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신 들린 천재 타자-47화 (47/200)

47. 뉴 페이스

카일을 데리러 온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구단 직원의 차 안.

불과 몇 시간 전까지 다저스 유니폼을 ‘입었던’ 카일 캠프는 통화 상대를 쏘아붙였다.

“그래. 그렇다고. 내가 여기서 헌신한 게 몇 년인데, 말 한마디 없이 보내버렸다니까?!”

팀에 빠르게 합류하려고 재활 일정까지 앞당겼는데 배신당했다느니.

자신을 주전 유격수로 삼겠다던 감독의 감언이설에 속아 넘어가 이미 LA에 집까지 샀다느니.

분노에 찬 카일의 말을 조용히 들어주던 에이전트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래도 이 트레이드가 오히려 좋은 기회일 수 있습니다.]

“······뭐?”

[파드리스에서는 주전 유격수로 뛸 수 있습니다. 게다가 그쪽도 다저스 못지않게 유격수 팜이 심각하니, 예전의 기량만 돌아오면 3년 이상의 계약도······.]

“입 닥쳐, 이 무능한 새끼야!!!”

카일은 자신의 신세가 모두 불운 때문이라고 여겼다.

유망주 시절부터 수비로는 탑클래스였지만, 타격 재능이 부족해 만년 마이너 신세였다.

다저스로 트레이드되고 나서야 드디어 타격에 눈을 떠 메이저리그 주전을 차지했지만.

잠깐 출장정지로 이탈한 사이 박도현이라는 초특급 유망주가 그 자리를 홀랑 차지해버렸다.

3루며 2루며, 구단 사정대로 자리를 옮겨 다니며 FA만을 기다렸던 세월.

FA를 앞둔 시즌, 박도현의 죽음으로 주전 유격수 자리가 비었을 때.

카일 캠프는 진심으로 기뻐했다.

기간은 짧지만 연봉을 늘린 2년 FA 계약을 맺고, 타격을 더 갈고닦으며 두 번째 FA를 행사할 단꿈에 젖어 있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그 자리를 같은 나라에서 온 투수 나부랭이한테 빼앗기다니.

[파드리스에서 준비해준 임시 숙소에서 지내는 동안, 부동산 문제는 제가 처리해드릴게요.]

에이전트의 제안에 그나마 화가 좀 가라앉았다.

그러나 이대로 넘어갈 생각은 없었다.

“기자들한테 먹여놓은 것들 좀 있지? 뱉으라 그래.”

[······예?]

“남 뒤통수를 때렸으면 욕은 좀 먹어야지.”

SNS나 인터뷰에서 사고를 여러 번 쳤던 카일은 뒷수습을 위해 기자들을 종종 이용했다.

이미 결정된 트레이드를 물릴 순 없더라도, 최소한 그 과정에서 자신의 자존심을 짓밟았다는 사실은 폭로해야 한다.

[지금 여론전을 펼치는 건 독이 될 확률이 높아요, 카일.]

그러나 에이전트의 대답은 기대와는 전혀 달랐다.

“뭐 이 새끼야?! 그게 니 일이잖아!!”

[다저스가 이미 길터주기식 트레이드라면서 판을 다 짜 놨어요. 팬들도 자기네들이 손해 아니냐는 여론이 대세고요.]

아마 부상 이전부터 트레이드 준비를 해왔을지도 모른다는 의견을 덧붙였지만, 카일의 귀에는 닿지 않았다.

겨우겨우 정신을 차린 카일은 어떻게든 물어뜯을 거리를 궁리했다.

“어, 그, 나한테 아무 언급 없이 진행한 트레이드잖아! 최소한 미리 준비할 시간은 주는 게 도리지!”

[그렇지 않은 경우가 훨씬 많죠. 게다가 단장이 직접 라커룸까지 내려가서 통보해줬다면서 선수를 치더라고요.]

“내가 복귀하고 나서 환영하는 자리 같은 것도 없었어! 제대로 반겨주는 사람도 없었다고!”

[대놓고 욕을 먹었다면 모를까, 너무 약해요. 혹시 녹취록 같은 건 없나요?]

“그······!”

카일의 머릿속에 방금 치르고 온 경기가 떠올랐다.

“오늘 경기에서 로버트가 그랬어. 사람들이 다 나를 싫어한다고. 녹취는 없지만, 중계에 잡혔을 거야.”

[그거는······ 카일이 실책한 다음에 그런 거 아니었어요?]

“그런 건 빼고, 살은 좀 붙여서 그럴싸하게 만드는 게 기자 놈들 할 일 아니야!!”

어쨌든 덕아웃에서 대놓고 훈계하며 자존심을 건드린 건 사실.

그 사실을 물고 늘어지면 로버트도 해명을 피할 수 없을 거란 계산이었지만.

[카일. 경기 전날 술 마셨죠?]

에이전트의 질문에 카일은 숨을 삼켰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는 알아요. 제가 카일을 담당한 지가 벌써 몇 년째인데요.]

술에 약하고 숙취도 심한 자신에게, 경기 전날 음주는 태업 의혹까지 끼워 맞출 수 있는 일.

게다가 그날 밤, 술에 취한 모습을 채드윅에게 들키기까지 했으니 잡아뗄 수도 없다.

“이런 X발!”

파직!

카일은 핸드폰을 집어던졌다.

다시 왼쪽 어깨에 따끔한 통증이 느껴졌지만, 그걸 느낄 겨를조차 없었다.

“뭘 쳐다봐?! 구경 났어?!”

“아, 아닙니다.”

뒤돌아보던 파드리스 직원에게 괜히 화풀이를 한 뒤.

카일은 고개를 숙이며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그러다 문득 그의 입에서 스산한 한마디가 튀어나왔다.

“······Koo.”

그놈이 돌아오고 나서 모든 게 어그러졌다.

주전 유격수 자리도. 팀에서의 입지도. 팬들의 지지도.

겉으로는 친절한 척하면서 자신을 궁지로 몰아넣는 가증스러운 자식.

“야.”

“아, 예! 무슨 일이십니까?”

“다음 다저스전 일정이 어떻게 되지?”

나는 잘못이 없다.

내게 잘못을 뒤집어씌운 놈을 단죄해야 한다.

카일의 머릿속을 채우는 생각은 그것뿐이었다.

* * *

[LA 다저스와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1대 3 트레이드 합의!]

LA 다저스의 내야수 카일 캠프(27)가 트레이드를 통해 파드리스 유니폼을 입게 됐다.

반대로 파드리스에서는 베테랑 외야수 벤 리히터(33), 더블 A 좌완투수 조쉬 먼로(24), 하이싱글 A 우완투수 에드윈 니콜슨(20)이 다저스로 이적한다.

이번 트레이드는 서로의 팀 사정에 따른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면서 발생했다고 전문가들은 추측했다.

다저스는 투수에서 내야수로 전향한 Hyun―Ki Koo와 마이너리그 계약으로 영입한 채드윅 마틴이 유격수 자리를 채워주면서 기존 주전 유격수 카일의 입지가 애매해졌다.

파드리스는 주전 유격수가 절실히 필요했고, 고액 연봉을 받으면서 미미한 활약을 보이는 베테랑을 내보낼 필요가 있었다.

시즌 개막 전 다저스와 블루제이스 사이의 트레이드는 개막 한 달이 지난 지금 ‘윈―윈 트레이드’로 평가받는 지금, 이번 트레이드의 결과는 어떨지 귀추가 주목된다.

* * *

애리조나로 이동하는 길.

연속 루징 시리즈를 기록했음에도 선수단의 분위기는 밝았다.

“아, 물 흐리던 놈 빠지니까 속이 다 시원하네!”

평소 거만한 언행으로 팀워크를 해치던 카일 캠프가 트레이드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축하해, 이달의 신인!”

“막 콜업돼서 연속 삼진당하고 질질 짜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말릭이 내셔널리그 이달의 신인에 선정됐기 때문이다.

24경기에 출전해 0.312/0.398/0.463, 4홈런.

다른 신인 선수들이 특별히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기에 본인도 어느 정도 확신은 있었을 거다.

“말릭! 한잔 사야지! 설마 메이저리그 사무국이 인정한 남자가 돈 아깝다고 빼는 건 아니겠지?!”

“오케이! 애리조나 도착하면 내가 쏜다!”

“와! 말릭이 사주는 밥이다!”

“나는 최저연봉자가 사주는 밥이 제일 맛있더라!”

말은 저렇게 해도 베테랑이 은근슬쩍 계산해버리는 게 메이저리그 문화.

가끔 진짜 털어먹거나, 주긴 주는데 자루에 동전으로 담아다 주는 양아치들도 있긴 한데.

우리 팀 최고참이 클레망이니까 그런 짓은 안 할 거다.

“제리, 말릭만 상 받았다고 삐진 거 아니지?”

눈치도 없고 개념도 없는 랜디가 제리에게 돌직구를 날려버렸다.

제리의 4월 성적은 5경기 출전해서 5승 무패 ERA 1.59.

뛰어난 성적을 기록했지만, 시카고 컵스의 에이스 A.D. 존슨에게 밀려 이달의 투수상을 수상하지는 못했다.

“메이저리그의 단일 시즌 연속 퀄리티스타트 기록이 몇 경기인 줄 알아?”

예전에 아버지한테 들었던 말이 떠오른다.

질문에 질문으로 대답하는 놈들은 항문을 꿰매버려야 한다고.

“2005년, 무려 32년 전 크리스 카펜터가 기록한 22경기가 메이저리그 신기록이지.”

“그래서 어쩌라고.”

“그 기록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투수에게 어쩌면 이달의 투수는 너무나 사소한 영예가 아닐까?”

온갖 곳에서 과자며 땅콩 포장지가 제리를 향해 날아갔다.

“저 새끼는 위로를 해주면 안 돼.”

“잘한다 잘한다 하니까 아주 지 세상인 줄 아네.”

“왜 아주 세계신기록까지 세워 버리지 그러냐.”

“어? 다른 리그에 세계신기록이 있어?”

“우리 팀에서 뛰던 RYU 알지? KBO에서 세운 23경기 연속 퀄리티스타트가 세계기록이라네.”

“와, 미쳤다. 그해는 RYU가 뛰던 팀이 우승했겠네.”

“저놈이 야구에 쓸 열정을 조금만 빼돌렸으면 진작 연애도 해봤을 텐데.”

“방금 어떤 새끼야?!”

연애 얘기만 나오면 급발진하는 제리의 옆자리에서 벗어나 자리를 옮겼다.

100번 놀려도 100번 다 반응해주니까 다른 놈들이 맨날 저러지.

어디 빈자리 없나 두리번거리던 그때.

“Hey, Koo.”

“아, 앤서니.”

시즌 개막을 앞두고 토론토에서 온 앤서니 아우젤로가 손짓했다.

“트레이드 기사 봤지? 이번에 온다는 친구들.”

“네, 봤죠.”

“같은 지구 팀이잖아. 어때? 아는 친구 있어?”

아는 사람이야 있지.

하이싱글 A 소속 투수 에드윈 니콜슨.

이 친구랑은 나름 동고동락을 해온 사이다.

“에드윈이 저랑 같은 에이전시예요.”

“아, 그래? 특급 유망주였나 보네. 벌써 에이전시도 있고.”

“아뇨, 그건 아닌데 사정이 있어서.”

라이브 배팅을 위해 숙식 제공 아르바이트로 데려온 투수.

나를 상대하면서 혼자 포크볼의 완성도를 높이는 등 노력하는 모습을 지켜본 데릭이 손을 내밀었다.

에이전시가 있다는 걸 구단이 파악 못 했을 리가 없는데, 트레이드로 풀린 게 좀 의외네.

“벤 리히터인가? 그 친구는 어때?”

카일이 떠나면서 생긴 로스터의 공백을 채울 베테랑 외야수.

파드리스와 5년 보장 6,000만 달러의 계약을 맺은 선수이기도 하다.

한창 전성기인 29세에 파드리스에 입단한 만큼, 다저스와 여러 번 맞부딪혀 봤어야 마땅하겠지만―

“몰라요.”

“어?! 몰라? 왜?”

“한 3년 전인가? 그때 몇 번 보긴 했던 것 같은데. 기록을 찾아봐야 알 것 같아요.”

경기를 뛰어야 상대도 해볼 것 아닌가.

파드리스에서 지금껏 보내온 3시즌 동안 장기 부상 티켓을 4번 끊은 양반이다.

계약 초기 잘나가다가 외야 펜스에 부딪혀서 60일 IL행.

후반기에 복귀했다가 얼마 안 돼서 얼굴에 데드볼 맞고  시즌 아웃.

다음 시즌 중반이 되어서야 복귀했는데, 이번엔 덕아웃으로 날아온 배트에 정강이를 맞고 또 시즌 아웃.

그다음 시즌에 복귀 후 슬라이딩을 하다가 손목 부상에 코뼈 복합골절까지 당하면서 또 또 시즌 아웃.

유리몸도 유리몸인데,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질 정도로 재수가 없었다.

“그러면······ 아주 그냥 쌩 먹튀네?”

“바로 그거죠.”

3시즌 동안 이 사람이 뛴 기간을 합치면 반년은 될까.

아직 2년 2,400만 달러의 계약이 남아 있는데, 또 언제 부상으로 퍼질지 모르는 지뢰 매물.

그러니까 우리 팀의 지뢰를 넘기면서도 상대 팀의 핵심 투수 유망주 조쉬 먼로까지 받아올 수 있었던 거다.

게다가 유망주 랭킹에서는 저평가받고 있는데, 에드윈 니콜슨도 제법 괜찮은 투수고.

“어떤 사람인지 직접 만나보고 싶을 지경이네.”

앤서니가 기가 막히다는 듯 중얼거렸다.

사실 나도 궁금하긴 마찬가지다.

보통 같은 지구 선수에 대한 소문은 어떻게든 들려오기 마련인데, 역대급 먹튀짓 탓에 파드리스 선수단도 이 사람을 잘 모르니까.

반면에 저 멀리 앞자리 쪽에서 혼자 앉아 있는 클레망은 조금 긴장한 기색이었다.

만약 먹튀짓까지 하면서 성질까지 부리는 베테랑이라면 카일 못지않게 팀 분위기를 해칠 테니까.

남한테 쓴소리를 어려워하는 클레망이기에, 그런 선수를 휘어잡기도 힘들 거고.

그렇게 기대와 걱정이 교차하는 가운데 도착한 애리조나의 호텔.

원정 숙소에 집합한 선수단을 향해, 구단 직원이 한 남자를 데리고 다가왔다.

자료에서만 봐 왔던 전설의 선수, 벤 리히터의 등장이었다.

“오늘부터 우리 팀에 합류하게 된 벤 리히터다. 다들 벤이 팀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줬으면 좋겠다.”

짧은 박수를 보낸 후, 벤에게 선수단 앞에서 자기소개를 할 시간이 주어졌다,

메이저리거들이 대부분 그렇듯 커다란 덩치에 살벌한 인상.

저년차 선수들이 긴장하는 가운데, 이윽고 벤의 입이 열렸다.

“반가워. 내 이름은 벤, 리히터.”

얼굴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얇고 가는 목소리.

그리고 단 세 마디로 끝나버린 자기소개.

침묵에 빠진 선수단을 둘러보던 벤은 혼자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하더니 덧붙였다.

“외야수.”

참 알고 싶었던 정보였다.

조지보다 말수 적은 선수를 만날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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