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신 들린 천재 타자-36화 (36/200)

36. 다저스의 주전 유격수(3)

투수를 하다 보면 누군가와 천적 관계가 형성되곤 한다.

객관적인 성적만 보면 별것 아닌데도, 이상하게 유독 누군가한테만 털리게 되는 그런 거.

당연히 투수 시절의 나한테도 그런 놈이 있었지. 아직도 생각만 하면 열불이 나는 놈이.

이런 관계를 청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깔끔한 정면승부로 제압하는 거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이런 식으로 시야가 좁아지는 바람에 악순환이 나오는 거 아닌가 싶은데, 아무튼 그렇다고.

아니면 그것보다 훨씬 쉬운 방법도 있지.

‘이 새끼가?’

쐐애액!

코스를 확인하자마자 허리를 뒤로 젖혔고.

눈앞을 스쳐 지나간 패스트볼이 뒤쪽 펜스에 틀어박혔다.

머리를 맞추겠다는 구린 의도가 엿보이는 코스.

꼭 맞추지 않더라도, 이렇게 언제든 머리를 노릴 수 있다는 식으로 겁을 주는 수법이다.

“실투야.”

포수가 원정 덕아웃 쪽을 슬쩍 보며 다급히 말했다.

겁먹을 만도 하지.

벤클킹으로 악명이 높은 로버트가 언제라도 뛰쳐나갈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으니까.

그러나 여전히 온몸을 감싸는 끈적하고 불쾌한 기운이, 방금 그게 실투가 아니라는 걸 알려주고 있었다.

쐐애애액!

팡!

“볼!”

초구는 셋업 피칭 과정에서의 실투라고 볼 수라도 있지.

같은 코스로, 심지어 머리에 더 가까이 붙는 2구.

이러면 뭔가 구린 의도가 있다는 걸 남들한테까지 실토하는 꼴이다.

“너 이 개―”

2구가 날아오고 나서 가장 먼저 한 행동은, 우리 팀 덕아웃을 향해 나오지 말라는 제스처를 보내는 것.

로버트가 덕아웃 입구에서 상체를 반쯤 내민 채 육두문자를 쏟아내는 걸 팀원들이 필사적으로 말리고 있었다.

“로버트! 정신 차려요! Koo가 괜찮다잖아요!”

“Koo는 더 이상 투수가 아니에요! 벤클 타이밍이 아니라구요!”

그 모습을 보자마자 이를 악물었다.

‘웃으면 X 된다.’

슬픈 생각. 죽은 햄스터 생각. 입원해 있느라 가보지도 못한 박도현 장례식 생각.

겨우겨우 웃음을 억누른 뒤 주심 쪽을 돌아봤다.

억울함과 분노를 참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방금 공은 고의 아닙니까?”

주심도 수긍할 수밖에 없는 상황.

마운드 쪽으로 몇 걸음 다가가며 주심이 목소리를 높였다.

“투수, 조심해. 실투든 뭐든 같은 코스로 한 번만 더 던지면 퇴장이야.”

“뭐라고요?”

방귀 뀐 놈이 성낸다더니 발끈하는 투수.

상대 덕아웃에서도 뭔가 심상치 않다는 걸 느꼈는지 투수 코치가 마운드를 방문했다.

뭐라고 대화를 나누긴 하는데 어차피 들리지도 않고. 타석에서 벗어나 아무렇지 않은 듯 스윙 연습이나 했다.

[저거 저대로 둬도 돼? 쟤 지금 독 빠짝 오른 것 같은데.]

‘됐어, 어차피 맞을 일 없어.’

투수가 던진 빈볼이 타자에게 맞는 경우는 두 가지.

불문율을 어겨서 당연히 날아올 타이밍이란 걸 양쪽 다 알거나.

아니면 뜬금없는 타이밍에 던져서 타자가 예상하지 못할 때.

‘몸으로 말해요’로 상대가 빈볼을 던질 의도를 알아챈 이상, 백 번을 던져도 피하면 그만이다.

하루 종일이라도 할 수 있어.

“플레이 볼!”

경기가 다시 시작됐다.

양쪽 덕아웃과 관중석에서 긴장이 감도는 가운데 맞이한 3구.

물론 나한테는 투수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훤히 보였다.

‘끝까지 가보자 이거지.’

투수에게 빈볼의 의도가 있음을 알려주는 불쾌한 감각.

투수 코치에게 한소리 들어서인지 조금 옅어지긴 했어도 여전히 남아 있었다.

‘벤치 클리어링까지 가긴 싫었는데.’

어차피 심판의 제지가 있었으니, 장기간의 출장 정지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머리 쪽으로는 안 온다.

만약 엉덩이 쪽으로 오면 까짓거 한 방 맞고 주먹으로 갚아주지 뭐.

그렇게 생각하며 투수의 손끝을 지켜보는데.

‘어, 이거······.’

명백한 몸쪽 공이긴 한데, 제대로 붙이지 못한 애매한 코스.

보통 몸쪽 승부에 대한 두려움을 완전히 버리지 못하면 이런 공이 나오는데.

‘몸으로 말해요’의 희생양이 되기 딱 좋았다.

따악―!

몸에 꽤 바짝 붙는 공이었기에 살짝 빗맞는 건 피할 수 없었지만, 어쨌든 우익수 앞에 떨어지는 안타.

“뭐야?! 안타야 지금?!”

“뭐해 루카스! 뛰어!”

2루 주자 루카스의 출발이 늦어지면서 타점은 올리지 못했다.

그럴 수 있지. 이 타이밍에 안타가 나올 거라고 누가 예상하겠어.

그래도 상관없다.

“세이프!”

내가 그래도 1루까지 3.8초 안쪽으로 끊는 놈인데.

견제구도 못 던지는 등신 상대로 도루도 못 하면 접시물에 코 박고 죽어야지.

히트 앤 런에 이어 통산 첫 도루까지 선물받았네. 참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위협구만 두 차례 던진 끝에 안타에 도루까지 허용했지만, 파드리스 벤치의 움직임은 없었다.

갑자기 뻘짓을 하며 위기를 자초했지만 어쨌든 매버릭 윌슨은 이틀 휴식 후 올라온 필승조.

설령 역전을 허용하는 한이 있더라도 이번 이닝은 맡기려는 거겠지.

따아아악―!

그래도 다저스처럼 바꿀 땐 바꿔야지.

오늘 병살에 실책으로 경기를 말아먹을 뻔한 채드윅 대신 대타로 클레망이 타석에 섰고.

결과는 분노의 쓰리런이었다.

“그렇지!!! 역시 클레망이야!!! 성능 확실하구만!!!”

“느그 팀엔 홈런 20개 넘게 치는 37살 베테랑 없지?!”

펫코 파크를 찾아와준 다저스 팬들의 환호성이 쏟아졌다.

셋이 함께 덕아웃으로 돌아와 세레머니 타임을 갖고, 분위기가 다시 진정되고 난 뒤.

“Koo. 이리 와 봐.”

로버트가 갑자기 나를 호출했다.

뭔가 싶어 다가가 보니 뜬금없이 딱밤이 날아왔다.

“오랜만에 그라운드에서 대화 좀 하려고 했는데, 너 때문에 김 다 샜잖아.”

맨몸으로 적지에 뛰어들어 몇 명을 병원 보내는 게 대화라고 할 수 있나 싶지만, 본인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X 같으면 괜히 참지 마. 시즌 내내 봐야 하는 놈들인데 X밥으로 보이면 곤란하니까.”

몸에 맞는 공이야 타자들이 어느 정도 감수해야 한다고 보는 게 메이저리그 문화.

그러나 명백한 의도가 보이는 빈볼에까지 소극적으로 대처하는 건 만만하게 보이기 딱 좋다.

경고를 받는 한이 있더라도 투수한테 몇 마디 쏘아붙이기라도 해야지.

하지만.

“제가 맞고 나가면 역전 주자였잖아요.”

1점 차의 클러치 상황에, 에이스는 아직 더 던질 여력이 있는 상태.

백업 멤버들의 컨디션이 그리 좋지 않은 지금, 벤치 클리어링은 손해가 될 확률이 높다.

“저 투수 맛 간 것 같길래, 여기서 한 5점 더 낸 다음 마운드에 올려달라고 떼쓰려고 했죠.”

“왜, 너도 대가리에 꽂으려고?”

“설마요. 근데 제구가 아직 안 돌아와서 큰일이네요. 누구 하나 다치면 안 될 텐데.”

기가 차다는 듯 헛웃음을 짓는 로버트.

진심인데. 내가 무슨 인간쓰레기도 아니고, 일부러 사람 맞히려고 등판을 자처할 리가.

“로버트, 대기 타석으로 가야겠는데.”

그때, 수비 코치가 로버트를 불렀다.

다음 이닝까지 나가려면 로버트가 타석에 서야 하는 상황.

“됐다. 수비 나갈 준비나 해.”

로버트는 내 등을 한 번 툭 치고는, 배트를 챙겨 덕아웃 밖으로 나갔다.

나도 다시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려다 수비 코치에게 붙잡혔다.

“Koo. 채드윅 대신 유격수 자리로 이동해줘야겠다.”

클레망이 대타로 나왔으니 유격수로 들어갈 줄 알았는데.

무슨 일인가 싶어 클레망을 흘낏 쳐다보니, 손목에 스프레이 파스를 뿌리고 있었다.

나이가 있다 보니 조심해서 기용해야겠다 이거지.

“예, 알겠습니다.”

“그래. 수고해.”

따악!

“아웃!” “아웃!”

때마침 로버트가 병살타를 치며 이닝 종료.

글러브를 챙겨 덕아웃을 나서려는데 박도현이 말을 걸었다.

[야, 근데 로버트가 너한테 아직 수비는 못 맡기겠다고 하지 않았냐?]

개막전을 치르러 샌프란시스코로 이동하던 비행기 안에서 분명 그런 말을 했었지.

나를 아끼긴 하지만, 나를 믿고 마운드에 설 수는 없다고.

“로버트, 저기 말이야, 7회부터는······.”

그러나 수비 코치에게 상황을 전달받은 로버트는 별다른 반응 없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유격수 자리에서 로버트의 피칭을 지켜볼 수 있게 됐다.

클레망이 나오기 어려운 상황에서, 적어도 채드윅보다는 내가 더 믿을 만하다고 인정받은 걸까.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스트라이크 아웃!”

“아웃!”

[로버트 이 악물고 삼진 유도하고 있는데?]

‘닥쳐.’

어차피 이번 이닝이 마지막이니 온 힘을 다해 던졌을 뿐이겠지. 분명 그럴 거다. 그렇고말고.

7회를 삼자범퇴로 마치며 오늘 로버트의 성적은 7이닝 4피안타 무사사구 1실점 비자책.

개막전 결과를 두고 에이징 커브가 왔다느니 뭐니 떠들어대던 사람들에게 한 방 먹이는 피칭이었다.

* * *

경기는 3대 1의 스코어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끝났다.

연패를 끊어내는 에이스의 호투가 빛났지만, 거기에 집중하는 기자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로버트, 오늘 덕아웃에서 유격수 채드윅 마틴과 언쟁이 오간 게 사실입니까?”

“위협구를 안타로 연결시킨 Koo가 돌아오자마자 무언가를 지시하셨는데, 자세한 내막을 알려주시죠!”

기껏 좋은 경기를 치르고도 청문회 같은 분위기가 되어버린 게 마음에 안 들었던 걸까.

로버트는 원론적인 대답만 몇 마디 하더니 인터뷰 스페이스를 떠나 버렸고.

자연스레 기자들의 시선은 다음 차례인 나에게 쏠렸다.

첫 선발 출장에서 4타수 2안타의 활약. 인터뷰의 주인공으로 선정되기는 충분했지.

“어떤 말이 오갔는지는 본인들의 동의 없이 밝힐 수 없다는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무언가를 지시하진 않았고요, 그냥 그 이전의 상황에 대해 제 의중을 물어봤습니다. 저는 괜찮다고 대답했고요.”

그 이전의 상황.

내 입에서 그 말이 나오자마자, 기자들이 먹잇감을 발견한 들개들처럼 몰려들었다.

“매버릭 윌슨 선수의 위협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머리 쪽으로 날아오는 공을 다행히 피하셨는데, 혹시 이 코스를 미리 예측하셨던 건지······.”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위협구라. 피하지 않았더하면 헤드샷이 됐을 공인데.

단어 선택이 마음에 안 들지만 어쨌든 대답은 해야지.

“저는 매버릭이 악의를 가지고 그 공을 던졌다고 보진 않습니다. 제구가 흔들렸을 뿐이라고 생각해요.”

생각보다 대답이 얌전했는지 기자들 사이에서 술렁임이 일어나는 가운데.

기자 한 명이 손을 들고 질문한다.

“일각에서는 시범경기에서의 악연이 영향을 미친 것 아니겠냐는 분석이 나오고 있는데요. 이런 주장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때마침 내가 기다리던 질문이었다.

“악연이라고 하셨는데, 지금 그 말씀은 약간 오해의 소지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오해라고요?”

“제 기억이 잘못된 거라면 사과하겠지만, 샌디에이고와의 시범경기에서 제가 비매너 플레이를 한 적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자 기자 한 명이 불쾌한 얼굴로 손을 든다.

누구인지 확인할 필요도 없이, 홈팀 샌디에이고 쪽 기자겠지.

“물론 정당한 플레이의 일환이었죠. 하지만 결과적으로 한 투수가 비정상적인 비난을 받게 되었고, 그 때문에 입스를 얻기도 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책임이 아예 없다고는······.”

“아, 저기. 저기. 잠시만요.”

중간에 말을 끊고 끼어들 수밖에 없었다.

“혹시 그 비난을 제가 초래했나요?”

“······그럴 의도는 없었다고 해도, 투수가 원래 예민한······.”

“맞죠. 투수가 예민한 존재긴 하죠. 그러나 이건 저랑은 무관한 사안이라고 생각합니다.”

잠깐 입을 다물고 집중을 유도한 다음, 마저 입을 열었다.

“고작 주루 작전 하나 허용했다고 입스에 걸리는 투수가 어디 있겠습니까. 저한테 3안타 허용했던 디백스 투수도 지금 멀쩡히 잘 던지고 있는 걸로 아는데요.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하지 마세요.”

파드리스와 디백스를 동시에 저격하는 발언.

순간 인터뷰 스페이스가 침묵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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