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다저스의 주전 유격수(1)
박도현의 재능을 뽑는 데 필요한 1만 포인트가 모였다.
당장이라도 뽑고 싶은 마음은 가득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다.
무사에 1루 주자로 나가 있는데 다른 데 정신 팔릴 시간이 어딨어.
“세이프!”
게다가 내 발이 빠르단 걸 자이언츠도 알기에 연달아 견제구를 던진다.
그렇다고 해서 1루에 딱 붙어 있을 수도 없으니.
투수의 움직임을 주시하면서 계속 잡힐 듯 말 듯 아슬아슬한 거리에서 깔짝거렸다.
“세이프!”
벌써 네 번째 견제구.
더 이상의 견제는 없겠다고 짐작했다.
내게 당장은 단독 도루 의사가 없다는 걸 눈치채기도 했겠지만.
라이벌 팀과의 개막 시리즈가 루징으로 끝나기 일보 직전인 홈팬들의 반응이 심상치 않으니까.
“야!!! 타자한테 집중 안 해?!”
“저 새끼 물방망이잖아!!! 주자가 뛰든 말든 삼진으로 처 잡으면 되잖아!!”
심정이야 이해하지만, 저런 말이 투수한테 들리기나 할까.
어쨌든 투수는 오늘 4타수 무안타로 침묵하던 포수 헨리에게 드디어 초구를 던졌고.
“Koo!!! 뛰어!!! 뛰어!!!”
결과는 포수 미트를 맞고 튀어나가는 폭투.
헨리와 1루 코치의 신호를 받자마자 입에 단내가 나도록 뛰어서 2루에 입성했다.
따악―!
이어서 헨리의 오늘 경기 첫 안타이자, 시즌 첫 안타가 터지면서 홈을 밟았고.
덕아웃에서 맞아주는 선수들과 하이파이브를 한 번씩 주고받은 뒤,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며 슬쩍 물러났다.
‘지금 뽑을래. 빨리빨리. 공격 끝날라.’
화장실 개인 칸에 들어가 박도현을 닦달했다.
다음이 투수 타석이라 대타가 나갈 텐데, 병살이라도 나오면 바로 나갈 준비를 해야 한다.
[1만 포인트를 사용해 재능 카드를 뽑으시겠습니까?]
시스템 메시지의 음성에 머릿속으로 수긍하자, 지난번처럼 수많은 카드들이 떠올랐다.
그 카드가 전부 펼쳐지기도 전에 하나를 터치했고.
선택한 카드가 빛을 내며 떠올랐다.
[D등급 재능 ‘손은 눈보다 빠르다’를 획득하셨습니다.]
이번이 세 번째 재능인데 그중 2개가 D등급.
재능 이름은 또 저게 뭐냐. 무슨 트릭 플레이 같은 거 숙달시켜주는 거면 완전 쪽박인데.
그렇게 생각하며 상세 설명을 확인했고.
[손은 눈보다 빠르다(D등급)―상시형]
○ 내야 수비 시 핸들링의 정확도가 보정됩니다.
○ 내야 수비 시 핸들링 과정에서의 부상 확률이 대폭 감소합니다.
소리 없는 환호를 질렀다.
D등급이면 뭐 어떤가. 핸들링에만 적용되는 재능이면 또 어떤가.
지금 당장의 쓸모만 생각하면 A등급 재능 부럽지 않다.
‘역시 박도현!!! 믿고 있었다구!!!’
화장실 변기에 앉아 허공에 뎀프시롤을 날리는 나를 보며 박도현이 허탈한 듯 중얼거렸다.
[인생 X나 운빨이야······.]
그때,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 싶어 문틈으로 슬쩍 보니 수비 보조 코치였다.
“Koo, 안에 있지? 지금 투아웃이라 빨리 나와줘야겠다.”
“예! 바로 가겠습니다!”
들어온 지 3분도 안 됐는데 벌써 나갈 때가 됐다.
지금 나를 부르러 왔다는 건 다음 이닝에서도 유격수로 세우겠다는 뜻.
‘재능이 쓸만한지 어떤지는 써먹어 봐야 아는 거지.’
내야수 전향 이후 빠른 타구는 항상 부담스러웠지만.
내 앞으로 날아오는 타구가 처음으로 기다려지는 순간이었다.
* * *
스코어 7대 3.
4점 앞서 있는 다저스의 9회 말 수비.
전날 등판한 마무리 투수 새뮤얼 대신, 첫날 두 번째 투수로 올라왔던 앤서니 아우젤로가 마운드에 올랐다.
“내야수들! 잘 좀 부탁할게!”
팀에 갑작스레 합류했으면서도 붙임성 있게 다가오는 앤서니의 외침에 내야수들이 화답했다.
나도 언제 날아올지 모를 타구에 온 신경을 기울이며 기다렸지만.
따아아악―!
타구를 담장 밖으로 넘겨버리면 야수들이 뭘 할 수가 없지.
대타로 나온 타자가 초구 체인지업을 예상했는지 그대로 풀스윙을 가져갔다.
“나이스 홈런! 다시 역전 가즈아!!”
“캐나다산 피칭머신!!! 잘 쓰겠습니다!!!”
홈 관중석과 상대 덕아웃에서 비아냥 섞인 환호가 쏟아졌다.
첫 승부의 결과는 좋지 않았지만, 그래도 한때 마무리 경험까지 있는 베테랑.
야수진을 돌아보며 멋쩍은 듯 가슴을 쓸어내리더니 지체 없이 다음 타자와의 승부에 들어갔고.
“파울!”
“파울!”
순식간에 유리한 카운트를 점했다.
다만 타자가 슬쩍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며 직감했다.
‘타이밍이 얼추 맞긴 했어.’
구위 자체가 뛰어난 투수는 아니니, 특정 구종을 여러 차례 보여주면 그만큼 눈에 익기는 쉽지.
이럴 땐 삼진보다는 인플레이 타구가 나올 확률이 높다.
그렇게 생각하며 날아오는 3구에 스윙을 가져가는 타자에게 집중했고.
따악―!
커다란 바운드를 일으키며 날아오는 3―유간 코스의 땅볼.
떨어지는 걸 기다렸다가 잡으면 늦는다.
달리던 상태 그대로 왼손을 쭉 뻗어 백핸드 캐치에 성공했고.
‘이런 거구나?’
‘손은 눈보다 빠르다’의 효과가 어떤 건지 바로 알 수 있었다.
글러브에 타구를 담아낸 순간, 공의 힘이 곧바로 죽어버렸다.
포심 그립 형태로 손가락을 구부린 오른손을 글러브에 담아, 자연스럽게 공을 쥐었고.
“흡!”
쐐애액!
스텝을 밟을 여유까지 생겼으니, 한결 빠르고 정확해진 송구가 클레망에게 도착했다.
“아웃!”
내 플레이를 지켜보던 투수 앤서니가 글러브를 치켜들어 나를 가리키며 외쳤다.
“Grazie!!!”
고맙다는 뜻의 이탈리아어.
저렇게 투수의 리액션이 좋으면 내야수로선 기운이 난다.
[그렇게 잘 알면서 왜 내가 유격수 볼 땐 안 그랬어?]
‘너니까.’
인플레이 상황 아니라고 이때다 싶어 끼어드는 박도현의 말은 깔끔하게 씹어주고.
글러브를 마주 흔들어 인사를 받아준 뒤 다시 내 수비 위치로 돌아갔다.
“힛 바이 피치!”
그러나 앤서니는 1―1의 카운트에서 몸에 맞는 공을 허용했다.
본인은 펄쩍 뛰었고, 감독님도 바로 비디오 판독을 요청했지만.
“와아아아아아아!!!”
느린 화면이 전광판에 재생되자, 홈팬들의 환호성이 쏟아졌다.
유니폼 옷깃에 아주 살짝 스치고 지나가는 게 명확하게 보였으니까.
투수로선 억울할 수 있어도 어쨌든 피하는 모션은 있었으니 판정은 번복되지 않았다.
‘바꾸려나?’
전광판이 불펜 풍경을 비췄고, 마무리 투수 새뮤얼 대신 루키 투수가 몸을 푸는 게 보였다.
혹시 몰라 다음 투수를 준비시키곤 있지만, 그래도 필승조를 가동하진 않겠다는 감독님의 의중.
앤서니는 고개를 끄덕였고, 담담히 다음 타자를 맞이했다.
1사 1루 상황에서 타석에 들어오는 건 자이언츠의 주전 포수.
‘땅볼이 또 나올 수도 있다.’
구위가 부족한 투수와 장타력이 부족한 타자의 조화.
땅볼이 나오기 가장 좋은 상황이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따악!
초구 볼을 잘 흘려보낸 타자가 벼락같이 배트를 휘둘렀고.
투수 키를 넘기는 땅볼 타구가 2루 베이스 근처로 날아왔다.
까다롭긴 해도, 더블 플레이를 의식해 위치를 약간 조정했기에 처리가 불가능하진 않은 타구.
‘이 정도는!’
원래부터 나는 송구 시의 잘못된 버릇 때문에 타구 처리가 지연됐을 뿐.
타구 포착 능력 자체는 준수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니까 실책을 쌓아가면서도 시범경기에서 꾸준히 출전 기회를 받았던 거고.
여기에 ‘손은 눈보다 빠르다’의 영향으로 안정적인 핸들링까지 손에 넣었으니.
‘잡아낼 수 있어야지!’
글러브에 공이 들어오는 감촉을 확인한 뒤.
이미 2루 베이스에 들어가 있던 2루수 조지를 향해, 글러브 토스로 공을 건넸다.
“아웃!”
조지가 클레망을 향해 침착하게 공을 던지면서.
“아웃!”
더블 플레이로 경기 종료.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와의 개막 시리즈에서 위닝을 챙겨 갔다.
바닥에 엎어진 채 쏟아져 나오는 동료들을 쳐다보던 내게 가장 먼저 손을 내민 건 투수 앤서니였다.
“나이스 플레이, Koo! 나한테 2년 만의 세이브를 챙겨준 내야수가 Koo라고 우리 와이프한테 말하면 헛소리하지 말라고 그럴걸!”
앤서니의 손을 붙잡고 일어서니 바지에 묻은 흙까지 아주 극진하게 털어준다.
“이따 같이 맥주나 한 잔 하자고! 내가 쏘는 거야!”
“우리 바로 샌디에이고로 이동해야 하잖아요, 앤서니. 차라리 포커 칠 때 카드 하나 까줘요.”
“저런, 너한텐 정말 감사하고 있지만 그건 들어줄 수 없어. 승부의 세계는 언제나 냉정해야 하니까!”
“그럼 제리는 꼭 끌어들이세요. 슬슬 긁으면 바로 넘어와요. 아마 메이저리그 투수 전체를 통틀어 가장 털어먹기 쉬울걸요?”
투수에게 안정감을 주는 건 좋은 수비를 꾸준히 보여주는 게 직빵이지만, 방법이 그것만 있는 건 아니다.
평소부터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서로 의지하는 것. 어쩌면 이게 더 오래가는 방법일 수도 있다.
그렇게 내 방식대로 주전 내야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그림을 그려 나가기 시작했다.
* * *
“혹시 자네가 어제 아침에 보고한 Koo의 새로운 핸들링이 저거였나?”
LA 다저스 필릭스 오브라이언 감독의 질문에 보조 수비 코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분명 감독님께 보고 후 다시 상의해보자고 했는데, 갑자기 실전에서 사용할 줄은 몰랐습니다.”
“보고도 없이 그러는 건 주의를 줘야겠지. 그래도 결과가 좋아서 다행이야.”
부상이 걸린 예민한 문제이기에 말은 꺼내야겠지만, 오브라이언 감독의 입가에는 흐뭇한 미소가 감돌았다.
“클레망이 조언했다고 했나?”
“예. 평소부터 후배 선수들의 고민을 자기 문제처럼 생각해주니까요.”
“좋은 선수야. 하지만 남의 조언을 저렇게 자기 것으로 만들 줄 아는 것도 대단한 일이지.”
냉정하게 말해, 구현기는 당장 주전 유격수를 맡기기엔 부족한 선수.
그러나 투수로서 빛나던 과거의 모습을 내려놓고, 새로운 자신을 받아들이며 빠르게 발전하는 선수이기도 하다.
워크에식을 수비 다음으로 중요시하는 오브라이언 감독의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점수 차가 크게 난 상황이 아니더라도, 경기 후반에 유격수로 뛸 기회를 몇 번 주는 게 좋겠군.”
그렇게 자신도 모르는 사이, 구현기에게 조금씩 기회가 찾아오고 있었다.
* * *
메이저리그 감독이 화려한 인식에 비해 고생스러운 직업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특히 요즘처럼 시즌 초반에는 어지간히 뚝심이 있지 않고서는 못 해먹겠지 싶다.
[Koo, 연일 맹타+호수비에도 선발 출장은 요원··· 오브라이언 감독 눈 밖에 났나]
이런 헛소리를 진지하게 기사로 써서 올리는 인간들이 있으니까.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와의 1차전이 끝난 직후 올라온 기사다.
작년부터 4선발을 맡아온 로드리고가 5이닝 3실점으로 역할을 마친 뒤, 역전에 재역전을 거듭하며 아쉽게 패배한 경기.
여러 대타 자원들이 기회를 받는 와중에, 나한테는 찬스가 오지 않았다.
[저런다고 기회를 더 주고 그러진 않을 텐데.]
‘그러게나 말이다.’
언론에 비치는 모습은 유한 편이지만, 뚝심으로 따지면 우리 감독님도 어디 가서 안 진다.
이미 몇 년을 함께 지냈기에, 시즌 초반 감독님이 어떻게 팀을 운영하는지 대충 예상은 된다.
[Koo, 9회 초 대타로 출전해 침묵··· 플루크 꺼지나?]
2차전에서 9회 초 선두 타자로 대타 출전해 뜬공으로 물러나자, 이번에는 또 이런 기사가 나왔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누가 썼나 확인해보니 역시나 친 샌프란시스코 기자.
에이스 퍼펙트 날아간 게 그리도 억울하셨나 봐.
‘아무리 그래도 스윕패는 좀 곤란한데.’
실책이나 범타가 몇 번 더 이어져도 당분간 기회가 계속 돌아올 것을 알기에, 딱히 초조하지는 않다.
대신 두 게임 모두 아슬아슬하게 패배한 건 좀 신경이 쓰인다.
시범경기 때 기껏 셋업맨한테 안 좋은 기억을 심어줬는데, 이대로 스윕이라도 당하면 말짱 도루묵이겠지.
[그 투수 있잖아. 너 때문에 견제구 입스 걸린 투수. 이틀 쉬었으니까 내일은 나오지 않을까?]
‘그럴 수야 있겠지. 나랑 마주치느냐가 중요한데······ 뭐 빈볼 던지거나 그러진 않겠지?’
그렇게 박도현과 대화를 나누며 숙소로 돌아가려던 도중.
“Koo, 잠시만 이리로.”
이제는 딱히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진, 감독님과의 개인 면담에 불려갔다.
오히려 ‘혹시?’ 하는 생각에 표정 관리가 힘들었지.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내일 자네를 1루수로 선발 출장시키려고 해.”
백업 유격수 채드윅과 백업 1루수 랜디, 둘 다 컨디션 난조를 보이면서 나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내야수로서의 메이저리그 첫 선발 출장의 기회가.
“알겠습니다. 준비 잘해오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담담한 척 면담실 밖으로 나섰지만.
‘예쓰! 예쓰! 예쓰!’
복도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자마자, 또다시 허공에 뎀프시롤을 날렸다.
[근데······ 내일 선발 로버트 아니야?]
잠자코 있던 박도현이 초만 치지 않았더라면 아주 행복하게 하루를 마무리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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