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신 들린 천재 타자-51화 (51/200)

51. 스위트홈(1)

5경기 16타수 4안타.

타자로서의 메이저리그 첫 시즌이고, 수비 부담이 큰 유격수라는 걸 고려하면 괜찮은 수준이지만.

그래도 LA 팬들이 내 페이스가 줄어들고 있느니 마느니 호들갑을 떠는 건, 4월 한 달 동안 워낙 준수한 활약을 선보였기 때문일 거다.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내가 보기엔 몸쪽 승부를 들어가는 투수들이 적어졌다는 게 크다.

메이저리그 구단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 내가 몸쪽 공에 강하다는 걸 슬슬 분석했겠지.

아래로 떨어지는 변화구는 그나마 괜찮게 골라내는 편이긴 한데.

바깥쪽 유인구를 기가 막히게 던지는 좌투수들한테는 조금 약했다.

특히 바깥쪽 가장자리를 찌르는, 강한 무브먼트를 동반하는 공에 헛스윙 비율이 높아졌다.

[그건 익숙해지는 것 말고는 답이 없어.]

풀타임 첫 시즌 40―40을 기록했던 박도현조차도 보더라인 투구를 제대로 해내는 투수들한테는 고전했었다.

지금 단계에서 내 타격에 약점이 없으면 그게 더 이상한 거지.

[어차피 기회는 계속 주신다고 했으니까, 익숙해질 때까진 타이밍을 잡는다는 생각으로 접근해봐. 조급해지면 그냥 끝이야. 겨울에 개고생해서 잡아놓은 타격 밸런스 무너진다.]

훌리안 코치님 밑에서 개처럼 굴렀던 나날이 떠올라 순간 소름이 돋았다.

타자로 탈바꿈하기 위해 그 고생을 했는데, 그걸 죄다 날려버릴 순 없지.

그렇게 타격 성적에 대해서는 인내심을 갖고 임하기로 했지만.

‘장타가 안 나오는 건 좀 아쉽네.’

정규시즌의 20%를 넘긴 현재 시점에서 내 홈런은 6개.

그마저도 주전으로 발탁된 이후부터는 아직 장타를 추가하지 못한 상태.

체력적 문제도 약간 있고, 투수들이 몸쪽 승부를 피하니 자연스레 밀어치기 위주의 타격을 하게 되는 것도 원인이다.

[올해까진 홈런 욕심내지 말자고 했잖아.]

박도현도 그렇고, 훌리안도 그렇고.

이번이 첫 시즌인 만큼 정확한 자세와 컨택에 집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솔직히 맞는 말이지만, 시즌 초반 몸쪽 패스트볼을 상대로 생각보다 홈런이 잘 나오다 보니 약간 욕심이 좀 생겼지.

‘근데 이번 시리즈에서는 나올지도 모르겠다, 홈런.’

홈 10연전의 마지막 상대는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최근 12연패에 빠지며, 돈은 돈대로 써 놓고 리빌딩 중인 로키스한테도 밀려 지구 최하위로 추락한 팀이니까.

* * *

다저 스타디움의 원정팀 전용 회의실.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의 코칭스태프들은 우중충한 표정으로 자료만 뒤적거렸다.

“그래, 오늘 경기는 이대로 진행하면 될 것 같고······ 다른 의견 있는 사람?”

“······.”

아무도 대답하지 않자, 감독은 코치들을 해산시켰다.

복도를 걷던 감독은 요즘 자꾸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았다.

팀이 12연패 중인데 멀쩡한 감독이야 없겠지만, 진짜 골치 아픈 문제는 따로 있었다.

쾅!

“그래, 이 XX놈들아! 어디 니들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봐!”

소란스러운 라커룸에서 뛰쳐나오던 한 선수와 눈이 마주쳤다.

기강이 완전히 무너진 팀에서 그나마 중심을 잡으려고 애쓰던 베테랑.

“······안녕하십니까.”

“그래.”

분노에 차 씩씩대면서도 자신과 눈이 마주치자 진정하려 애쓰는 그 모습이, 감독에게는 참 안쓰럽게 느껴졌다.

감독은 라커룸 안으로 들어가 소란을 일으킨 선수들의 얼굴을 살폈다.

베테랑들이 FA와 부상으로 빠져나간 사이 클럽하우스를 휘어잡으려는 일부 선수들.

그리고 얼마 전 같은 지구 팀에서 온 이적생.

“무슨 일이지?”

별 의미 없다는 걸 알면서도 할 수밖에 없는 질문.

“서로 피드백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조금 과열됐을 뿐입니다. 그렇지, 카일?”

“그럼요. 서로 도움을 줄 수만 있다면 이 팀에서 제가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서로를 향한 불만을 숨길 생각이 없어 보이는 태도였다.

그럼에도 감독은 소란 피우지 말라는 하나 마나 한 소리밖에 남길 수 없었다.

사실상 프런트에게 좌지우지되는 신세라는 걸 선수들도 다 알고 있기에.

‘이렇게 될 거라고 분명 얘기했는데!’

카일 캠프는 분명 나쁘지 않은 선수다.

포지션을 옮겨 다니면서도 골드 글러브 최종 후보에 여러 차례 들며 수비력을 입증했다.

“파드리스에도 골드 글러브 유격수가 나올 때가 됐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던 구단주가 환장할 만한 선수지.

문제는 그놈의 멘탈과 워크에식.

기강을 잡아줄 베테랑이 많은 다저스 같은 팀이면 몰라도, 지금의 파드리스가 다루기는 힘든 선수다.

그런 다저스마저 내친 걸 보면 대충 사이즈가 나오니, 눈치 빠른 구단은 아예 영입전에서 발을 빼 버렸지만.

구단주 앞에서 재롱떨기 바쁜 망할 단장 놈이 기어코 일을 벌였다.

‘게다가 벤은 또 어떻고?’

잦은 부상으로 먹튀 짓을 했고, 극도의 아웃사이더이긴 하지만.

최소한 팀 스피릿과 고액 연봉자로서의 책임감은 있는 선수였다.

파드리스에는 신고식이랍시고 막 콜업된 선수를 비싼 식당에 데려가 계산을 강요하는 악습이 있는데.

벤이 그 자리에서 몰래 계산하거나 액수를 확인해서 나중에 돌려주었다는 일화를 여러 번 들었으니까.

두통약을 챙겨 덕아웃으로 들어간 파드리스 감독은, 그라운드에서 훈련 중인 홈팀 선수들을 바라보았다.

‘Koo 같은 선수 어디 또 안 나오나······?’

절실하고, 실력 있고, 무엇보다 아무런 기대가 없었는데 갑자기 두각을 드러낸 선수.

원래부터 자주 그랬지만, 오늘따라 다저스 오브라이언 감독이 너무나 부러워지는 파드리스 감독이었다.

* * *

홈 10연전의 마지막 시리즈이자, 파드리스와의 시즌 4차전.

이번 경기에도 다저스 팬들이 나름 주목할 만한 스토리가 있다.

우선 이번 시즌 에이스급 피칭을 선보이고 있는 제리 헤이즈택의 기록이 주목받고 있다.

시즌 7경기 등판해 7승, 48과 2/3이닝 7실점으로 ERA 1.29의 미친 성적.

게다가 연속 경기 퀄리티 스타트 기록도 여전히 진행 중이다.

“저놈의 기록 좀 빨리 깨졌으면 좋겠네. 실책하면 모가지가 매달릴 것 같아서 내가 요즘 제리 경기 전날 잠을 못 자.”

“단장님한테 나 좀 빨리 트레이드해달라고 졸라야겠어. 저놈 뻐기는 꼴을 이번 시즌 내내 어떻게 봐?”

말은 저렇게 해도, 제리가 등판하는 날이면 야수들의 집중력이 조금 높아지는 것 같다.

“친구들, 너무 부담 가질 필요 없어. 너희 실책으로 내 기록이 날아가면 메이저리그 공식 홈페이지에 얼굴이 대문짝만하게 걸릴지도 모르겠지만. 난 그래도 괜찮아.”

“너는 괜찮겠지.”

“안 괜찮게 해줄까?”

“등판 전에 급똥 마려워서 변기 열어보니까 누가 물 안 내리고 갔으면 좋겠다.”

물론 제리 하는 거 보면 그냥 빨리 깨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안 드는 건 아닌데.

사실 가장 의식하고 있는 건 본인일 테니까. 그냥 하던 대로 해주길 바라며 수비만 신경 쓰면 그만이지.

그리고 어찌 보면 다저스 팬들이 더 신경 쓸 만한 또 하나의 이유.

“카일! 개자식아! 갔으면 잘하기라도 하지 그게 뭐야!”

“너 때문에 파드리스 놈들이 우리 보고 사기꾼이라잖아!”

작년 한 해 다저스의 주전 유격수로 뛰었던 카일이 다저 스타디움으로 돌아오는 첫 경기니까.

홈팬들의 반응은 조롱 반, 안타까움 반 정도다.

어쨌든 박도현의 사망으로 힘든 시기를 보내던 작년 다저스의 내야를 책임져주기도 했고. 다저스에 서운하다느니 뭐 그런 언론 플레이 없이 조용히 떠났으니까.

“······쯧.”

오늘 와서 다저스 덕아웃을 있는 대로 꼬라보는 걸 보니, 감정이 아예 없진 않은 모양인데.

“저 새끼 또 뭐야?”

“이따 경기에서 우리 안 만날 것 같나?”

카일한테 감정이 안 좋은 몇몇 선수들이 눈을 부라리자 금방 꼬리를 내린다.

“플레이 볼!”

그렇게 긴장과 어수선함 속에서 시작된 경기.

기록은 머릿속에서 지우고, 반드시 이겨야겠다는 마음만 남긴 채 그라운드로 나갔지만.

1회 초, 나를 포함한 내야수들이 타구를 만져볼 기회는 찾아오지 않았다.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스트라이크 아웃!”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제리가 14개의 공으로 삼진 세 개를 얻어내며 이닝을 끝냈으니까.

긴 연패에 빠져 있는 상대 선수들의 절박한 심정을 읽고 아슬아슬한 유인구를 계속 던진 게 먹혔다.

“K! K! K!”

“아주 손쉽게 끝내버리네! 야수 놈들 뒤뚱뒤뚱 뛰어다니는 꼴을 봐야 하는데!”

“그 재수 없는 인터뷰 오늘 또 봐야 하는 거야?! 오늘 등판 끝나면 바쁜 일 있다고 먼저 가면 안 돼?!”

장난스런 야유는 무시하면서, 덕아웃을 비추는 카메라를 향해 머리를 쓸어넘기며 씨익 웃어 보이는 제리.

[너 오늘도 고생 좀 하겠다. 실책이라도 하면 욕 오지게 먹겠는데?]

박도현이 실실 웃는다.

이렇게 컨디션이 좋은 날은 커터도 말을 잘 듣고, 그럼 후반으로 갈수록 내야 땅볼도 많이 나오니까.

‘실책하면 속죄포 한 방 쏘고 오지 뭐.’

오늘 파드리스의 선발은 얼마 전 트리플 A에서 올라와 이번이 통산 두 번째 선발 등판인 투수.

첫 등판에서 겁나 말아먹었지만, 극단적 타자 친화 구장 쿠어스 필드에서의 경기였다는 걸 감안해 다시 기회를 준 모양인데.

따아악―!

아무리 그래도 로키스와는 타선의 무게감부터가 다른데, 너무 무모한 선택이 아니었나 싶다.

1회부터 공 27개를 던지며 2실점.

저렇게 정신 못 차릴 때 상대하면 딱 좋았겠지만, 6번 타자 클레망이 뜬공으로 물러나며 내 첫 타석은 2회로 미뤄졌다.

[제리가 평소처럼만 하면 연승은 이어가겠다. 쟤네 정신 못 차렸네.]

박도현이 원정팀 덕아웃을 가리키며 수군거린다.

목청껏 소리를 지르며 억지로라도 파이팅을 이어가도 모자랄 판에,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공수 교대를 준비하고 있다.

파드리스에서 베테랑이 많이 이탈했단 건 들었는데, 진짜 개판이네.

쐐애애액!

퍼엉!

“스트라이크!”

1회와 마찬가지로 쌩쌩한 제리의 공에 파드리스 타자들은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고.

“아웃!”

빗맞은 땅볼을 제리가 직접 잡아 1루수에게 토스하며 원 아웃.

“아웃!”

선풍기 스윙에 걸린 타구를 중견수 루카스가 마중 나와 잡아내면서 투 아웃.

2사 주자 없는 상황에서 파드리스의 6번 타자가 타석으로 향하자, 조롱과 야유, 응원이 한데 뒤섞여 다저 스타디움을 뒤흔들었다.

솔직히 나라도 그러겠다.

파드리스 유니폼을 입은 채 제리를 노려보는 카일의 모습이 어지간히 어색해야 말이지.

“후우.”

짧게 한숨을 쉬면서 감정을 가라앉힌 뒤.

옛 동료를 눈앞에 둔 제리가 망설임 없이 와인드업에 들어갔다.

* * *

[파드리스의 6번 타자는 카일 캠프. 바로 얼마 전 트레이드를 통해 유니폼을 갈아입게 된 선수입니다.]

[맞습니다. 다만 이른 복귀와 갑작스런 환경 변화가 독이 된 걸까요? 이적 후 파드리스의 주전 유격수로 꾸준히 출장하면서도 9경기 29타수 4안타, 타율 0.138에 실책도 3개를 기록하는 등 기대에 못 미치는 활약을 보여주고 있죠.]

[반대로 카일이 떠나면서 주전 유격수 자리를 차지하게 된 Koo는 최근 약간 주춤했어도 여전히 괜찮은 활약을 펼치고 있습니다. 올 시즌 타율 0.338, 실책은 2개를 기록했죠. 카일이 개막 직후 3주 이상의 공백을 가졌다는 걸 고려하면 엄청난 차이입니다.]

[과연 전 소속팀을 찾아온 카일 캠프의 첫 타석은 어떤 결과를 낳을까요? 제리 헤이즈택 와인드업! 앗! 초구부터 스윙! 쳤습니다!]

[유격수 Koo의 백핸드 캐치! 잡아서 1루로 송구! 아웃! 조금 느리지만 3―유간으로 향하는 좋은 코스였지만 Koo가 당연하다는 듯 처리해냅니다!]

[카일 캠프도 내야 안타가 적지 않은 선수예요. 장타력은 부족하지만 발이 빠르고 컨택 능력이 괜찮으니까요. 그러나 Koo의 이 수비가 내야 안타가 될 수도 있는 공을 땅볼로 둔갑시키는군요!]

[모처럼의 안타 기회를 빼앗긴 카일 캠프가 울분을 터뜨리지만, 다저스 선수들은 아무 상관 없다는 듯 돌아섭니다! 스코어는 2대 0! 제리 헤이즈택의 퀄리티 스타트 도전은 여전히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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