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신 들린 천재 타자-45화 (45/200)

45. 승리를 위해(1)

LA 다저스 프런트 중역들이 모인 회의실.

단장 마이크 올리버는 모여 앉은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이제 내야진 이야기를 좀 해봅시다.”

팀은 15승 8패로 순항 중이고, 현장에서도 큰 문제가 있다는 보고는 없었지만.

최근 내야진에 작은 구멍이 하나 뚫렸다.

“카일이 복귀하면서 백업 3루수 가브리엘이 떠났죠.”

내야수 중 마이너 옵션이 있는 선수는 구현기 하나뿐.

그러나 구현기를 구단 사정으로 내려보내는 순간, 강성 다저스 팬들에게 진지하게 목숨을 위협받을지도 모른다.

애초에 내려보낼 생각이 없기도 하다.

구현기가 팀에서 해주는 역할은 단순 백업 선수 수준이 아니다.

아마 구현기가 없었더라면 지구 1위도, 채드윅의 잠재력 폭발도, 아드리안의 노히트노런도 없었겠지.

“트리플 A에서 올릴 만한 3루수는 없습니까?”

“제프리와 라이언 정도인데, 솔직히 말씀드리면 풀타임 백업 수준에도 못 미친다고 봅니다.”

“맞습니다. 제프리는 부상 이전의 퍼포먼스가 안 나오고, 라이언은 수비 정확도가 너무 떨어져요.”

“구체적으로는 어느 정도입니까?”

“차라리 시범경기 때의 Koo를 세우는 게 나을 정도입니다.”

어쩔 땐 주전만큼이나 프런트의 골머리를 썩히는 게 백업 선수다.

못하면 못하는 대로 곤란하고. 잘하면 잘하는 대로 다른 팀에 뺏기기 쉬우니까.

올리버 단장은 볼펜 끝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조나단이 메이저리그에 올라오려면 어느 정도 걸릴 것 같습니까?”

팜 디렉터가 작성한 다저스 내야 유망주 랭킹 1위를 차지한 조나단 라틀리프.

향후 다저스의 주전 3루수를 맡아줄 만한 실링이 있다는 평가가 대다수다.

“하이싱글 A에서 타율 4할 중반을 기록 중이고, 수비도 완성됐다고 봐도 되겠습니다. 다만 더블 A에서 풀타임 시즌을 한 번 치러보게 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

박도현을 기점으로 실력만 있다면 유망주의 콜업 시기를 앞당기게 된 다저스였지만.

풀타임 주전으로 뛰며 컨디션 관리를 해본 것과 안 해본 것의 차이는 크다.

아예 박도현처럼 안 올릴 수 없을 정도로 활약한다면 모를까, 그 정도는 아니라는 평가.

“카일을 빨리 보내야 자리가 날 텐데······.”

카일이 부상으로 자리를 비운 동안, 구현기와 채드윅의 2인 유격수 체제의 가능성을 충분히 확인했다.

당장 팔아도 상관없겠지만, 문제는 가격이다.

경기 중 동료에게 화풀이하는 모습이 송출된 이후 타 구단에서 내미는 카드의 급이 떨어졌다.

“지금은 오히려 카일보다 채드윅을 원하는 구단이 많아졌습니다.”

회의실 안의 중역들이 하나같이 고개를 저었다.

“채드윅은 못 팔죠.”

“서비스 타임이 1년 겨우 넘는데,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데리고 있어야 합니다.”

“지금처럼만 해줘도 백업 유격수로는 차고 넘치는걸요.”

여러 구단을 전전하다가 다저스에 와서 포텐이 터진 채드윅 마틴.

연봉도 싸고 FA 자격까지 많이 남았는지라 많은 구단이 눈독을 들였지만, 올리버 단장 역시 팔 마음이 없었다.

“그럼 카일을 팔 때 백업 3루수를 카드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건데······.”

가뜩이나 트레이드에 차질을 빚고 있는데, 여기서 조건을 추가한다?

생각만 해도 한숨이 나오는 상황이었다.

“그러면 Koo에게 백업 3루수를 맡겨보는 건 어떻겠습니까?”

성공만 한다면 가장 좋은 시나리오일 것이다.

실제로 감독 역시 당장 백업 3루수를 구할 수 없다면 구현기를 활용하는 게 현실적 방안이라고 말한 바 있고.

다만 실패했을 때의 리스크도 무시하기 힘들다.

백업 3루수는 만약 주전 선수가 부상이라도 당한다면 쭉 3루를 지켜야 하는 입장.

자주 포지션을 바꾸는 건 경기력에 손해가 되면 됐지 도움은 절대 되지 않는다.

“선수 본인의 의사를 확인해보는 건 어떻습니까?”

감독의 뜻은 이미 확인했으나, 결국 중요한 건 선수 본인의 의지.

본인에게 뜻이 있다면, 조금이라도 빠른 시일 내에 3루 수비 경험을 쌓게 해줄 필요가 있다.

마침 선수들이 경기 종료 후 숙소로 돌아가 있을 시간.

올리버 단장은 구현기에게 전화를 걸어, 백업 3루수 역할을 맡을 의사가 있는지 물었다.

“뭐라고 대답하던가요, 단장님?”

올리버 단장은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에이전트와 상의해보고 알려주겠다더군요.”

지난 오프 시즌 연봉조정 협상 때처럼 정중하면서도 단호한 태도였다.

지금처럼 인상적인 활약을 해주는 선수에게 구단은 갑이 아닌 을이 될 수밖에 없다.

더구나 구현기는 내년 시즌이 끝나면 FA 자격을 취득하는 선수.

FA 계약은 나중 일이라고 해도, 당장 이번 시즌 후 연봉조정부터 걱정해야 할 판이다.

‘이대로 활약만 해준다면야.’

선수들을 돈으로 봐야 하는 게 메이저리그 단장이라지만, 써야 할 때 쓰는 것도 경영자의 역할이다.

“연락이 오기 전까지 다음 안건부터 처리합시다. 일단은······.”

* * *

백업 3루수 겸업 제안.

갑작스럽긴 하지만 나한테는 나쁜 제안이 아니다.

‘이걸 물어본다는 것 자체가 구단에서는 나를 거의 주전감으로 보고 있다는 거지.’

기회를 주면 감사합니다, 하고 나가야 하는 상황은 아니란 거다.

카일이야 거의 나가는 게 확실하고. 채드윅도 당장 주전으로 삼기엔 타격이 살짝 아쉬우니까.

[저는 Koo의 결정을 전적으로 지지하겠습니다.]

에이전트 데릭은 자기가 의견을 낼 문제는 아닌 것 같다고 선을 그었다.

대신 제안을 받아들였을 때의 장단점은 알려줬지만.

[풀타임 내야수로서 첫 시즌인 만큼 적응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습니다. 지금처럼 선발과 대타를 번갈아 가며 출전한다면 괜찮겠지만, 출전 시간이 늘어날수록 체력적 부담도 클 테고요.]

역시 가장 큰 문제는 적응과 체력이다.

이제 겨우 체력 관리에 대한 감을 잡아가는 와중이니까.

[대신 다음 시즌 연봉조정에서 아주 유리해질 겁니다. 유사시에 다른 포지션을 구멍 없이 막아줄 수 있는 선수는 모든 구단이 원하니까요.]

멀티 포지션은 어려운 만큼 시장에서 가치를 인정받는다.

무난하게만 해낸다면 내년 연봉조정뿐 아니라 FA 협상에서도 굉장히 유리해지겠지.

장단점을 저울 위에 올려놓고 고민한 끝에 결정을 내렸다.

“할게요.”

실패한다고 해서 나를 당장 마이너로 내리진 않을 거란 계산이었다.

다시 유격수에만 박아놓고 감을 되찾을 시간을 주겠지.

반면에 성공만 한다면, 장기계약을 얻어내기도 수월해질 거다.

내야수로서 명예의 전당에 들기 위해서는 출전 기회가 무엇보다도 소중하니까.

“단장님께도 제가 그렇게 연락드릴게요.”

[알겠습니다, Koo. 대신 힘든 일 있으면 언제든 연락 주시고요.]

그렇게 단장님께 3루를 겸업하겠다는 의사를 전달한 후.

바로 다음날 치러진 워싱턴 내셔널스와의 2차전.

경기 시작 전 감독님이 선발 라인업을 발표했다.

1, 말릭 케이타 LF

2, 조지 라모스 2B

3. 루카스 에머런 CF

4. R.H. 데이 RF

5. 클레망 파로 1B

6. 구현기 3B

7. 채드윅 마틴 SS

8. 헨리 데이비슨 C

9. 아드리안 빌라 P

단장님과의 통화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바로 감독님께 전화가 걸려 왔다.

내일 경기에서 나를 선발 3루수로 출장시키겠다는 연락.

미국답지 않은 빠른 일처리에 조금 놀랐다.

‘원래 이렇게 번갯불에 콩 볶아먹듯 흘러가는 거냐?’

[뭐가?]

박도현은 뭐가 이상한지 잘 모르겠다는 눈치였다.

‘지금까지처럼 경기 후반에 3루수로 옮겨서 시험해보고 그럴 줄 알았지.’

내 유격수 선발 데뷔전이 개막 원정 10연전의 마지막 경기였는데.

클레망의 손목 부상이 없었다면 더 미뤄졌을 수도 있고.

[원래 백업들 시험하는 건 시즌 초에 하는 거야. 최대한 빠르게.]

‘그래도 지구 1위로 잘나가고 있는데, 기세 끊기면 좀 그렇지 않나?’

[그러니까 더더욱 지금 해야지. 이럴 땐 한두 경기 버려도 괜찮으니까.]

‘내가 3루수 보면 그건 버리는 경기야······?’

경기 시작도 전부터 힘 빠지는 소리 하고 있어.

그러나 내가 힘이 빠지든 말든 경기는 정해진 시간에 시작된다.

1회 초 득점은 없었고, 3루수로서의 첫 메이저리그 경기를 치르기 위해 그라운드로 나갔다.

“아웃!”

“스트라이크 아웃!”

“아웃!”

그리고 공 한 번 안 만져보고 얌전히 돌아왔다.

중견수 뜬공, 삼진, 유격수 땅볼로 쓰리 아웃.

‘유격수보다는 타구 만질 일이 적긴 하네.’

고작 한 이닝 치러 놓고 이런 말 하는 것도 우습지만, 통계가 그러니까.

그렇다고 해서 집중을 안 할 수는 없는 게, 타구의 수는 적은 대신 힘이 실린 타구가 많이 온다.

적어도 시범경기 때보다는 상대 타자들도 폼이 올라왔을 테니, 타구도 더 까다로워지겠지.

3루 수비 땐 체력을 어떻게 분배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옆자리에 누군가 와서 앉는다.

오늘의 선발 투수 아드리안 빌라.

보통 선발은 안 건드리는 게 매너인데, 지가 와서 앉으면 어떡해야 할까.

“난 망했어, Koo. 어쩜 좋지?”

얘는 1회 삼자범퇴로 잘 막아놓고 갑자기 웬 흰소리야.

“너는 내 수호천사잖아. 네가 유격수 자리에 있어야 하는데, 없으니까 뭔가 흔들리는 기분이야.”

그놈의 수호천사 타령은 1절만 좀 할 것이지.

노히트노런을 달성한 날부터 툭하면 이 난리다.

로테이션상 어쩌다 보니 아드리안이 등판하는 날마다 내가 유격수를 맡게 됐는데, 무슨 루틴 비슷한 게 생겼나 보다.

[누가 보면 너 결장한 줄 알겠다.]

‘그러게. 몇 미터나 차이 난다고.’

빠져나갈 구석을 찾아 주변을 둘러보는데, 지정석에 앉아 이쪽을 쳐다보는 로버트와 눈이 마주쳤다.

참고로 로버트는 귀가 아주 밝다.

딱히 목소리를 낮추지도 않은 아드리안의 말 정도는 전부 들렸을 거다.

“괜찮아, 괜찮아. 3루 쪽으로 오는 건 내가 다 잡아줄게.”

대충 그렇게 달래는 동안 대기 타석으로 나갈 차례가 됐고.

볼넷과 안타로 무사 1, 3루 상황에서 첫 타석에 섰다.

따아아악!

초구를 노렸고, 결과는 워닝 트랙에서 잡히는 희생플라이.

3루 주자 R.H.와 함께 덕아웃으로 돌아와 동료들과 하이파이브를 나눈 뒤 아드리안의 옆자리로 돌아갔다.

“봐, 선취점도 났잖아. 우리 타자들 믿지? 기운 내자구.”

“그래도······.”

그래도는 무슨 그래도야. 털 잔뜩 난 마초 새끼가 말꼬리 흐리고 있어.

······라는 생각이 들어도 말해서는 안 되는 게 야수의 숙명.

투수 시절에 같은 투수가 이런다? 바로 욕부터 박았다.

[부메랑으로 돌려받았죠? 달달하고 야무지게 얻어맞았죠?]

‘좀 싸물어. 부정 타니까.’

다저스가 추가점을 내지 못하고 1대 0의 스코어에서 공수 교대.

결국 힘내자는 말만 남기고 다시 그라운드로 향했는데.

무슨 말이든 쥐어짜서 달래줘야 했을까.

따아아악―!

연이어 장타를 허용하며 흔들리기 시작한 아드리안.

자연스레 3루 쪽으로 날아오는 강한 타구도 늘어나 쉴 새 없이 몸을 던져야 했다.

안타 코스의 타구를 땅볼로 둔갑시키거나, 유격수 채드윅이 놓친 공을 커버해서 아웃카운트를 늘리기도 했지만.

그런 X꼬쇼에도 불구하고 오늘 아드리안의 성적은 3이닝 5실점으로 퀵후크.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돌아온 아드리안에게 로버트가 말을 걸었다.

“아드리안, 우리 잠깐 얘기 좀 하지.”

다저스 투수 중에서 그 말뜻을 모르는 선수는 없다.

얼굴이 흙빛이 되어 덕아웃 밖으로 사라지는 아드리안을 보며 선수들이 한마디씩 얹었다.

“정신교육 시간이네.”

“쟤 울까? 저래 봬도 여린 친군데.”

“타자로 전향한다고 그럴지도 몰라.”

“와, 방금 그거 누가 한 소린가 깜짝 놀랐는데 Koo 네가 한 말이었어?”

로버트에게 털리고 나면 수호천사이니 뭐니 배부른 소리는 안 하게 되겠지.

신경 끄고 다시 경기에 집중하기로 했다.

* * *

선발 투수가 일찍 무너졌음에도, 오늘 경기의 최종 스코어는 6대 8.

9회까지 꾸준히 쫓아갔지만 아쉽게도 역전에는 실패했다.

[그래서, 3루수로 뛰어보니까 어때?]

처음엔 그래도 쉬울 줄 알았지.

시범경기 때도 3루 수비 땐 실책이 하나밖에 없었으니까.

그런데 막상 오늘 경기를 뛰고 나니 생각이 달라졌다.

‘딱 백업 정도. 풀타임 3루수로 뛰라 그러면 못 하겠어.’

유격수는 내가 어느 정도 집중하면 어느 코스의 타구는 잡을 수 있다, 뭐 이런 감이 좀 잡히는데.

3루수는 타구가 언제 올지도 모르겠고, 또 대부분 까다로운 것들이라 지금까지 해온 것과 부딪히는 느낌이다.

번트 타구 처리도 훨씬 촉박해졌고.

‘그나마 타격에는 영향이 안 가서 다행이야.’

3타수 2안타 1홈런 1볼넷 3타점 1득점.

오늘 다저스의 6득점 중 절반이 내 타점이다.

3루수로 꾸준히 출장했을 때도 타격감에 영향이 안 갈 거란 보장은 못 하겠지만.

‘오늘은 클레망이랑 조지한테 붙잡힐 일도 없으니, 그냥 들어가서 일찍 쉬어야겠······.’

그렇게 생각하며 호텔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가는데.

안에 혼자 들어 있던 카일과 눈이 마주쳤다.

“카일, 잠깐······.”

눈이 마주치자마자 닫힘 버튼을 연타했는지, 매정하게 닫히는 문.

어처구니없는 상황이지만 그냥 그러려니 하게 된다.

[쟤 왜 저래?]

‘냅둬. 얼마나 볼 거라고.’

오늘 경기 후, 감독님은 인터뷰에서 카일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카일 캠프가 복귀 후 어제와 오늘 이틀 연속 출장이 없었는데요, 혹시 기용 계획이 없으십니까?”

감독님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감독은 팀의 승리를 최우선으로 생각해야 하며, 그 원칙에 따라 라인업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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