한 게 컸다.
그나마 발이라도 빨라서 망정이지, 안 그랬음 마이너 유격수도 처리할 수 있는 타구도 흘려댔을지 모른다.
구단 안팎으로 외야 수비 훈련을 받아보는 게 어떻겠냐는 말이 나오기는 하지만.
박도현과의 계약에 묶여 있는 나로서는 내야수를 고집할 수밖에 없다.
당장 내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문제에 집착하기보다는 잘할 수 있는 걸 최대한 보여주는 게 맞지.
부족한 수비 대신, 타석에서는 내가 이 자리에 설 자격이 있다는 걸 증명했다.
* * *
따아아악―!
[쳤습니다! Koo의 이 타구는 우익수 키를 훌쩍 넘겨 오른쪽 담장을 직격! Koo는 2루에서! 속도를! 줄이지 않습니다! 3루에서 슬라이딩! 세이프! 3루수는 태그조차 시도하지 못합니다! 2루 주자 유진 리빙스턴이 홈인하면서 1타점 적시 3루타!]
[방금 공은 몸쪽에서 훅 떨어지는 체인지업이었어요. 장타를 허용하기 쉬운 구종과 코스라고는 해도 좌투수의, 심지어 저 정도의 낙폭이라면 이야기가 다릅니다. 그러나 Koo는 몸쪽 승부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에 저 떨어지는 공에 힘을 실어 퍼 올릴 수 있었던 거예요!]
직접 타석에 서 보고 나서야 ‘몸으로 말해요’의 효과를 실감할 수 있었다.
몸쪽 공이 날아올 때면 벗어나겠다, 들어오겠다, 떨어지겠다, 뭐 이런 대략적인 코스를 훨씬 수월하게 읽어낼 수 있게 되었을뿐더러.
조금 빠지거나 무브먼트가 심한 공을 때려도 좋은 타구가 나오는 걸 직접 확인하고 나니, 더 자신감 있는 스윙을 가져갈 수 있게 됐다.
1사 3루 상황. 타석에는 주전 2루수 조지 라모스.
조지는 초구 스트라이크를 흘려보낸 뒤 2구를 맞았다.
“볼!”
얼굴 가까이 날아오는 위협구성 볼을 조지가 허리를 젖혀 피했고, 곧바로 관중들의 야유가 쏟아진다.
“이 XXX놈의 새끼들이 장난해?! X발 제구가 안 되면 마운드에 세우질 말아야지!!!”
사실은 제구가 안 되는 게 아니라, 일부러 저렇게 던진 거다.
진짜 실투였으면 포수가 저렇게 여유 있게 잡아내질 못했겠지.
특정 구종과 코스에 강한 임팩트를 남겨서 타자의 눈을 현혹시키는 ‘셋업 피칭’이다.
“파울!”
‘몸으로 말해요’의 또 한 가지 사기적인 점은, 이런 위협구성 셋업 피칭에 넘어가지 않게 된다는 점이다.
몸쪽 공의 잔상이 남은 상태에서 바깥쪽으로 절묘하게 흘러가는 공이 날아오면 자기도 모르게 배트가 나가는 거지.
그러나 위협구성 공이 날아오기도 전부터 찌리릿, 하고 강렬한 직감을 느끼는 나는, 이미 머릿속으로 대비를 하는 만큼 잔상도 적게 남는다.
따아악―!
배트 윗부분에 맞으며 멀리 뻗지는 못한 공.
워닝 트랙보다 한참 앞에서 중견수 글러브에 들어갔지만, 내가 홈으로 들어오기까지는 충분한 거리였다.
내 주력이 어느 정도 알려진 다음부터는 아예 홈 승부도 안 들어온다.
“잘했어, Koo! 조지!”
“나이스 배팅! 나이스 러닝!”
동료들의 환대를 받으며 덕아웃으로 돌아왔다.
희생플라이로 한 점이 올라가면서, 6회 말 스코어는 3대 1.
2사 상황이니 다시 글러브를 챙기려는데, 감독님이 잠시 와 보라며 손짓했다.
“고생했어, Koo. 7회부터는 대수비로 교체될 거야.”
“알겠습니다!”
오늘 내 성적은 3타수 1안타 1볼넷. 상대 선발 투수에게서는 안타를 얻어내지 못한 게 약간 아쉽다.
수평 무브먼트가 좋은 패스트볼을 바깥쪽으로 넣었다 뺐다 하는데, 이런 계열의 공은 아직 눈에 익지 않아서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그래도 꾸준히 주어진 기회를 살리면서, 타격면에서는 기존 주전 내야수들을 상회하는 성적을 냈다.
0.417/0.464/1.041의 정신 나간 슬래시 라인.
장타율은 디백스와의 사이클링 히트 때문에 뻥튀기된 면이 좀 있고, 본격적으로 분석이 들어가면 떨어질 수밖에 없는 성적이지만, 그래도 잠재력을 증명하기엔 차고 넘치지.
[3루타 치고 득점까지 해 놓고는 표정이 왜 그래?]
머릿속이 복잡한 게 얼굴에 드러났나 보다.
황급히 표정을 고치고는 대꾸했다.
‘이렇게 치는데도 마이너에서 시작할 것 같으니까. 속이 쓰리네.’
[아······.]
이렇게 감이 좋을 때 메이저 투수들을 꾸준히 상대하면 타석에서의 접근법을 갈고닦을 수 있을 텐데.
지금으로선 내가 개막 엔트리에 올라갈 확률이 한없이 낮다.
수비? 이 정도 타격 성적이면 1루수로만 세워도 500만 달러의 연봉 값은 차고 넘친다.
다만 주전 1루수 클레망과 백업 1루수 겸 대타 요원 랜디의 장타력이 살벌한 편이라 자리가 없을 뿐이지.
‘마이너 옵션이 남은 게 독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네.’
처음 시즌을 준비할 때만 해도, 마이너 옵션은 나에게 있어 일종의 보호막이었다.
마이너 옵션을 전부 소모한 선수를 개막 로스터에서 제외시켜 마이너리그로 보내려면 지명할당 절차를 밟는 수밖에 없는데, 이건 사실상의 방출 수순.
솔직히 다른 팀을 구할 자신이 없는 건 아닌데, 이러면 기껏 500만 달러의 스플릿 계약을 한 의미가 없어진다.
그러나 마이너 옵션이 있으면, 반대로 구단이 언제든 메이저리그와 마이너리그를 오고 가게 만들 수 있다.
현재 백업 내야수 자리를 두고 경쟁하는 선수들 중 마이너 옵션이 남은 건 나밖에 없다.
즉, 옵션이 없는 선수들을 먼저 쓰다가 시원찮으면 지명할당해버리고 나를 올려서 쓰면 되지.
“Hey, Gene. 요즘 잘 치던데.”
“아, 응. 고마워.”
지금 막 카일이 치근덕대고 있는, 내야와 외야를 오가는 전천후 유틸리티 유진 리빙스턴.
시범경기 타율이 정확히 내 절반 정도지만, 마이너 옵션이 없는 저런 선수에게 먼저 기회가 간다는 거다.
물론 괜찮은 선수지. 포수를 제외한 어느 포지션에 데려다 놔도 최소 구멍은 안 되는 데다, 성격도 무난하고 얌전하니까.
대신 자기주장이 좀 약한 편이라서, 다른 선수들이 슬슬 거리를 두기 시작한 카일과도 쉽게 손절하지 못하고 끌려다니고 있다.
“카일, 이번 이닝부터 유격수로 들어가야겠다.”
“······알겠습니다.”
감독님의 통보에 카일이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며 일어섰다.
근신 기간 이후로도 한동안 경기에 못 나가다가 이번이 첫 출전.
글러브를 챙겨 나갈 채비를 하던 두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잘하고 와.”
“어, 그래.”
“으, 응. 갔다 올게.”
카일은 사건 이후 계속 기가 죽어 있고, 나만 보면 슬슬 피해 다닌다.
재작년에 트레이드되어 온 유진은 애초에 그리 친밀한 사이가 아니었지. 심지어 지금은 직접적인 포지션 경쟁자이다 보니 더 그렇다.
“카일! 그딴 쓰레기 같은 모습 한 번만 더 보여봐! 다저 스타디움 관람 보이콧할 줄 알아!”
“잘 좀 해라! 제발 정신 차리고!”
“Koo한테 미안한 줄 알아야지! SNS에 글 몇 줄만 대충 올리고 말이야!”
카일이 그라운드에 발을 디디자마자 야유가 쏟아졌지만, 유니폼을 불태우는 인증 사진 릴레이가 펼쳐지던 일주일 전에 비하면 그나마 누그러든 상태.
이 정도 반응에도 주눅들어서 경기 말아먹으면 그건 본인 책임이지 뭐.
시범경기도 이제 끝을 향해 달려가는 시기.
지금은 남은 기회를 최대한 살리는 것만 생각하자.
이 불편한 동거도 조만간 어떻게든 정리가 될 테니.
* * *
“그럼 야수조에서 이 인원들은 확정하는 걸로 하겠습니다. 이의 없으시죠?”
LA 다저스 단장 마이크 올리버는 좌중을 둘러보며 물었다.
아무도 반기를 들지 않았고, 명단 속 야수들은 2037시즌 개막 로스터 진입이 확정되었다.
[내야수]
클레망 파로(1B, SS)
조지 라모스(2B)
켄 워싱턴(3B)
카일 캠프(SS)
랜디 콘트레라스(1B, OF, PH)
[외야수]
루카스 에머런(CF, LF)
말릭 케이타(LF, CF)
R.H. 데이(RF)
메이슨 그레이엄(RF, LF)
각 포지션별 주전 선수와, 내·외야 백업 한 명씩이 확정되었다.
이중 유격수 카일 캠프는 시즌 개막 이후 적당한 때를 봐서 트레이드하기로 내부에서 의견을 모았고.
작년에 메이저리그에 데뷔해 쏠쏠한 활약을 보였던 말릭을 주전으로 세우기로 했다.
“이제 남은 자리는 두 개뿐입니다.”
백업포수와 백업 내야수 랜디가 여차하면 외야 수비를 볼 수도 있기에, 여기에 백업 내야수 2명을 추가하면 된다.
가브리엘 루이스(3B)
채드윅 마틴(2B, SS)
유진 리빙스턴(IF, OF)
구현기(IF)
기존 자원과 초청선수를 포함해, 최종적으로 추려낸 인원이 4명.
각자 장단점이 뚜렷해 선택에 난항을 겪고 있었다.
“가브리엘은 파워가 인상적입니다. 수비가 조금 불안해도 대타 요원으로 활용할 가치는 있어요.”
“채드윅은 이중 유격수 수비를 가장 무난하게 볼 수 있는 자원입니다. 다만 타격이 카일보다 떨어지죠.”
“유진은 이번 시즌이 끝나면 FA가 되죠. 타격도 이 이상 발전을 기대하긴 힘들 것 같아요. 대신 멀티 포지션이 가능해서 주전 선수에게 휴식을 줄 수 있습니다.”
“Koo는······.”
구현기의 이름이 나오자 어디선가 한숨 소리가 흘러나왔다.
지금 다저스의 모든 타자를 통틀어 가장 타격감이 좋은 선수.
당장 대타나 대주자 요원으로 기용해도 메이저에서 살아남기는 어렵지 않을 선수.
그러나 네 명의 후보 중 유일하게 마이너 옵션이 남아 있는 선수이기도 하다.
“지금 성적이 플루크라고는 해도 너무 아쉬워요.”
“맞아요. 옵션도 있으니 플루크가 꺼지면 마이너에서 수비를 가다듬고 오라고 해도 되죠. 혹시 트레이드로 자리를 만들어볼 순 없겠습니까?”
“지금 우리한테 오는 트레이드 제안은 Koo를 달라는 것뿐이더군요.”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이제는 구현기가 투수로 재기에 성공했을 때의 기회비용을 논하기에는 상황이 너무 많이 달라졌다.
이만한 실력과 화제성을 갖춘 내야수를 메이저에서 한 경기도 써먹지 못한 채로 팔아버리는 머저리는 이 세상에 없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Koo는 마이너 옵션을 사용하고, 나머지 세 명에 대해 좀 더 얘기를 나눠보죠.”
마이크 올리버가 프레젠테이션 화면에서 구현기의 이름을 지우려던 바로 그 순간.
“저, 단장님.”
단장 비서가 노크하고는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오자, 그 자리의 모든 이들 사이에서 긴장이 감돌았다.
사전 약속 없는 방문은 올리버 단장이 가장 싫어하는 행동 중 하나니까.
심지어 회의 도중 끼어들기까지 했으니, 사소한 용건이라면 뒷감당이 어려우리라.
“회의를 중단할 정도로 중요한 소식이 아니라면 나중으로 미루라고 했을 텐데요.”
“네, 상당히 긴급한 사안이라 이렇게 오게 됐습니다. 죄송합니다.”
비서가 가져온 소식은, 과연 회의를 중단할 정도로 긴급하고 중요한 용건이었다.
지금까지의 회의 내용을 백지로 돌리고 처음부터 다시 논의해야 할 정도로.
“카일이 경기 중 부상을 당해 이송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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