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신 들린 천재 타자-50화 (50/200)

50. 경쟁의 끝

디백스와의 3차전은 야구팬들 사이에서 소소하게 화제가 됐다.

서로 간의 인터뷰로 인한 라이벌 구도 형성. 그리고 완벽하게 복수에 성공한 투수 호세 리카르도.

여기까지는 야구판에서 흔하디흔한 라이벌리에 불과하지만, 아무도 기대하지 않던 이적생의 동점포와 믿고 보는 디백스의 불펜진이 이 경기를 ‘기묘한 이야기―메이저리그편’으로 만들어버렸다.

[호세 형은 나가 있어······ 뒤지기 싫으면······.]

└ ???: 고맙다······.

└ 이 X발놈들이 X 같은 Korean Meme을 가져와?! 이제 코리안은 지긋지긋해!

└ 제발 그만둬! 나 너무 무서워! 이러다간 다 죽어! 나 죽으면 유언장에 니들 이름 하나하나 다 적을 거다! 이 XX 같은 불펜 놈들아!

└ [충격 실화] 선발이 9이닝 1실점 도미넌트 스타트를 기록해도 이기질 못하는 팀이 있다?!

└ 옛날 옛적 애리조나의 한 시골 마을에 우애 좋은 삼형제가 살고 있었어요.

그들은 동시에 한 여인을 사랑했는데, 여인의 아버지는 10달러를 주며 이것으로 방 안을 가득 채우는 이에게 딸을 주겠다고 했죠.

그러자 삼형제는 10달러로 야구공과 글러브를 사서 디백스로 향했어요. 배트걸과 맥주 판매원 등 쟁쟁한 경쟁자들을 만났지만 모두 물리치고 입단에 성공했죠.

그리고 그들은 연장 10회 초 사이좋게 한 사람당 1실점씩 하면서 체이스 필드를 관중들 가슴 속 불꽃으로 가득 채웠답니다!

└ 디백스 프런트 퇴진 서명받고 있습니다. 오늘 경기에 실망하신 팬 여러분들은 꼭 참여해주시기 바랍니다! (링크)

└ 너 이 @*#^$ 어디 사냐 이 XXXX

└ 엌ㅋㅋㅋ 이거 Koo가 10회 초 2루타 치는 장면이잖앜ㅋㅋㅋ

└ 또 속냐! 이 친구야!

시범경기 이후 한동안 잠잠해졌던 ‘투같새 라인’이 다시금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디백스 팬들은 온라인상에서 전보다 격렬하게 ‘#YGJT(You Guys Just Thrower, 느그가 투수가)’ 운동을 펼쳐 나갔다.

‘선발이 그 정도 던졌는데 졌으면 좀 맞아도 싸지.’

인터뷰에서도 언급했지만, 호세 리카르도는 좋은 투수다.

나한테 내추럴 사이클링 히트를 허용하면서 두고두고 조롱의 대상이 됐는데, 그걸 극복하고 반대로 나를 호구 잡았지.

[솔직히 너도 찝찝하지?]

현재 디백스 불펜에서 저건 못 치겠다 싶은 공을 던지는 투수는 없다.

그래서 나도 연장 10회 초 2루타로 주자를 불러들였는데, 놀라우리만치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았다.

전쟁에선 이겼지만 승부는 졌다, 뭐 이런 프레임을 잡으려고 애리조나 언론에서 X꼬쇼를 벌일 뿐.

‘아니? X나 좋은데?’

그 승부 내가 하겠다고 했나.

나한테 중요한 건 그래서 그놈한테 빈볼을 던질 의도가 있었느냐 없었느냐일 뿐.

그다음부터는 내가 할 일에만 집중하면 그만이지.

아직은 출전 기회를 나눠서 받고 있는 나에게 5타수 무안타는 치명적이다.

‘나한텐 당장 오늘 경기에서 선발로 나가는지가 가장 중요해.’

바로 어제 원정 시리즈가 끝났지만, 바로 오늘부터 다저 스타디움에서는 홈 10연전이 열린다.

약속도 안 했는데도 알아서 일찌감치 출근한 야수조 선수들이 모여들었고.

지금은 클럽하우스 내부 식당에서 간단한 점심을 먹는 중.

“Koo. 그나저나 벤이 나가기 전에 뭐 좀 물어보는 것 같던데, 대체 무슨 얘길 해준 거야?”

“맞아! 도대체 뭐라고 했길래 벤 같은 먹······ 먹해질 정도로 실전 경험이 부족했던 투수가 홈런을 때렸어?!”

본인 앞 아니라고 말 너무 막하네. 팩트긴 하지만.

벤은 경기 끝나고 다저스 리포터와 첫 MVP 인터뷰를 했다.

그 인터뷰에서 10개 이상의 질문을 받은 건 사상 최초일지도 모른다.

‘벤, 당신의 새로운 팀 다저스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멋진 홈런이었습니다! 지금 소감을 들어볼 수 있을까요?’

‘기쁩니다.’

‘네, 솔직한 대답 감사합니다! 하지만 팬들은 당신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어 할지도 모르겠군요! 샌디에이고에서 LA로 오면서 당신에게 생긴 심경의 변화가 있을까요?’

‘기쁘고 설렜습니다.’

‘오케이, 벤. 당신이 자기 감정을 표현하는 데 별로 관심이 없다는 건 이해했습니다. 주제를 바꿔보죠. 당신의 이적 후 첫 타석이자 동점포를 날린 그 타석에서 어떤 마음가짐으로 임했습니까?’

‘몸쪽 공을 의식했습니다.’

왜냐하면 대답 하나에 10초를 넘기는 법이 없었으니까.

혹시 트레이드에 불만을 품고 일부러 인터뷰를 대충 하는 거 아니냐고 진지하게 의심하는 사람도 있었지.

파드리스로 FA 이적하기 전, 원 소속팀 텍사스 레인저스에서의 MVP 인터뷰 영상이 공개되면서 원래 저렇게 생겨먹은 사람이라는 게 밝혀지긴 했지만.

아무튼 그때 나눴던 이야기는 별거 아니었다.

“만약 내가 저 투수라면 어디로 던질 것 같냐고 물어보더라.”

솔직히 조금 놀랐다.

그냥 침울한 티 안 내려고 애쓰면서 서 있었을 뿐인데, 갑자기 나를 콕 집어 질문했으니까.

그전까지 개인적인 대화를 한 번도 안 나눠 봤는데도.

“그래서 뭐라 그랬는데?”

“몸쪽 높은 변화구라고 그랬지.”

얼굴에 데드볼을 맞은 적이 있는 타자들은 몸쪽 떨어지는 공에 예전보다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투수를 욕할 건 아니지. 그 약점을 극복 못 하는 건 결국 본인 책임이니까.

물론 상대가 대처하지 못할 거라고 판단해서 들어갔다가 홈런 맞는 것도 본인 책임인 건 마찬가지고.

“안녕.”

양반은 못 되는 걸까.

벤이 식판을 들고 이쪽으로 다가온다.

양갈비, 베이컨, 후라이드 치킨, 버터에 볶은 시금치 등등. 훈련 전에 먹는 것치고는 제법 무거운 메뉴들.

“그거 다 먹을 수 있어요, 벤?”

“먹어야 돼.”

그렇게 대꾸하더니 정말 먹기 싫다는 듯 억지로 꾸역꾸역 밀어 넣는다.

[옛날 모습이랑 진짜 다르긴 하다.]

‘그러니까 내가 기억을 못 하지.’

같은 지구 파드리스에서 뛰면서도 여러 차례 장기부상으로 골골댔던 탓에, 내가 벤과 맞대결을 펼쳤던 건 3년 전 두 경기뿐.

그때 영상을 보니까 상당히 날렵하고 호리호리한 체형이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확실히 얼굴부터 시작해서 제법 후덕해진 느낌.

“혹시 지금 벌크업하는 거예요?”

랜디가 던진 질문에, 입에 가득 담긴 음식을 간신히 삼키며 벤이 대답했다.

“아니. 지금은 유지 중.”

주력이나 수비 범위를 조금 포기하더라도, 파워와 내구성을 키우는 전략.

부상이나 노쇠화로 기량이 줄어든 타자가 흔히 하는 선택이긴 한데.

“그 정도로 찌우면 타격 밸런스 잡기 어렵지 않아요?”

타격폼을 비롯해 스탠스, 스윙 등의 매커니즘부터 주요 대처 구종 등등.

새로운 몸에 맞는 대대적 수정을 거쳐야 하는데, 이 과정이 또 만만치가 않다.

그런데.

“거의 다 잡았어.”

벤이 툭 던지듯 내놓은 대답에 다들 잠시 침묵에 잠겼다.

이적 전 파드리스에서 벤은 대타로만 8경기 출전해 7타수 1안타에 불과했다.

그런데 만약 그게 밸런스 조정이 안 끝나서였고, 이제는 어제 경기처럼 한 방이 있는 대타 자원으로 활약해줄 수 있다면.

[파드리스에 피바람이 몰아치겠는데?]

진지하게 프런트에서 몇몇은 목이 날아갈지도 모른다.

반대급부로 건너간 카일은 시즌 첫 안타도 신고하지 못한 채 3경기 2실책으로 삽질하고 있으니까.

심지어 핵심 유망주까지 덤으로 보냈는데.

‘남의 동네 걱정은 해서 뭐 하냐.’

박도현에게 핀잔을 주면서 식판을 챙겨 일어섰다.

“나 먼저 간다.”

“아, 왜. 같이 웨이트 가는 거 아니었어?”

“어디 좀 갈 데가 있어서.”

딱히 켕기는 건 없지만, 누가 불렀는지 대놓고 말할 순 없었다.

이 자리에는 채드윅이 끼어 있었으니까.

지금부터 내가 듣게 될 소식이, 경우에 따라 채드윅이 크게 실망하게 만들지도 모르니까.

* * *

이제는 꽤나 익숙해진 감독님과의 독대.

감독님은 자리에 앉자마자 바로 본론부터 꺼냈다.

“자네가 일주일 내내 경기를 뛰어도 문제가 없을지 테스트해볼 생각이야.”

사실상 나를 주전 유격수로 기용하겠다는 말.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다.

시즌 개막 이후 슬래시라인이 0.375/0.449/0.812. 실책도 2회로 구멍은 안 된다는 걸 증명했으니.

지금까지는 메이저리그에서 타자로서 뛰는 것에 적응할 시간을 줬다고 보는 게 맞겠지.

“우선 앞으로 한 달. 매주 한 번은 휴식일을 줄 거고. 또 한 번은 3루수로 기용할 거야.”

백업 3루수를 겸업하기로 한 이상, 최소한의 수비 감각은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겠지.

주전 3루수 켄의 장기 공백이 불가피하다면 트리플 A에서 전문 3루수를 데려다 써야겠지만, 열흘 정도라면 내가 자리를 채워야 할 테니까.

“이건 아주 중요한 거니까 명심해둬, Koo.”

감독님이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지금의 성적을 유지해야겠다고 발버둥 치지 마. 그러면 메이저리그에서 버티지 못할 거야.”

어찌 보면 당연한 걱정이겠지.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은 오히려 몸을 굳게 만들고, 부상의 위험도 올라간다.

“알겠습니다, 감독님.”

그래서 수긍하긴 했지만. 나한테는 지금만큼, 아니 지금보다 더 잘해야만 하는 사정이 있다.

명예의 전당.

메이저리그 역사에 남을 임팩트를 남기거나, 커리어 내내 꾸준히 호성적을 기록하지 않으면 쳐다볼 수조차 없는 그곳.

물론 그곳에 도달하려면 뼈를 깎는 노력도 필요하겠지만.

[현재 포인트: 3240]

박도현의 재능 역시 절실하게 필요하다.

살아만 있었다면, 명예의 전당에 무조건 들어갔을 그 재능이.

* * *

다저 스타디움에서 벌어지는 홈 10연전.

3연전―3연전―4연전으로 이어지는 이번 시리즈에서 앞선 두 개의 시리즈가 끝난 가운데.

나는 유격수 4경기, 3루수 1경기로 총 다섯 경기에 출전했다.

그 말인즉, 내가 다저스의 주전 유격수로 선택받았다는 게 대대적으로 알려졌다는 거다.

“Koo, 이제 따로 진행하는 훈련은 여기까지만 해도 되겠다.”

클레망은 이제 자기가 가르칠 만한 건 다 가르친 것 같다고 했다.

앞으로는 훈련이나 조언을 통해 배우는 것보다 직접 경기를 뛰며 배우는 게 훨씬 많을 거라는 덕담과 함께.

“열심히 해, Koo.”

채드윅은 이미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를 끝냈는지, 생각보다 담담했다.

이제는 그런 말도 슬슬 들을 일이 없어지긴 했지만, 지난 시즌까지 투수였던 나한테 밀렸다는 사실에 좌절하진 않을까 싶었지만.

“원래는 메이저리그에서 살아남기만 해도 다행이라고 생각했지만······ 나도 욕심이 생겼으니까. 긴장 풀진 말고.”

최소한 기회가 온다면 절실한 플레이를 보여줄 것 같아, 조금 마음이 놓였다.

그렇게 주전으로서의 첫발을 떼고, 체력 분배를 위해 궁리하고, 내 적응에 시간이 더 필요하다던 야구 프로그램의 몇몇 패널이 얼굴에 괴상한 스티커를 붙인 채 진행하는 걸 구경하면서.

홈 10연전 중 파드리스와의 4연전만을 남겨둔 시점.

[‘주전 유격수’ Koo, 눈에 띄게 떨어진 타격 페이스··· 이대로 괜찮은가?]

[익명의 전문가, “지금까지는 출전 시간에서 배려받은 만큼 페이스 배분이 쉬웠던 것”]

뭐 이런 어처구니없는 기사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사실 성적 감소는 어느 정도 예상하긴 했지.

지금까지는 투수들이 나와 승부를 피하기 어려운 분위기가 만연했는데, 이젠 그냥 타자 취급이고.

그렇다고는 해도, 이제 막 주전으로 발돋움한 유격수가 5경기 16타수 4안타 3볼넷을 기록하고 있는데, 그걸 가지고 눈에 띄게 페이스가 떨어졌다느니 하는 건 좀 많이 갔다.

언론의 반응에 휘둘릴 시기는 지났지만, 사실 루키 시절이었더라도 흔들릴 일은 없었을 거다.

아주 확실하고 정직한 수단으로 지금의 내 활약을 평가받고 있었거든.

[Koo가 관심을 가질 만한 굵직한 제안은 이 정도라고 보시면 됩니다.]

주전으로 기용되고, 내가 메이저리그에 오래 붙어 있을 만하다고 판명되고 나니, 각종 스폰서 및 광고 촬영 제안이 쏟아졌다.

불과 한 달도 안 됐을 뿐인데 자릿수가 달라졌다.

심지어 몇몇 제안은 투수 시절보다도 액수가 늘어나기도 했으니 말 다 했지.

“일단 잔여 시즌 계약을 제안한 것들 위주로 가죠. 광고 촬영은 올스타 브레이크쯤 진행해도 괜찮다는 곳으로 잡아주시고요.”

[알겠습니다. 하지만 어지간해서는 받아들일 것 같네요. 빨리 침을 발라야 한다는 간절함이 느껴지더라고요.]

선수 케어 못지않게 돈 되는 일을 잘 관리하는 데릭은 연일 행복한 비명을 질렀다.

[다년 계약은 왜 다 거절했어?]

이런 쪽으로는 짱구가 잘 안 돌아가는 박도현은 의문인 모양이었지만.

‘일단 대부분 총액이 시원찮고.’

다년이라고 해봤자 3년을 넘기지 않는 것들인데, 그런 것치고는 위험 부담이니 뭐니 해서 단가를 너무 후려친다. 게다가 제약도 많은 편이고.

‘이번 시즌이 끝나면, 더 좋은 제안이 들어올 거 아냐.’

박도현이 오랫동안 방치된 공중화장실에 들어간 사람 같은 표정으로 나를 쳐다본다.

뭐. 왜. 뭐가 문제야. 눈 예쁘게 떠.

나 명예의 전당 보내준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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