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다저스의 주전 유격수(4)
매버릭 윌슨을 대놓고 저격한 내 인터뷰는 소소한 화제가 됐다.
이쪽 동네 정서를 생각하면 사실 그리 수위가 세진 않았는데.
일부 사람들(주로 파드리스 팬들)이 입스를 걸고넘어진 걸 못마땅하게 보더라.
이유야 어찌 됐든, 견제구 입스는 투수로선 꽤 아픈 핸디캡이 맞으니까.
‘근데 내 앞에서 입스로 징징대긴 좀 그렇지.’
Koo는 변화구를 아예 못 던지는데 어디서 엄살이냐, 뭐 이런 여론이 대세였다.
게다가 복수랍시고 선택한 게 하필이면 헤드샷이다.
선수 본인은 공이 손에서 빠졌다고 끝까지 우기는 모양인데, 누가 그걸 믿을까.
결과적으로는 안타가 됐으니 징계는 흐지부지될 확률이 높지만.
[근데 그건 그렇다 치고, 디백스에 걔는 왜 건드렸냐?]
문제는 이거다.
내가 내추럴 사이클링 히트를 기록했던 경기의 선발 투수 호세 리카르도.
얘는 그냥 가만히 있다가 처맞은 거다.
‘얘도 멀쩡한데 왜 징징대냐, 뭐 이런 의미로 말한 건데······.’
따지고 보면 칭찬이지.
그만큼 멘탈이 단단하다는 거니까. 실제로 시즌 첫 경기에서 퀄리티 스타트도 했고.
디백스 팬들이 그렇게 호의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게 문제지만.
[Koo 이 새끼는 왜 가만히 있던 우리한테 불똥 날리고 X랄이야? 시범경기에서 우리한테 대기록 세웠다고 지금 유세 떠는 거야?]
└ 저 새끼의 대가리에 존중이란 걸 주입시켜줘야 하지 않겠어?
└ 우리 다저스랑 처음 만나는 게 4월 말인데? 솔직히 대놓고 꼽을 준 것도 아니고. 그때 가서 뭐라 그러면 오히려 쪼잔해 보이지 않나?
└ 그리고 우리 재작년에 다저스랑 벤클 붙었다가 IL에 다섯 명 올라갔잖아. 로버트 그 싸이코 같은 인간이 또 그러면 어떡하게?
└ 로버트를 어떻게 막는다고 해도 Koo가 수틀리면 마운드 올라가서 제구 안 되는 변화구를······.
‘빈볼은 안 나올 확률이 높아.’
디백스에서 호전적인 편에 속하는 선수들은 로버트에게 이미 한 번 기가 꺾였고.
그나마도 그중 상당수가 이번 오프 시즌을 앞두고 드러누워 부상자 명단에 오른 상태.
덤벼서 손해가 더 큰 쪽은 디백스다.
[와, 만만한 팀한테는 말 막 해도 된다 이거야? 구현기 인성 진짜······.]
‘너는 안 만만한 팀한테도 말 막 했잖아.’
어디서 약을 팔아.
니 통역 매니저가 그만두기 전에 나랑 술 먹으면서 뒷담화 오지게 했는데.
자기가 통역하는 사람인지 창작하는 사람인지 모르겠다고.
“Hey, Koo.”
누군가가 나지막이 부르는 소리에, 박도현을 갈구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주전 2루수 조지 라모스였다.
내가 미국에서 만난 모든 야구 선수를 통틀어 가장 조용하고 차분한 사람.
“혹시 지금 잘 거야?”
“아뇨, 아직요.”
“그럼 잠깐 나 좀 보자.”
개막 원정 10연전의 마지막 시리즈는 신시내티 레즈와의 4연전.
캘리포니아에서 오하이오까지 밤 비행기로 이동 후, 휴식 없이 바로 저녁 경기를 치르는 일정.
다른 선수들이 대부분 잠을 청하고 있는 만큼 조지의 목소리는 조용조용했다.
“우리 사인 미스 나올 뻔한 거 기억해?”
유격수로 자리를 옮긴 뒤인 8회에 벌어진 일.
주자 1루에 시프트가 걸려 있었는데, 내가 조지의 사인을 잘못 읽어서 스타트가 늦었다.
아마 내 발이 조금만 느렸어도 타자 주자를 잡아내지 못했겠지.
“아······ 네. 죄송합니다.”
“아냐. 사인 미스는 원래 공동 책임이잖아.”
내야 수비에서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누가 타구를 잡으면 누구는 베이스에 커버를 들어가는 등.
수비가 강한 팀은 이런 약속된 플레이가 유기적으로 이뤄진다.
“그리고 따지고 보면 내 책임이 더 크지. 나도 카일한테만 맡기던 버릇이 들었던 것 같아.”
수비 범위가 넓은 야수에게 상당 범위를 맡기고, 나머지는 커버 플레이에 치중하는 팀도 있는데.
아마 작년의 다저스는 그랬던 모양이다.
[그러게. 원래 조지가 말이 되게 많은데, 어째 조용하다 했어.]
박도현의 신용할 수 없는 말은 일단 흘러넘겼다.
조지가 말이 많다고? 내가 올해 저 사람이랑 한 번에 열 마디 이상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는데.
“감독님 생각을 내가 다 알진 못하지만, 네가 유격수로 나올 기회가 몇 이닝 정도로 끝나진 않을 것 같아.”
애초에 내가 현시점에서 3옵션 유격수라는 건 감독님께 직업 들은 사실이다.
그러나 같이 내야에서 뛰는 동료에게 이런 말을 듣는 건 뭔가 느낌이 다르다.
동료들에게 믿음을 줄 수 있는 선수가 되어가고 있구나, 이런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그럼 A 포메이션부터 쭉 점검해볼까? 주자 1, 2루에 내가 이렇게 하면 콜을 못 듣더라도 일단 3루로······.”
물론 믿음에는 그만한 비용이 든다.
미 대륙을 가로지르는 내내 조지는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말 겁나게 많다는 게 사실이었어.
[우리 비행기는 지금 아이오와주 상공을 날고 있습니다. 오늘도 선수 여러분의 건투를 빕니다!]
겨우 두어 시간 눈만 붙인 채 도착한 신시내티.
그곳에서 나는 조지가 말했던 ‘더 많은 기회’를 손에 잡게 된다.
내가 원치 않았던 방식이라는 게 문제지만.
* * *
신시내티 레즈와의 4연전, 그 첫 경기.
2선발 제리는 첫 경기에서의 좋은 컨디션을 이어 갔다.
[다저스의 7회 초, 1사 주자 1루 상황. 제리 헤이즈택의 타석에서 다저스는 대타 Koo를 내보냅니다.]
[이로써 오늘 제리 헤이즈택의 피칭은 6이닝 5피안타 1사구 2실점. 1회에 약간 흔들렸지만 금방 컨디션을 되찾으며 두 경기 연속 퀄리티 스타트를 기록합니다.]
[타석에는 Hyun―Ki Koo. 아직은 대타 위주로 출전해 표본이 적습니다만 시즌 7타수 4안타, 타율 0.571로 다저스 타선에 활기를 더해주고 있죠.]
[조금 더 수비에서 안정감을 갖춘다면 충분히 주전으로 발돋움할 수 있는 선수입니다. 말씀드리는 순간 초구······ 기습 번트! 1루 쪽 절묘한 타구! 투수! 포수! 1루수! 모두 대응이 늦어지면서 Koo가 1루에 입성합니다!]
[Koo가 시범경기에서 보여준 장타력 때문에 내야수들을 약간 뒤로 배치했는데, 기습 번트 가능성을 아예 떠올리지 못한 것 같습니다!]
[이제 Koo는 내야수가 미리 대비하지 않는다면 언제든 번트 안타를 만들어낼 수 있는 타자라고 봐야겠군요! 심지어 지난 경기에서는 통산 첫 도루까지 기록했으니까요!]
[메이저리그에서 안타를 기록했습니다.]
[20포인트가 지급됩니다.]
[현재 포인트: 140]
1루수가 주자 헨리에게 정신 팔린 게 보여서 초구부터 과감하게 번트를 댄 게 맞아떨어졌다.
“샌디에이고에서는 주자한테 사기 쳐서 아웃 따내더니, 이번엔 기습 번트야? 재밌네. 어디 그 머리통에 치졸한 생각이 얼마나 들었나 구경 좀―”
따아악―!
상대 1루수가 뭐라 입을 털긴 했는데, 계속 들어줄 시간은 없었다.
말릭의 2루타에 죽어라 뛰어 홈까지 도착했으니까.
지가 제대로 대응 못 해놓고 혓바닥이 뭐 이리 긴지 원.
지난번과는 달리 수비를 소화하진 않았지만, 7회 초 만들어낸 2점의 리드를 지켜내며 4대 2로 승리.
제리에게 시즌 2승째를 안겨주는 데 성공했다.
“제리가 무척 좋은 피칭을 보여줬고, 점수를 내야 할 상황에서 타자들이 활약해준 공도 컸다고 봅니다.”
오브라이언 감독님은 승장 인터뷰에서 여러 선수들의 이름을 언급을 언급했다.
“7회 초 Koo의 번트 상황에 대해 본인에게 물어보니 근거가 있는 플레이였다고 하더군요. Koo는 아주 좋은 타자가 될 겁니다. 클러치 상황에서 자기 몫을 해준 말릭, 팀 사정상 유격수 수비를 맡아주고 있는 클레망에게도 고마움을 전하고 싶네요.”
원정 시리즈에서 7전 4승 3패의 나쁘지 않은 전적.
점점 타격감이 올라오고 있는 주전 야수들.
꾸준히 제 몫을 해주며, 가끔 무너지더라도 곧바로 페이스를 되찾는 선발진.
주전 유격수가 이탈한 상황에서도 팀이 크게 흔들리지 않는 이유였다.
‘사실 팀이 개판일수록 나한텐 좋지. 그래야 백업한테 기회가 많이 돌아가니까.’
[감독님이 너 이딴 생각하는 거 꼭 좀 알아야 할 텐데······.]
아무튼 그렇게 시즌 초반이 순탄하게 흘러가는가 싶었지만.
바로 다음날, 신시내티 레즈와의 2차전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따악―!
“그렇지! 요새 아주 불을 뿜는구만!”
“클레망! 진짜 40살까지 은퇴 안 할 생각이에요?!”
6회 초 선두 타자 클레망이 안타를 치고 나간 상황.
“스트라이크 아웃!”
포수 헨리가 삼진으로 물러나고, 이제 투수가 타석에 나갈 차례.
감독님은 5이닝 동안 90개의 공을 던지며 승리 투수 요건을 채운 다니엘 슈미트 대신 대타를 내보내기로 했다.
“가브리엘, 타석으로 나가라.”
“옙!”
감독님의 선택은 이번 시즌 대타로만 3타석을 소화해 안타 없이 볼넷 하나만 기록한 가브리엘 루이스.
아직 첫 안타를 신고하지 못해 초조할 법도 하지만.
딱!
바깥쪽으로 들어오는 포심 패스트볼을 가볍게 밀어쳐서 안타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계산이 어긋난 점이 하나 있다면, 상대 좌익수가 타구를 빠르게 캐치해 유격수에게 러닝 스로를 시전했다는 것.
일찌감치 스타트를 끊었는데도 클레망이 3루에서 아웃될 위기에 놓였다.
촤아아악!
유격수를 향해 글러브를 벌리는 3루수를 보더니, 클레망이 마음이 급해졌는지 슬라이딩에 들어갔지만.
“아웃!”
비디오 판독조차 신청하지 않은 완전한 아웃 타이밍.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며 자리에서 일어서던 감독님은, 전광판을 쳐다보더니 이내 다급히 덕아웃에서 뛰쳐나갔다.
“클레망! 왜 그래! 괜찮아?!”
3루 베이스 근처에서 손목을 붙잡고 신음하는 클레망.
지난번 경기에서 홈런을 치고 나서 스프레이 파스를 뿌렸던 왼손이었다.
클레망은 왼손을 땅바닥에 짚다가 움찔하고는, 다시 오른손으로 짚고 일어섰다.
“오버 슬라이딩을 했나 봅니다. 손목이 좀······.”
덕아웃으로 돌아온 클레망의 말에 그 자리의 모든 사람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전광판에는 느린 화면으로 방금 전 플레이가 재생되었다.
슬라이딩 과정에서 베이스에 손이 부딪히며 손목이 살짝 꺾였다.
[붓기가 거의 없어. 최소한 골절은 아니야.]
사람들 사이를 뚫고 클레망의 손목을 자세히 살펴보던 박도현의 말에 일단 안심했지만.
감독님의 얼굴에는 여전히 근심이 가득했다.
“당장 병원부터 가. 상태 확인하면 바로 연락 주고.”
“죄송······ 합니다.”
“미안할 게 뭐 있다고. 얼른 가. 얼른.”
한창 경기가 진행되던 도중 유격수의 이탈.
당장 유격수로 기용할 수 있는 건 최근 삽질을 반복한 채드윅, 그리고 내야수로 전향한 지 1년도 안 된 나뿐.
두 선수를 한 번씩 쳐다보고 나서 감독님은 결단을 내렸다.
“채드윅. 자네가 다음 이닝부터 유격수로 나가 줘야겠어.”
“······알겠습니다.”
아마도 이건 이성을 발휘한 선택일 거다.
이 상황에서의 유격수 출전은 나에게 너무 큰 부담이 될 테니까.
“채드윅. 무리하지 말고 안전하게 하자.”
“잘하려고 하지 말고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해. 우리 점수 더 낼 수 있잖아.”
R.H.와 루카스 등, 고참 선수들이 달라붙어 채드윅의 멘탈을 최대한 케어해 주고는 있지만.
박도현은 가능성을 그리 높게 보지 않았다.
[지금 가뜩이나 마음이 너무 급한데. 잘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
채드윅은 메이저리그에서 2시즌을 보내긴 했지만, 개막 로스터에 든 것은 이번이 처음인 선수.
뭔가 보여줘야만 한다는 압박에 시범경기에서의 모습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고 있으니.
이런 클러치 상황에서 클레망의 공백을 완전히 메우기란 어려운 일이었고.
[LA 다저스 클레망 파로, 슬라이딩 도중 손목 부상으로 경기 중 이송!]
[교체 투입된 채드윅 마틴, 8·9회 연속 실책··· 만루 상황 만드는 데 일조해]
5회까지의 3점의 리드를 지켜내지 못한 채 패배를 맞이했다.
물론 다들 경기에 집중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던 만큼, 채드윅의 실책에만 책임을 전가하는 건 불공평했다.
애초에 선수들에게 중요한 건 한 경기의 승패 따위가 아니기도 했고.
“감독님!”
“어떻게 됐습니까?!”
경기 종료 후 늦은 저녁.
숙소로 돌아가지 않은 채 라커룸에서 소식을 기다리던 선수들은 감독님께 우르르 몰려갔다.
“가벼운 염좌라더군. 이번 시리즈와 휴식일을 포함해 3일간 휴식을 주기로 했어.”
생각보다 크지 않은 부상에 다들 가슴을 쓸어내렸다.
“진짜 사람 놀래키고 있어······.”
“나이도 많으신 양반이 왜 그랬대.”
“우리한텐 아웃카운트 하나에 목숨 걸지 말라더니, 본인이 한 말 못 지키는 거 봐.”
그러나 감독님의 표정은 여전히 밝지 못했다.
주전 유격수와 백업 유격수가 둘 다 경기에 나갈 수 없는 상태.
내야 수비의 주축을 잃어버린 상황에서 당장 다음 경기를 어떻게 치러야 할지 막막할 테니까.
[야, 이거 어쩌면······.]
박도현의 말대로였다.
어쩌면 내게 기회가 찾아올지도 모른다.
유격수로서의 첫 선발 출장의 기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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