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다저스의 주전 유격수(6)
신시내티 레즈와의 3차전은 다저스의 완승으로 끝났다.
다저스 4선발 마리오 로드리고가 실점 없이 5와 3분의 2이닝을 소화했고, 불펜진도 깔끔하게 이닝을 정리했다.
그러나 그보다 빛났던 것은 타선.
레즈의 선발 투수를 4회도 채우지 못하고 강판시키고, 올라오는 투수마다 안타를 때려내며 7대 0의 스코어를 만들었다.
“오늘은 제게 정말 영광스러운 날입니다. 한 선수의 커리어 첫 MVP 인터뷰를 함께하게 됐으니까요. 소개합니다! 채드윅― 마틴!”
오늘 경기의 MVP는 유격수 채드윅 마틴.
타석에서는 4타수 3안타 1볼넷으로 활약했고, 실책 없이 무난한 수비를 선보였다.
그전 경기까지 안타가 없던 데다가 선발 출장 때마다 실책을 기록했던 선수라고는 믿기 힘든 활약.
“어, 저는······.”
채드윅은 마이크를 잡은 지 2초 만에 울음을 터뜨렸다.
다저스 MVP 인터뷰 사상 최단 기록이었다.
“괜찮아요, 채드윅. 이해합니다. 당신한텐 아마 많은 것이 처음일 거니까요. 개막 로스터에 들어간 것도, 메이저리그 경기에서 멀티 히트를 기록한 것도. 자, 이제 좀 진정이 됐나요?”
채드윅은 울먹이면서도 인터뷰를 이어 나갔다.
가족을 향한 감사, 오래 기다려준 여자친구를 향한 사랑, 첫 안타를 쳤을 때의 기분 등등.
물론 그런 데 전혀 관심이 없는 몇몇 선수들은 음료수와 얼음이 가득 담긴 통을 들고 조용히 접근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포착한 리포터는 은근슬쩍 뒤로 물러나며 질문했다.
“채드윅, 솔직히 말하면, 오늘 당신이 플레이하는 모습은 마치 어제까지와는 다른 사람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혹시 뭔가 계기가 있었나요?”
“음, 그건······ 오늘 낮에 Koo랑 나눴던 대화 덕분인 것 같습니다.”
그 말에, 음료수를 쏟으러 접근하던 선수들의 시선이 함께 있던 구현기에게 쏠렸다.
“Hyun―Ki Koo! 놀랍군요. 과연 Koo가 어떤 마법의 말을 건네준 걸까요?”
“어······ 음······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 전부는 말씀드리기 어려울 것 같아요.”
새로 영입한 선수들에게 다저스 프런트가 강조하고 또 강조하는 사항이 있다.
바로 공식 인터뷰에서 박도현에 대한 언급을 삼가라는 것.
감격에 벅차 있는 채드윅이었지만 그것만큼은 확실히 기억하고 있었다.
“다만······ 다저스의 유격수 자리를 대체하는 게 아니라, 밀어내야 한다는 각오로 임하라는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그런 말을 했다고요? Koo가요?”
“네. 야구를 계속하기 위해 누구보다 치열하게 노력하고 있는 Koo가, 만난 지 얼마 안 된 저에게 그런 말을 해줬다는 게······ 너무 고마워서······.”
결국 채드윅은 말을 끝마치지 못한 채 다시 오열하고 말았다.
선수들은 조용히 물러나서 음료수와 얼음 통을 치웠다.
리포터는 차라리 저걸 자신에게 쏟아부어 주기를 바라는 눈치였지만, 굳이 그의 소원을 들어줄 필요는 없었다.
“Koo, 너······ 쟤랑 포지션 겹치는 거 아니었어?”
“그렇긴 한데. 동료잖아. 채드윅이 잘해야 우리 팀이 잘되는 거 아니겠어?”
사실은 라이벌의 기량 향상과 800포인트를 교환한 거지만, 그걸 곧이곧대로 말할 수 없으니 대충 둘러댔다.
“헛소리하지 마. 분명 뭔가 꿍꿍이가 있었겠지.”
“대가 없는 선의는 없다는 걸 Koo 너한테 배웠는데.”
“난 이 자식을 만나고서부터 가족한테도 차용증을 받아낸다고.”
물론 씨알도 안 먹혔다.
나의 순수한 마음을 어찌 이리 짓밟을 수 있을까. 눈물이 앞을 가린다.
[야, 너 친구 농사 진짜 잘 지었다. 너를 정확하게 알고 있네.]
‘싹 다 갈아엎고 다시 지어야 할 것 같은데.’
네놈이 숙청 1호다. 박도현 개자식아.
* * *
“감사합니다, 감독님!”
“그래, 들어가 쉬게.”
경기가 끝난 늦은 밤.
다저스 오브라이언 감독은 경기장에 남아 몇몇 선수들과 면담을 가졌다.
조금 전 면담을 마치고 나간 선수는, 바로 오늘 아침 최후 통첩을 날린 참이었던 내야수 채드윅 마틴.
이미 여러 팀에서 방출을 겪었던 선수지만, 재능은 분명 있다.
잘만 키운다면 메이저리그에서 최소 백업 역할은 충분히 수행할 수 있을 정도로.
문제는 그놈의 멘탈.
꾸준한 선발 기회를 약속했고, 병살을 치거나 실책을 저질러도 격려해줬지만.
개선의 여지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면, 더 오래 붙잡고 있어 봤자 팀에 악영향만 갔을 거다.
개선되지 않았더라면 말이다.
‘처음엔 위기감 때문에 이 악물고 덤비는 줄 알았는데.’
굳이 마지막 기회를 주겠다고 통보했던 건, 변화를 기대하기보다는 선수를 존중하는 의미가 더 컸다.
그런데 결과는 기대 이상의 놀라운 변화.
그 변화보다도 더 놀라운 것은, 변화의 계기가 같은 내야 백업 자리를 두고 경쟁하는 구현기의 격려였다는 사실이었다.
‘Koo가 그 정도로 팀에 헌신적인 선수였나?’
오브라이언 감독은 물론 구현기를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
재능과 근성을 갖췄고, 타자라는 새로운 길을 개척해나가는 용기도 있는 선수.
그러나 클레망처럼 팀의 승리를 위해 몸을 내던지는 스타일은 아니라고 판단했었다.
채드윅 마틴에게서 구현기가 했던 말을 상세히 전달받기 전까지는.
‘Park의 빈자리를 가장 크게 느꼈을 Koo가, Park의 이야기를 꺼내면서까지 포지션 라이벌을 격려했다.’
오브라이언 감독은 선발 라인업을 기록하는 용지를 꺼냈다.
신시내티 레즈와의 4연전이자, 원정 10연전의 마지막을 장식할 내일 경기.
다른 선수는 모두 결정했지만, 유일하게 남겨둔 한 자리.
기존의 구상은, 만약 오늘 경기에서 승리하며 최소 동률 시리즈를 확보한다면 구현기에게 선발 기회를 주는 것.
그런데 채드윅이 오늘 미친 활약을 선보이면서 선발에서 제외하기가 약간 애매해졌다.
여론 따위의 문제가 아니라, 선수의 동기부여의 문제다.
그러나 다시 한번 확신했다.
기존의 구상을 그대로 밀고 나가도 되겠다고.
“알겠습니다! 내일 경기가 아니더라도, 기회를 주신다면 최선을 다해 임하겠습니다!”
자신의 기용 계획을 설명하고 양해를 구했을 때 채드윅이 한 대답이었다.
오늘 활약했음에도 다음날 선발에서 제외된다는 사실에 대한 불만은 찾아볼 수 없었다.
똑똑.
“들어오게.”
오브라이언 감독은 라인업 용지를 책상 아래로 치웠다.
지금부터 들어올 구현기에게 기쁜 소식을 더 극적으로 전하기 위해.
* * *
“자네는 내일 7번 유격수로 선발 출장할 거야.”
원정팀 숙소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내내 현실감이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뭐라고 대답했는지도 기억이 잘 안 난다.
만약 머릿속에 떠오른 걸 그대로 말했다면 대참사인데.
“왜요?”
싫다는 게 아니다. 당연히 좋지.
그런데 내가 알던 감독님 스타일상, 아직 나를 선발 유격수로 기용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경기 후반에 대수비로 출전시키면서 새로 바꾼 핸들링에 적응할 시간을 주겠다고 듣기도 했고.
[클레망 때문 아닐까?]
박도현은 조심스럽게 예측했다.
[솔직히 클레망이 복귀하고 나서도 바로 유격수를 맡기기엔 부담이 될 거 아냐.]
‘그렇긴 하지.’
손목 염좌는 큰 부상은 아니지만 재발하기 쉽다.
어쩌면 사흘 뒤 홈 개막전에서 클레망이 복귀하더라도 1루수, 혹은 대타로만 출전할지도 모르지.
아니면 상황을 봐서 복귀 시기를 약간 늦출 수도 있고.
‘그럼 내가 내일 경기에서 어지간히만 하면······.’
[기회가 더 올지도 모르지. 카일이 복귀하기 전까지 아예 유격수로는 채드윅과 너만 쓸 수도 있고.]
박도현의 예상이 맞다면, 이건 나한테 나쁜 상황은 아니다.
채드윅과 나는 둘 다 현재로서는 온전히 한 시즌을 맡기기는 어려운 자원.
당분간은 둘 다 꾸준히 기용하면서 저울질할 시간을 갖겠지.
채드윅의 포텐셜이 어느 정도인지는 내가 알 리가 없지만.
만약 만개해서 내가 밀려난다고 해도,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채드윅이 포텐을 터뜨리며 주전급 실링을 보여준다면―
‘최소한 카일은 바로 보내버릴 수 있어.’
[너 진짜 카일 어지간히도 싫어하나 보네······.]
박도현은 동료의 좋은 점만을 보려고 노력하는 편인데, 이럴 땐 그게 참 깝깝하다.
자기를 저격하는 인종차별 발언으로 출장정지까지 받았던 놈인데, 뭐가 예쁘다고 그리 감싸주는지 원.
‘얼른 가서 일찍 잠이나 자야지. 우리가 아무리 떠들어 봤자 내일 경기 말아먹으면 말짱 도루묵이야.’
[어제처럼 애들이 니 방에 쳐들어와서 죽치고 있으면 어떡하게?]
‘슬리퍼로 대가리 두 대씩만 때려주면······.’
그렇게 로비를 지나 엘리베이터로 다가가던 순간.
“아, Koo. 이제 들어왔구나.”
문이 열리면서 주전 2루수 조지 라모스가 성큼성큼 걸어나왔다.
“내가 메시지 보내둔 게 있을 텐데. 혹시 아직 확인 안 했나?”
“아, 예. 면담 끝나고 정신이 없어서······.”
“그래. 그럴 수 있지. 감독님께 소식 전해 들었어. 축하해, Koo.”
조지가 다가와 어깨를 두드려 줬는데.
표정이 없어서 그런가, 별로 축하받는다는 느낌은 안 든다.
“시범경기 때를 생각하면 정말 잘해주고 있는데, 나는 우리가 팬들에게 더 정교한 키스톤 플레이를 보여줬으면 좋겠어.”
“네, 그럼요. 저도 그래요.”
“그렇지? 그럼 우리 자기 전에 간단하게 사인 한 번만 더 맞춰보도록 할까?”
그리고 이럴 때 내 느낌은 대체로 정확하다.
사인이야 이미 숙지했으니 상관은 없지만, 조지랑 단둘이 있으면 상당히 부담스럽다.
평소엔 조용하면서 야구 얘기할 때만 말이 심각하게 많아지는데, 그 갭이 무섭다고 해야 하나.
[왜 그래. 좋은 사람이잖아.]
지 일 아니라고 신난 거 보소.
LA 돌아가면 박도현 방에 못질부터 하든가 해야지.
“Hey, Koo.”
그때, 저 멀리서 구원의 손길이 다가왔다.
어제는 다른 선수들과 모임을 가졌던 백업 1루수 랜디가 이쪽으로 오며 손을 흔들었다.
“다들 모여 있는데 왜 이렇게 늦어? 오늘은 나도 왔으니까 우리 라운지에서―”
“B―2 포메이션에서 주자 1, 2루야. 내가 너한테 이 사인을 보내면서 콜을 했어. 어디로 커버를 들어가야 할까?”
“―한잔하는 것보다 중요한 일이 이 세상엔 많지. 좋은 밤 보내!”
구원의 손길은 그대로 자연스럽게 유턴해 사라졌다.
뭐야 망할. 살려줘요.
* * *
조지와의 오붓한 대화는 1시간 정도로 간단(?)하게 끝났고.
꿈도 안 꾸고 푹 자고 나서, 다음날 아침이 밝았다.
[오늘의 할 일(2/3)]
[10포인트가 지급됩니다.]
[현재 포인트: 970]
“Koo!!! Koo!!! Koo!!! Koo!!!”
“Triple!!! Triple!!!”
스타팅 라인업을 소개하는 전광판.
유격수 자리에 내 이름이 올라온 것을 본 팬들이 열광했다.
경기 시작 전에 기사로 다 올라오니까, 이미 알고는 있었을 텐데도.
[그만큼 기대하고 있다는 거지.]
기대해주는 건 고마운데, 어떤 팬들은 트리플 플레이를 염원하는 피켓까지 가져왔다.
그런 허슬 플레이가 나온다는 건 애초에 투수의 공이 맞아 나간다는 뜻이니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닌데.
“플레이 볼!”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오늘 경기도 그렇게 될 확률이 비교적 높다.
오늘 양 팀의 선발 투수는 모두 5선발.
로테이션상 맨 뒤에 위치한 투수들인 만큼 치열한 타격전을 예상하는 사람들이 많을 테고―
“와아아아아아!!!”
1회 초 다저스의 공격은 팬들의 기대에 부응했다.
볼넷, 안타, 볼넷으로 무사 만루.
딱!
“아~!!!”
4번 타자 R.H.가 병살을 치면서 순식간에 아웃카운트 두 개가 올라갔지만, 그래도 선취 득점을 올렸고.
따아아악!
“루카스! 모처럼의 타점 기회가 날아가서 어쩐대?!”
“내가 아니라 어린놈들이 병살 쳤으면 큰일 날 뻔했네!”
5번 타자 루카스가 3루 주자를 여유롭게 불러들이는 2루타를 치면서, 나도 대기 타석으로 나갔다.
“Koo!!! Koo!!! Koo!!! Koo!!!”
대기 타석에서 스윙 연습을 하는 모습이 전광판에 비치자, 다저스 팬들이 다시 내 이름을 연호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제대로 쐐기를 박아줄 거라는 팬들의 기대감을 엿볼 수 있었지만.
따아아아악―!
거의 넘어갈 듯했던 타구가 중견수의 점프 캐치에 뜬공으로 둔갑했다.
타자 주자 랜디가 달리다 말고 헬멧으로 경의를 표할 정도의 호수비.
어제 날 버리고 가더니 천벌을 받은 모양이다.
“어제 하던 대로! 알지? 잘 치고 잘 잡자!”
“Let’s go!!!”
“Dodgers!!!”
기세등등하게 외치는 선발 야수들 틈바구니에서, 나도 목청을 높였고.
원정팬들의 박수를 받으며 그라운드로 입장한 다저스 야수진은 1회 말 수비를 삼자범퇴로 끝냈다.
“······.”
다만, 다들 덕아웃으로 들어와 기쁨을 나누는 가운데.
나는 하얗게 불타올라 재만 남은 채 물만 겨우 마셨다.
“저기, Koo. 너 바로 타석으로 나가야 해.”
“네······.”
아직도 쿵쾅대는 가슴을 붙잡고 타석으로 나갔지만, 결과는 헛스윙 삼진.
“괜찮아, Koo!! 잘했어!!! 이대로만 가자!!!”
“삼진 좀 당하면 어때?! 넌 최고야!!!”
그러나 원정팬들은 오히려 잘했다며 격려를 보냈다.
그래야지. 양심이 있으면 나한테 비난은 못 보내지.
1회 말 아웃카운트는 각각 유격수 땅볼, 유격수 라인드라이브, 다시 유격수 땅볼.
모든 아웃카운트를 내 손으로 처리했으니까.
‘이 새끼들, 타구 내 쪽으로만 보내기로 작정했네.’
신시내티 레즈의 작전 야구가, 내 메이저리그 유격수 선발 데뷔전을 위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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