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신 들린 천재 타자-32화 (32/200)

32. 개막전(2)

4회가 끝난 시점에서 7대 0.

점수 차가 벌어지면서 일찌감치 주전 선수들을 교체하지 않을까 예상했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개막전, 그것도 라이벌 관계에 놓인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와의 경기.

팬들이 경기를 포기한다는 인상을 받을까 부담스러웠나 보다.

그러나 경기가 진행될수록 기회가 한 번은 오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경기 시작 전 박도현이 조언했던 대로 5회 초 공격이 끝난 이후부터 덕아웃 바깥에서 몸을 풀었고.

“······Koo, 다음 이닝에 나갈 수 있으니 준비하도록.”

감독님의 예고대로, 8회 초 선두 타자 R.H.가 아웃되며 1사 주자 없는 상황에 대타로 투입됐다.

게임 종료까지 남은 아웃카운트는 5개.

오라클 파크의 1루를 밟은 것은 오직 자이언츠 선수들뿐이었다.

까딱하다가는 사상 초유의 개막전 퍼펙트게임의 희생양이 될 처지.

뭐라도 시도해봐야 할 타이밍에 감독님이 조커 카드로 선택한 건 나였다.

[업적 ‘메이저리그 첫 출전’을 달성했습니다.]

[200포인트가 지급됩니다.]

[현재 포인트: 9550]

‘데뷔전(?) 타이밍 한번 기가 막히네.’

타석이야 다저스에서의 3년간 여러 번 섰지만, 시스템은 이번이 데뷔전이라 인식한다 이거지.

원정팬들도 이미 지칠 대로 지쳐서 많이들 떠났고, 프레스석만 신났다.

이번 타석 결과가 어떻든 대문짝만하게 박제되는 건 확정이겠네.

“Koo! 오랜만이다! 늘 먹던 걸로 줘! 삼구삼진 말이야!”

“설마 번트 대려고 나온 건 아니겠지?! 대가리에 95마일짜리 패스트볼을 던질 수 있는 건 너뿐만이 아니야!”

상대 덕아웃과 홈팬들의 야유가 선명하게 들려온다.

누가 들으면 내가 일부러 헤드샷을 날려대는 성격파탄자인 줄 알겠네.

‘신경 꺼, 신경 꺼.’

마운드에는 자이언츠의 에이스 투수.

7과 3분의 1이닝 동안 퍼펙트를 기록하며 투구 수는 92개.

덕아웃 밖에서 내내 지켜본 타이밍을 떠올려보며 타석에 들어섰고.

“스트라이크!”

“스트라이크!”

눈 한 번 깜빡한 것 같은데, 투 스트라이크에 몰려 있었다.

초구는 바깥쪽 아래로 절묘하게 꺾이는 체인지업에 헛스윙.

2구 몸쪽 포심은 살짝 깊었던 것 같은데, 퍼펙트 피칭에 홈 어드벤티지까지 받았는지 스트라이크 판정.

“들어온 거 맞아요?”

“맞아.”

그래도 주심한테 슬쩍 어필은 해봤는데 끄떡도 않는다. 단호박인 줄.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속으로는 두려움을 없애는 마법의 말을 외웠다.

‘어차피 욕은 감독님이 먹는다.’

그렇잖아.

아무리 내가 경력자라고는 해도 타자로서는 데뷔전인데, 상대 에이스가 퍼펙트 중일 때 내보냈으면 후폭풍은 감당해야지.

“볼!”

“파울!”

“파울!”

효과가 있었던 걸까, 연달아 커트에 성공했다.

특히 5구는 우측 관중석 상단에 꽂히는 큼지막한 타구.

투수 입장에서, 이런 파울 타구를 때려낸 타자가 하면 빡치는 행동은―

“오케이.”

타이밍을 잡았다는 듯 아주 살짝 웃으며 고개 끄덕이기.

박도현의 전 재산을 걸고 장담컨대, 이걸 보고 감정의 동요가 일어나지 않는 투수는 없다.

“파울!”

“파울!”

‘어우, X 될 뻔.’

7구는 파울팁 타구를 포수가 놓치면서 겨우 살았다.

1―2의 카운트에서 8구이자 오늘 경기 100구째를 던질 차례.

슬슬 타이밍이 맞아나가는 건 아닐까 초조하겠지.

유인구로 던지는 공을 죄다 커트하고 있으니까.

머리로는 아예 확 빼는 공으로 타자의 반응을 지켜보는 게 낫다는 걸 알면서도, 빨리 승부를 봐야 한다는 조급함에 사로잡히고 만다.

쐐애애액!

투수가 선택한 공은 몸쪽 아래를 찌르는 포심 패스트볼.

한동안 바깥쪽 일변도를 고집했으니, 허를 찌르는 괜찮은 볼 배합이다.

물론 이 공이 좀 더 안쪽으로 몰리지 않았다면.

그리고 나한테 몸쪽 공의 대응력을 높여주는 ‘몸으로 말해요’라는 재능이 없었다면 말이지.

따아아아악―!

[업적 ‘메이저리그 첫 안타’를 달성했습니다.]

[200포인트가 지급됩니다.]

[업적 ‘메이저리그 첫 홈런’을 달성했습니다.]

[200포인트가 지급됩니다.]

[현재 포인트: 9950]

야유와 조롱을 보내던 오라클 파크의 홈팬들을 침묵시키는 커다란 한 방.

개막전 퍼펙트게임이라는, 샌프란시스코가 오늘 경기 내내 꾸었을 달콤한 꿈을 산산조각 냈다.

[나이스 나이스!!! 아!!! 쫌만 더 제대로 맞았으면 스플래시 히트인데!!!]

오늘 경기 내내 침울했던 박도현이 쩌렁쩌렁하게 소리를 질러댔다.

시끄러워 미친놈아.

그리고 맥코비 만에 타구 빠트려도 자이언츠 선수 아니면 인정 안 해줘.

* * *

[Koo, 오늘 자이언츠의 에이스 댄 앨리슨에게 가장 많은 공을 던지게 하고 있습니다. 카운트는 여전히 1―2. 와인드업, 8구째······ Oh, My God!!!]

[몸쪽 공에 호쾌한 스윙! 그리고 이 타구는! 담장을! 담장을! See! You! LAter! 다저스에게 드리운 개막전 퍼펙트게임의 악몽을 깨운 것은 바로 이 선수! Hyun! Ki! Koo!!!]

[아, 지금 막 덕아웃으로 돌아가는 Koo인데요. 하하하! 동료들이 마중을 나오기는커녕 완전히 무시하고 있습니다.]

[시범경기에서 홈런 일곱 개를 때려내며 절정의 타격감을 과시했지만, 메이저리그에서는 통산 첫 홈런이거든요. 첫 홈런을 친 타자를 무시하는 세레머니, 사일런트 트리트먼트입니다!]

[물론 Koo는 내셔널리그 투수로서 이미 수많은 타석을 소화했으니 데뷔 타석 홈런은 아닙니다만, 그래도 어려운 상황에서 기념비적인 홈런을······ 아니, Koo가 지금 뭐 하는 거죠?!]

[오늘 4회를 채우지 못하고 강판된 다저스의 선발투수, 로버트 켈리의 옆자리에 앉았습니다! 그리고 게토레이를 뺏어 마시고 있습니다! 선수 일동 경악! 코칭스태프도 경악! 로버트 켈리 본인도 놀란 것 같습니다!]

[아, 오늘 내내 굳어 있던 로버트가 드디어 웃음을 보이는군요! 동료들도 낌새를 눈치채고 달려듭니다! 그러나 뿌리치고 도망치는 Koo! 어디로 가나요?! 하하하! 새 음료수를 꺼내서 로버트에게 가져다 바치고 있습니다!]

[정말 좋은 선수입니다. 큰 차이로 지고 있다고 해서 침울해하고 있으면 안 되거든요. 다시 화기애애해진 다저스 덕아웃의 분위기가 플레이에서도 나타났으면 좋겠습니다!]

[동의합니다. 오늘 처음 마운드를 방문한 자이언츠의 투수 코치가 막 내려가고 있으니, 저희는 다시 경기로 돌아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 * *

8회 말 수비를 삼자범퇴로 끝낸 뒤 찾아온 9회 초.

다저스는 1사 상황에서 연속 안타로 한 점을 더 뽑아내면서 댄 앨리슨을 강판시켰다.

추가 점수를 뽑아내지는 못하면서, 개막전은 9대 2의 스코어로 패배했다.

그러나 아쉬운 결과에 관심을 갖는 사람은 적었다.

[타자로 돌아온 Koo, 자이언츠의 개막전 퍼펙트를 빼앗다!]

타자로서의 메이저리그 데뷔 타석에서 통산 첫 홈런을 얻어낸 나에게 어그로가 다 끌렸으니까.

덕분에 정해진 시간을 훌쩍 넘겨 가면서 인터뷰에 임했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호텔로 향하면서도 자꾸만 히죽히죽 웃음이 나온다.

[현재 포인트: 9950]

재능을 뽑을 수 있는 1만 포인트까지 앞으로 50포인트.

최소한 이번 주 안에는 세 번째 재능을 뽑을 수 있게 됐다.

[이번엔 수비 쪽 재능 뽑으면 딱인데!]

박도현 말대로 지금 내게 가장 시급한 건 수비력 보강.

그중에서도 그립을 의식하는 버릇을 고치는 데 도움이 되는 재능이 가장 필요하다.

‘수비할 때 쿠세를 없애주는 뭐 그런 재능도 있어?’

[음, 그 정도로 사소하고 구체적인 재능은 없는 걸로 기억하는데······.]

사소하다니.

이거 못 고치면 나 다시 마이너 가야 하는데.

[나는 오히려 자꾸 변화구 그립이 잡힌다는 니가 더 신기하거든? 그냥 딱 잡고. 실밥 확인하고. 자연스럽게 돌리면 되는 거 아냐.]

‘음······.’

이 버릇이 하도 없어지지를 않으니까 자꾸 이래저래 고민하게 되는데.

그립이 완벽하게 잡혀야 제구가 정확하게 된다는, 오랜 세월에 걸쳐 쌓인 일종의 강박 때문에 그런 게 아닌가 싶다.

투수는 자기가 의도한 그립이 손에 충분히 감길 때까지 충분한 시간이 주어지니까, 다급하게 공을 쥐어야 하는 상황에 대한 인풋이 아예 안 된 거고.

[너 그럼 지금까지 투수 앞 땅볼 처리할 땐 그립 어떻게 했어?]

‘그때는 그립 신경 안 쓰고 토스하듯 던졌지. 세게 던지질 않으니까 공에 움직임이 일어날 일이 없잖아.’

잡히는 대로 던졌다고 보는 게 맞지.

심지어 손가락은 아예 안 쓰고 손바닥 근육만 사용해서 던질 때도 있었으니까.

이런저런 그립을 쥐어보며 박도현이랑 이야기를 나눠보고 있는데, 누군가가 내 등을 툭 쳤다.

“Koo. 여기서 뭐 해?”

오늘 힘겨운 하루를 보내다 9회에 시즌 첫 안타를 신고한 클레망이었다.

“저 이제 인터뷰 끝내고 들어왔어요. 클레망은요?”

“나는 뭐······ 로버트랑 잠깐 얘기 좀 하다가. 가서 쉬려고.”

로버트와 클레망은 각각 투수조 최고참과 야수조 최고참.

경기가 끝나면 종종 둘이 만나 피드백도 주고받고, 선수들의 동향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눈다고 한다.

오늘처럼 로버트가 경기 말아먹은 날에는 푸념이나 듣다가 오는 거겠지만.

“그나저나 아까 무슨 그립 잡는 것 같던데, 혹시 무슨 문제 있어?”

꽤 전부터 보고 있었나 보다.

허공에다 손장난하는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기 전에, 송구할 때의 안 좋은 버릇에 대해 털어놓았다.

“흠······ 나도 잘 모르겠는데.”

사실 클레망도 고등학교 때까지는 투수로 뛰던 선수니까, 이런 고민을 해본 적이 있을 줄 알았는데.

곰곰이 생각하던 클레망은 갑자기 떠올랐다는 듯 물었다.

“Koo, 너는 유격수 수비가 몇 단계로 나눠진다고 생각해?”

단계라.

처음 수비 훈련을 받을 때는 거의 10단계에 달했던 것 같다.

타구 확인하고, 타구를 향해 달려가고, 글러브 뻗고, 뭐 이런 자잘한 동작들을 전부 하나하나 의식하지 않으면 뭘 할 수가 없었지.

“지금은······ 4단계요.”

타구를 확인하고, 글러브에 담아서, 오른손에 꺼내 쥐고, 던진다.

스텝을 하면서 공에 힘을 싣는 게 정석이라고는 해도, 나는 그렇게 하면 오히려 동작이 꼬이는 기분이더라고.

클레망은 고개를 끄덕이며 내 설명을 듣더니.

“그래. 잘하고 있어. 잘하고 있는데, 만약 나라면 조금 더 단순하게 생각할 것 같아.”

그러면서 직접 수비 동작을 보여주며 예를 들었다.

“나는 이렇게. 타구를 글러브에 담고, 몸을 일으키면서 오른손을 글러브에 넣고 던질 위치를 파악하는 게 1단계.”

그러더니 가상의 1루를 향해 공을 던지는 모션을 취했다.

“공을 빼면서 스텝을 한 번 밟고, 정해둔 위치로 던지는 게 2단계.”

“스텝은 꼭 한 번씩 밟아야 하나요?”

“정확히 말하자면 한 번 이상은 안 밟는 거지. 여러 번 밟는다고 해서 힘이 더 실리는 것도 아니고, 주자를 잡기만 힘들어지니까.”

의식하지 않고 이어갈 수 있는 행동의 단계를 줄여, 일종의 루틴으로 만드는 것.

결국은 이 모든 게 자연스럽게 이어질 정도로 반복 연습을 해야 한다는 걸까.

당장 도움이 되는 조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명예의 전당 입성이 유력한 유격수에게 1대 1로 코칭을 받는 기회는 흔치 않다.

“고마워요, 클레망.”

“아냐. 이 정도 가지고 뭘.”

그렇게 헤어져서 각자 방으로 돌아가려던 찰나.

문득 떠올렸다는 듯 클레망이 덧붙였다.

“그런데, 네가 고민하는 그거 말이야. 그냥 그립을 먼저 쥐고 나서 공을 잡으면 안 되는 거야?”

“······네?”

“아니, 글러브에서 그립을 완성해야 한다는 강박증이 있는 것 같다며. 그럼 아예 그립을 잡은 상태에서 끼워 넣는다는 느낌으로 해보면 어떨까 싶어서.”

그 말을 남기고 클레망은 자기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박도현이 그 모습을 보며 쯔쯧, 하고 혀를 찼다.

[그게 그렇게 간단하게 해결될 문제였으면 이 고생을 안 하지. 게다가 땅볼 타구를 손으로 덮으면서 몸쪽으로 끌어당겨야 하는데, 손가락을 접은 상태에서 그렇게 하려면 손이 장난 아니게 커야······.]

그렇게 주절대던 박도현은, 입을 다물고 있는 나를 흘낏 쳐다봤다.

[너 왜 그래?]

나는 대답하는 대신 손을 멍하니 내려다봤다.

박도현보다 최소 손가락 한 마디 이상은 큰 내 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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