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신 들린 천재 타자-41화 (41/200)

41. 돌아오다(1)

지옥의 원정 10연전을 마치고 주어진 하루의 휴식일.

열한 시쯤 눈을 떠서, 한 시간 넘게 핸드폰만 붙들고 있다.

[진짜 하루 종일 이러고 있게? 어디 안 나가?]

‘할 게 얼마나 많은데. 같은 지구 팀 경기 영상 보고. 투수들 피칭 데이터도 확인하고.’

[어차피 맥주 마시면서 볼 거 아냐! 그게 노는 거지! 그럴 거면 나가서 노는 게 낫겠다!]

다저 스타디움에 오랫동안 지박령 비슷하게 묶여 있던 탓인가, 박도현이 더럽게 찡찡댄다.

불러주는 곳은 많은데 솔직히 나가기가 싫다.

고작 여섯 경기. 그것도 선발 출장은 두 경기뿐인데도 기력이 다 빨린 것 같아서.

‘마이너 안 가겠다고 시범경기에서 발악한 후폭풍이지.’

그나마 ‘체력은 근력’의 보정도 받고, 애초부터 체력 단련을 꾸준히 해 왔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10연전 도중 진짜로 퍼졌을지도 모른다.

나름 회복이 빠른 체질이니, 오늘 잘 먹고 푹 쉬면 내일은 정상 컨디션으로 돌아올 거다.

[나 때는 놀러도 다니고 여자도 만나고 할 거 다 했어! 노오오오력이 부족하다 이 말이야!]

‘알아. 내가 너 퍼질러 자는 동안 아침밥 차려준 여자들이 어디 한둘이냐.’

내가 박도현을 재능충이라고 생각하는 가장 큰 이유다.

시즌만 끝났다 하면, 가끔은 시즌 중에도 여자랑 잘만 놀아나면서도 전설적인 성적을 유지했으니까.

누구는 야구에만 절박하게 매달려서 올라간 게 3선발까진데.

얘는 한두 달 잘 사귀다가 현타 왔다면서 한 1년 잠잠하고. 다시 다른 사람이랑 한두 달 불태우고 그랬지.

‘너랑 헤어지고 나서 나한테 들이대는 또라이도 있더라.’

[아, 걔? 둘이 사귀면 내가 집 비우고 도망치려고 했는데.]

‘보통은 나를 쫓아내려고 그러지 않나······?’

그렇게 방 안에서 뒹굴대고 있는데, 다시 전화가 걸려 왔다.

또 누구인가 싶어 확인해보니 에이전트 데릭이었다.

[Koo, 원정 다녀오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컨디션은 좀 어떠신가요?]

“네, 데릭. 오늘 푹 쉬면 괜찮아질 것 같네요.”

[다행입니다. 오늘 연락드린 건 다름이 아니라······.]

데릭은 전혀 예상치 못한 소식을 전해줬다.

바로 기업으로부터 스폰서십 제안이 들어왔다는 것.

“솔직히 벌써 올 거라고는 생각 못 했네요.”

[이미 전에도 비슷한 제안은 꾸준히 왔습니다. 다만 그때는 ‘포기하지 않는 열정’ 같은 이미지 마케팅이 대다수였고, 금액도 상식 밖이었기에 내부에서 커트했을 뿐이죠.]

“잘하셨어요.”

어차피 스폰서십은 돈 보고 하는 것.

액수가 성에 차지 않는 계약에 휘둘려 집중 못 하는 것만큼 미련한 게 없다.

데릭에게서 새로 들어온 제안을 상세히 들어본 내 감상은.

“확실히······ 투수 때랑 비교하면 많이 깎였네요.”

큰 기복 없이 활약하는 강팀의 젊은 선발 투수.

스포츠 관련 기업에서 눈독 들일 만한 요소를 갖췄기에, 최저연봉보다 조금 더 받던 시절에도 돈이 궁하진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액수는 성의의 문제다.

[아직까진 위험 부담이 있다고 판단했을지도 모르죠.]

데릭의 냉정하지만 정확한 분석.

아직 마이너 옵션이 남아 있는 나는, 구단에 확신을 주지 못한다면 카일의 복귀와 함께 강등될 가능성이 남아 있다.

어차피 기간도 죄다 단년. 해서 손해는 안 된다는 생각에 잠시 고민했지만.

“전부 거절해주세요.”

투수 시절보다 더 받겠다는 생각은 없었지만, 최소한 자릿수는 같아야지.

지금의 활약을 카일이 복귀하기 전까지 이어 나간다면, 시즌 내내 메이저에 남을 확률이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갈 테니.

그때 가면 지금보다 몸값이 훨씬 올라가겠지.

[알겠습니다, Koo. 힘내십시오.]

응원의 말을 남기고 데릭은 전화를 끊었다.

어차피 당장은 받을 생각도 없는 돈이지만, 뭔가 헛헛한 기분.

‘맥주는 생략하자.’

메모지와 펜을 준비하고 나서, 홈시어터에 경기 영상 파일을 재생했다.

* * *

홈 개막전을 앞둔 다저 스타디움의 클럽하우스.

일찍 출근한 야수조의 젊은 선수들은 간단하게 점심을 먹고 나서 몸을 풀기 전 짧은 휴식을 즐겼다.

“잘 들어, 채드윅. 우리 다저스에 마음 여린 사람은 필요 없어.”

“어, 응.”

말릭이 채드윅을 붙잡고 거들먹거렸다.

또 무슨 헛짓거리를 하려고 저러나, 다들 흥미롭게 지켜봤다.

“어디 우리 팀에 어울리는 인재인지 시험해보자고. 내가 상황을 하나 던질 테니까 잘 생각하고 대답해. 매정하게 말이야.”

“응, 알겠어! 매정하게, 매정하게······.”

“OK. 저기, 채드윅. 상대 팀인 내가 이런 말 하기 민망하지만, 사실 내 조카가 네 팬이야. 미안하지만 사인 하나만 해주지 않겠어?”

“X까.”

착한 얼굴에 그렇지 못한 대답.

어안이 벙벙한 말릭을 뺀 나머지 선수들은 배꼽을 잡고 뒤집어졌다.

“장난해?! 이건 매정한 게 아니라 인간쓰레기잖아!”

“어?! 이렇게 하는 거 아냐?!”

“프흐흐흐흙. 욕하는 거 이렇게 어색한 사람 처음 보네.”

“채드윅, 넌 앞으로 이렇게 밀고 가면 되겠다. 상대 포수가 같잖은 트래시 토크를 걸면 지금 이렇게 ‘X까’ 한마디만 해줘.”

“맞아. 지가 방금 욕먹은 건가 싶어 멍 때리다가 블로킹도 제대로 못 할걸?”

불쌍한 채드윅.

건수 하나 잡으면 최소 1년은 놀려먹는 악랄한 놈들인데.

“안녕. 다들 일찍 나왔네?”

누군가의 등장에 시선이 전부 그쪽으로 몰렸다.

다저스의 주전 1루수이자, 카일의 공백을 메꾸려 유격수로 나오고 있는 클레망 파로.

아직까지 왼손에서 사라지지 않은 보호대를 발견한 선수들이 우르르 몰려갔다.

“클레망! 어제 잘 쉬었어요?”

“손목에 그거 아직 안 뺐어요? 나으려면 시간 더 걸린대요?!”

클레망이 자기 손목을 내려다보며 웃었다.

“아니, 많이 괜찮아졌어. 이번 주 동안은 경기 중엔 어쩔 수 없어도 평소에는 끼고 다니는 게 나을 것 같대서.”

다들 다행이라며 가슴을 쓸어내린다.

클레망의 공백이 길어지면 팀 사기에도 영향이 크겠지.

굳이 겸손하게 굴지 않아도 누구나 떠받들어 줄 커리어를 가졌는데도, 후배들을 가장 세심하게 챙기는 사람이니까.

그나저나, 하며 클레망이 나와 채드윅을 쳐다봤다.

“Koo, 채드윅. 그때 약속했던 거, 시간 있으면 지금 바로 시작할까?”

“예! 좋습니다!”

“저도 좋아요.”

“그래, 그럼 가자. 다들 잘 쉬고 이따 봐.”

“이따 봐요, 클레망!”

“우리도 슬슬 가서 몸 좀 풀자. 실책하면 로버트한테 또 무슨 말을 들으려고.”

단체 훈련 소집 전까지 개인 루틴에 따라 몸을 데우기 위해 다들 뿔뿔이 흩어졌고.

클레망을 따라 도착한 곳은 수비 훈련 시설.

“너희 둘을 같이 봐주는 게 서로 불편할 수 있다는 건 아는데, 나도 시간이 여유롭지가 않아서.”

“아닙니다! 이렇게 시간 내주시는 것만 해도 너무 감사합니다!”

“맞아요. 늦둥이 넷째 아빠한테 경기 끝나고도 시간 내달라고 하면 고소당해도 싸죠.”

주전 유격수가 되고 싶어 하는 두 사람을 같이 몰아놓은 건데도, 분위기는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서로 스타일이 다르기도 하고, 무엇보다 채드윅이 나를 꽤 괜찮게 보고 있기도 해서.

“Koo, 너랑 경쟁할 수 있어 영광이야. 누가 주전 자리를 차지하더라도 서로 응원해주는 거다!”

눈을 똑바로 쳐다보기 힘들 정도로 올곧은 태도.

나는 포인트 때문에 입을 털었을 뿐인데. 만약 나한테 양심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었다면 힘들었을 뻔했다.

“일단 너희 각자 수비하는 방식이 있을 테니까, 진짜 치명적인 문제가 없는 한 그건 그대로 갈 거야.”

당연한 말이었다.

마이너 수비 코치도 아니고, 아무리 먼저 가르침을 청했다고 해도 수비 동작에 손을 대는 건 선 넘는 일이지.

그것 말고도 가르쳐줄 수 있는 건 많으니까.

“부상을 방지하는 플레이 습관. 내가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거야. 이거는 개인적으로 꼭 익혀줬으면 좋겠다.”

클레망은 성치 않은 몸으로도 친히 시범을 보여줬다.

급하게 송구할 때 어깨가 뒤틀리는 걸 방지하는 법이나, 슬라이딩할 때 무게중심을 어떻게 둬야 배부터 떨어질 수 있는지 등등.

토미 존 서저리를 받고도 유격수로 복귀한 선수가 쌓아올린 처절한 노하우들을, 나와 채드윅은 하나라도 놓칠세라 꼼꼼히 메모했는데.

‘니가 알려준 거랑 겹치는 게 꽤 있는데?’

어째 좀 익숙하다 했더니, 박도현이 강조했던 것들이 섞여 있었다.

[당연하지. 나도 클레망한테 엄청 많이 배웠으니까.]

메이저 풀타임 경력이 고작 5년밖에 안 되면서 뭐 이리 세세한 것까지 알고 있나 싶었는데, 이제야 의문이 풀렸다.

“근데 채드윅과 Koo, 둘 다 체격이 약간 다르잖아. 이럴 땐 무릎의 각도를 약간 다르게 가져가는 게 좋은데······.”

물론 그렇다고 해서 도움이 안 된다는 건 절대 아니다.

박도현과 나는 키를 비롯해 신체 조건이 꽤 다른데, 클레망이랑은 비슷한 편이니까.

자기 피지컬을 기준으로 설명해주는 게 진짜 머릿속에 쏙쏙 박힌다.

“클레망, 아직 먼 얘기지만 은퇴하면 무조건 수비 코치를 하세요. 아니다. 개인 인스트럭터로 나가면 진짜 대성할 거예요.”

“마, 맞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수비에 접근해본 건 처음이에요! 마치 혁명 같습니다!”

“에이 참, 뭘 띄워주고 그래······.”

뺨을 긁적이며 쑥쓰러워하더니, 클레망이 이만 정리하자며 일어섰다.

“오늘 할 내용은 여기까지거든? 보조 코치님한테 내가 말을 해놓을 테니까, 이번 주 동안 둘이 하루에 30분씩 연습을 해보자.”

“알겠습니다!!”

“그래. 궁금한 거 있음 언제든 물어보고.”

클레망은 가다 말고 무언가 떠오른 듯 다시 이쪽으로 돌아왔다.

“아, 그리고 너희도 이미 들었겠지만, 로버트 경기 때 말고는 너희한테 기회가 번갈아서 갈 거야.”

로버트는 야수들의 수비력에 상당히 예민한 투수.

자기 경기에서 무너지는 모습을 보인 채드윅과, 유격수 경력이 현저히 적은 나는 아직 신뢰를 못 받은 모양이다.

“그때는 내가 아마 1루수나 대타로 나갈 텐데, 너희 수비하는 걸 보면서 내가 또 피드백 줄 게 있으면 해줘도 될까?”

“당연하죠! 저희가 부탁드려도 모자란데요!”

“해주시면 감사히 받겠습니다.”

이미 아쉬운 플레이에 대한 피드백은 박도현에게 받고 있지만, 베테랑 유격수가 자기 관점에서 봐주는 것도 소중한 경험.

굳이 거절할 필요 없는 좋은 기회였다.

그렇게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채드윅이 갑자기 손을 들고 질문했다.

“저, 그런데 저희한테 이렇게 해주셔도 괜찮은 겁니까?”

“응? 뭐가?”

“원래 주전 유격수였던 선수 입장에서는, 약간 그······.”

클레망의 표정이 굳었다.

채드윅 얘가 박도현이랑 키만 비슷한 게 아니라 눈치도 비슷했네.

뭐라 대답해야 할지 망설이던 클레망이 이내 채드윅의 어깨를 붙잡고 말했다.

“채드윅. 솔직히 말하면, 나는 카일이 마음에 들지 않아. 하지만 이것보다 더 자세히 말하면 험담이 될 것 같아.”

클레망이 호구 소리를 듣는 이유가 바로 이런 부분 때문.

그냥 인종차별이나 하는 X신이랑 상종하기 싫다고 시원하게 쏘아붙이지를 못한다.

아프리카계 미국인인 클레망에게도 인종차별 때문에 받은 상처가 분명 있었을 텐데 말이야.

* * *

기나긴 개막 원정 시리즈를 끝내고 맞이한 홈 개막전.

선발 투수는 에이스 로버트 켈리.

게다가 상대 팀은 고산지대에서 내려온, 같은 내셔널리그 서부지구의 콜로라도 로키스.

홈팬들이 승리를 예측할 근거로는 충분했다.

아직 승률을 따지기에는 한참 이른 시기지만, 콜로라도 로키스는 내셔널리그 서부지구 최하위를 기록하고 있다.

리빌딩으로 긁어모은 특급 유망주를 대거 콜업했는데, 아직 적응 기간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런데 그 적응을 지난 시리즈에서 끝내고 왔던 걸까.

따아아아악―!

1회부터 연속 안타를 허용했지만 1실점으로 꾸역꾸역 버텨오던 로버트였지만.

5회 초, 관중석 상단까지 날아가는 대형 투런포를 얻어맞고 말았다.

“고생하셨어요, 로버트!”

“고생하셨습니다!”

이닝은 끝마쳤지만, 5회까지 94구를 던진 로버트의 역할은 여기까지.

아쉬운 피칭 내용에 로버트가 다시 덕아웃 지정석에서 명상에 잠겼다.

‘얘네 상대로는 쉽게 갈 줄 알았는데.’

당장 홈런을 때린 타자만 해도 지난 시리즈까지 15타수 무안타 행진을 기록하던 선수.

아예 박살이 났던 개막전과 비교하면 5이닝 3실점이라는 기록 자체는 나쁘지 않았지만.

역시나 본인은 만족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아웃!”

“스트라이크 아웃!”

“아웃!”

반면 다저스 타자들은 콜로라도의 에이스에게 내내 끌려다니는 양상이었다.

좋은 투수지. 극도의 타자 친화 구장 쿠어스 필드를 홈으로 쓰면서 3점대 중반의 ERA를 기록했으니까.

거기다 오늘 긁히는 날이기까지 하니, 7이닝 동안 산발적으로 다섯 개의 안타만을 뽑아내는 데 그쳤다.

“아웃!”

“아웃!”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그나마 다저스도 앤서니 아우젤로가 2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아내 주면서 후반을 도모할 수 있게 됐다.

게다가 7회 말, 상대 선발의 승계 주자 한 명을 불러들이며 한 점 따라붙은 상태.

“Koo, 8회부터 대수비로 들어갈 거야.”

아직 만전의 상태가 아닌 클레망에게 휴식을 주기 위해서인지 감독님이 교체 투입을 통보했고.

8회 초, 전광판에 내 이름이 떠올랐다.

[SS: Clément Paro → Hyun―Ki Koo]

“Koo!!! Koo!!! Koo!!! Koo!!!”

원정 시리즈에서의 내 활약을 지켜봐준 팬들이 내 이름을 연호했다.

이곳에서 이 목소리를 다시 듣게 되는 날이 언젠가 올 거라곤 생각했는데.

모자를 푹 눌러쓴 채 클레망과 하이파이브를 하며 그라운드로 뛰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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