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돌아오다(3)
[홈 개막전 MVP Koo, “클레망에게 감사 전하고 싶다. 그가 해준 조언이 큰 도움이 됐다.”]
[다저스 선수 A, “나도 부상을 방지하는 플레이에 대한 조언 절실해”]
[클레망 파로, “후배 유격수들에게 수비 관련 조언을 해주는 과정에서 알려준 것들이다. 다저스에 내 도움이 필요한 선수가 있다면 기꺼이 나서겠다.”]
[LA 다저스 오브라이언 감독, “서로 좋은 영향력을 주고받는 선수들과 함께하는 것은 감독으로서 커다란 행운”]
MVP 인터뷰가 끝나고, 한 선수가 자기도 알려주지 그랬냐는 인터뷰를 하는 바람에.
나와 채드윅에게 따로 도움을 주고 있다는 걸 클레망 본인이 직접 인정했다.
[근데 익명이네? 우리 팀에 굳이 익명으로 인터뷰할 사람이 있었나?]
‘생각할 거 뭐 있어. 랜디겠지.’
우리 팀에서 누군가 헛소리를 했다는 말이 돌면 일단 랜디를 의심하면 된다.
애초에 그 정도로 생각 짧고 말 많은 사람은 걔밖에 없어.
아니면 카일인데, 카일은 최소한의 눈치는 있어서.
본인한테 역풍이 올 게 뻔한 상황에서 저딴 언플은 안 한다.
“카일한테는 미안하게 됐네.”
클레망이 안타까워했다.
후배 유격수에게 도움을 주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카일이 다저스에 필요 없다는 여론은 가속화된 상황.
본인 의도와는 다르게 주전 유격수를 저격한 셈이 되어버렸으니까.
“저 때문에 곤란해지신 것 같아서 죄송하네요.”
“아냐, 아냐! 너도 좋은 의도로 말했던 거잖아.”
딱히 좋은 의도로 말했던 게 아닌지라, 아주 조금 더 미안해졌다.
“다시 경기 얘기로 돌아가 볼까?”
이른 시간부터 클레망과 전력분석실에서 만난 것은 지난 경기 플레이에 대한 피드백을 받기 위해.
화면에 경기 영상이 재생되었다.
8회 초, 1루 대신 3루를 선택했다가 주자 올 세이프를 만든 문제의 장면.
“사실 나도 네가 여기서 3루로 던질 땐 ‘얘가 지금 뭐 하나’ 싶었거든.”
1루로 던졌다면 100% 아웃 타이밍.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그랬다면 다음 타자의 플라이로 실점 없이 이닝이 종료됐겠지.
“그런데 여길 보면, 송구가 어긋났는데도 타이밍 자체는 박빙이었어. 만약 정확하게 들어갔으면 아웃이었을 거야.”
물론 이것도 결과론적인 이야기다. 실패한 플레이는 그냥 실패한 플레이니까.
그런데 클레망의 생각은 조금 다른 듯했다.
“Koo, 너 혹시 우완투수도 해본 적 있어?”
“아, 네. 옛날이지만요.”
“어쩐지. 송구가 꽤 빠르고 정확하다 했어.”
클레망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깨라는 근거를 바탕으로 이런 판단을 내린 거잖아? 그럼 이건 잘못된 판단이라고 볼 수 없어.”
“네? 하지만 결과가······.”
“결과를 걱정하면서 자기 플레이를 못 하는 게 훨씬 안 좋아. 같은 결과가 여러 번 나왔을 때만 신경 쓰면 돼.”
문득 박도현이 했던 말이 떠오른다.
까다로운 타구에 저거 못하겠는데, 라는 생각이 먼저 들면 내야수로선 끝장이라고 했지.
아마 그 말도 클레망에게 들은 게 아니었을까.
“홈스틸 얘기도 해보자. 그때는 무슨 근거로 그런 판단을 한 거야?”
“네. 일단 투수가 긴장한 게 눈에 들어와서······.”
반대로 결과가 좋은 플레이였더라도 근거가 빈약했다면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그렇게 클레망과 박도현을 비롯한 여러 이들의 도움 속에서, 발전을 위한 한 걸음을 쌓아갔다.
* * *
홈 9연전이 끝났다.
다저스의 성적은 5승 4패로 원정 시리즈 때보다 약간 주춤했지만.
그래도 시즌 성적 12승 7패, 지구 1위로 순항 중이다.
“빠진 사람 없지? 있으면 손 들어 봐.”
“재미없어요, 클레망.”
오늘은 홈 시리즈를 끝내고 다시 원정길에 오르는 날.
동부지구의 마이애미와 워싱턴을 거쳐, 같은 지구 애리조나까지 총 9연전을 치르는 일정.
그나마 중간에 이동일이 껴 있으니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또 엄청 피곤했겠네.
“난 미리 좀 잘래, Koo. 이따 포커 칠 때 깨워줘.”
제리는 그렇게 말하더니 수면안대와 귀마개를 끼고는 단잠에 빠졌다.
“뭐야? 제리 자?”
“에이, 포커는 나중에 치자. 쟤 말고는 바닥 깔아줄 사람이 없잖아.”
동료들에게 이런 취급을 받고 있지만, 저래 봬도 현재 다저스 선발진 중 가장 순항하고 있다.
선발로 4경기 등판해서 전승. ERA 1.73. 4경기 연속 퀄리티 스타트를 기록 중이니까.
“Koo, 너는 어때? 우리끼리라도 할래?”
“아냐, 나도 뭐 좀 볼 게 있어서.”
기내 와이파이로 다저스 포럼에 접속해, 기사들을 대충 훑어보며 박도현에게 말을 걸었다.
‘야수들이 경기 중에 계속 긴장하면 안 된다는 게 무슨 말인지 이제 좀 알겠더라.’
[그치? 니가 해보니까 알겠지?]
언제든 뛰쳐나갈 수 있도록 몸에 불어넣는 긴장. 타구를 계산하는 데 쏟아내는 순간의 집중력.
이걸 경기 내내 유지하려 들면 체력이 쭉쭉 빠져나가는 거다.
‘앞으로 출전 기회가 더 늘어날 텐데, 페이스 조절을 잘해야겠어.’
이번 9연전에서 나는 총 6경기에 출전했다.
선발 출장이 4경기. 그중 1루수로 나간 한 경기를 빼면 모두 유격수로.
다저스가 클레망, 채드윅, 나로 이어지는 3인 유격수 체제를 선택하면서 주전급으로 도약하진 못했다.
[Koo, 4타수 무안타로 침묵··· 원인은 유격수 포지션+징검다리 출전?]
[‘Shortstop Koo’, 시즌 첫 실책! 팀은 4대 3 역전패]
LA 언론에서는 잠깐 주춤한 걸로 호들갑을 떨어대고 있는데, 웃기지도 않는 소리다.
시범경기에서 14경기 6실책 하던 시절은 벌써 잊어버렸나 보네.
‘체력은 근력’이나 ‘몸으로 말해요’의 보정이 있어도, 매 경기 안타를 때려내는 건 어렵다.
대타 위주로 나오면서 쌓였던 거품이 줄어든 거라고 보는 게 맞지.
대신 주전 유격수 경쟁에서는 한 걸음 앞섰다고 봐도 될 듯하다.
채드윅: 0.264/0.321/0.350 1홈런 1도루(도루시도 2회) 8볼넷 15삼진 4실책
구현기: 0.392/0.464/0.750 3홈런 3도루(도루시도 3회) 2볼넷 11삼진 1실책
수비를 보고 기용하는 채드윅의 실책 수를 지적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3안타 경기 이후 멘탈이 회복되고 나서부터는 나름 빈틈없는 수비를 보여주고 있으니, 단순 비교는 불가능하다.
반면에 타격만 놓고 보면 채드윅이 나한테 비비기는 어렵다.
내셔널리그 전체 2위에 달하는 타율.
주전으로 꾸준히 나갔다면 이달의 선수도 노려볼 수 있는 성적이지.
[이 정도면 마이너 내려갈 일은 없겠지?]
‘나 내려보내면 단장님 차에 불 지르지 않을까?’
1루수 출장 시 5번으로 조정되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내 타순은 7번 고정.
그런데도 당장 나를 상위 타선으로 올려야 한다고 난리를 치는 게 지금 다저스 팬들이다.
“어, 이거 뭐야?”
그때, 저 멀리서 랜디의 당황한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이 기사 봤어?”
“뭐야. 얘 분명 4주 걸린다고 안 했나?”
통로 너머로 불쑥 태블릿이 넘어왔다.
뭔데 이 난리인가 싶어 받아본 순간, 나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떴다.
[LA 다저스 유격수 카일 캠프, 리햅 경기 출전으로 복귀 시동]
4주 이탈이 유력하다던 카일의 복귀 소식이었다.
가벼운 부상 시 리햅 경기를 많이 치르지 않는다는 걸 고려하면, 예상보다 일주일쯤 빠르게 돌아오는 셈.
[차도가 생각보다 빠른가 본데?]
‘그랬겠지?’
[응. 아무리 자기 자리가 불안하다고 해도 재활을 대충 스킵하면 오히려 손해잖아? 자신이 있으니까 돌아오는 거겠지.]
카일이 내 인터뷰 때문에 조급해져서 재활을 망쳤으면 좋겠단 기대를 아예 안 해본 건 아니지만.
현실적으로 가능성은 낮게 봤다.
‘그냥 X 같으라고 한 거지.’
메이저리거라면 자기 몸이 재산인 줄은 알 거니까.
근데 또 부상 전에 정신 못 차리고 급발진했던 거 생각하면 또 가능성이 아예 없어 보이진 않고.
아무튼 그보다 중요한 건.
‘얘가 지금 와도 자리가 있나?’
억지로 앞당겼든 다 나아서 온 거든 상관없긴 한데.
구단이나 감독님 입장에서 굳이 카일을 기용해야 할 이유가 있는지 모르겠다.
당장 나한테 유격수 출전 기회를 꾸준히 주겠다고 공언했고.
채드윅은 수비에 비해 타격이 아쉬운데, 그건 카일도 마찬가지다.
‘로버트가 등판하는 날 클레망 대신 카일을 쓰는 것 정도?’
[에이, 설마.]
설마가 사람을 잡는지 안 잡는지는 나중에 가서 확인할 문제고.
“그래, 뭐 나았으면 오는 건데, 좀······ 그렇지?”
“얘 얼마 전에 나한테 좀 있으면 돌아가니까 잘 부탁한다고 연락하던데.”
“그래서, 답장은 했어?”
“미쳤냐?”
환대할 생각 따위는 없어 보이는 동료들.
멘탈이 약한 카일이 지금 복귀해 봤자 어느 정도 활약할 수 있을까.
딱히 긍정적인 예측은 못 하겠네.
* * *
마이애미 말린스와의 1차전은 다저스의 완패로 끝났다.
스코어 8대 2.
최근 컨디션이 좋지 못해 로테이션을 한 차례 건너뛰기로 한 로버트의 대체 선발이 일찍 무너졌다.
물론 야수진도 딱히 할 말은 없었지.
실책도 두 차례 나왔고, 클러치 찬스를 번번이 날려먹었으니까.
낮 경기 이후라고는 해도, 휴식일 없이 마이애미까지 이동한 여파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1차전에 채드윅이 나갔으니, 2차전에는 내가 나설 차례였다.
경기 초반에는 딱히 이렇다 할 활약을 하진 못했지만.
[원아웃에 주자 2루. 스코어 1대 0의 아슬아슬한 리드. 타석에는 오늘 3타수 무안타를 기록 중인 Hyun―Ki Koo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오늘은 삼진, 땅볼, 뜬공. 다양하게 아웃당하는 모습을 보여줬죠. 최근 타석에서 조금 주춤하고는 있지만, 그래도 수비가 한층 안정됐다는 건 긍정적입니다.]
[마운드에는 말린스의 마무리 투수 존 리버. 제구가 뛰어나고, 특히 몸쪽 승부를 즐겨 하는 선수입니다.]
[반대로 Koo 역시 몸쪽 승부를 마다하지 않는 타자죠. 잠시 Koo의 핫콜드존을 보시겠습니다. 와, 몸쪽이 위아래를 가리지 않고 새빨갛네요!]
[이런 타자를 상대로 몸쪽 공을 던질 수 있다면 그 용기를 인정해야 할 겁니다. 세트 포지션에서 초구······ 아!!! 쳤습니다!!! 이 공은!!!]
[See!!! You!!! LAter!!! Koo가 오늘 경기 첫 안타를 통쾌한 투런포로 장식합니다! 9회 초, 말린스의 추격 의지를 꺾어버렸습니다!]
1대 0의 살얼음 같은 리드에서 멀찍이 도망치는 홈런을 날렸고.
경기가 그대로 끝나면서 시리즈의 균형을 맞췄다.
제리가 6이닝 무실점으로 연속 퀄리티스타트 게임과 연승 기록을 이어나가게 된 건 덤이었다.
“수고했어, Koo! 이따 한잔해야지?”
“어, 금방 갈게! 클레망이랑 조지가 잠깐 보자고 해서.”
다저스의 주전 유격수에 어울리는 수비력을 갖추게 해주겠다는 본인의 각오를 지키려는 걸까.
클레망은 내가 출전하고 나면 잠시 나를 불러 그날 수비를 함께 복기하고 있는데.
내 수비를 아직 완전히 신뢰하지는 않는 조지도 모임에 끼어들었다.
듣기로는 채드윅에게도 똑같이 해주고 있다는데, 아마 클레망이 메이저리그에서 후배한테 가장 시간 많이 쏟는 선배일 거다.
오늘 플레이가 어땠는지 대충 떠올려보면서 잠시 다저스 포럼에 접속한 순간.
사이트 최상단에서 눈길을 잡아끄는 기사를 발견했다.
[카일 캠프, 싱글 A 리햅 경기에서 2타수 무안타··· 복귀 시기상조인가?]
얘는 진짜 뭐 하는 거래.
조급해져서 재활을 대충 건너뛰었다는 말도 안 되는 가설의 신빙성이 올라가는 순간이었다.
* * *
말린스와의 3차전은 2대 3의 스코어로 아쉽게 패배했다.
전날에 이어 연투한 마무리 투수 새뮤얼의 블론 세이브가 나오고 만 것이다.
이번 시즌 원정 경기에서 쾌조를 보였던 다저스의 첫 원정 루징 시리즈.
그러나 선수단의 분위기가 축 처진 것은 경기 결과 때문만은 아니었다.
[LA 다저스 가브리엘 루이스, 카일 캠프 복귀 앞두고 지명할당 조치]
백업 3루수 겸 대타 요원으로 활약하던 가브리엘이 팀을 떠나게 됐다.
“고마웠어, Koo.”
“나야말로, 가브리엘.”
붙임성 있게 팔을 벌리는 가브리엘과 포옹을 나눴다.
다들 포옹에 응해주며 애써 아쉬움을 감추는 분위기.
물론 이건 웨이버 공시 이후 가브리엘을 원하는 팀이 나타났기에 분위기가 나쁘지 않은 것도 있다.
“하필이면 같은 지구 팀이라니. 네 타구를 잡아낼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진땀이 나는데?”
가브리엘을 데려간 팀은 같은 내셔널리그 서부지구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최근 백업 3루수가 심각하게 부진하다더니, 그 자리에 써먹을 모양이다.
“벤치 클리어링 때 로버트가 나는 안 때리겠지?”
“글쎄, 장담은 못 하겠는데.”
“하하하! 알겠어, Koo. 내가 알아서 도망 다닐게.”
그렇게 한 사람이 팀을 떠났고.
그 자리를 다른 한 사람이 채웠다.
“안녕, 다들 오랜만이야!”
원래대로라면 LA로 돌아왔을 때 합류했어야 할 카일이지만.
어쩐 일인지 다음 원정지인 워싱턴으로 직접 합류하는 열정을 보였다.
본인의 복귀 의지가 강하며, 팀을 위해 다시 헌신할 기회가 주어져 기쁘다는 언플과 함께.
“어, 그래.”
“고생했다.”
만난 지 한 달도 안 된 가브리엘과 헤어질 때와는 차원이 다른 반응.
생각보다 냉담한 동료들의 모습에 카일이 슬그머니 손을 내렸다.
“Hey, Koo.”
유니폼을 다 갈아입은 카일이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러더니 평소에는 하지도 않던 주먹 인사를 건넨다.
“유격수 포지션에서 뛰느라 고생했지? 이제 내가 돌아왔으니까 걱정하지 마.”
메이저리그에서 뛰면서 웃음을 참아야 하는 순간이 여러 번 있었는데, 지금이 가장 힘든 순간이 아닐까.
걱정은 무슨 걱정이야.
니 앞날부터 걱정해야 할 판에, 3할 7푼 치고 있는 타자 걱정을 하고 있어.
그렇게 클럽하우스를 활보하며 선수들과 코칭스태프들에게 다시 눈도장을 찍으려 애쓰던 카일이었지만.
“오늘의 선발 출장 명단이다. 다들 확인하도록.”
경기 시작 전 선수단이 소집되고 나자, 표정 관리를 하지 못했다.
유격수 포지션에 올라가 있는 것은 나.
카일의 이름은 선발 명단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