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다저스의 주전 유격수(7)
상대 팀의 약점을 파고드는 것은 현대 야구의 기본 전술.
수비가 약한 야수 방향으로 타구를 유도하는 것은 전략 축에도 끼지 못한다.
게다가 다저스 5선발 아드리안 빌라는 떨어지는 슬라이더와 체인지업을 즐겨 쓰는 투수.
이런 구종의 제구가 잘 돼서 땅볼이 나오면 차라리 다행이지.
구위 자체가 탁월하진 않아서 조금만 몰려도 라인드라이브 타구가 양산된다.
따악―!
바로 지금처럼.
투수 옆을 지나가는 안타성 타구를 향해 몸을 날렸다.
바닥에 엎어진 채 미끄러지면서 2루심을 향해 글러브를 벌려 보였고.
“아웃!”
안타를 확신한 듯 1루만 보고 달리던 타자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이쪽을 쳐다본다.
뭘 쳐다보고 있어. 아웃됐으면 쳐 들어가기나 하지.
내 쪽을 노리는 작전은 무의미하다고 전해주면 더 좋고.
“I Love you, Koo!”
오늘의 선발 투수 아드리안의 우렁찬 사랑 고백.
방금 내 수비로 4이닝째 기록 중인 퍼펙트를 지켜냈다.
“이 개자식들아!!! 안타 하나 치는 게 그리 어렵냐!!!”
“어떻게 치는 족족 저딴 새끼한테 다 붙잡혀!!!”
털 잔뜩 난 마초의 고백보다야 상대 팬들의 야유가 훨씬 감미롭지.
상대 입장에서도 억울하긴 할 거다.
땅볼이야 그렇다 쳐도, 라인드라이브 타구는 기본적으로 잘 갖다 맞혔다는 뜻이니까.
특히 몇 걸음 안 움직이고 잡아낸 1회 말 라인드라이브와는 달리, 이번 타구는 그냥 내가 잘 잡아낸 거지.
[메이저리그에서 호수비를 기록했습니다.]
[30포인트가 지급됩니다.]
[현재 포인트: 1,000]
그래서인지, 시스템도 내 활약을 인정하며 포인트를 하사했다.
“저기, Koo······.”
“예! 갑니다!”
앉아서 쉬고 있을 시간은 없다.
1회에 흔들리던 상대 투수가 나를 삼진으로 잡고 나서 정신을 차렸는지, 2회부터 4회까지는 싹 다 삼자범퇴.
5회 초 선두 타자로서 두 번째 타석을 소화하게 됐다.
따아악―!
‘아오 진짜!’
가운데로 치기 좋게 몰린 체인지업을 제대로 당겨친 것까지는 좋았는데.
배트에 닿자마자 빗맞았다는 느낌이 왔다.
“아웃!”
타구가 내야를 벗어나지 못하면서 그대로 내야 플라이 아웃.
1루 베이스를 돌아 덕아웃으로 향하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유격수는 타율 좀 까먹어도 봐준다는 게 이래서구나.’
1회처럼 3개의 아웃카운트를 전부 처리한 건 아니다.
애초에 그건 대놓고 노린다고 해도 운이 따라줘야 하는 결과였지.
그래도 전체 아웃카운트의 어림잡아 절반 정도는 내 손으로 만들어냈다.
수비 때문에 타격에 온전히 집중하기 힘들다는 게 이런 건가 싶어 혀를 내두르는데.
박도현이 꼭 그런 것만도 아니라며 끼어들었다.
[지금 상황이 좀 특수한 거지.]
‘특수하다고?’
[너한테 타구가 자주 가도록 상대가 전략을 짜왔잖아. 게다가 너 이번 경기에선 선두 타자로만 나갔고]
이닝의 선두 타자에겐 시간이 많이 주어지지 않는다.
숨 좀 고르고, 방금 수비 상황 복기하고, 스윙 연습 몇 번 하면 끝이다.
그래도 이건 어찌 보면 핑계다. 잘 치는 타자는 어떤 상황에 데려다 놔도 어지간히 치니까.
[물론 나하고는 상관없는 얘기지. MVP랑 유격수 골드 글러브 동시 수상 아무나 하는 거 아니다. 알지?]
이때를 놓칠세라 지 자랑을 하는 박도현을 무시하면서 클레망에게 다가갔다.
“클레망, 오늘 경기 뛰어보니까 알겠네요. 진짜 대단해요.”
“어? 나?”
“네. 유격수 골드 글러브랑 MVP 동시에 따낸 거, 진짜 엄청난 거였더라고요. 존경해요.”
“에이, 뭘······ 갑자기 칭찬하고 그래, 민망하게.”
[야!!! 클레망은 그거 동시에 탄 거 한 번밖에 없잖아! 나는 세 번이고! 야! 무시하냐?!]
박도현이 덕아웃 안에서 혼자 날뛰는 동안, 5회 초 다저스의 공격이 삼자범퇴로 끝났다.
* * *
내 유격수 수비 시 핸들링 방식이 변했다는 것까지는 분석되지 않았을 확률이 높다. 사실 분석돼도 어떻게 해볼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고.
하지만 바보가 아닌 이상, 내 수비가 시범경기 때보다 개선됐다는 걸 눈치는 챘을 거다.
“볼!”
그래도 신시내티 레즈는 작전을 철회하지 않았다.
유격수 선발 데뷔전에서 동료가 퍼펙트게임에 도전한다는 특수한 상황.
극도의 긴장에 빠진 내가 실책이라도 저지른다면, 그만큼 후유증이 심하게 남을 거란 계산이겠지.
같은 지구는 아니라도 어쨌든 내셔널리그. 타격감이 좋은 선수의 기를 죽여놓을 수 있다면 이득이니까.
“볼!”
그런데, 내 생각보다 한 수 더 내다본 모양이었다.
퍼펙트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은 야수들만 하는 게 아니다.
지금까지는 실책은커녕 안타도 지워내는 수비를 보여주고 있지만.
투수 입장에서 오늘 유격수로 처음 선발 출장하는 나는 언제 터질지 모를 시한폭탄이나 마찬가지.
“볼!”
유인구를 던지는 투수와 신중하게 접근하는 타자.
이 두 사람이 만나면 결과는 뻔했다.
“볼! 베이스 온 볼스!”
6회 말 1사 상황에서 스트레이트 볼넷.
투수가 자기 손으로 퍼펙트 행진을 끊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어.”
오늘 처음 마운드로 올라온 투수 코치가 내야수들을 소집했다.
“투수는 공을 던지고, 포수는 받고, 야수들은 타구를 막아내고. 우리가 늘 해오던 거지. 그리고 지금까지도 아주 잘하고 있어.”
투수 코치는 지금 막 퍼펙트가 날아간 아드리안의 멘탈을 돌보는 한편, 나한테도 꽤나 신경을 쓰는 것 같았다.
“Koo, 긴장하고 있나?”
“아닙니다.”
“그게 사실이라면 자네는 메이저리그 최고의 유격수가 될 거야. 지금은 긴장해도 돼. 실책을 해도 되고.”
투수와의 의견 조율을 마친 발언은 아니었는지, 아드리안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생각이 복잡해지면 야수는 아무것도 못 해. 그럴 바엔 차라리 머릿속을 비워버리는 게 더 나을 수도 있어.”
“생각은 비우되, 적당히 긴장만 하겠습니다.”
“아드리안, 들었지? Koo가 모범 답안을 말해줬으니 이대로만 하도록.”
내내 딱딱하던 분위기가 처음으로 풀어졌다.
그러나 아드리안의 기분이 완전히 풀어지지 않았다는 것쯤은 누가 봐도 알 수 있었다.
아드리안은 커다란 덩치와 호쾌한 리액션과 어울리지 않는 기분파 투수.
기분에 따라 제구가 오락가락하는 편인데, 제구가 안 되면 또 제구가 흔들리는 악순환에 빠지며 강판당하곤 했다.
때문에 한 차례 불펜으로 강등됐다가 개선되면서 다시 선발진에 합류했는데, 다시 예전 모습이 슬금슬금 고개를 드는 듯했다.
‘이번 이닝이 승부처다.’
안타 하나라도 나오는 순간 와르르 무너질 확률이 높다.
그렇다고 선발 투수가 노히터 중인데 지금부터 불펜을 가동할 수도 없고.
결국은 무조건 막아내는 수밖에 없는 셈.
따악―!
그러나, 투수가 흔들린다는 걸 상대 팀이 모를 리가 없었다.
3―유간 코스로 정확하게 날아오는 명백한 안타성 타구.
저걸 놓친다고 해서 나를 비난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에이 씨!’
아웃카운트 하나에 목숨 걸지 마라.
정작 본인은 지키지도 못하면서, 클레망이 입에 달고 사는 말.
타구를 향해 몸을 날리면서, 클레망이 왜 그러는지 대충이나마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미 내 머릿속에 대충 타구의 궤적이 그려졌는데, 이걸 어떻게 참아. 잡고 봐야지.
툭!
타구가 글러브에 맞고 아래로 튕겨 나갔다.
이것만으로도 이미 기적에 가까운 플레이.
그러나 내 플레이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루!”
목청껏 외치는 동시에, 오른손으로는 조지를 향해 2루 커버 사인을 보냈다.
콜은 페이크. 진짜는 사인.
조지가 2루로 들어가는 동안, 내 의중을 파악한 랜디가 1루로 돌아가 포구 동작을 취한다.
1루 주자 쪽을 몸으로 가리긴 했는데, 공이 떨어진 게 보였는지는 나도 모른다.
그보다 중요한 건, 타구가 라인드라이브로 잡혔을지도 모른다는 강렬한 의심을 주자에게 심어주는 것.
내 수비 기본기가 떨어지기는 해도, 클러치 상황에서 놀라운 집중력을 발휘한다는 걸 시범경기에서 레즈도 확인했을 테고.
더군다나 나는 오늘 라인드라이브 타구를 두 번이나 잡아낸 유격수.
“어?! 야!!! 저 새끼 뭐 해!!!”
“2루!!! 2루 가야지!!!”
홈팀 덕아웃과 1루 코치의 신호를 확인한 주자가 다시 몸을 돌려 2루로 향했지만.
“아웃!”
그리고, 타자 주자는 1루 주자의 역주행에 정신이 팔려 속도를 줄였다.
물론 1루 코치의 콜에 금방 상황을 파악하긴 했지만.
공을 떨어트리며 생긴 딜레이를 메꾸기에는 차고 넘치는 시간.
"아웃!"
주자들의 본헤드 플레이로 더블 플레이.
아드리안의 노히터는 끝나지 않았다.
“으아아아아!!!”
아드리안이 고함을 지르며 내 쪽으로 뛰어오는데, 솔직히 진짜 곰인 줄 알았다.
도망칠 틈도 없이 그대로 땀내 나는 품에 갇혀버렸다.
“Koo!!! 네가 내 수호천사였어!!! 빌어먹을!!! 진작 널 믿었어야 했는데!!!”
안 돼요. 싫어요. 도와주세요.
왜 내 의사도 안 물어보고 나를 수호천사로 삼는데.
* * *
7회 초 다저스의 공격.
2사 주자 1루 상황.
“머리 잘 쓰던데, 얼마나 단단한지 확인해봐도 불만 없지?”
상대 포수는 내가 타석에 들어서자마자 으르렁댔다.
아니꼬울 만도 하지. 결국 노히터도 못 깬 데다가, 두고두고 웃음거리가 될 만한 명장면도 만들었으니까.
“너희 투수한테 그럴 용기가 있다면 얼마든지.”
최대한 재수없는 말투로 대꾸했다.
노히터 중 빈볼은 비매너 중의 비매너지만, 비난을 감수할 각오만 있다면 그만큼 효과는 크다.
빈볼을 당한 팀으로서도 보복하기가 애매해지거든.
벤치 클리어링을 열 수도 없고, 보복구도 당연히 못 던지고.
그러나 내심 웃음을 지었다.
‘몸으로 말해요’의 부가 능력, 빈볼 감지가 전혀 발동하지 않았으니까.
쐐애애액!
빈볼을 의식하게 해놓고 카운트를 잡을 생각이었는지, 존 안쪽으로 들어오는 패스트볼.
딱히 위력적이지도 않고 코스도 애매한 몸쪽.
이런 공은 머리 쓸 필요 없이 그냥 당겨버리면 그만이다.
따아아아아악―!
앞선 두 타석의 울분을 씻어내는 호쾌한 투런포가 그레이트 아메리칸 볼파크의 좌측 외야석에 틀어박혔다.
아, 선두 타자 아니니까 이렇게 편안할 수가 있나.
아무래도 내가 리드오프 체질은 아닌 모양이다.
* * *
[‘5선발의 반란’ LA 다저스 아드리안 빌라, 2037 시즌 메이저리그 첫 노히트노런 달성!]
[아드리안 빌라, “Koo는 나의 수호천사. 그를 나의 전담 유격수로 써달라.”]
[LA 다저스 필릭스 오브라이언 감독, “우리 팀에 전담 유격수라는 제도는 없다. 다만 피칭에 도움이 된다면 라인업 구상에 참고는 할 것.”]
[“우리 퍼펙트는 날리더니”··· 안타 지우개 Koo, 자이언츠 팬들은 ‘부글부글’]
[수비력에 트릭 플레이에 장타력까지··· 다저스 오브라이언 감독, 이래도 Koo가 주전감이 아닌가요?]
내 호수비 덕분이라고만은 할 수 없지만, 어쨌든 흥이 올라온 아드리안은 기어이 노히터를 달성해버렸다.
내일은 휴식일이니 LA로 가자마자 진탕 마시자고 달라붙는 걸 겨우 떨쳐냈다.
인상적인 수비와는 달리 타석에서의 성적은 약간 주춤한(?) 3타수 1안타 1홈런. 시즌 2호 홈런이었다.
“어, Koo. 그 공은 뭐야?”
“홈런볼. 볼걸이 갖다주더라.”
“아, 관중이 집어던졌댔나?”
분노한 레즈 팬이 홈런볼을 그라운드에 집어던지는 바람에 뜻밖에도 돌려받을 수 있었다.
시즌 1호이자 통산 1호 홈런은 하필 자이언츠의 퍼펙트를 깨트리며 쳐냈었지.
회수하지 못할까 봐 진지하게 걱정했는데, 기적적으로 중립 야구팬 손에 들어간 덕에 내 손으로 돌아왔다.
“어디 장식이라도 해놓게?”
“그래야지.”
박도현이 방에 전시하던 물건들을 다저 스타디움과 한국의 본가에 옮기면서 공간이 많이 남았다.
그 공간을 이제는 내 흔적으로 채워야겠지.
[내 장식장 장난 아니게 큰 거 알지? 다 채우려면 빡세게 굴러야 할 거다.]
‘응. 그거 치우고 새로 맞출 거임.’
그런 시답잖은 대화를 나누는 사이, 선수단을 태운 비행기는 그리운 LA에 도착했다.
“개막부터 원정 시리즈를 치르느라 고생들 많았어. 하루 푹 쉬고 다저 스타디움에서 만나자고.”
“예!!!”
감독님의 짧은 훈화와 함께 선수들은 각자 해산했다.
도착이 늦어졌으니 다들 집으로 갈 테고. 나도 주차장으로 향하는데.
“Koo, 잠깐만 나 좀 볼까?”
클레망에게 붙잡혀 선수단 주차장 구석 외진 곳으로 향했다.
무슨 살벌한 소리를 하려고 이런 곳에 불렀나 솔직히 조금 쫄렸는데, 클레망은 전혀 뜻밖의 질문을 던졌다.
“채드윅이 3안타 쳤던 날 있잖아. 경기 시작 전에 나한테 와서 질문을 하더라고. 혹시 뭐라고 물었을 것 같아?”
“그야······ 타격에 관한 질문 아니었습니까?”
“틀렸어.”
클레망이 고개를 저었다.
“다저스의 주전 유격수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러더라고.”
도대체 그 질문에 뭐라고 답해줬길래 채드윅이 안타를 뻥뻥 때려낸 걸까, 조금 궁금해졌다.
그러나 그걸 물어볼 새도 없이, 클레망이 먼저 물었다.
“너는 어때, Koo? 다저스의 주전 유격수가 되고 싶은 생각이 있어?”
채드윅의 간절함과 나의 간절함은 서로 약간 다를 수 있다.
내 경우는, 포지션 상관없이 명예의 전당에 오르는 것이 목표.
어쩌면 ‘인생을 걸고 한다’라는 표현에 직접 들어맞는지도 모르겠다.
“당연하죠.”
다저스의 유격수여야만 한다는 간절함과는 조금 다르다.
그러나 클레망의 성격상, 내가 조금이라도 머뭇거린다면 확신을 갖지 못할 거다.
박도현처럼 자신의 뒤를 이을 만한 간절함이 있다는 확신을.
“그러면 내가 알려줄게. 내가 다저스의 유격수로 뛰어오면서 배워온 것들. 전부 다.”
클레망이 미끼를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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