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다저스의 주전 유격수(2)
야수가 실책하는 걸 좋아하는 투수는 없다.
잘 던지다가도 사소한 실책 하나에 급격히 흔들리는 투수도 적지 않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로버트는 야수 실책에 무너지는 투수는 아니다.
본인이 무너질 것 같으면 대신 실책한 야수를 무너트려서 문제지. 정신적으로.
‘너 로버트 경기에서 실책해본 적 있냐?’
[있지 그럼. 한 이닝에 두 번도 해봤어.]
‘그때 뭐라 그러디?’
[안 듣는 걸 추천하고 싶은데.]
그걸 굳이굳이 캐물어서 들었는데, 듣지 말 걸 그랬다.
물론 애초에 실책을 안 하면 될 문제라지만, 실책을 하고 싶어서 하는 선수가 어디 있겠는가.
메이저리그 선수들의 모든 인플레이 타구 속도의 평균값이 시속 90마일은 우습게 뛰어넘는다.
집중 빡 하고 달려들어도 마음이 급해지는 순간 공을 떨구는 건 예사다.
[그래도 실책이 정신력 문제라는 게 꼭 틀린 말은 아니야.]
수비로 유명한 일부 야수들이나, 인플레이 타구에 직접 관여할 일이 거의 없는 투수들이 종종 하는 말.
경기 중 집중을 유지하는 것도 실력의 일종이란 걸 생각하면 대충 수긍은 간다.
그러니 오늘 내야수로서의 첫 선발 경기는, 평소보다 온 신경을 다해 수비에 임하기로 마음먹었는데.
‘근데 이거 맞아······?’
오늘 선발 유격수로 출전한 것은 채드윅 마틴.
수비형 유격수 카일 캠프의 하위 호환 수준의 선수.
현재 클레망과 2대 1 정도로 선발 기회를 받고 있으며, 로테이션상 이번 경기 출전이 맞긴 한데.
클레망보다 수비 범위는 넓지만, 안정적이라는 생각은 안 들었다.
게다가 지난번 타석에서 병살 두 개 때리며 삽질한 후로, 수비에서도 영향을 받아 실책을 저질렀지.
가뜩이나 개막전을 말아먹고 신경이 날카로워진 로버트의 뒤에서 실책이라도 저지르면······.
[왜 남 걱정하는 척하고 그래. 안 어울리게.]
‘그치?’
어차피 채드윅이나 나나 비슷한 처지의 선수.
저쪽에서 삽질을 하면 할수록 나한테 타석 하나라도 더 들어올 거다.
물론 정도가 심해지면 덕아웃 분위기는 개판이 되겠지만, 그건 나중에 생각할 일.
지금은 첫 선발 출장의 기회를 붙잡는 것만 신경 쓰자.
* * *
6번 타자 1루수.
파드리스와의 3차전에서 내가 맡은 역할이었다.
[First Baseman! Back No.48! Hyun! Ki! Koo!]
“Koo! Koo! Koo! Koo!”
전광판에 배트를 든 내 사진이 떠오르자 원정팬들이 환호를 보낸다.
“고맙다, 다저스! 스윕 잘 챙겨갈게!!”
“너네는 빠따 들 애들이 없어서 투수를 1루에 세운다며?!”
물론 홈팬들의 압도적인 야유에 파묻히기는 했지만.
시범경기에서 나 때문에 팀 전체가 조롱의 대상이 됐으니 감정이 좋을 리가 없다.
“신경 쓰지 마. 경기만 생각해.”
오늘 벤치에서 휴식을 부여받은 클레망이 내 어깨를 툭 쳤다.
괜히 흥분할까 봐 걱정이라도 해주는 걸까.
“왜요? 기분 너무 좋은데요?”
“어, 그래······.”
원래 상대 팀의 야유와 저주는 최고의 극찬이다.
스윕 챙겨가겠다는 조롱은 팩트라서 좀 아프지만, 어차피 내 출전 기회는 거의 없었으니 무시해도 되겠지.
“플레이 볼!”
오늘 경기는 양쪽 모두 에이스를 내세웠다.
파드리스의 선발 투수는 알레한드로 이글레시아스.
개막전에서 실점 없이 6이닝을 책임졌는데, 아주 기세가 등등하다.
“아웃!”
“스트라이크 아웃!”
“아웃!”
1회 초 다저스의 공격은 삼자범퇴로 끝났다.
포심에 타이밍을 제대로 맞췄는데도 뜬공으로 물러난 말릭이 입맛을 다셨다.
“컨디션이 좋아. 배트가 밀리더라고.”
하지만 로버트 역시 만만한 투수는 아니다.
정확하게 제구된 투심이 파드리스 타자들의 배트를 유혹했다.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아웃!”
“스트라이크 아웃!”
파드리스의 1회 말 공격도 삼자범퇴로 막아냈다.
초반부터 흔들렸던 지난 경기의 부진을 씻어내는 호투.
자연스레 경기는 투수전 양상으로 전개됐다.
“아웃!”
2회 초 투아웃 상황에서 첫 타석에 들어갔고, 결과는 낫아웃 삼진.
투 스트라이크에서 커트만 두 개 하고 나서 떨어지는 체인지업에 속아 넘어갔다.
[괜찮아, 괜찮아. 잘했어. 원정팬들 더울까 봐 선풍기 틀어준 거지?]
깐족대는 박도현에게 뭐라 받아칠 틈도 없이 바로 다음 이닝 수비를 준비했다.
파드리스의 2회 말 공격.
로버트는 초구로 지난 이닝 내내 좋은 결과를 냈던 투심을 선택했고.
따악!
결과는 좌익수 앞에 떨어지는 안타.
오늘 처음으로 1루 베이스에 파드리스 선수가 머물 자격을 얻었다.
“Hey, Koo.”
“어, 그래.”
파드리스의 4번 타자는 싱글벙글 웃으며 도루용 장갑을 받아 꼈다.
“다저스 이번 시즌 탱킹한다며?”
“누가 그래?”
“작년까지 투수였던 선수를 1루에 갖다 박는 것만 봐도 알지. 괜찮아? 많이 힘들지?”
“그럼. 메이저리거들 어휘력이 다 비슷비슷한가, 한 20번째 듣는 소리 같긴 한데. 뭐 나쁘진 않네.”
상대 타자와 입씨름을 하면서도 눈으로는 포수 사인을 살피기 바빴다.
잠시 후 견제구 사인이 나왔고, 로버트가 뒤돌아보며 던진 느린 견제구를 받아냈다.
“세이프!”
슬라이딩조차 불필요한 여유로운 귀루.
그러나 견제 사인은 한 번에 그치지 않았다.
“세이프!”
아까보다 훨씬 빠른 속도의 견제구가 들어왔다.
은근슬쩍 거리를 벌렸던 주자는 슬라이딩으로 급하게 1루로 돌아왔다.
글러브에서 꺼낸 오른손을 로버트를 향해 휘두르며 퉁명스럽게 물었다.
“견제 한 세 번 더 할 건데, 그냥 붙어 있지?”
“나야 좋지. 어디 한번 해봐.”
“그래? 들어가 그럼.”
그렇게 대꾸하며 글러브로 주자의 허벅지를 눌렀다.
“아웃!”
1루심의 콜에 주자와 상대 1루 코치가 동시에 펄쩍 뛰었다.
굳이 길게 얘기할 필요 없이 글러브에서 공을 꺼내 보여줬다.
전광판에는 1루 베이스에서 주자의 발이 떨어지는 순간 글러브를 갖다 대는 내 모습이 비쳤다.
“비겁한 새끼!”
“이거 순 사기꾼들 아니야!”
홈팬들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지만, 정작 주자 본인은 나를 노려보면서도 군말없이 덕아웃으로 돌아갔다.
내가 투수에서 전향한 지 얼마 안 됐다고 방심한 건데, 무슨 할 말이 있겠어.
물론 로버트가 자연스럽게 공을 받아내는 모션을 취해준 덕도 있었지만.
“스트라이크 아웃!”
“아웃!”
주자가 허무하게 아웃되면서 맥이 끊긴 걸까.
두 명의 타자를 더 잡아내기 위해 로버트는 고작 다섯 개의 공을 던졌다.
결과적으로 공 여섯 개로 이닝을 정리한 셈.
“아까 들었냐? 여기 팬들이 너보고 비겁하대.”
덕아웃으로 들어가면서 로버트가 글러브로 내 등을 툭 쳤다.
야수한테 대놓고 칭찬하지 않는 평소 스타일상, 이건 거의 극찬이나 마찬가지다.
“저 상처받았어요. 오늘 자기 전에 치킨 먹고 자야지.”
[치킨! 치킨!]
‘먹고 남은 거 냉장고에 넣어둘 테니까 그거나 처먹어. 너 시원한 거 좋아하잖아.’
[와 개치사해!]
* * *
4회까지 양 팀 선발 투수는 각각 안타 2개씩만을 허용했다.
사사구는 아예 나오지 않은, 그야말로 명품 투수전.
그리고 다저스의 5회 초 공격.
초구를 지켜보고 나서, 어쩌면 판도가 바뀔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깐 오버페이스였다.’
같은 포심 패스트볼이었지만, 2회 초 첫 타석에서의 위력이 느껴지지 않았다.
상대 선발이 주로 사용하는 구종은 고작 3개뿐.
게다가 내가 몸쪽 코스에 강하다는 것도 분석은 했을 테니, 이러면 수 싸움에서 한결 유리해진다.
따악―!
“Koo!!! Koo!!! Koo!!! Koo!!!”
“그렇지! 이번엔 선취점 내자!”
깨끗한 좌전 안타로 무사 주자 1루.
타석에는 아직 시즌 첫 안타를 신고하지 못한 채드윅.
작전 야구를 종종 활용하는 오브라이언 감독님이기에, 예상대로 희생번트를 지시했지만.
“파울!”
“파울!”
번트파울만 두 번 나오면서 카운트는 0―2.
괜히 2루까지 전력 질주만 두 번 하면서 힘을 뺐다.
딱!
감독님이 보낸 사인은 타자에게 판단을 맡기는 것.
채드윅은 쓰리 번트 대신 강공을 선택했고.
“아웃!” “아웃!”
차라리 쓰리 번트로 아웃되는 게 나았을, 최악의 결과를 만들어내고 말았다.
이번이 시즌 2경기째인데 벌써 병살타가 3개째.
“아······!”
본인도 괴로워하는데 감독님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심지어 명백한 아웃 타이밍이었는데도 1루까지 전력 질주하기까지 했는데.
“괜찮아, 괜찮아. 이따 수비에 집중하자구.”
코치가 다가와서 격려했지만, 채드윅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카일처럼 본헤드 플레이를 저질러 놓고 뻔뻔하게 나오는 것도 문제지만, 저렇게 주눅 드는 것도 곤란하다.
유격수가 흔들리고 있다는 게 상대 덕아웃 쪽에서도 보일 테니까.
따악―!
5회 말 수비.
삼진을 잡아낸 이후 연속 안타로 1사 1, 2루 상황.
채드윅이 자기 앞으로 날아온 무난한 땅볼 타구를 받아냈지만, 2루로 송구하려다 공을 떨어트렸다.
더블 플레이로 이닝을 끝낼 찬스가 날아가고, 주자는 만루.
로버트의 시그니처 포즈가 어김없이 채드윅을 향했다.
“어······ 으······.”
채드윅은 완전히 굳어버린 채 로버트와 덕아웃만 번갈아 쳐다봤다.
상대에게 제발 자기 쪽으로 땅볼을 날려달라고 애원하는 꼴.
따아악!
그러나 유격수가 크게 흔들린다는 걸 알아챈 로버트는 존 안에 들어가는 체인지업으로 타자의 풀스윙을 유도했고.
“나이스! 나이스!”
“됐어! 알레한드로한테 1점이면 충분하지!”
비록 희생플라이로 선취점을 내줬지만, 어쨌든 두 번째 아웃카운트를 잡아냈다.
“스트라이크 아웃!”
1, 2루에 주자를 남겨둔 채 삼진으로 이닝 종료.
로버트는 묵묵히 덕아웃으로 돌아가 지정석에 앉았다.
[쟤 지금 사과하러 가는 건가? 타이밍이 좀 그런데.]
다들 로버트 근처에서 떨어져 혼자만의 시간을 갖게 해주고 있는데.
채드윅은 클레망이 말릴 틈도 없이 그런 로버트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죄송합니다!”
쫄았다는 게 한눈에 보이지만, 그래도 사과부터 하러 온 채드윅.
로버트는 짧게 한숨을 쉬더니, 개인 텀블러에 담긴 음료를 한 모금 마시고는 툭 던지듯 물었다.
“너 유격수 왜 하냐?”
“······예?”
“유격수 왜 하냐고. 성질 X 같은 투수한테 대가리 숙이려고?”
그렇게 말하고는 저리 비키라는 듯 손짓한 후, 눈을 감고 명상에 들어갔다.
[또 시작이네.]
로버트는 때때로 실책을 저지른 유망주의 자존심을 긁곤 한다.
물론 이런 태도는 호불호가 갈린다.
차라리 쌍욕을 하는 게 낫다며 치를 떠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래도 이 정도로 끝나서 다행이라며 안도하는 사람이 있지.
무슨 의도에서 그러는 건지 본인한테 물어볼 생각은 딱히 없지만.
사실은 그냥 본인 하고 싶은 말을 그대로 하는 거 아닐까.
나는 야수 실책을 웃어넘기는 X만한 투수가 아니다. 대가리를 숙이든 들이받든 니 X대로 해봐라. 뭐 이런 거지.
[아이고······ 쟤는 안 되겠다.]
이럴 때 최악의 대응은 저렇게 좌절하는 것.
덕아웃 구석에 주저앉은 채드윅이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한 표정으로 머리를 감싸고 있었다.
카메라가 그 모습을 담았으니 오늘 인터뷰에서도 질문이 나오겠지만, 로버트는 그런 건 전혀 신경 쓰지 않을 거다.
‘본인 책임이지.’
앞으로 로버트가 등판하는 날 채드윅이 선발 출장하기는 어렵겠다.
로버트가 거부하지 않더라도 본인이 부담스러워하겠지.
* * *
6회가 끝난 시점에서 양 팀 선발 투수의 투구 수는 90개 내외.
이번 이닝까지는 계속 쓸 거라고 예상했지만.
따악―!
7회 초 선두타자 조지가 커트를 반복하며 7개의 공을 던지게 한 후, 펜스를 강타하는 큼직한 2루타를 날리자마자.
파드리스 벤치는 미련 없이 마운드를 교체했다.
출루 허용하면 바꾸겠다, 뭐 이런 약속이 되어 있던 거겠지.
[오, 쟤 나왔다.]
무사 2루 상황에서 올라온 투수는 셋업맨 매버릭 윌슨.
시범경기에서 나에게 런 앤 히트로 2루를 빼앗긴 뒤 견제구 입스에 걸려버린 투수였다.
“Mav! 원수를 갚아줄 찬스다!”
“어디 저딴 새끼한테 또 쫄기만 해봐! 대가리 한 대 맞춘다고 사람 안 죽어!”
그 경기에서는 진짜 죽일 듯 야유를 보내더니, 그래도 자기 팀 선수라고 감싸주긴 한다.
사실 나도 대주자로 나갔던 거니까 타석에서 만나는 건 처음이다.
제리처럼 커터를 결정구로 쓴다는 건 아는데, 직접 공을 봐야 뭐라도 생각을 해볼 수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타석에 들어가 자세를 잡았는데.
‘오우.’
투수의 눈을 보자마자 알았다.
‘몸으로 말해요’의 특수 효과가 아니더라도, 눈깔 뜨는 뽄새만 봐도 안다.
표정은 평온 그 자체인데 눈만 훼까닥 돌아 있다.
게다가 뭔가 저릿저릿한 느낌이 온몸을 뒤덮기까지 하니.
‘한 방 맞추겠다 이거지.’
재밌네.
어디 어떻게 나오나 보자고.
온몸에 긴장을 끌어올리며 타격 자세를 잡았고.
주자가 2루에 있는데도 와인드업에 들어간 투수가 이윽고 초구를 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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