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개막전(1)
[Koo, Welcome Back Major League Baseball!]
‘내야수’ 구현기의 개막 로스터 등재.
곧 다가올 2037시즌, 메이저리그 팬들을 찾아온 가장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Koo? 나 야구 잘 모르는데. 요새 우리 동네 야구팀 놈들 죄다 이 사람 얘기밖에 안 하더라고. 대체 뭐가 그리 대단하단 건데?]
└ 얘가 작년까지 투수였거든? 공 던지는 사람. 근데 이번 시즌부터 타자, 그러니까 방망이로 공 치는 사람으로 전향하고서 바로 메이저리그에서 뛰게 됐거든.
└ 그러니까 원래 메이저리그에서 뛰는 사람이 역할만 바꿨다는 거 아냐? 그게 왜?
└ 이게 투수랑 타자가 서로 필요한 능력이 달라. 사용하는 신체 부위도 다 다르고. 그걸 짧은 시간 동안 적응을 끝내고 프로 선수급으로 단련해 왔다고 보면 돼.
└ 그러니까······ 축구로 따지면 작년까지 스트라이커였던 사람이 골키퍼로 전향했는데 1군에서 시즌 시작한다는 거나 마찬가지네? 완전 미친놈 아냐?
메이저리그에, 야구 자체에 흥미가 없던 사람들의 시선도 끌어당기는 사상 초유의 사태.
SNS의 실시간 트렌드에 구현기의 이름이 오르내렸고, 구현기의 투수 시절 투구 모습과 타자 전향 이후 시범경기에서의 활약상이 담긴 영상이 일파만파로 퍼져가는 가운데.
당연히 이 사실은 구현기의 출신지 한국에서도 널리 화제가 되었다.
[(속보) LA 다저스 구현기, 메이저리그 개막 로스터 포함]
└ ???
└ 얘 타자 전향한다고 나대지 않았냐? 투수로 복귀함?
└ 기사에 그런 말 없는데?
└ 기사 ㅈㄴ 성의없게 썼네 ㅡㅡ 이거 mlb 공식 사이트 칼럼 번역기 돌린건데 함 읽어봐 (링크)
└ 뭐야 그럼 진짜로 얘가 내야수로 메이저리그 올라간 거야? 와 다저스 박도현 사고나고 나서 진짜 나락 갔구나;;
└ ㄹㅇ 국민퇴물 구현기한테 빠따 쥐여줄 정도면 그냥 해체해야지 ㅇㅇ
└ 요새 구현기 악플 고소 안 한다고 아주 신났네 ㅋㅋㅋ 응 이거 다 캡처해서 에이전시한테 보냄 ㅅㄱ
└ 근데 농담빼고 진짜 어케된거임? 나 전에 무슨 원로인지 뭔지 하는 사람이 ‘구현기 증상은 태도 문제’ 뭐 이런 소리 하는 건 봤거든?
└ 아 ㅋㅋㅋㅋ ‘투혼’이 없어서 스트라이크를 못 던진다고 했는데 홈런은 어떻게 치냐고~
└ 그분 아직도 살아계심??
시범경기 해외 중계를 일일이 확인하는 일부 메이저리그 팬들은 ‘혹시나’ 하는 생각을 품기도 했지만.
KBO 팬들이나 야구에 큰 관심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그야말로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블래스 신드롬 진단 이후, 구현기와 감정이 좋지 않았던 일부 언론과 원로들이 만들어낸 ‘퇴물’ 이미지.
구현기는 자신이 타자로서도 메이저리그에 올라갈 만한 재능이 있다고 스스로 증명하면서 그들의 입장을 난처하게 만들었다.
난처한 입장에 처한 건 한국의 일부 언론뿐만이 아니었다.
아무런 악의 없이 지극히 상식적인 태도로 구현기의 타자 전향 이후의 가능성을 논했던 메이저리그 전문가들 역시 진땀을 뺐다.
“안녕하세요, 굿데이 베이스볼 시간이 돌아왔습니다. 오늘은 지금 메이저리그 팬들에게 가장 핫한 남자 Koo에 대한 분석을 들어보고자 ‘자칭’ 전문가분들을 모셨습니다!”
구현기의 도전이 실패로 끝날 거라고 단언했던 이들은 얼굴을 들 길이 없었고.
그나마 성공 가능성을 논했던 이들도 메이저리그 재진입을 위해서는 최소 몇 년간의 담금질이 필요할 거라고 주장했기에.
구현기에 대한 예측에 성공한 전문가가 단 한 명도 나오지 않아, 죄다 ‘사짜’라고 놀림받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Koo의 타격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바깥쪽 승부를 강요하는 타자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래도 할 일은 해야 하는 것이 전문가의 숙명이었다.
‘자칭’ 딱지를 애써 무시하면서 해설위원은 구현기의 스윙 장면이 담긴 3D 영상을 분석했다.
“표본이 적긴 하지만, 몸쪽 패스트볼을 아주 잘 공략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하체에서 출발한 힘을 상체의 회전력에 실어 보낼 줄 알기에 배트 스피드도 빠르고, 이렇게 컴팩트한 스윙으로도 장타를 만들어내죠.”
“그런데 흥미로운 게, 몸쪽으로 바짝 붙어 날아오는 공을 골라낸 다음에도 바깥쪽 빠져나가는 유인구에 잘 속아 넘어가지를 않는단 말이죠. 그러면서도 조금만 밋밋하다 싶으면 밀어치는 타격으로 안타를 만들어버리고요. 이건 어떻게 봐야 할까요?”
“일단 몸쪽 선구안이 특히 좋을 뿐, 바깥쪽 공을 보는 능력도 평균 이상이란 건 분명합니다. 게다가 본인이 투수 출신이다 보니 타자의 눈을 교란하는 레퍼토리에 대응하기가 수월한 게 아닐까 싶네요.”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그럼 우리 수비 ‘전문가’님께서는 내야수 Koo가 메이저리그 적응에 성공할 거라고 보십니까?”
구현기에 대한 예측을 하지 않았던, 그래서 ‘자칭’ 딱지를 피한 해설위원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지금의 타격 컨디션이 망가지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Koo는 아주 좋은 내야수가 될 겁니다. 하지만 카일 캠프가 복귀하고 나서는 마이너로 내려갈 거라고 봐요.”
“저런, 선배들이 곤경에 처한 걸 보고도 배우지 못한 건가요? 그렇게 확신해도 괜찮겠어요?”
“괜찮습니다. 우리는 이미 Koo가 지닌 야수로서의 센스를 확인했어요. 하지만 주전 내야수가 되려면 더 많은 경험이 필요합니다. 마이너에서 충분한 시행착오를 겪고 나면 Koo는 지금보다 훨씬 좋은 선수가 되겠죠.”
내셔널리그 투수로 뛰면서 그나마 접해볼 기회가 있었던 타격과는 달리, 내야 수비는 구현기에게 완전히 미지의 영역.
해설위원은 마이너에서 시간을 들여 갈고닦다 보면 충분히 극복할 수 있는 문제라고 강조했다.
전문가와 팬들, 새로 유입된 시청자들까지. 수많은 이들의 주목 속에서 막이 열리는 2037시즌 메이저리그.
LA 다저스의 개막전 상대는 같은 지구 전통의 라이벌 팀,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였다.
* * *
샌프란시스코 원정은 거리상으로는 가깝지만, 싫어하는 선수가 꽤 있다.
라이벌리가 워낙 세다 보니 야유도 살벌하고, 결과에 대한 부담도 크지.
거리가 가까워서 다저스 팬들도 많이 오는데, 지기라도 하면 그 많은 팬들이 죄다 대법관으로 바뀌어 엄벌을 탄원하니까.
내가 메이저리그 데뷔 후 다저스 팬에게 처음으로 쌍욕 메시지를 받은 것도 자이언츠전에서 탈탈 털리고 조기 강판당했던 날이었지.
[그래도 투수로 가는 거랑 지금이랑 기분이 좀 다르지 않냐?]
‘글쎄.’
지금이 더 쫄리는 건 당연하지만, 선발 로테이션을 차지할 때도 원정길이 딱히 편하진 않았다.
내가 투수치곤 굉장히 무심한 편인데도 그랬으니, 다른 투수들은 더했을지도 모르겠다.
지금 내 옆자리에서 조용히 전력 분석 자료를 노려보는 제리만 봐도 그렇고.
“Hey, Koo. 제리.”
계약 마지막 해인 이번 시즌까지도 1선발로 시즌을 시작하게 된 로버트.
아무리 예민한 선수라도 나중에 얘기하자며 밀어낼 수 없는 베테랑의 등장에 둘 다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제리, Koo랑 할 말이 있는데 니 자리 좀 잠깐 쓰자.”
“아, 예. 쓰십쇼.”
“가서 루키 애들한테 말도 좀 걸어주고, 긴장하는 애들 있으면 좀 풀어주고 그래.”
“알겠습니다!”
로버트는 차기 에이스로 제리를 생각하고 있는지 한동안 계속 데리고 다니면서 이것저것 알려주고 있다.
[나 루키 땐 자기 경기에서 실책하면 죽여버리겠다고 했으면서······.]
‘너한테도 그랬냐?’
내가 대체선발 겸 불펜으로 뛸 때도 승리요건 날려버리면 죽여버리겠다고 했었지.
옛 추억을 새록새록 떠올리는 사이, 로버트는 제리가 앉아 있던 자리에 걸터앉았다.
“원정 같이 가는 게 거의 1년 반만인가? 네가 이렇게 돌아올 줄은 꿈에도 몰랐네.”
그렇게 포문을 열길래 격려라도 해주러 왔나 싶었지만.
신인한테도 격려 대신 협박이나 하는 로버트가 그런 훈훈한 짓을 하러 왔을 리가 없었다.
“감독님이 너를 메이저에 남겨두신 이유를 나도 대충 듣긴 했거든.”
유진의 트레이드 소식과 내가 개막 로스터에 합류했다는 걸 전달받은 그 면담에서, 감독님은 나의 활용 방안에 대해서도 알려주셨다.
우선 기본적으로 대타 및 대주자 요원. 선발 출장 시에는 1루수.
그리고 클레망과 채드윅에 이은 3옵션 유격수로, 점수 차이가 벌어진 경기 후반에 체력 안배 차원에서 기용할 것.
“Koo, 네 유격수 수비가 아직 빅리그 수준이 아니라는 감독님 의견엔 나도 동의해. 내가 널 아끼는 건 너도 알겠지만, 지금 상태에서 너를 믿고 마운드에 설 수는 없어.”
냉정한 말이었지만 조용히 수긍했다.
로버트는 내가 재활할 때 가장 자주 찾아와준 선수 중 하나다.
지금 이건 친한 선배가 아닌 다저스의 선발 투수로서 하는 말이었다.
“카일만큼 수비하는 건 바라지도 않아. 그래도 최소한 채드윅 정도로는 수비를 할 수 있어야 해.”
채드윅은 이번 오프 시즌에 마이너리그 계약으로 영입한 초청선수.
수비 원툴로 평가받는 카일보다도 타격이 부족하며, 주전 유격수의 이탈이 아니었다면 개막 로스터에 오르기 힘들었을 거다.
지금 당장은 그런 선수보다도 믿음을 주지 못하는 게 내 현실이다.
“새겨듣겠습니다.”
“그래. 쉬어라. 불편한 얘기인데 이해해줘서 고맙고.”
로버트가 떠난 이후, 멍하니 허공을 쳐다보는 내게 박도현이 물었다.
[억울해?]
‘그럴 리가.’
분하면 분했지. 팩트가 아닌 게 하나도 없는데 억울할 리가.
어차피 지금 모습은 내 한계가 아니다.
제발 내 등 뒤에서 수비해달라고, 은퇴도 미루겠다고 매달릴 만한 선수가 되면 그만이지.
“나 왔다. 요즘 애들 진짜 긴장 하나도 안 하네.”
“그치. 너랑은 다르다니까. 너처럼 루키 때 원정에서 개털리고 돌아올 때 담요 덮고 자는 척하면서 울고 그러지 않아.”
“······그거 언제까지 우려먹을 거야? 나 은퇴할 때까지?”
하지만 열은 받으니까 일단 제리를 놀려먹기로 했다.
[와 인성 봐 진짜······. 사람 속상한 거 가지고 놀리면 진짜 평생 가는데.]
‘개소리야. 얘 울었던 거 알려준 사람이 너잖아.’
어디서 선을 그어.
원래 사람은 끼리끼리 어울리는 거라고 했다.
* * *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홈구장 오라클 파크.
원정팀 훈련 시설에서 가볍게 땀을 빼고 나서 라커룸으로 향했다.
[오늘의 할 일(1/3)]
[10포인트가 지급됩니다.]
[현재 포인트: 9340]
스프링캠프 기간의 포인트 2배 이벤트가 끝나고, 매일 훈련으로 수급 가능한 포인트가 다시 30포인트로 줄었다.
몸풀기 외의 본격적인 수비 훈련은 거의 소화하기가 힘들 테니, 매일 20포인트라고 보는 게 낫겠지.
[그만큼 경기를 뛰며 받는 포인트는 늘어나니까, 오히려 수급 속도는 더 빨라질걸?]
메이저리그에서 안타와 호수비를 기록하면 얻을 수 있는 포인트는, 스프링캠프와 마이너리그에서 지급되는 포인트의 2배.
홈런 하나를 치면 100포인트.
생전의 박도현만큼 안타와 홈런을 때려대면 한 시즌에 재능 2개를 뽑을 수도 있겠지.
그런 뻘생각을 하면서 원정 덕아웃으로 향했다.
“안녕하세요, 로버트.”
등판 날이면 늘 그렇듯 조용하고 예민해진 로버트가 한 손만 들어 인사를 받아줬다.
자기 역할을 마치고 마운드에서 내려오고 나면 멀쩡해지니, 신경 쓰지 말고 내 할 일이나 하면 된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간 끝에, 단체 훈련 시간을 앞두고 감독님이 선수들을 호출했다.
개막전을 찾아와준 팬들에게 감사하는 마음과 집중력 있는 플레이를 잊지 말자는 취지의 연설을 마친 뒤, 오늘 경기의 라인업을 발표했다.
1. 루카스 에머런 CF
2. 조지 라모스 2B
3. 켄 워싱턴 3B
4. R.H. 데이 RF
5. 말릭 케이타 LF
6. 랜디 콘트레라스 1B
7. 클레망 파로 SS
8. 헨리 데이비슨 C
9. 로버트 켈리 P
클레망 대신 채드윅이 유격수로 출장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최소 한 달 정도는 고정 라인업으로 봐도 되겠지.
단체 훈련을 위해 그라운드로 나가는 동안에도 박도현은 계속 쫑알거린다.
[따로 말 없어도 경기 후반쯤 되면 미리 스윙 연습 좀 하고 그래. 감독님 그런 거 은근히 좋아하셔.]
얘 오늘따라 왜 이렇게 말이 많지.
야구 선수이기 이전에 야구팬이기도 하니까, 개막전에 설레기라도 하는 건가.
“Let’s Go! Dodgers!”
“그리웠어! 이 경기가 너무 그리웠다구!”
일찌감치 자리잡고 앉은 원정팬들도 선수들을 향해 환호와 응원을 보낸다.
자기 차례를 마친 선수들은 손을 흔들어주거나, 가까이 앉은 어린 팬들에게 사인을 해주거나 하면서 화답한다.
팬과 선수가 하나가 되는 훈훈한 광경.
그러나 이 모습은 오래가지 않았다.
“야!!! 너네 X발 장난해?!”
“어떻게 사람 X끼가 한 명도 없어!!!”
경기 시작 후 대략 1시간 반.
다저스 팬들은 눈이 뒤집힌 채 선수단을 향해 증오의 말을 쏟아내고 있었다.
1회는 양 팀 모두가 삼자범퇴로 가볍게 마쳤지만.
4회 말인 지금까지 다저스 타자 중 1루를 밟은 사람은 없었고.
로버트는 1루와 3루에 주자를 남겨둔 채 투수 코치를 맞이했다.
불펜 문이 열리고, 얼마 전 트레이드로 영입한 앤서니 아우젤로가 마운드에 올라갔다.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은 로버트가 덕아웃에 들어와 앉자, 모두 쥐 죽은 듯 입을 다물었다.
오늘 로버트의 피칭은 그가 다저스의 에이스를 맡은 뒤, 개막전에서 받아든 성적표 중 최악이었다.
3과 1/3이닝 3K 2사사구 6실점.
따아악―!
7실점.
‘오늘 생각보다 빨리 출전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
그렇게 생각하면서 박도현을 쳐다보는데, 경기 시작 직전까지 나불대던 놈은 어디 가고 눈동자에 초점이 없다.
[지금이라도 옷 벗고 난입할래? 그럼 다른 팀으로 트레이드시켜줄 것 같은데······.]
정신 차려 이 친구야. 차라리 쌍욕을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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