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신 들린 천재 타자-30화 (30/200)

30. 개막 로스터(2)

복귀전에서 카일은 나쁘지 않은 활약을 선보였다.

7회 초 대수비로 투입되어 자기 앞으로 날아온 두 개의 땅볼 타구를 무난하게 처리했다.

무턱대고 야유를 퍼붓던 일부 관중들도 이닝이 끝나자 못 이기는 척 박수를 보냈지.

“그렇지! 그렇게만 해!”

“잘할 수 있는 놈이, 꼭 화를 내야지·······.”

8회 초에는 주자 1, 2루에 시프트가 걸린 상태에서 몸을 날려 까다로운 타구를 잡아냈고.

작년에 이미 호흡을 맞췄던 주전 2루수 조지와 더블 플레이를 합작해냈다.

상대의 흐름을 제대로 끊어놓으며 이닝을 끝내는 좋은 플레이였다.

“나이스 플레이.”

“잘했다. 고생했어.”

덕아웃에서도 예전처럼 열렬히 환대해주지는 않았지만, 몇몇 선수들이 먼저 하이파이브를 권하며 다가가 줬다.

최근 덕아웃에서 계속 눈치만 보던 카일도 모처럼 편안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한 점을 추가해 4대 1로 앞선 8회 말.

2사에 주자 없는 상황에서 카일의 타석이 돌아왔다.

“카일! 타석에서도 뭐 좀 보여줘 봐!”

“수비할 때 보니까 몸 다 풀렸더만! 아주 푹 쉬었나 보네!”

이기고 있는 상황에서 오랜만에 타격을 선보이는 카일에게, 관중들은 야유가 아닌 응원을 보냈고.

따아악―!

“그렇지! 한 점 더 내자!”

“개막하고서도 이만큼만 하면 불태운 유니폼 다시 산다!”

카일은 그 기대에 제대로 부응했다.

이번 시즌 시범경기를 통틀어 처음으로 터진 장타.

2루에 안착한 카일이 덕아웃을 향해 세레머니를 보내자, 이번에는 좀 전보다 많은 선수들이 화답해줬다.

여전히 마음에 안 드는 놈이고, 제대로 반성하고 있는지도 의심이 가지만, 어쨌든 카일은 메이저리그에서 여러 해 살아남은 선수.

궁지에 몰린 현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좋은 플레이를 보여야만 한다는 건 알고 있을 거다.

그래서였을까.

따악―!

후속타가 터지자, 카일은 타구의 방향을 슬쩍 보더니 3루 코치의 신호에 따라 홈플레이트를 향해 뛰었다.

그러나 코치와 카일 둘 다 예상하지 못했던 한 가지 사실은, 상대 팀의 경험 적은 우익수가 무리하게 홈 보살을 시도하려 했다는 점이고.

예상외로 상당히 빠르게 도착한 그 송구가 포수 미트에 틀어박힌 위치는 주루선상이었다.

퍼억!

카일은 달리던 힘 그대로, 송구를 붙잡으려고 몸을 기울이던 포수를 들이받았다.

“Oh My God!!!”

“뭐야?! 어떻게 된 거야?!”

흙먼지 속에서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포수였다.

근처에 굴러다니던 공을 집어 들어 쓰러져 있는 카일을 태그했다.

“아웃!”

주심의 아웃 콜이 울려 퍼지고 나서도 일어나지 못하는 카일을 보고.

클레망과 로버트, R.H. 등 베테랑 선수들과 코칭스태프 전원이 덕아웃 밖으로 뛰쳐나갔다.

선수들과 코치들이 카일의 상태를 확인하는 동안 감독님은 주심에게 삿대질을 하며 항의했다.

“포수가 주자한테 몸을 들이댔잖아!!!”

주심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송구가 그 위치로 왔어요. 규정 위반이 아닙니다.”

송구를 받기 위해 몸을 기울였을 뿐, 고의로 주자를 막을 의도가 아니었다는 판단.

의료진이 달려와 상태를 확인하며 심각한 대화를 나누기 시작하자, 감독님도 항의를 중단하고 카일에게로 향했다.

전광판에는 왼쪽 어깨를 붙잡고 신음하는 카일의 모습이 나왔다.

‘회전근개 쪽이면 완전 나가린데.’

부분 파열만 돼도 최소 두 달이다. 카일이 뛸수록 폼이 올라오는 스타일인 걸 감안하면 전반기를 꼬라박는 거나 마찬가지지.

결국 구급차에 실려가는 카일을 보니 영 마음이 개운치 않았다.

만약 수비 집중 훈련 때처럼 개수작 부리다가 다친 거면 자업자득이니까 통쾌하기라도 할 텐데.

‘나도 마음의 준비를 해야겠네.’

카일의 공백이 확정된 이상, 남은 백업 자리는 수비가 되는 내야수로 채울 가능성이 크니까.

* * *

LA 다저스 스프링캠프 구장 내부 회의실.

사람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가운데, 휴대전화 진동이 울렸다.

마이크 올리버 단장은 잠깐 심호흡을 한 뒤 상대에게 물었다.

“부상은 어느 정도랍니까?”

카일 캠프는 여러 이슈를 고려해 트레이드 칩으로 활용하기로 결정된 선수.

그렇기에 부상의 정도가 더 중요했다.

장기 결장이 불가피하다면 내년까지 데리고 있어야 할 텐데, 자연스레 트레이드 가치도 떨어진다.

“······그래요. 그만하면 다행이네요.”

올리버 단장이 전화를 끊었다.

“어깨뼈 미세골절. 재활까지는 4주 정도 소요될 거랍니다.”

여기저기서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만약 공백이 길어졌다면 당장 즉전감 유격수를 구해야 했을 텐데, 메이저리그 단장들은 이런 사정이 생긴 팀에 절대로 저렴한 대가를 치르게 하지 않으니까.

카일과 비슷하거나 살짝 아쉬운 선수를 대가로 주요 유망주들을 털어가려고 들겠지.

“4주라면 기존 자원으로 대체 가능할 듯합니다.”

올리버 단장은 현시점에서 유격수로 기용 가능한 전력을 정리했다.

클레망 파로, 채드윅 마틴, 유진 리빙스턴.

채드윅과 유진은 타격이 아쉽고, 클레망은 장타력은 있지만 체력 부담 때문에 주전으로 기용할 수 없다.

“지금으로선 이렇게 세 명을 번갈아 가며 기용하는 게 가장 현실적이겠군요.”

올리버 단장이 정리하자, 자리에 참석한 한 사람이 아쉬운 듯 말끝을 늘렸다.

“로스터에 자리만 있었어도 Koo에게 경험을 쌓게 해 줬을 텐데······.”

구현기는 현재로서는 트리플 A로 보내 유격수로서 경험을 쌓게 하는 것이 잠정적으로 결정됐다.

수비 센스와 날렵한 움직임은 이미 인정받은 만큼, 지금 구현기에게 필요한 것은 더 정교한 수비를 위한 많은 경험이니까.

1루로 세워두고 타격을 살려도 괜찮지만, 스프링캠프 기간의 활약만으로 기존 백업 1루수 랜디의 자리를 밀어내기는 어렵다.

“애쉬튼의 언론 플레이는 요새 좀 어떻습니까?”

내추럴 힛 포 더 사이클 달성 이후, 구현기가 소속된 애쉬튼 베이스볼 에이전시에서는 여론전을 펼치려 들었다.

덕분에 ‘이런 대기록을 세우고도 마이너리그로 가야 한다면 얼마나 우스운 일이냐?’라는 여론이 팬 커뮤니티를 떠돌았다.

“아무래도 요즘은 좀 잠잠합니다. 수비면에서 조금 더 경험이 필요하다는 감독 인터뷰가 먹히고 있어요.”

구현기는 미칠 듯한 호수비와 정신이 나갈 듯한 실책을 번갈아 하는 선수.

수비가 된다면 어떻게든 자리를 만들어 써야겠지만, 14경기 6실책은 선을 좀 많이 넘었다.

“그럼 야수조 로스터 자리는 이렇게 확정하는 걸로 하죠. 다음 안건은······.”

그때, 갑작스럽게 올리버 단장의 핸드폰이 울렸다.

화면에 떠오른 이름을 확인한 그는 짜증스럽게 전화를 받았다.

“트레이드? Koo를 팔 생각은 없다고 몇 번이나······.”

그러나 전화 너머 상대의 말을 경청하는 동안 그의 표정에서 짜증이 점차 사라졌고.

잠시 후 흥미롭다는 듯 상대에게 되물었다.

“우리 구체적으로 카드를 좀 맞춰 볼까?”

스프링 트레이닝을 앞두고, 판매를 염두에 둔 몇몇 선수들에 대한 떡밥을 뿌려뒀는데.

저 멀리 플로리다에서 드디어 입질이 왔다.

* * *

한 달 동안 이어진 시범경기의 끝이 다가왔다.

이제 사람들의 관심은 시범경기 내용보다는 개막 로스터 발표에 집중됐다.

이미 확정된 선수들보다는 어떤 선수들이 막차를 탈지에 대한 논의가 주를 이뤘지.

써먹기에도 버리기에도 애매한 자원들은 이 무렵 트레이드되는 경우도 간혹 있다.

만약 나한테 마이너 옵션이 없었다면 트레이드 물망에 올랐을지도 모르겠네.

[너 왜 그래? 표정이 무슨 해탈한 사람마냥······.]

‘어? 내가 왜?’

메이저든 어떠하리, 마이너든 어떠하리.

야구를 계속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일 아니겠는가.

만약 내가 메이저리그 복귀에 성공해서 FA 자격을 취득하는 날이 오더라도, 다저스가 나에게 마이너 옵션을 사용한 것을 마음에 담아 두지는 않을 거다.

그럼. 그렇고말고. 시범경기 타율 4할에 7홈런 쳤어도 자리 없으면 내려갈 수도 있는 거지.

[어, 다시 사악해졌다.]

‘싸물라고 진짜.’

오락가락하는 마음을 붙들며 시간을 확인했다.

훈련 시작 전 감독님과의 개인 면담.

마음의 준비는 진작 끝냈고, 마지막으로 유니폼 옷매무새를 정돈한 다음 면담실로 향했다.

“어.”

“아······.”

면담실 쪽으로 가는 복도의 모퉁이에서 누군가와 부딪힐 뻔했다.

백업 자리를 두고 경쟁하던 유진 리빙스턴.

혹시라도 나 대신 개막 로스터 탈락을 통보받은 건가 아주아주 잠깐 기대해봤지만, 이내 접어버렸다. 표정이 밝아 보였으니까.

“힘내, Koo. 고마웠어.”

“······그래. 너도.”

이렇게 대놓고 스포일러를 한다고?

카일이랑 어울리더니 인성까지 옮아버린 게 분명하다.

‘무념무상. 무념무상.’

주문을 외우며 마음속의 동요를 잠재운 다음, 면담실 문을 노크했다.

“들어와.”

선수에게 무언가 전달해야 하는 상황에서 감독님은 곧바로 본론부터 꺼내지 않는다. 좋은 소식이든, 나쁜 소식이든.

신변잡기 같은 소소한 이야기를 하면서 긴장을 풀게 한 다음, 선수가 받아들일 준비가 됐다는 판단이 들면 그제야 얘기를 꺼낸다.

그래서 감독님이 태블릿을 꺼내며 하신 말도 그런 맥락인 줄 알았다.

“오늘 다저스 포럼은 들어가 봤나?”

“아뇨. 경기 전에는 안 확인하는 편입니다.”

“좋은 자세야.”

그렇게 말하며 감독님은 다저스 포럼의 최상단에 올라온 기사를 화면에 띄우더니, 나한테 태블릿을 넘겼다.

제목을 보자마자 헙, 하고 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LA 다저스―토론토 블루제이스 트레이드 합의!]

메이저리그 개막을 앞두고 다저스와 블루제이스 간의 트레이드가 극적으로 체결되었다.

다저스의 유틸리티 내야수 유진 리빙스턴과 유망주 좌투수 조셉 펠트리(AA)가 블루제이스로, 블루제이스에서는 불펜투수 앤서니 아우젤로와 내야 유망주 피트 넬슨(AA), 테루마사 아키(A+)가 다저스로 이적한다.

한편 내셔널리그 서부 소속 다저스와 아메리칸리그 동부 소속 블루제이스는 이번 시즌 인터리그에서 맞대결을 펼칠 예정이며······.

시범경기 내내 아무런 언질이 없다가 갑자기 발표된 트레이드.

원래 슈퍼스타의 이적이 아닌 이상 이런 식으로 흘러가는 게 트레이드라지만, 그래도 기분이 조금 이상하다.

방금 전 복도에서 마주친 동료가 떠난다는 소식을 듣게 된 건 또 처음이라서.

“서로 더 많은 기회를 얻기 위한 트레이드라고 보면 될 거야.”

내야진에 구멍이 숭숭 뚫린 블루제이스와, 지난 오프 시즌 베테랑 불펜이 대거 빠져나간 다저스.

트레이드 결과는 시즌이 끝나야 알 수 있는 거라지만, 보직만 놓고 보면 나름 서로 가려운 곳을 긁어준 트레이드일지도 모른다.

[야, 걔가 갔네. 스프링캠프에서 로버트 뒷담 깠던 걔.]

어딘가 들어본 것 같은 이름이다 했더니, 라이브 피칭에서 초구 백투백투백 홈런 맞았던 그 유망주였다.

그러고 보니 툴은 상당히 괜찮았지. 좌완에 구속도 나름 빨랐고. 멘탈이나 워크에식만 고친다면 타 구단에서 탐낼 만도 하겠더라.

‘보통 그런 게 죽어도 안 고쳐져서 그렇지.’

이제 남의 팀 선수가 된 유망주 생각은 더 해서 뭐 할까.

중요한 건 굳이 이 타이밍에 이 기사를 나한테 보여준 감독님의 의중이었다.

얼굴에 티를 내지 않으려 애쓰면서 태블릿을 감독님께 공손히 돌려드렸다.

“유진은 이번 시즌이 끝나면 FA가 되지. 아마 단장님은 유진보다는 다른 선수가 팀에 남는 게 더 도움이 되겠다고 판단한 모양이야.”

감독님은 더는 감정을 숨기려 애쓰지 않아도 된다는 듯, 내 어깨에 손을 얹으며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축하해. 지난 시즌까지 투수로 뛰던 선수가 내야수로 개막 로스터에 오르다니. 자네는 메이저리그 역사에 남을 일을 해낸 거야.”

개막 로스터.

스프링캠프가 시작될 때까지만 해도 기대조차 할 수 없던 단어.

메이저 캠프에 최대한 오랫동안 남는 게 목표였고, 불안 요소였던 수비가 끝내 발목을 잡았을 땐 여기까지인가 싶었다.

그래도 나는 해냈다.

메이저리그 26인 로스터에 내 이름을 남겼다.

온갖 감정이 휘몰아치면서 제대로 된 말이 나오지 않던 그 순간.

[히든 업적 달성!]

[메이저리그는 운과 실력이 모두 있어야만 도달할 수 있는 곳입니다. 실력을 갖췄더라도 자리가 나지 않는다면 멀리서 지켜봐야만 하죠. 그러나 당신은 계약한 지 1년도 안 되어 그곳에 발을 들였군요! 아름다운 지옥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1,000포인트가 지급됩니다.]

뜬금없이 나타난 히든 업적 달성 안내.

시스템을 관리하는 박도현이 또 놀라서 펄쩍 뛰었다.

[뭐야?! 나 이건 진짜 처음 보는데?!]

그럴 만도 하지.

설명을 잘 읽어보면, 계약 후 한 시즌 이내에 메이저리그에 도달해야 달성할 수 있다는 것 같으니.

미리미리 마이너리그에서 인정받고 있던 선수가 아니라면 물리적으로 아예 불가능한 업적이었다.

‘메이저에서 투수로 뛰더라도 시스템에 반영이 안 된다는 게 진짜였네.’

아름다운 지옥.

이것보다 더 알맞은 표현이 있을까.

겉으로는 화려해 보여도, 서로 인생이 걸린 싸움을 매일 반복하는 지옥도에 가까운 곳이지.

이제는 그곳에서 살아남는 것뿐 아니라, 그곳을 지배해야만 한다.

명예의 전당에 도달하지 못한다면, 지금의 이 기쁨도 죄다 안개처럼 흩어져버릴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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