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신 들린 천재 타자-42화 (42/200)

42. 돌아오다(2)

홈 개막전의 선발 라인업이 발표됐을 때, 내가 벤치라는 사실에 아쉬워하는 팬들이 많았다.

그도 그럴 게, 내가 마지막으로 다저 스타디움에서 치른 경기가 재작년 9월이다.

게다가 원정 시리즈에서 쏠쏠한 활약을 보여주고 있으니, 홈에서 만나는 걸 더욱 기대했겠지.

그렇게 8회 초.

열렬한 환호를 받으며 대수비로 투입된 지 약 10분.

“Koo!!! 한동안 잠잠하더니 또 시작이냐!!!”

“감독 개자식아!!! 도대체 왜 Koo를 유격수로 쓰는 거야?!”

교체 투입될 때의 환호는 어디 가고, 홈팬들은 죽일 듯 야유를 퍼부었다.

[야, 정신 똑바로 차려. 멘탈 나간 거 아니지?]

‘멘탈이 왜 나가냐, 내 잘못인데.’

원아웃 주자 2루 상황.

유격수 정면으로 오는 타구를 잡아낸 것까진 좋았는데.

스타트를 끊은 주자를 잡아낼 수 있겠다고 판단해 3루로 뿌렸지만, 송구가 살짝 빗나가며 3루수의 태그가 늦어졌다.

주자 올 세이프로 1사 1, 3루.

야수선택으로 기록되겠지만, 실책성 플레이가 맞다.

“괜찮아, Koo! 원 아웃!!”

“이미 끝난 건 어쩔 수 없어! 집중하자! 집중!”

3루수 켄과 2루수 조지가 양쪽에서 소리친다.

아마 관중들의 야유에 흔들리지 않을까 걱정하는 거겠지.

근데 내가 메이저에 처음 올라온 것도 아니고. 투수로 뛰면서 경기 말아먹었을 땐 원색적인 욕설도 들어봤다.

욕먹어도 억울할 게 없는 상황인데, 이 정도 가지곤 끄덕없지.

따아아악―!

희생플라이로 3루 주자가 홈을 밟으며 2점의 점수 차가 다시 3점으로 벌어졌지만.

“스트라이크 아웃!”

삼진으로 마지막 아웃카운트를 잡아내면서 이닝 종료.

덕아웃으로 돌아오자마자 감독님의 호출을 받았다.

“Koo. 표정이 안 좋네. 마치 실책이라도 한 사람처럼.”

방금 플레이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안 좋게 느끼셨다면 그건 표정이 아니라 얼굴 문제입니다······ 라고 할 뻔.

“실책? 괜찮아. 해도 돼. 물론 지금 플레이는 실책도 아니지만, 실책 몇 번 한다고 해서 자네를 기용하지 않을 일은 없을 거야.”

감독님은 얌전히 서 있는 내게 격려를 이어 나갔다.

“발전을 위해 꾸준히 노력하고, 팀을 위해 헌신해주는 모습은 항상 지켜보고 있어.”

발전을 위해 노력한다는 건 클레망에게 도움을 받아 따로 훈련하는 걸 말하는 것 같은데.

팀에 헌신한다는 건 무슨 뜻인지, 짚이는 게 딱히 없다.

‘내 존재만으로 팀에 도움이 된다는 뜻이겠지?’

[정신 나갔네 아주.]

투수 타석부터 시작된 8회 말 공격은 삼자범퇴로 끝났고.

9회 초 수비에서도 나는 여전히 유격수로 나섰다.

딱!

2사 상황에서 타자가 쳐낸 맥없는 땅볼을 빠르게 달려가 붙잡았고.

팡!

“아웃!”

1루수 랜디의 글러브에 정확하게 송구하면서 이닝 종료.

그립 문제를 해결하고 나서부터는 러닝 스로에 대한 부담감도 사라졌다.

‘정신 나간 사람이 수비를 이렇게 잘할까?’

[너 솔직히 말해봐. 그딴 소리 하면서 스스로 민망한 적 한 번도 없어?]

‘니가 투수를 안 해봐서 그래. 투수들은 다 이런다니까?’

열받아 죽겠다는 표정의 박도현이지만, 반박하진 못한다.

저놈이 다시 태어나서 투수를 해보지 않는 이상 평생 써먹을 수 있는 가불기.

만족스럽지 못한 플레이로 답답해졌던 가슴이 이제야 상쾌해진다.

* * *

무난한 수비로 조금 전 아쉬운 플레이를 만회했지만, 덕아웃에서 웃음을 보일 순 없다.

여전히 1대 4의 스코어. 3점을 뒤져 있는 상태.

그러나 상위 타선부터 시작하는 9회 말 공격에, 선수들은 희망을 놓지 않았다.

따악―!

로키스의 마무리 투수를 상대로, 선두 타자 켄이 오늘 경기 첫 안타를 때려냈고.

따아악―!

R.H.의 연속 안타에 무사 주자 1, 3루라는 절호의 찬스가 찾아왔다.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루카스가 삼진으로 물러나며 관중석의 열기에 살짝 찬물을 끼얹기는 했지만.

“볼! 베이스 온 볼스!”

최근 OPS 히터로 발전을 노리는 랜디가 볼넷을 골라내면서, 1사 만루.

“그렇지! 이제야 본 실력이 나오는구만!”

“원래 야구는 9회 말 투아웃부터지!”

“다시 따라가면 되는 거야!”

로키스 코칭스태프가 마운드를 방문하면서 생긴 잠깐의 틈.

스윙 연습을 하는 내 모습이 전광판에 나오자, 관중들의 함성이 더 격해진다.

“Koo!!! Koo!!! Koo!!! Koo!!!”

클러치 상황에서의 한 방.

다저스 팬들에게 각인됐을 그 이미지가 우렁찬 응원으로 돌아왔다.

“타자, 타석으로!”

1사 만루. 홈런 한 방이면 끝내기 승리.

오늘 컨셉은 정해졌다.

긴장과 설렘으로 평정을 유지하기 힘든 루키 타자.

“볼!”

로키스의 노련한 마무리 투수조차 넘어갈 수밖에 없는 연기.

바깥쪽 떨어지는 슬라이더에 손도 대지 않았다.

“볼!”

허를 찌를 생각이었는지 같은 코스에 같은 구종.

타이밍을 읽히기 싫었는지 일부러 더 멀리 빼긴 했지만, 얼추 눈에 익었다.

이미 비슷한 공을 R.H.가 때려내는 걸 덕아웃에서 지켜봤거든.

곧이어 날아온 3구.

쐐애애액!

‘텄네, 텄어.’

물론 내가 아니라 투수 이야기다.

바깥쪽 공에 눈이 익은 상태에서, 다시 바깥쪽 코스의 밋밋하게 떨어지는 체인지업.

어지간한 타자라면 배팅볼 취급을 할 만한 실투였다.

하루 푹 쉬면서 감각을 정비한 나한테는 더더욱.

따아악―!

가볍게 밀어 친 타구가 3루 베이스 뒤쪽 라인을 타고 흘렀고.

3루심이 페어 사인을 보내기 전부터 이미 주자들은 스타트를 끊었다.

“세이프!”

좌익수가 필사적으로 타구를 쫓아갔지만, 이미 주자들은 전부 홈을 밟았고.

나도 여유롭게 2루 베이스에 안착했다.

스코어 4대 4, 동점을 만드는 3타점 적시 2루타.

[메이저리그에서 2루타를 기록했습니다.]

[40포인트가 지급됩니다.]

[현재 포인트: 1320]

“으아아아아아! 미쳤어! Koo! 너는 미쳤다고!!”

“도대체 왜 진작 타자로 전향하지 않은 거야!!!”

“Koo!!! Koo!!! Koo!!! Koo!!!”

5만 명이 넘는 관중들이 리듬에 맞춰 Koo 콜을 부르짖자, 로키스 선수들의 얼굴이 썩어들어간다.

믿었던 마무리 투수의 블론세이브에, 9회 말 역전패 위기.

결국 로키스가 마운드를 교체했고.

딱!

“아웃!”

포수 헨리의 땅볼을 틈타 3루까지 진루하며, 2사 3루.

3루로 뿌려주지는 않을까 살짝 기대하긴 했다. 아까 나처럼.

“대타 내겠습니다.”

다음 타석은 투수.

감독님은 얼마 전 경기에서 물오른 타격감을 선보인 채드윅을 대타로 내보냈지만.

“스윙! 스트라이크!”

“볼!”

“파울!”

클러치 상황에서 몸에 힘이 들어갔는지 순식간에 불리한 볼카운트에 몰리고 말았다.

연장전으로 갈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는데.

투수가 긴장이 되는 듯, 공을 받아 쥔 왼손을 잠시 내려다보는 게 눈에 들어왔다.

‘이거 혹시······.’

투아웃. 투 스트라이크. 좌완. 긴장한 투수. 와인드업.

여러 단서를 통해 떠올린 한 가지의 가능성.

‘홈스틸.’

투수가 공을 돌려받은 이상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

설령 실행에 옮기지 않더라도 사인을 보낼 타이밍은 지금뿐.

그리고 잠시 후, 덕아웃에서 돌아온 사인은.

‘마음대로 해봐.’

어차피 채드윅이 물러나는 순간 연장전은 확정된다.

더구나 나는 이미 동점 상황을 만들어준 타자.

이 정도 기회는 줘도 괜찮겠다 이거지.

‘평소 하던 대로. 하던 대로.’

평소처럼 투구 타이밍을 읽어내기만 하면, 내가 해야 할 건 달라지지 않는다.

조금 전 상황보다 아주 미세하게 거리를 벌리고, 무게 중심도 홈 쪽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투수의 어깨가 움찔하는 게 눈에 들어온 순간.

팍! 팍! 팍! 팍!

“홈! 홈!”

뒤에서 내야수들이 콜을 하며 뛰어나오는 소리. 이제는 낙장불입이다.

이 악물고 뛰었지만, 구종은 하필 아래로 떨어지는 슬라이더.

슬라이딩에 들어간 순간, 눈앞에는 이미 포수가 공을 받아내는 모습이 보였다.

태그를 피해야만 하는 상황.

그때, 오늘 막 클레망에게 배웠던 사실이 떠올랐다.

“슬라이딩과 동시에 태그를 피한답시고 상체만 틀면 허리 부상의 위험이 있어. 몸 전체를 돌린다고 생각하면서 하체를 자연스럽게 끌어당겨 봐.”

눈앞으로 다가오는 미트를 피해 상체를 젖히면서, 하체를 살짝 당겨주니.

상체와 같은 방향으로 자연스럽게 반 바퀴 돌아갔고.

포수 미트가 허공을 가르는 사이, 나는 자신 있게 손을 뻗었다.

“세이프!”

심판 판정은 세이프.

그러나 심판이 잠깐 머뭇거리는 사이, 나는 이미 결과를 확신한 상태였다.

로키스 덕아웃에서 곧바로 챌린지를 요청했지만, 번복될 일은 없었다.

[업적 ‘홈스틸’을 기록했습니다.]

[300포인트가 지급됩니다.]

[메이저리그에서 도루를 기록했습니다.]

[50포인트가 지급됩니다.]

[메이저리그에서 끝내기 득점을 기록했습니다.]

[100포인트가 지급됩니다.]

[현재 포인트: 1770]

시스템이 한 발 앞서 보상을 지급했으니까.

야구의 신이 관리하는 시스템이라고 하니까 성능은 확실하겠지.

“세이프!”

아니나 다를까, 판독 결과는 원심 유지.

덕아웃 입구에서 뛰쳐나올 준비를 하던 선수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으아아아아!!!”

“Koo!!! 니가 드디어 사고를 치는구나!!!”

“투수들 좀 그만 괴롭혀라 이 자식아!”

사방에서 물과 음료수를 뿌려대는 통에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됐지만, 웃음이 멈추질 않았다.

홈스틸 한 번에 450포인트.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해볼 만한 플레이였다.

* * *

8회 초에 투입되어 두 이닝을 소화한 게 전부지만, 오늘 경기 MVP는 내 차지였다.

1타수 1안타 3타점 1득점의 활약.

게다가 메이저리그 역사를 통틀어 찾아보기 힘들었던 끝내기 홈스틸까지.

소감을 묻는 질문에, 나는 먼 곳을 바라보며 아련한 표정을 지었다.

온몸이 젖은 상태라 눈가까지 젖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사고가 난 그날부터, 다시 다저 스타디움으로 돌아오는 날만을 꿈꿨습니다. 오늘 제 플레이가 100퍼센트 만족스럽지는 않았지만, 그것만으로도 제 생애 최고의 날 중 하나가 될 겁니다.”

“만족스럽지 않았다고요?”

“네. 8회 초 수비에서 아쉬운 판단으로 상대에게 추가점을 내줬으니까요. 다음부터는 이런 일이 없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미국에서는 겸손한 게 무조건 미덕이 아니라지만, 팀을 먼저 생각하는 정신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하지 않다.

“오늘 정말 많은 생각이 교차할 것 같은데, 혹시 가장 먼저 떠오른 사람이 있을까요, Koo?”

평소라면 가족과 동료들, 뭐 이런 상투적인 대답으로 임했겠지만.

오늘은 조금 다른 대답을 내놓았다.

“클레망에게 가장 먼저 감사를 전하고 싶네요.”

“클레망이라고요?”

“네. 클레망이 태그를 피하는 상황에서 부상을 방지하는 방법을 알려줬습니다.”

팀에 헌신하는 베테랑들이 후배들에게 종종 노하우를 전수한다는 건 그리 드문 일이 아니다.

하지만 지금은 주전 유격수가 자리를 비운 상황.

심지어 그 유격수가 팀 스피릿을 해친 전력이 있고, 각종 망언으로 비호감 스택을 쌓은 선수.

“더 좋은 선수가 되고 싶다는, 더 잘하고 싶다는 욕망이 지금의 저를 지탱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건 저 혼자서는 해낼 수 없는 일이죠.”

이 상황에서 클레망이 후배 내야수에게 가르침을 준다는 것.

시나리오 쓰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반응할 만한 화젯거리다.

‘다저스의 주전 유격수가 바뀔지도 모른다.’

이런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사람들의 머릿속에 떠오른다면, 오늘 인터뷰는 성공적이라고 봐도 되겠지.

아니, 사실은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아도 상관없다.

딱 한 명.

내 소식이라면 신경 쓰지 않고는 못 배길 사람이 있으니까.

* * *

LA 다저스와 제휴를 맺은 재활 트레이닝 센터.

땀에 젖은 운동복을 입은 채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던 한 남자가, 문득 손가락을 멈추었다.

[Hyun―Ki Koo, 3타점 2루타+끝내기 홈스틸로 홈 개막전 승리로 이끌다!]

해당 기사에는 구현기의 활약과 그날의 MVP 인터뷰 내용이 요약되어 있었다.

기사를 천천히 읽어나가던 남자의 손이 점차 떨리기 시작했다.

“FXXK!”

남자는 욕을 하며 핸드폰을 바닥에 내던졌다.

그러다 왼쪽 어깨를 스치는 따끔한 통증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성을 잃은 나머지, 막 보호대를 푼 왼쪽 어깨를 쓰고 말았다.

‘괜찮아. 괜찮아.’

금방 가라앉는 통증에 남자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대로라면 예정대로 복귀하는 데는 문제가 없을 듯했다.

“캠프 씨, 오후 훈련 들어가야······ 뭐야, 이거 왜 이러지?”

트레이너가 박살난 액정을 보며 놀랐지만, 카일 캠프는 별거 아니라며 웃어주었다.

“괜찮으시다면야······ 아무튼, 재활은 예정대로 진행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우선 다음 주 주말에 리햅 경기를 가지시는 걸로······.”

“아, 저기. 잠시만요.”

카일이 트레이너의 말을 끊었다.

“재활 스케줄을 약간 앞당길 순 없나요?”

LA 다저스의 주전 유격수 카일 캠프.

그는 구현기가 던진 덫에 발을 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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