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스위트홈(2)
“야수들은 첫 수비나 첫 타석에서 이건 좀 아니다 싶은 플레이가 나오지? 그날 경기 내내 안 풀린다.”
박도현이 아직 살아 있을 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내가 타자로 전향할 줄 꿈에도 몰랐던 나는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갔다.
직접 뛰어보고 나서야 그게 얼추 맞는 말이라는 걸 알았지.
그나마 다행인 건, 이 법칙은 나 말고 상대한테도 똑같이 적용된다는 거다.
* * *
“베이스 온 볼스!”
2회 말 첫 타석의 결과는 스트레이트 볼넷.
방망이를 내 볼 생각조차 안 드는 어처구니없는 공만 들어왔다.
‘얘는 안 되겠다.’
메이저리그가 개막한 지 한 달이 넘었고. 이제 어지간한 투수들은 내가 투수 출신이라는 걸 의식하지 않고 승부에 들어가는데.
일부 투수들, 특히 팀에서 입지가 불안정한 투수들은 아직도 신경 쓰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런 투수들은 둘 중 하나다.
‘너는 무조건 잡는다’라며 무지성으로 덤비거나, ‘너한테까지 당하면 끝장이다’라며 벌벌 떨거나.
개인적으로는 전자가 고마운데, 이놈은 확실히 후자다.
‘다음 볼에 출발해.’
흔들리는 투수. 발 빠른 주자. 평균 이하의 어깨를 가진 포수. 개판이 된 내야진.
도루 사인이 안 나는 게 더 이상한 상황.
팍! 팍! 팍!
“2루! 2루!”
파드리스 2루수의 다급한 지시에 카일이 베이스 커버를 들어가긴 했지만, 세이프라는 확신이 들었다.
어깨에 자신이 없는 포수라면 아예 안 던지는 게 나을 정도로 완벽하게 빼앗은 타이밍.
분명 그랬는데.
“이런 X발······!”
고개를 돌려 상황을 파악했다.
카일의 욕설 섞인 비명과 외야를 향해 날아가는 공.
내가 엎드린 건 추진력을 위해서였다고 주장하듯, 슬라이딩하던 자세 그대로 몸을 일으켜 세워 3루로 뛰었다.
“세이프!”
덕아웃에 세레머니를 보낸 뒤, 조금 전 장면이 리플레이되는 전광판을 흘낏 쳐다봤다.
2루 베이스를 밟고 멍하니 서 있던 카일이 글러브로 송구를 튕겨내고 있었다.
‘정신이 아까 타석에 가 있으니 저러지.’
송구가 안 올 타이밍이라고는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본인 입장.
공을 던지고 말고를 결정하는 건 포수인데, 자기 딴에는 안 올 거라고 판단했으니 대응은 늦어질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는 V-리그의 정상급 리베로들이나 보여줄 법한 완벽한 리시브였다.
“친정팀 사랑도 티 좀 안 나게 할 수 없어? 파드리스 단장한테 총 맞을까 봐 마이크가 윈터 미팅에 못 나가면 네놈이 책임질 거야?!”
“사실은 발레리노가 되고 싶었던 거냐, 카일?! 공중 동작이 예사롭지 않았어!”
3루 쪽 관중석에서 예술과 문화의 도시 LA답게 기상천외한 조롱이 쏟아졌다.
아무리 그래도 지금 실실 쪼개면 벤치 클리어링이겠지?
따아악―!
덕아웃으로 돌아가 마음껏 웃으라는 듯, 8번 타자 헨리가 넉넉한 플라이를 쳐 줬다.
“Koo!! 이 동업자 정신도 없는 놈아!! 파드리스 감독이 요즘 두통약 달고 사는 게 너 때문이라는 소문이 있어!!”
“도대체 지금까지 도루하고 싶은 걸 어떻게 참았던 거야?!”
“그 몸에 그 속도로 달리면서도 무릎이 멀쩡한 이유가 뭐야? 알려주면 영혼이라도 팔겠어!”
뭐긴 뭐야. 타고난 거지.
차가 반파되는 교통사고를 겪고도 메이저리그에 돌아올 수 있었던 건, 타고나기를 튼튼한 인대와 관절 덕도 있었다고 보니까.
아무튼 경기 초반에 벌써 3대 0. 마운드에는 올 시즌 ERA가 1.29인 제리.
일찌감치 가까워진 승기에 다저스 덕아웃은 흥을 한껏 끌어올렸다.
“스트라이크 아웃!”
“아웃!”
제리가 배터 박스 끝에서 얌전히 서 있었는데도 볼을 하나 얻어내는 기묘한 삼진을 당하고.
말릭이 3―0의 카운트에서 노려 친 공이 담장 바로 앞에서 잡히면서 2회 말은 3대 0의 스코어로 끝났다.
“다들 알지? 오늘도 어제처럼! 잘 달리고 잘 막고 잘 치자!”
“Let’s Go!”
“Dodgers!!!”
상대 투수는 이미 너덜너덜해졌고, 실책으로 내야진 분위기도 개판이 됐고, 타자들도 무기력한 상태.
아직 초반이지만, 팬들이나 우리나 오늘 경기도 손쉽게 이기겠다며 마음을 놓을 만한 타이밍이다.
이렇게 모든 것이 순조롭게 흘러갈 때, 야구의 신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곤 한다.
‘깝치지 마라’라고.
* * *
완벽한 흐름을 이어가던 경기가 묘하게 어긋난 출발점은 3회 초 수비였다.
7번부터 시작하는 하위 타순.
공 일곱 개로 손쉽게 두 타자를 돌려세우고, 이닝의 마지막 타자로 파드리스의 선발 투수를 맞이한 제리였지만.
“힛 바이 피치!”
노 볼 투 스트라이크까지 잘 잡아놓고 뜬금없이 나온 힛 바이 피치 볼.
포심이 손에서 빠지면서 엉덩이로 날아간, 고의성을 찾을 수 없는 실투였다.
하필이면 맞춘 상대가 투수라는 게 문제지.
“이 XX놈의 새끼들이 투수를 맞춰?! 우리 투수는 맞출 줄 몰라서 안 그러나 보지?!”
“제구도 안 되는 쓰로워 새끼를 뭐 하러 올려?!”
투수한테 빈볼을 던져서는 안 된다는 것은 메이저리그의 오랜 불문율.
물론 지금은 고의가 아니었지만, 그걸 상대가 신경 쓸 필요는 딱히 없다.
저쪽 입장에서는 지금처럼 덕아웃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기 싸움을 걸기 딱 좋은 상황일 뿐.
“X발 쟤가 일부러 맞췄겠냐?! 삼진 잡으면 그대로 이닝 끝인데?!”
“투수 취급받으려면 뒤로 물러나 있던가! 지가 홈플레이트에 바짝 붙어놓고 뭔 개소리야!”
물론 기 싸움이라면 다저스도 어디 가서 밀리는 팀은 아니다.
게다가 명분은 이쪽도 있다.
호투 중인 선발 투수가 대개 그렇듯, 최대한 뒤로 물러나 지켜만 보고 있었으면 벌어지지 않았을 일.
뭐라도 해야겠다는 절박함에 바짝 붙어서 스윙까지 하는데, 그건 다른 타자들처럼 위험을 감수하겠다는 뜻 아닌가.
“응 너네 투수 이제 제구 X 돼서 다음 타석에서 홈런 맞음!”
“응 너네 투수는 2이닝 3실점!”
보통 이런 상황에서는 점점 유치해지는 말싸움을 보다 못한 주심이 양 팀 덕아웃에 주의 한 번씩 주고 끝내는 게 국룰인데.
12연패 중인 팀 분위기를 어떻게든 끌어올리려는 발악인 건지, 아니면 단순히 화풀이인지는 몰라도.
파드리스 덕아웃에서 몇몇 선수들이 삿대질을 하며 뛰쳐나왔다.
“야구 똑바로 해, 이 XX놈들아!”
“지들이 맞춰 놓고 큰소리치는 건 어디서 배워먹은 예의야?”
일을 키워서 잘 던지던 제리의 페이스를 흩뜨려놓겠다는 얕은 수작.
하지만 다저스에는 이런 상황을 빠르게 정리할 수 있는 적임자가 한 명 있다.
“너, 너, 너까지 셋. 너네 이따 경기 끝나고 나 좀 보자.”
덕아웃 밖으로 혼자 나온 로버트는 가장 앞에 서서 외쳐대던 세 명을 가리켰다.
기세등등하게 다가오던 파드리스 선수들을 주춤하게 만들기에 그 한마디면 충분했다.
“야! 다 들어가! 지금부터 상대 쪽으로 한 걸음이라도 다가가면 바로 퇴장이다!”
“방금 욕하면서 나온 셋 경고! 그리고 로버트 자네도 경고야!”
경기가 잠시 중단됐고, 심판진이 우르르 몰려와 선수들의 등을 덕아웃 쪽으로 떠밀었다.
파드리스의 용감한 3인방이 이따 끝나고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제리를 흔들려는 의도였다면 성공했다.
따악―!
파드리스의 리드오프가 가운데로 몰린 포심을 통타했고, 이제 2사에 주자 1, 2루.
게다가 앞으로 상대할 타자들은 상위 타선.
방심할 수 없는 상황에서 호흡을 가다듬던 제리가 세트 포지션에 들어갔고.
따악!
초구를 노린 듯 망설임 없이 가져간 스윙에 걸렸다.
마운드를 맞고 크게 바운드가 됐지만, 그만큼 속도가 줄어든 타구.
2루수 조지를 향해 베이스 커버 사인을 보내고, 타구 방향으로 슬라이딩하며 팔을 쭉 뻗었다.
아무리 2루 주자가 투수라도 이걸 놓치면 무조건 실점이다.
‘잡았다!’
다시 바운드가 일어나기 직전 간신히 글러브에 담아낸 타구.
한 바퀴 구르면서 일어나 조지에게 가볍게 토스했다.
“아웃!”
“좋았어!”
2루심의 판정이 떨어지자마자,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이쪽을 쳐다보던 제리가 주먹을 불끈 쥐며 환호한다.
자칫 상대 쪽으로 넘어갈 수도 있었던 분위기를 완전히 되찾아왔다.
그러나.
12연패를 기록 중인 팀의 승리를 향한 집착을 얕봤던 걸까.
3회 말 마운드에 올라간 투수가 기어코 사고를 쳤다.
퍽!
초구에 엉덩이를 얻어맞은 선두 타자 조지가 투수를 노려보기가 무섭게, 주심이 재빨리 튀어나와 투수에게 손가락질했다.
“자네 경고야! 이건 고의였어!”
보복구라는 판정에도 별다른 리액션 없이 슬그머니 조지의 눈을 피하더니, 손에 로진을 묻히며 딴청을 피우는 투수.
대충 사이즈가 나온다며 박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등 떠밀었네.]
자기한테도 원인이 있다는 걸 아는 이상, 몸에 공 맞았다고 급발진해서 덤벼드는 투수는 거의 없다.
일을 키워보겠다는 누군가의 의도가 개입됐을 게 분명하고, 팀 내에서 입지가 없다시피 한 투수가 거스르긴 힘들었겠지.
그게 덕아웃의 판단인지, 일부 선수들의 판단인지는 모르겠지만.
“저 XX놈이 진짜······!”
다저스 덕아웃에서도 분통을 터뜨렸지만.
그냥 넘어가라는 조지의 손짓이 곧바로 나오면서 뛰쳐나갈 타이밍을 놓쳤다.
머리 쪽으로 날아오는 위협구였다면 몰라도, 어쨌든 명목상으로는 투수가 맞은 곳과 같은 부위.
게다가 제리는 연승 기록과 연속 퀄리티스타트 기록을 이어가는 중이다.
괜히 벤치 클리어링을 일으켜서 기록에 영향이 갈까 봐 한 번 참은 거겠지.
[지금 이렇게 넘어가는 게 딱히 도움은 안 될 텐데······.]
박도현의 걱정대로, 경기의 흐름이 다시 바뀌었다.
“아웃!” “아웃!”
3번 타자 켄이 평소답지 않은 조급한 스윙으로 병살타를 쳐냈고.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R.H.는 첫 타석에 잘 노려서 안타를 쳐냈던 슬라이더에 헛스윙 삼진을 당했다.
화를 제때 표출하지 못해서인지, 아니면 그냥 집중력이 흐트러진 건지는 모르겠지만.
제리의 기록을 향한 여정에 다시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 * *
무사 만루.
안타 하나만으로 대량 실점이 가능한 위기.
“제리, 잘 들어.”
마운드 위의 투수는 파드리스의 투수가 아닌 제리였다.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고는 있지만, 금이 가기 시작한 멘탈이 공에 정직하게 드러났다.
투수 코치의 말이 귀에 들어오긴 할지 의문이었다.
“안타를 맞아도 돼. 타자를 맞춰도 되고, 폭투가 나와도 돼. 결과는 상관없으니까, 포수 미트만 보고 던져.”
“······알겠습니다.”
에이스급 구위를 자랑하는 제리가 가진 치명적인 약점.
자기 때문에 팀이 흔들린다는 생각이 들면 급속도로 흔들리기 시작한다.
한마디로 평소엔 뻔뻔한 주제에 착해빠진 게 발목을 잡는다는 거다.
‘내가 실투만 안 던졌어도 조지가 공을 맞을 일은 없었을 텐데.’
안 좋은 기억 하나가 그날 경기 내내 발목을 잡는다던 야수들의 징크스.
그것이 마운드 위의 제리에게 찾아온 걸지도 모른다.
“타자 위치로!”
어쩌면 지금 타석에 들어오는 타자 때문에 더 흔들리는 걸 수도 있고.
오늘 경기 파드리스의 6번 타자.
제리를 향해 맹렬한 적의를 보내며 배트를 휘두르는 카일이었다.
‘커터.’
조금 전 폭투가 될 뻔하긴 했지만, 이럴 때 믿을 수 있는 건 자신의 결정구뿐.
만약 카일이 무사 만루라는 먹음직스러운 밥상 앞에서도 인내할 수 있다면, 볼이 될 가능성이 크겠지만.
따아악!
카일에게는 그런 인내심이 없었고.
제리도 흔들리는 상황에서 위력적인 커터를 던질 순 없었다.
빠르게 외야 쪽으로 날아가는 타구.
문제는 위치다.
더블 플레이를 대비해 2루 베이스 쪽에 다가가 있던 내게서 멀지 않은 방향.
‘잡을 수 있나?’
이런 생각이 먼저 들면 내야수로선 끝이라고 했었지.
생각을 채 마치기도 전에, 내 몸은 이미 도약하고 있었다.
2회 초 포수의 송구를 튕겨내던 카일처럼, 마치 발레리노 같은 포즈로.
그리고 잠시 후.
“으아아아아아아!!!”
다저 스타디움에 처절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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