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따끔한 맛(1)
메이저리거 중에는 극한의 아웃사이더가 종종 있다.
인간관계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그냥 조용히 자기 할 일만 하는 게 편한 선수들.
“Hey, 벤. 우리 말릭이 이달의 신인 수상 기념으로 한턱내기로 했는데, 같이 갈래?”
“갈래.”
근데 또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가겠다는 걸 보면 팀에 녹아들 생각이 아예 없는 것 같지는 않고.
“어서 오십시오!”
“2층으로 모시겠습니다!”
다음날 등판 예정인 제리나 컨디션이 영 안 좋아서 일찍 자야겠다는 로버트 등등.
몇몇 선수들만 빼고 대부분의 선수단이 저녁을 먹으러 갔다.
클레망이 센스 있게 미리 예약해 둔, 숙소에서 멀지 않은 예약제 식당.
“빨리 빨리 메뉴들 정해서 넘겨! 배고프니까!”
“메뉴 두 개 시켜도 돼요?”
“나 말고 말릭한테 물어봐!”
오는 길에는 호기롭게 굴었던 말릭도 메뉴판을 확인하고 나서는 표정이 약간 굳었다.
이 가격에 이 인원. 종업원 팁까지 합치면 중고차 한 대 가격은 나갈 거다.
“안녕, 벤. 예전에 잠깐 인사했던 것 같은데. 난 클레망이야.”
“응. 안녕.”
클레망은 벤의 맞은편에 앉았다.
대화를 나누면서 어떤 선수인지 파악해보려는 심산일까.
옆 테이블에 앉은 나도 은근슬쩍 그쪽에 귀를 기울였다.
“갑작스러웠을 텐데, 그래도 이런 자리에 와줘서 고마워. 다저스에 온 기분은 좀 어때?”
“기뻐.”
“그래? 다행이네. 혹시 우리 팀의 어떤 점이 맘에 들었는지 물어봐도 될까?”
“아내와 아들이 LA에 살아.”
프흡―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에 음료를 마시다 사레가 들렸다.
[아 드러! 왜 갑자기 뿜고 난리야!]
‘좀······ 닥쳐봐······.’
저 무뚝뚝한 사람한테 아들까지 있다는 게 너무 예상 밖이긴 했는데.
남이 결혼했단 말 듣고 뿜는 건 엄청 실례 아닌가.
다행히 벤을 향해 우르르 몰려간 선수들 덕분에 내 소란은 금방 묻혔다.
“뭐야, 벤. 결혼했어요?”
“사진 보여줘요! 사진!”
“자. 여기.”
사진을 확인한 선수들이 침묵에 잠겼다.
“보통 이런 가족사진 찍을 땐 웃으면서 찍지 않나······?”
“웃은 건데.”
슬쩍 끼어들어서 나도 사진을 봤는데, 순간 할 말을 잃었다.
가동 전의 안드로이드 가족을 데려다 앉혀 놓으면 딱 저렇겠다는 느낌.
<화목한 가정>이라는 제목으로 현대미술 전시관에 데려다 놔도 어색하지 않을 것 같다.
‘이상한 사람이다.’
어떤 선수들은 에고가 너무 강해서 남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기도 한다.
만약 이런 선수가 최고참이라면 선수단 기강이 개판이 되기도 하지.
그래도 아예 팀워크를 망가뜨리는 카일 같은 선수보다야 훨씬 낫지만.
“다들 그만 일어나자고.”
내일 경기를 생각해 가볍게 끝난 식사 자리.
선수들은 히죽거리며 말릭을 일으켜 세웠다.
“잘 먹었어, 말릭~”
“다음 달에 또 상 타라! 그때 가서 또 얻어먹게!”
억지웃음을 지으며 종업원을 불러낸 말릭이었지만.
“다른 분이 이미 계산을 다 하셨어요.”
그 말에 차마 숨길 수 없는 웃음꽃이 피어났다.
“야, 쟤 표정 봐! 진짜 쫄았나 보다!”
“누가 계산했어? 아깝다! 이달의 신인한테 밥 얻어먹을 기회였는데!”
보나마나 클레망이 아까 화장실 간다면서 계산했겠지.
그런데 평소대로라면 멋쩍은 웃음을 짓고 있었을 클레망의 표정이 알쏭달쏭하다.
“잘 먹었어요, 클레망.”
한 선수가 작게 인사를 남기고 빠져나가자 클레망이 중얼거린다.
“내가 계산한 거 아닌데······.”
클레망은 굳이 이런 일에 겸손 떨지는 않는 선수.
본인이 계산 안 했다면 진짜 안 한 거다.
다저스에서 보통 이런 자리에서는 클레망이 계산하는 게 관례처럼 굳어졌는데, 그럼 누가 한 거지.
[야, 야.]
박도현이 불러서 쳐다보니, 입구 근처 종업원에게 다가가는 벤의 모습이 보였다.
“잘 먹었어요.”
“감사합니다! 내일 경기 힘내세요!”
가벼운 인사를 나누는 것 같더니, 종업원이 슬쩍 내민 카드를 잽싸게 받아 챙겼다.
첩보 영화 찍는 것도 아니고 저게 무슨 짓이래.
계산할 거면 이적 기념으로 쏘는 거라며 생색이라도 내던가.
‘진짜 이상한 사람이다.’
[그러게.]
박도현이 인정할 정도면 진짜 심각한 거다.
‘그래도 나쁜 사람은 아니야.’
나쁜 사람은 남을 위해 한 끼에 중고차 한 대를 태우지 않는다.
실력적으로는 모르겠지만, 베테랑으로서의 책임감은 있다고 봐도 되겠지.
* * *
[에드윈한테 전화라도 해주지 그래?]
호텔 방으로 돌아가 눕자마자 박도현이 그런 소리를 꺼냈다.
‘전화? 무슨 전화?’
[우리 팀 온 거 환영한다, 메이저에서 빨리 만나자, 뭐 그런 거.]
같은 에이전시의 유망주와 한 팀이 되면 연락하는 경우는 많지만, 굳이 지금 할 필요까지야 있을까.
오자마자 한 달도 안 돼서 바로 다른 팀에 팔려가는 경우도 수두룩한데.
내 표정을 읽었는지 박도현이 갑자기 훈계를 시전했다.
[너 마이너 때 생각 안 나? 스프링캠프나 리햅 경기 때 잠깐 봤던 메이저리거가 연락 한 번 해주면 그게 그렇게 기억에 남는다잖아.]
‘그야 뭐······.’
[걔네가 메이저리그에 올라오면 아주 확고한 니 편이 한 명 생기는 거야. 이거 완전 남는 장사 아니냐?]
틀린 말은 아니다.
싱글 A에서 시즌 도중 하이싱글 A로 승격됐을 때, 클레망한테 받은 축하 연락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니까.
근데 로버트는 그런 연락 같은 거 한 번도 안 했는데도 믿고 따르는 젊은 투수들이 많다.
결국은 케이스 바이 케이스.
[너도 솔직히 마이너에 있을 때 내가 연락해주면 기뻤지?]
‘닥쳐.’
근데 생각해보니 얘 마이너리그 생활 1년도 안 했잖아.
어디서 아는 척이야. 열받게.
‘에드윈 번호가 어디 있을 텐데······.’
그래도 해서 손해는 아니니 연락을 해보기로 했다.
헤어지기 전 받아둔 연락처를 벌써 쓸 날이 올 줄은 몰랐네.
[여, 여보세요?]
“안녕, 에드윈. 혹시 나 기억해?”
[Koo!!! 자, 잘 지내셨습니까! 제가 이번에 다저스로······!]
“알아. 잘 왔다고 연락한 거야.”
생각보다 리액션이 크다.
나도 예전에 클레망한테 연락 받았을 때 저랬을까.
일단 박도현이 연락했을 때는 확실히 저러진 않았다.
“그러면 지금 미들랜드에 도착한 거야?”
[아닙니다. 조쉬와 함께 털사로 데려다주시더라고요.]
이적과 함께 더블 A로 콜업됐다는 소식까지 전달받았다.
다저스 스카우트 팀이 제법 실링을 높게 평가한 모양이네.
“혹시 제리도 연락했어?”
심각하게 재수없긴 하지만, 어쨌든 이것저것 섬세하게 챙기는 제리라면 이미 연락했을지도 모른다.
[아, 예. 해주셨습니다.]
“혹시 뭐라 그러디? 내 뒷담 같은 거?”
[아닙니다! 저기, 그······.]
에드윈은 말을 하다 말고 우물쭈물했다.
[얼른 올라와서 연속 퀄리티스타트 기록을 세우는 순간을 옆에서 지켜볼 행운을 누리라고······.]
괜히 물어봤다.
저딴 소리나 할 거면 차라리 연락하지를 말지.
다음에 또 저딴 헛소리 지껄이면 그냥 끊어버리라고 충고해주면서 통화를 마쳤다.
‘조나단한테도 연락해봐야겠네.’
마이너리그에서 차근차근 자라고 있는 초특급 3루 유망주 조나단 라틀리프.
지금은 내가 3루 알바를 뛰고 있지만, 얘가 빠르게 성장해서 메이저에 올라오면 유격수 수비에 집중할 수 있겠지.
그렇다고 연봉조정 협상에서 생색을 못 내는 것도 아니니까.
[OH MY GOD!!! Koo!!!]
바로 통화 음량부터 줄였다.
얘가 기차 화통을 삶아먹었다는 걸 잊고 있었다.
“안녕, 조나단. 잘 지내······.”
[어떻게 알고 연락했어요?! 통보받은 지 한 시간도 안 됐는데!]
평소보다 끝장나게 높은 텐션, 한 시간 전의 통보.
바로 태블릿을 꺼내 다저스 포럼에 접속했다.
최상단의 속보란에 올라온 기사의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다저스 내야 유망주 1위 조나단 라틀리프 A+서 AA 승격!]
이제 마이너 2년 차인 놈이 참 빠르게도 올라갔다.
물론 그건 그거고.
“당연히 알아야지, 우리는 라커를 함께 쓴 사이인데.”
그러자 박도현이 혐오스러운 눈길을 보낸다.
그럼 내가 뭐라 그러냐. 생각나서 전화 걸었는데 타이밍이 좋았다고?
그게 더 소름 돋겠다.
[고마워요, Koo! 빨리 메이저에서 만났으면 좋겠어요!]
“나도 그래. 더블 A는 거기보다 시설이 꽤 좋을 거야. 밥도 맛있고. 특히 감자 샐러드가 맛있으니까 많이 먹어.”
이번에는 마치 범죄자를 보는 듯한 시선으로 바뀌었다.
뭐. 왜. 뭐.
조나단 입에는 맞을 수도 있잖아. 감자보다 오이가 더 많이 들어간 샐러드지만.
* * *
원정 9연전의 마지막 일정,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이번 시즌 시범경기 때 약간의 사연이 있었던 팀이다.
단타―2루타―3루타―홈런.
4개의 안타를 순서대로 쳐내는 내추럴 사이클링 히트.
그 경기의 임팩트가 없었더라면 개막 로스터에 이름을 올리기 힘들었을지도 모르지.
그리고 내가 본의 아니게 인터뷰에서 어그로를 끌었던 팀이기도 하다.
“저한테 3안타 허용했던 디백스 투수도 지금 멀쩡히 잘 던지고 있는 걸로 아는데요.”
샌디에이고의 셋업맨 매버릭 윌슨의 위협구로 벤치 클리어링 직전까지 갔던 경기.
그놈에게 항의하는 뜻을 담아 진행한 인터뷰였지만, 당연히 디백스 팬들의 기분이 좋을 리는 없었지.
[Koo, ‘디백스 투수 나한테 3안타 허용’··· 자신감과 만용 사이 아슬아슬한 줄타기]
[“Koo는 존중을 배워야 한다”, 디백스 팬들 ‘경고’]
물론 당시 경기도 지고 극딜까지 먹은 샌디에이고 언론에서 이런 분위기를 조장하기도 했지만.
어쨌든 이걸 명분 삼아 나한테 빈볼을 던질 가능성도 없진 않았다.
빈볼을 분위기 반전의 계기쯤으로 여기는 양아치가 메이저리그에 없진 않거든.
팀 내부에서 그런 걱정이 나오는 가운데, 7번 유격수로 출장한 시리즈 첫 경기.
따아아악―!
[3구 스윙! 커다란 타구! 외야수 집결! 그러나 이 타구는 담장을 직격하고 떨어집니다! 3루 주자 홈으로! 1루 주자까지 홈으로! 빠르게 뛰어 2루까지 입성하면서 2타점 적시 2루타! Hyun―Ki Koo!!!]
첫 타석에 들어가자마자 위협구나 빈볼은 없겠구나 싶었다.
‘몸으로 말해요’의 빈볼 감지 능력이 전혀 발동하지 않았으니까.
다만 디백스의 좌완 선발을 공략하지 못했고, 셋업맨에게서만 2루타를 뽑아내며 4타수 1안타를 기록했을 뿐.
[투수 코치가 마운드를 방문하는군요. 오늘 경기 제리 헤이즈택의 역할은 여기까지입니다. 7과 3분의 1이닝 무실점, 퀄리티 스타트 플러스를 기록하며 연속 퀄리티 스타트 기록을 6경기로 늘립니다.]
개막 이후 다저스 선발진 중 최고의 컨디션을 자랑하는 제리가 마운드를 단단하게 지켜주며, 1차전은 손쉽게 가져갔다.
그리고 2차전.
다저스 3선발 다니엘 슈미트의 선발 등판 경기.
채드윅이 선발 유격수로 출장하면서 나는 벤치를 지켰다.
“Yeah!!!”
6회 말까지 마운드를 지킨 다니엘은 마중 나온 선수들과 하이파이브를 나누며 포효했다.
다니엘의 이날 투구 내용은 6이닝 4피안타 무사사구 8K 무실점.
최근 컨디션이 올라오기 시작하더니, 이번 시즌 최고의 경기를 펼쳤다.
스코어 2대 0으로 앞서면서 시즌 첫 승 요건까지 갖춘 상태.
그러나 불과 10분 후.
“아······.”
머리를 부여잡는 다니엘의 모습이 전광판에 비쳤다.
7회 말 두 번째 투수로 최근 컨디션이 좋았던 앤서니가 올라갔지만, 아웃카운트 하나를 잡는 동안 두 명의 주자를 내보냈고.
급한 불을 끄러 올라온 고든이 초구에 홈런을 허용하면서 다니엘의 첫 승 요건이 날아갔다.
이번 시즌 9경기 등판해 ERA 0.84를 기록한 고든의 시즌 첫 피홈런.
9회 초 투수 타석에서 대타로 나가 안타를 기록하긴 했지만, 경기를 뒤집지는 못하며 다니엘의 첫 승은 다음으로 미뤄졌다.
개막 이후 첫 두 경기야 본인 컨디션이 별로였으니 어쩔 수 없다지만.
최근 폼이 올라오면서 시즌 ERA는 3.96까지 떨어졌는데, 승리 없이 3패.
패배 귀신에 아주 단단하게 씌였다.
[너 예전에 점수 안 나서 연패하면 타자들 세워놓고 줄방망이 때려야 한다고······.]
'내가? 에이 설마.'
나 같은 평화주의자가 그런 말을 했을 리가 있나.
설령 그랬다고 하더라도 그건 과거의 일일 뿐.
원래 사람은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니까.
“다들 수고했다. 오늘 아쉬운 플레이는 최대한 빠르게 잊고, 내일 경기만 생각하면 된다.”
감독님은 선수단 분위기를 다잡으려 애썼지만, 쉽진 않았다.
내일 경기까지 패배하면 3연속 루징 시리즈를 달성하게 되니까.
게다가 경기가 끝나기가 무섭게 애리조나 언론에서 올라온 한 기사 때문에 선수단 분위기는 더욱 어수선해졌다.
[내일 선발 등판 예정 호세 리카르도, “Koo에게 따끔한 맛을 보여줄 것이다. 이것으로 그가 존중을 배웠으면 좋겠다.]
시범경기에게 내게 3타수 3안타를 허용했던 선발 투수.
그가 나에게 대놓고 도전장을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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