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승리를 위해(2)
“감사합니다! 내일 뵙겠습니다!”
“그래. 잘 들어가.”
내셔널스 파크 근처 원정 숙소.
채드윅 마틴은 자기 방으로 향했다.
클레망에게 수비에 대한 피드백과 조언을 받기 시작한 지 어느덧 2주째.
자정을 훌쩍 넘긴 시간이었지만, 피곤한 줄도 몰랐다.
명예의 전당 입성이 유력한 선수에게 1대 1 교습을 받는, 그의 생애 두 번 다시 올지 모를 엄청난 기회였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주전을 차지하기는 어려워 보였다.
포지션 경쟁자 구현기의 타격감이 심상치 않았으니까.
오브리이언 감독은 최소 4월 한 달 동안은 번갈아 가며 기용하겠다고 약속했지만, 그 4월도 끝나가고 있었다.
‘Koo 같은 선수를 천재라고 부르는 거겠지.’
메이저리그 개막 이후에도 여전히 활약하는 구현기를 보며, 누군가는 해묵은 약물 의혹을 다시 꺼내기도 했다.
구현기를 바로 옆에서 지켜본 채드윅은 그게 헛소리란 걸 알았다.
클레망에게 같은 조언을 받고, 함께 추가 훈련을 진행해도, 구현기는 그걸 받아들이는 속도 자체가 달랐다.
대선수의 지식과 경험을 탐욕스럽게 빨아들인다고 해야 하나.
‘게다가 이제 카일까지 돌아왔고······.’
기존의 주전 유격수가 돌아왔으니 교통 정리가 필요한 상황.
구단이 카일에게도 기회를 다시 준다면, 밀려나는 것은 분명 자신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에 잠긴 채 자신의 방이 있는 층에 도착한 채드윅은, 복도를 어슬렁거리는 사람을 발견했다.
“카, 카일······?”
얼굴이 시뻘개진 채, 술 냄새를 풍기는 카일이었다.
“Hey, Chad.”
언제부터 친했다고 허락도 없이 애칭으로 부르는 걸까.
채드윅은 스프링캠프 때 카일과 처음 만났던 순간을 떠올렸다.
아는 사람 없이 외롭게 다니던 그는 복도에서 같은 포지션이었던 카일과 마주치자 용기를 내 말을 걸었다.
‘안녕. 나는 작년까지 화이트삭스에 있었던······.’
그때 카일은 아무런 반응 없이 지나쳤었다.
마치 자신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처럼.
그런데 이제 와서 친한 척이라니.
“······과음한 것 같은데, 네 방은 아마 저기일 거야.”
젊은 야수조 선수들이 쓰는 층.
다른 선수들의 방은 다 알고 있으니, 자연스레 남은 방은 카일의 차지일 것이다.
“어쩔 수 없어, Chad. 이 X 같은 팀에서 술 없이는 못 견디겠거든.”
고참 선수나 코칭스태프가 들었다면 진지하게 문제가 될 수도 있는 말.
그러나 채드윅은 카일을 오래 상대하기 싫었다.
“방으로 돌아가, 카일. 그리고 난 이 팀이 X 같다고 생각하진 않아.”
그러자 카일의 입가에 비웃음이 떠올랐다.
“그래, 뭐. 이 팀에서 백업 노릇이나 하며 붙어 있고 싶다면, 그렇게 말해야겠지.”
채드윅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나 반박할 말은 떠오르지 않았다.
‘내 실력이 좋았다면 들을 일 없는 말이야.’
당장은 투수에서 전향한 지 얼마 안 된 구현기에게 밀리고 있는 게 자신의 현실.
그러나 백업 선수로 지내는 한이 있더라도, 저렇게 한심한 소리나 내뱉는 선수는 되고 싶지 않았다.
“다 X신이야. 다저스도, 너도, Koo도. 스트라이크도 못 던지게 된 X신 투수가 내야를 지키는 X신 팀이라고.”
그냥 지나치려던 채드윅의 발걸음이 멎었다.
반응을 안 했던 게 도리어 심기를 건드렸던 걸까. 기세가 등등해져서 망언을 한다.
자신만 건드린다면 그래도 동료끼리의 실수로 넘어가줄 수 있지만.
팀을, 다른 동료를, 그것도 자신에게는 은인이나 마찬가지인 구현기를 욕보이다니.
채드윅은 카일에게 돌아가, 눈을 마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X까, 카일.”
자신이 욕을 하면 상대가 당황할 거란 동료들의 말이 맞았다.
카일은 어안이 벙벙해져서 입을 벌린 채 채드윅을 쳐다볼 뿐이었다.
* * *
워싱턴 내셔널스와의 3차전을 앞둔 오전.
오브라이언 감독은 원정팀 전용 대기실에서 누군가를 기다렸다.
“부르셨습니까.”
“그래, 어서 와.”
그를 찾아온 것은 팀의 에이스이자 투수조의 중심, 로버트 켈리.
오늘 경기에서 선발 등판 예정인 투수이기도 했다.
이번 시즌 성적은 4경기 등판해 1승 3패 ERA 6.43으로 에이스답지 못한 피칭을 보여주고 있지만.
감독으로서 보자면 로버트는 아주 훌륭한 베테랑이다.
클레망처럼 순응하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베테랑의 권위를 존중하는 만큼은 감독의 권위도 존중해주니까.
지금부터 물어볼 것도 그 권위에 포함되는 것이었다.
“이미 알고 있겠지만, 클레망을 유격수로 세우기는 어려운 상황이야.”
로버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부상 정도는 가벼웠지만, 클레망은 37세의 노장 선수.
팀 사정상 유격수를 맡아줬을 뿐, 이제는 다른 선수에게 맡길 때가 됐다.
“그래서 지금 기용할 수 있는 유격수 자원 중에서 자네한테 선택권을 줄 생각이야.”
로버트는 선발 등판 시 무척 예민해지고, 야수들의 수비력에도 영향을 많이 받는다.
적어도 어떤 선수에게 등 뒤를 맡길지 선택권이라도 주는 게 최선이었다.
현재 기용 가능한 유격수 자원은 카일, 채드윅, 구현기.
오브라이언 감독은 현 상황에서 가장 믿을 수 있는 구현기의 이름이 나올 거라 예상했지만―
“카일을 출전시켜 주시죠.”
“카일이라고?”
예상 밖의 선택에 놀라움을 감춰야 했다.
경기력은 둘째치고, 시범경기 때의 사건으로 신뢰를 완전히 잃었다고 생각했으니까.
“기회는 필요하니까요. 구단한테든, 카일한테든.”
눈치 빠른 로버트는 구단이 카일을 팔아치울 거란 사실을 알아챈 모양이다.
선수를 팔기 위해서는 쇼케이스가 필요한 법.
성적이 시원찮은 대신 시험대 역할을 기꺼이 떠맡겠다는 걸까.
마음 씀씀이는 고마웠지만, 한 가지 우려되는 점이 있었다.
“카일한테 오늘 출전할 거란 사실을 미리 전달 안 했는데, 괜찮을지 모르겠군.”
벤치를 지키던 선수가 선발 출장하기 전날 미리 알려주는 것이 오브라이언 감독의 스타일.
그것만 믿고 컨디션 관리를 소홀히 했다면, 대참사가 벌어질지도 모른다.
“준비했을 겁니다. 주전 유격수라면요.”
박도현의 사고 이후, 작년 한 해 동안 주전으로 도약했던 카일 캠프.
로버트는 카일에게 주전으로서의 책임감을, 더 나아가 선수로서의 열정을 기대해보기로 한 모양이었다.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라는 한국 격언을 알았다면, 그런 선택은 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지만.
* * *
경기 전 소집 시간.
감독님이 선발 명단을 발표한 순간 작게 웅성대는 소리가 퍼져나갔다.
7번 유격수로 카일 캠프가 올라가 있었으니까.
“왜, 뭔가 문제라도 있나?”
“아닙니다!”
“그럼 바로 훈련 들어가도록 하지.”
감독님이 물러나고, 선수들은 그라운드로 나가면서도 수군거렸다.
“카일이 로버트 경기에······?”
“본인하고 얘기는 된 거겠지?”
솔직히 나도 조금 놀랐다. 카일이 로버트한테 어지간히 미운털이 박혔어야지.
카일 본인도 놀란 눈치였다. 게다가 미리 언질도 못 받았는지, 딱히 열심히 준비해온 것 같지도 않다.
[쟤 왜 저렇게 비실거려. 설마 어제 술 먹은 건 아니겠지?]
‘야, 아무리 그래도······.’
주량이 와인 한 잔인 놈인데.
다음날까지 영향이 갈 게 뻔한데도 그런 짓을 했을 리가.
“플레이 볼!”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시작된 경기.
1회 초 공격에서 점수는 나지 않았고, 1회 말 수비에 들어갔다.
마운드 위의 로버트를 보니, 딱히 카일 때문에 심기가 불편해 보이지는 않았다.
‘본인이 요청하기라도 했나?’
로버트의 뜻은 알 길이 없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경기는 진행됐다.
이번 시즌에 자주 그랬듯 첫 타자부터 안타를 허용하긴 했지만.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스트라이크 아웃!”
삼진 두 개로 빠르게 투아웃을 잡아내며 휴식의 효과를 보여줬다.
“세이프!”
대신 1루 주자가 도루에 성공하며 득점권에 나가긴 했지만, 로버트가 그 정도로 흔들릴 투수는 아니다.
주자더러 뛰려면 뛰라는 식으로 와인드업을 고수하며 빠른 템포로 투구를 이어갔고.
딱!
유격수 쪽으로 향하는 무난한 땅볼이 나온 순간, 로버트를 맞이하러 덕아웃 입구로 향했다.
그런데, 이닝이 끝나리라 확신했던 그 순간에.
“어?! 뭐야!”
“어떻게 된 거야?!”
2루 주자가 전속력으로 홈을 향해 질주하기 시작했다.
뭔 일인가 싶어 1루를 보니, 클레망이 어딘가로 후다닥 뛰어가고 있었다.
“세이프!”
2루 주자는 그대로 홈인. 선취점을 빼앗겼다.
전광판의 광경이 로버트가 카일을 노려보던 모습에서 조금 전 플레이로 바뀌었다.
타구를 거의 제자리에서 잡아낸 카일이 1루로 송구했는데, 클레망이 잡을 수 없는 곳으로 던진 것.
[쟤 돌았나······?]
시간에 쫓겼으면 이해라도 할 텐데, 저건 도대체 뭔가.
창백해진 표정으로 본인 머리를 쥐어뜯고 있지 않았다면 태업도 의심해볼 만한 플레이.
‘내가 투수 할 때 니가 저랬다? 덕아웃 들어와서 발로 깠어.’
[내가 진짜 저랬으면 그냥 맞아준다.]
이기고자 하는 의지가 전혀 보이지 않는 저런 플레이는 투수의 멘탈을 제대로 갉아먹는다.
그리고 그건 베테랑 투수한테도 예외가 아니다.
따아아아악―!
관중석 상단에 떨어지는 홈런.
1회 말부터 비자책 3실점.
로버트가 오늘도 힘겨운 1회를 맞이하게 됐다.
* * *
덕아웃 안은 물병 여는 소리까지 들릴 만큼 조용했다.
심지어 코칭스태프들도 목소리를 낮춰 의논하고 있다.
“······.”
로버트는 자기 지정석 옆에 카일을 앉혀둔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차라리 죽여줬으면 하는 표정을 짓던 카일을 향해, 로버트는 툭 던지듯 말했다.
“야, 카일.”
“예!”
“어제 술 처먹었냐?”
카일은 뭐라 변명이라도 해보려는 듯 입술만 달싹이다가 끝내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설마 설마 했는데, 진짜 마셨다고?
“후······.”
로버트는 대답 안 하냐고 불호령을 내리는 대신, 짧게 한숨을 쉬며 이렇게 말했다.
“여기 너 싫어하는 사람 X나 많아.”
누군가가 옆에서 숨을 삼켰다.
아무리 빡친 상태라지만 저걸 대놓고 말해도 되나.
“사람들이 다 너를 싫어하는 거 같지? 그게 맞을 수도 있어. 적어도 난 그래.”
로버트는 기본적으로 야수조 선수를 터치하지 않는다.
만약 꼭 주의를 줘야 한다면 단둘이 있을 때만 하지.
이렇게 남들 보는 앞에서 쏘아붙이는 건 적어도 나는 처음 봤다.
“그럼 저보고 뭐 어떡하라는 겁니까?”
얘가 술이 덜 깼나.
이 지경까지 와 놓고서 자존심을 세우려는 건지 카일이 말대꾸를 한다.
그러나 대참사가 벌어질 거란 예상과는 달리, 로버트는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야구를 X나 잘해야 해. 니 살길은 그것밖에 없어.”
야구로 보답하겠다, 뭐 이런 사고 친 선수들이 종종 하는 헛소리가 떠오른다.
보답이 될지 안 될지 나는 모르지. 근데 사실 야구 선수가 할 수 있는 건 야구밖에 없긴 하다.
만약 카일이 박도현급 실력을 가졌다면 다저스 팬들이 실드를 치고, 절대 보내서는 안 된다고 매달렸을 거다.
로버트가 한 말이 사실이긴 하다.
미움받는 선수가 살아날 길은 야구를 잘하는 것뿐이다.
그 말뜻을 카일이 이해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1회 말 이후, 카일이 실책을 저지르지는 않았다.
3타수 무안타를 기록한 끝에 8회 초 네 번째 타석에서 교체되긴 했지만.
오늘 경기의 최종 스코어는 2대 3.
1회 말 이후 실점 없이 6회까지 마운드를 지켜준 로버트였지만, 시즌 4패째를 떠안았다.
* * *
이번 원정 9연전의 마지막 일정은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동부 끝에서 서부 끝까지 가는 기나긴 원정길이지만, 이동일이 하루 끼어 있어 한결 여유롭다.
연속 루징 시리즈로 침울해졌지만, 다음 경기를 위해 애써 분위기를 끌어올리며 공항으로 떠나려던 도중.
“다들 고생했네. 오늘 경기는 아쉽게 됐어.”
다저스의 마이크 올리버 단장님이 원정 라커룸을 방문했다.
굳이 라커룸까지 내려오는 경우는 흔치 않은데, 무슨 일인가 싶어 다들 긴장하는 가운데.
단장님은 구석에 찌그러져 있던 카일을 향해 다가갔다.
“카일, 할 말이 있는데. 여기서 해도 괜찮겠나?”
그 순간, 다들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눈치챘을 거다.
카일이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단장님은 악수를 권하며 통보했다.
“구단 직원이 안내해줄 테니 밀워키로 바로 이동하도록. 그곳에서 파드리스 선수단에 합류하면 될 거야.”
카일의 행선지는 다름아닌 같은 지구 팀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이적 후에도 자주 얼굴 보게 생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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