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따끔한 맛(2) - 수정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와의 3차전을 앞둔 오전.
평소였다면 클레망과 따로 추가 훈련을 진행할 시간이지만, 오늘은 건너뛰었다.
거절할 수 없는 호출을 받았으니까.
“좋은 아침입니다, 감독님.”
“그래, 컨디션은 좀 어떤가?”
“쌩쌩합니다.”
지금 지쳐 있으면 안 되지.
어제 대타로 한 타석만 나갔는데. 수비도 안 하고.
“자네도 알다시피, 서로 안부나 주고받으려고 부른 게 아니지.”
감독님은 전날 올라온 기사를 보여줬다.
나에게 따끔한 맛을 보여주겠다던, 오늘 선발 등판 예정 투수 호세 리카르도의 인터뷰.
거의 선전포고나 마찬가지였지만.
“자네 생각은 어때? 자네한테 빈볼이 올 것 같나?”
“아니라고 봅니다.”
만약 나라면, 진짜 그럴 의도가 있었다면 절대 기자한테는 말 안 한다.
사전에 알려지면 심판진한테도 당연히 전달될 테고. 그럼 몸쪽을 찌르기만 해도 바로 경고다.
이렇게 대놓고 예고하는 건 사인 훔치기나 인종차별 등, 상대가 심각한 문제를 일으켰을 때나 묵인되는데. 내가 한 발언이 그 정도는 아니지.
차라리 다저스 선수들을 흔들려는 의도의 인터뷰라는 게 더 현실성 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타석에서 집중력을 잃어버리는 타자가 한두 명만 나와도 성공이니까.
“솔직히 우리도 같은 생각이지만, 가능성이 아예 없진 않아.”
그러나 감독님 입장에선 섣불리 ‘수작 부리는 거니까 걱정 말아라’라고 말할 수 없겠지.
실제 플레이에 들어가기 전까진 무엇이든 일어날 수 있는 게 야구니까.
“그래서 말인데, 이런 생각을 한번 해 봤는데 말이야······.”
이어지는 감독님의 설명을 듣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누가 이 감독님을 보고 덕장이라 그러던가.
뭐 이런 빠꾸 없이 급발진하는 사람이 다 있어.
“좋습니다.”
당장 해야지.
굳은 악수를 나누는 감독님과 나를 보며 박도현이 질색했다.
[요새 계속 지더니 사람들이 점점 이상해지고 있어······.]
뭐래. 껴들지 마.
나 대신 경기 뛰어줄 것도 아니면서.
* * *
LA 다저스와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의 시즌 3차전.
1승 1패로 시리즈의 균형을 맞춘 가운데, 디백스의 홈구장 체이스 필드는 묘한 열기로 가득했다.
가장 큰 이유는 오늘 경기 디백스의 선발 투수가 빈볼 예고로 해석할 수 있는 발언을 했기 때문.
다저스에 안 좋은 기억이 있던 홈팬들은 온라인에서는 환호했지만, 정말로 일을 키울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 경기의 로스터가 발표된 직후.
사람들은 정말로 무언가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갖게 됐다.
[오늘 경기의 첫 타자가 타석으로 향합니다. 슬래시라인 0.395/0.477/0.860으로 환상적인 4월을 보낸 선수. 데뷔 첫 리드오프 출전, 1번 유격수! Hyun! Ki! Koo!]
다저스 감독은 가장 타격감이 좋은 타자를 앞세웠을 뿐이라고 했지만, 그걸 믿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디백스의 선발 호세 리카르도를 저격했던 구현기의 리드오프 기용.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명확했다.
“던질 테면 던져봐. 노리기 좋게 첫 빠따로 내보내 줄게.”
간접적인 도발에 대놓고 정면돌파하는 패기.
반으로 나뉜 전광판에 투수와 타자의 모습이 함께 잡혔다.
무표정으로 서로를 노려보는 두 사람.
곧이어 주심이 선언했다.
“플레이 볼!”
* * *
감독님은 상대에게 빈볼 의도가 없다고 99%쯤 확신한 듯했다.
디백스의 소위 ‘벤클 요원’들은 죄다 부상자 명단에서 골골대는 중.
나를 담가서 타격감을 떨어트린다고 해도 뒷감당을 할 수가 있어야지.
아무튼 덕분에 메이저리그에서 첫 리드오프 출전을 경험하게 됐고.
타석에 들어가자마자 상대 투수의 뜻을 알 수 있었다.
‘역시 뻥카였네, 이 새끼.’
재능 ‘몸으로 말해요’의 빈볼 감지 능력이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
빈볼을 의식하게 해놓고 카운트를 가져가겠다는 속셈.
“낭심 보호대 말고 기저귀나 차고 오지 그랬냐? 어차피 그쪽은 안 노릴 건데.”
이미 뜻을 읽고 나니 포수가 으르렁거리는 것도 귀엽게만 느껴진다.
그렇게 몸쪽 존 안에 들어오는 패스트볼을 의식하면서 초구를 맞이했는데.
“스트라이크!”
예상과는 정반대로 바깥쪽에 걸치는 포심.
배트를 내려다 움찔했지만, 주심의 판정은 단호했다.
“Hey! Baby! 우리가 미안해!”
“겁먹었구나?! 그러게 착한 아이로 지냈어야지!”
“너네 감독님한테 가서 기저귀 갈아달라 그래!”
상대 덕아웃이며 뒤쪽 관중석에서 온갖 조롱이 쏟아진다.
멘탈을 흔들려는 얕은 수작.
빠르게 떨쳐버린 뒤 2구를 맞이했지만.
딱!
“윽!”
낮은 공을 퍼 올리려고 했지만, 배트가 밀리면서 파울.
타구가 오른발 옆부분을 때렸다.
신발이 충격을 흡수해주긴 해도 통증을 안 느낄 수는 없는 법.
“Hey.”
이 와중에 투수는 포수더러 얼른 공을 달라고 재촉한다.
가뜩이나 자존심 대결로 흘러가고 있는 오늘 경기.
여기서 통증을 가라앉히겠답시고 타임을 부르면 기세가 꺾인다.
‘들어온다 싶으면 무조건 스윙한다.’
0―2를 선점한 투수라면 삼구삼진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게 아니더라도 헛스윙 삼진보다는 루킹 삼진이 훨씬 안 좋다.
타석에서 소극적으로 대처하는 타자를 어떤 감독이 믿을 수 있을까.
예상 구종은 상대 투수의 결정구, 고속 슬라이더.
패스트볼 타이밍에 맞춰 스윙해도 막상 궤적은 아래로 휘어지는 더러운 공이지만.
정확한 컨트롤 없이는 그냥 대놓고 빠져나가거나, 존 안으로 들어오는 빠르고 밋밋한 슬라이더에 불과하다.
긴장감 속에서 맞이한 3구.
‘실투!’
한가운데로 몰리는 코스.
최소 커트는 할 수 있다고 확신하며 스윙을 가져갔다.
그러나.
부웅!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분명 가운데로 몰리는 듯했던 공이, 마치 배트를 피하듯 아래쪽으로 훅 떨어졌다.
순간 등에 소름이 확 끼쳤다.
‘이 구속에 이 무브먼트라고?’
만약 의도하고 던진 공이라면, 적어도 당장은 공략법이 떠오르지 않는다.
슬쩍 투수를 보니, 아무 리액션 없이 포수한테 공을 요구하고 있다.
“Koo! 선풍기질 고오맙다! 애리조나 날씨 더운 건 또 어떻게 알아 가지고!”
“여름에도 원정 올 거지? 그때도 잘 부탁해!!”
등 뒤로 쏟아지는 야유에 귀를 닫으며, 대기 타석에서 나오는 조지에게 말했다.
“고속 슬라이더가 거지 같아요. 어지간한 포심 구속에 무브먼트도 장난 아니에요.”
“구체적으로는?”
“제리 커터보다 아주 조금 나은 정도.”
“망했군.”
그렇게 얼굴을 찌푸리며 타석으로 향한 조지였지만.
따악―!
바로 그 고속 슬라이더를 받아쳐 안타를 만들어냈다.
뭐야. 이러면 내가 뭐가 돼.
* * *
1회 초 세 번째 타자 켄이 병살을 때렸고, 이후 두 이닝을 삼자범퇴로 틀어박히면서 4회 초 선두 타자로 나섰다.
“아웃!”
결과는 내야 뜬공.
덕아웃으로 터덜터덜 돌아왔는데, 타격 코치의 호출을 받았다.
평소 타석에서의 결과 가지고 질책하는 스타일은 아닌지라 뭔가 싶어 가보니.
“Koo. 저놈 지금 너만 노리고 있어.”
“네? 이제 와서 빈볼을요?”
“그게 아니고.”
타격 코치는 상대 선발 호세 리카르도의 투구 데이터를 보여줬다.
“너를 상대할 땐 사인 교환을 아예 안 했어. 네 성향을 분석해서 레퍼토리를 미리 짜온 모양이야.”
다른 타자를 상대할 때보다 평균 2~3초쯤 앞당긴 인터벌.
결정적으로 빠르면서도 강한 무브먼트를 동반했던 고속 슬라이더는 나한테만 던지고 있었다.
“아마 저놈한테도 이 공은 몸에 부담이 쌓이는 거겠지.”
조금 전 타석에서 고속 슬라이더를 골라내서 볼을 얻어내긴 했다.
근데 알고 골라냈다기보다는, 무조건 기다리기로 한 타이밍에 그게 들어온 거지.
그 공을 또 상대하기 싫다는 생각에 몸쪽 깊숙한 공을 무리하게 잡아당겼다가 아웃된 거고.
“그럼 다음 타석에서는······.”
“빠른 타이밍에 승부를 가져가는 게 오히려 나을 수 있지.”
그렇게 맞이한 6회 초 세 번째 타석.
“아웃!”
초구를 노려 쳤는데, 3루수 앞에 떨어지는 땅볼이 나왔다.
“노림수를 가져가더라도 결과가 안 나올 때도 있지.”
“······.”
“뭐.”
누굴 원망하겠나. 결국 스윙을 선택한 건 난데.
3타수 3안타를 때려냈던 시범경기 때와는 달리, 3타수 무안타로 꽁꽁 묶이고 있는 지금.
타석에서 활약하지 못하는 만큼, 최소한 수비에서는 밥값을 하기 위해 죽어라 뛰어다녔고.
“아웃!” “아웃!”
오늘 다저스의 선발 마리오 로드리고가 제구 불안으로 볼넷을 다섯 개나 헌납했지만.
세 개의 더블 플레이를 합작하면서 내야를 빈틈없이 틀어막았다.
최종 성적은 5이닝 1실점.
1대 0으로 아슬아슬하게 뒤져 있는 상태에서 경기는 이어졌다.
* * *
8회 초, 디백스의 수비.
선발 투수 호세 리카르도는 홈팬들의 환호를 받으며 마운드에 올랐다.
현재 투구 수 92개. 완봉 도전 여부는 이번 이닝 결과에 달려 있다.
‘못해도 8회까진 내가 막아야 해.’
하위 타선부터 시작하는 이번 이닝 다저스의 공격.
팀의 불펜 사정을 생각하면 조금이라도 이닝을 책임져야 했다.
호세는 타석에 들어오는 7번 타자 클레망 파로를 노려보며 마인드 컨트롤에 집중했다.
그러나 자기도 모르게 몸에 힘이 들어갔던 걸까.
따아악―!
따악―!
하위 타선의 타자 두 명에게 연속 안타를 얻어맞고 순식간에 무사 1, 3루의 위기에 봉착했다.
고작 1점에 불과한 점수 차를 고려하면 너무나 커다란 위기.
마운드로 올라오는 투수 코치를 보며 마음의 준비를 마친 호세였지만.
“믿는다, 호세.”
투수 코치는 마운드에 오래 머무르지 않았다.
4월 한 달간 내셔널리그 불펜 ERA 전체 14위를 차지한 팀 사정을 이야기하며, 그의 눈을 간절하게 바라봤을 뿐.
그는 고개를 돌려, 덕아웃 난간에 기대 자신만을 애처롭게 바라보는 동료들을 확인했다.
이만한 기대가 쏟아지는 상황에서.
약한 소리를 할 수 있는 투수가 과연 있기나 할까.
“스트라이크 아웃!”
투수 대신 올라온 대타를 삼진으로 잡아내며 원아웃 1, 3루.
사실은 더블 플레이로 잡아내고 싶었지만, 그런 투정을 부릴 틈은 없다.
대기 타석에서 막 걸어오고 있는 타자는 다름 아닌 구현기.
그가 오늘 경기에서 목숨을 걸고 잡아내야만 하는 타자였다.
‘솔직히 처음엔 얕봤었다.’
스프링캠프 기간의 안일한 판단이 화근이었다.
다른 경기에서 나쁘지 않은 활약을 했다고 들었으면서도 준비를 게을리했고. 존 안에 아무렇게나 쑤셔 박았다.
두 타석 연속 안타를 허용하고 나서야 정신이 들었지만, 이미 늦어도 한참 늦었다.
[너는 X발 투수도 아니야! 어디 가서 디백스 선수라고 하면 죽여버린다!]
[투수한테 3안타 처맞은 놈이 밥은 넘어가나 보지?! 그걸 SNS에 처 올릴 정신도 들고?!]
한동안 SNS 메시지는 물론 등판하는 날 현장에서까지 쏟아지던 팬들의 비난과 야유.
시간이 지나면서 시들해지긴 했지만, 그 사건은 호세 리카르도에게 지독한 상처를 남겼다.
‘너만은 무조건 잡는다.’
그러나 그는 상처를 독기로 승화시킬 줄 아는 투수였다.
자신의 결정구이자, 구현기에게 무참히 얻어맞은 고속 슬라이더.
컨트롤을 위해 잡아챌 때 약간 힘을 뺐지만, 그냥 안과 밖 둘 중 하나를 고른다는 생각으로 위력을 올리는 데만 집중했다.
따끔한 맛을 보여주겠다는 인터뷰를, 마치 빈볼 예고라도 되는 것마냥 실어놓은 기사를 보고 기가 막혔지만.
굳이 나서서 정정해줄 필요는 없었다.
그런 나약한 투수가 아니라는 걸 바로 이 자리, 홈팬들 앞에서 증명해줄 생각이었으니까.
마침내 그 노력이 결실을 맺었다.
앞서 세 번의 타석에서 구현기를 돌려세운 것.
그러나.
따아악―!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경기 초에 비해 확실히 위력이 떨어진 고속 슬라이더를 구현기가 제대로 받아쳤다.
좋게 마무리를 짓지 못한 승부.
호세 리카르도가 고개를 떨구던 그 순간.
“와아아아아아아!!!”
홈팬들의 함성에 그는 뒤를 돌아봤다.
“아웃!” “아웃!”
1루심의 판정이 떨어지기 무섭게, 글러브에서 공을 꺼내 던지며 포효하는 1루수.
명백한 안타성 공을 잡아내면서, 베이스를 밟아 1루 주자를 아웃시킨 것이다.
더블 플레이로 이닝 종료.
“으아아아아아!!”
평소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는 그였지만, 지금은 참을 필요가 없었다.
득점 지원이 고작 1점이면 뭐 어떤가.
방금 수비는 그에게 10점 이상의 가치로 다가왔다.
현재 투구 수 104개.
메이저리그 커리어 통산 첫 완봉승의 기회가 그의 눈앞에 찾아왔다.
* * *
9회 초. 다저스의 정규이닝 마지막 공격.
마운드를 지키는 것은 여전히 호세 리카르도.
전광판이 텅 빈 홈팀 불펜을 비추자, 디백스 팬들의 열화와 같은 환호가 터져 나왔다.
‘박쥐 같은 인간들.’
호세 리카르도는 이를 악물었다.
예전의 조롱과 야유가 아직도 귓가를 맴도는 듯했으니까.
그러나 체력만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지금 상황에서 솔직히 힘이 되기도 했다.
“아웃!”
“아웃!”
다저스 타자들은 조급해졌는지 유인구에 함부로 손을 댔다가 범타를 만들어냈다.
공 5개만에 투아웃을 잡아내면서, 완봉승까지 남은 아웃카운트는 오직 하나.
그때, 다저스 덕아웃에서 움직임이 일어났다.
“대타 내보내겠습니다.”
최근 트레이드로 다저스에 합류했다던 베테랑 외야수.
사전 정보는 거의 없었다. 경기를 좀 뛰어 봤어야 뭐라도 기록이 나올 거 아닌가.
다만 어마어마한 유리몸이라는 것만 알고 있을 뿐.
‘수건 던졌네.’
대타가 타석으로 들어오기 전.
오늘 그가 복수에 성공한 타자 구현기가 대타에게 무어라 말을 걸고, 고개를 끄덕이는 게 보였다.
아마 복수를 해달라느니, 뭐 그런 시답잖은 소리겠지.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몸쪽 높은 변화구.’
부상 이력이 있는 타자가 약점을 보이는 구종과 코스.
승리를 확신하면서, 힘을 쥐어짜내 투구에 들어갔다.
쐐애애액!
초구는 의도한 곳을 정확하게 찔렀고.
따아아아아아아악!
체이스 필드는 침묵에 잠겼다.
타구가 관중석 상단에 떨어지는 텅, 하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 * *
[벤 리히터, 이적 후 첫 경기에서 동점 홈런포로 다저스 팬들 눈도장 ‘쾅’]
[Koo, 연장 10회 초 디백스 필승조 상대로 결승 2루타 작렬! 5타수 1안타에도 오브라이언 감독 ‘흡족’]
[오프시즌 불펜 보강 실패한 디백스! 연장전 역전패, 예고된 참사인가?]
[빈볼 예고 논란에 입 연 호세 리카르도! “아무 할 말이 없다. 팀의 패배를 막지 못해 어깨가 무거울 뿐.”]
[Hyun―Ki Koo, “호세 리카르도가 좋은 투수라는 생각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파드리스―다저스 트레이드의 결과는 다저스의 완승? 카일 캠프, 이적 후 3경기서 실책 2개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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