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스위트홈(4)
분위기가 어지간히 험악해지지 않고서야, 벤치 클리어링에서 너 죽고 나 죽자는 식으로 달려드는 선수는 별로 없다.
사태가 커질수록 징계가 무거워지기도 하고, KBO처럼 팀을 아우르는 선후배 문화는 없어도 어쨌든 한두 다리 건너면 다들 아는 사이여서 그런 것도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부상의 위험 때문이다.
남을 뒤지게 팰 수 있는 건, 자기도 죽도록 두들겨 맞을 각오가 되어 있는 놈뿐이라고 했던가.
아무리 싸움에 자신이 있더라도 상대 역시 탈일반인 수준의 피지컬을 가진 놈들뿐인데, 서로 흥분하다 보면 어디 한 군데 잘못되는 건 일도 아니다.
그래서 다저스에서 투수로 뛰어온 지난 몇 년간, 나는 벤치 클리어링이 벌어질 때면 그다지 적극적으로 나서는 선수는 아니었다.
기껏해야 뒤쪽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거나, 급발진하는 로버트의 허리에 매달리는 정도.
“뒤져, 이 X 같은 원숭이 새끼야!”
이놈이 먼저 슬라이딩으로 위협을 가한 주제에, 인종차별적 욕설과 함께 선빵을 날린 것도 그걸 알아서였겠지.
제법 튼실한 몸뚱이를 가진 놈의 주먹이 내 가슴팍에 정통으로 틀어박힌 순간, 새로운 재능 ‘벤치 클리어링의 황제’의 효과를 바로 알 수 있었다.
‘맞을 만한데?’
부상 방지 효과와 전투력 상승 효과가 중첩됐는지, 살벌한 소리와 함께 꽂힌 주먹이었지만 정작 내가 느낀 통증은 UFC 챙겨 보는 고딩 일진의 펀치 수준이었고.
상대는 친절하게도 펀치와 함께 내 쪽으로 상체를 들이밀어 줬으니.
뻐어억!
호의를 받아들여, 가드 없이 텅 빈 턱주가리에 어퍼컷을 선사해줬다.
제대로 들어간 선빵에도 내가 별 리액션이 없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던 상대의 얼굴이 단 한 방에 몽롱해졌지만.
‘방금 그건 위험한 플레이의 몫이었고!’
이에 그치지 않고, 내 허리를 끌어안고 말리는 손길에서 빠져나와 비틀대는 상대를 향해 바디 블로우를 한 방.
프헉, 하고 숨을 뱉어내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건 인종차별의 몫!’
아무래도 이 슬라이딩이 미리 약속된 플레이였는지, 파드리스 선수단이 한 박자 먼저 뛰쳐나오는 가운데, 마지막 한 방을 준비했다.
원래대로라면 내가 다칠 확률이 더 높으니 쓰면 안 되는 기술이지만, 부상으로부터 보호된다면 이만한 임팩트도 없겠지.
로버트에게 ‘헤드기어 컬렉터’라는 별명을 선사해준 전설의 기술.
4회 초 수비에서의 점핑 캐치에 버금갈 정도로 허공에 높이 뛰어오른 뒤.
‘망치 나가신다, 개자식아!’
주먹에다 90kg이 넘는 체중을 실어, 제한 시간이 3초 남은 두더지 잡기 게임에서 막타를 날리는 심정으로 헬멧 위 정수리에 꽂아버렸다.
‘방금 이건 박도현의 몫이었다.’
[나는 왜?!]
그냥 니 몫 챙겨주는 거니까 조용히 있어라. 괜히 끼어들어서 분위기 깨고 있어.
“끄윽······!”
최후의 일격을 맞은 상대는 비명도 못 지른 채 쓰러져버렸고, 동시에 파드리스 선수단이 나를 에워쌌다.
“저 XX놈의 새끼! 넌 오늘 뒤질 줄 알아!”
“잡아! 죽여버려!”
환자도 내팽개친 채 분노에 휩싸인 선수들 틈바구니에 순식간에 빨려 들어가며 몰매를 맞을 위기에 처했지만.
“뭐 X발! 와 보던가!”
‘벤치 클리어링의 황제’의 부가 효과가 발동되었는지, 소리를 질러 위협하자마자 팔이며 옷자락을 붙잡는 손길이 멎었다.
그리고 로버트가 도착하기까지는 그 정도 시간이면 충분했다.
“야.”
퍼억!
로버트가 파드리스 선수단을 향해 몸을 날렸고.
내 옆에 있던 한 선수가 얼굴에 팔꿈치를 정통으로 맞고 눈을 까뒤집었다.
금방 다시 자세를 잡은 로버트가 날아오는 손길을 피하거나 쳐내면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마도 3회 초 대치 상황에서 경기 끝나고 보자던 선수를 찾는 모양이었는데, 때마침 그중 한 명이 로버트의 뒤쪽에서 손을 뻗는 게 보였고―
“끄헉!”
하지만 어림도 없지.
심판인지 코치인지 모를 누군가의 품에서 잽싸게 빠져나오자마자 곧장 후두부를 가격해 쓰러트렸다.
‘UFC에서는 규정 위반이지만 벤치 클리어링에선 합법이지!’
[이미 주먹 쓴 시점에서 규정 위반이야 미친놈아······.]
약 5분가량 이어진 벤치 클리어링.
애초부터 감정이 격해진 상태에서 시작된 싸움이니만큼 제법 큰 규모의 난타전이 벌어졌고, 이런 상황에서는 승패를 떠나 서로 피해가 막심한 경우가 많지만.
사태가 진정되고 나서 바닥에 쓰러진 건 파드리스 선수들뿐이었다.
사실 당연한 결과였다.
전성기가 지난 지금도 최소 3명 정도는 컨트롤할 수 있는 로버트와, 부상에서 보호받는 만큼 마음껏 탱커 역할을 맡을 수 있는 나.
‘벤치 클리어링의 황제’의 영향으로 각각 사기 충전과 공포심을 느끼는 양 팀 선수들까지.
그렇게 충분히 때렸다 싶어 보안요원들의 간절한 손길에 몸을 맡기려던 그 순간.
“Koo!!! 이 개자식아!!!”
분노에 찬 목소리가 들려 옆을 쳐다봤더니.
누구한테 처맞고 왔는지 눈가가 부어 있고 코피를 철철 흘리는 카일이, 스파이크를 앞세운 채 내 쪽으로 발차기를 날리고 있었다.
‘미친새낀가?!’
생각보다 행동이 먼저 나왔다.
보안요원의 품에서 빠져나와, 스파이크가 막 내 몸에 닿으려던 찰나 발목을 붙잡는 데 성공했고.
그 와중에 발을 빼내겠답시고 무리하게 잡아당기던 카일은 얼굴부터 바닥에 처박혔다.
“뭐야? 방금 뭐야?”
“내가 지금 잘못 본 건가? 저 새끼 발차기로 얼굴 노린 거 맞지?”
동료들도 분노보다는 당혹스러움이 앞선 듯했다.
아무리 부상으로부터 보호받는다고 해도, 저건 그냥 살상용 무기를 들이대는 거나 마찬가지다.
1999년, 다저스의 또 다른 Park이 제대로 맞지도 않은 발차기로 7경기 출장정지를 받았을 만큼 사무국에서도 엄격히 금지하는 행동.
아무리 그래도 이것까지 참긴 힘들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그리고 다리에는 다리.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아직까지 놓치지 않고 있던 카일의 정강이뼈를 겨냥했고.
빠직!
“끄아아아아악!”
다리를 붙잡고 뒹구는 카일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나도 보안요원들에게 파묻혔다.
어찌 보면 더 큰 2차전으로 번질 수도 있는 심각한 사안이지만, 내가 맞지도 않았고 오히려 보복에 성공해서인지 싸움은 그대로 끝났다.
“퇴장!”
다저스에서 4명, 파드리스에서 3명. 퇴장 명령만 7명에게 내려진 대형 난투극.
나도 당연히 그중 한 명이었고, 심판의 명령에 수긍하며 자리를 벗어나려던 그 순간.
“Koo!!! Koo!!! Koo!!! Koo!!!”
다저 스타디움의 홈팬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목청껏 Koo 콜을 외쳤다.
부상자가 발생하며 제대로 누리지 못했던 무보살 삼중살의 영광을 다시금 축하하듯.
그리고 경기에서도, 벤치 클리어링에서도 파드리스를 압도했던 다저스를 찬양하듯.
“와아아아아아!!!”
마지막으로 모자를 벗어 흔들며 그 마음에 응답하면서, 오늘 경기에서의 내 역할은 완전히 끝났다.
* * *
부상자가 속출한 큰 싸움이었기에 경기 재개에도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우선 다저스에서 퇴장당한 네 명.
로버트와 나는 물론, 평소엔 유쾌하고 서글서글하면서도 벤클만 났다 하면 미쳐 날뛰는 R.H.랑, 몰래 팔꿈치를 쓰다가 딱 걸렸다던 앤서니까지.
어제 등판했던 선발 투수는 상관없다 쳐도, 주전 유격수와 우익수, 멀티 이닝 소화 가능한 불펜이 이탈하게 됐고.
싸움을 말리다가 한 번 다쳤던 손목을 또 다치게 된 클레망과, 도대체 언제 어디서 맞고 온 건지 코피를 줄줄 흘리던 벤도 경기에서 빠졌다.
그래도 파드리스랑 비교하면 절대 손해는 아니다.
적어도 백업들을 총출동하면, 타격은 몰라도 수비에서 구멍은 안 나는 다저스에 비해 파드리스의 백업들은 공포 그 자체니까.
이적 후 타율 0.138로 삽질하던 카일이 계속 주전으로 뛸 수 있었던 건 다 이유가 있다.
부상자들은 클럽하우스 의무실로 향하고, 퇴장당한 선수들만 라커룸에 나란히 앉아 경기장을 비추는 모니터를 쳐다봤다.
전날 선발 등판으로 몸에 피로가 쌓인 상태에서 날아다녔던 로버트의 상태를 살피려고 슬쩍 곁눈질했는데.
“아! 이게 사는 거지!”
사우나로 땀 쫙 빼고 국밥 뚝배기째 기울이면서 크어어 뻑예 한번 조져준 듯한 표정이길래, 그냥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그래도 사람 패고 와서 저렇게 행복해하다니.
로버트 켈리 싸이코패스설이 그냥 나오는 게 아니다.
“야, Koo.”
“넵.”
얼굴에 묻은 (주로 남의) 피땀눈물을 닦아내던 도중, 로버트의 호출을 받아 잽싸게 달려갔다.
“너 좀 치던데. 왜 지금까진 남들 싸울 때 가만히 있었냐?”
남을 시험하는 듯한 날카로운 눈빛.
제가 지금 막 벤치 클리어링 때 부상 안 당하는 재능을 뽑았걸랑요, 이렇게 대답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
“선발 투수는 벤치 클리어링 때 나서는 거 아니라고 카일로한테 배웠습니다.”
지금은 FA로 다저스를 떠나고 없는 선수를 팔아먹는 게 최선이었다.
팔아먹었다고 보기엔, 사실 그런 말을 진짜 하기도 했다.
다만 지금 내 눈앞에서 황당하다는 듯 쳐다보는 사람한텐 씨알도 안 먹힐 소리이기도 하지만.
“그게 지금 선발 투수 앞에서 할 소리냐?”
그러게요.
그러나 벤클로 몸을 혹사한 뒤에도 다음 등판에 영향이 가지 않는 로버트가 별종인 거지, 보통 선발 투수는 빠지는 게 중론이긴 하다.
그 점을 잘 아는 로버트이기에, 날카로운 눈초리는 내가 아닌 저 멀리 보스턴을 향했다.
“그 뺀질이 새끼. 하여튼 그놈이 문제야.”
“맞습니다.”
“시끄러 임마.”
로버트는 자기 옆자리에 나를 앉히더니 일장 연설을 늘어놓았다.
“맨 처음에 그 새끼들이 너 끌고 갈 때, 대체 뭐냐 그게. 아무리 맷집 세도 가드도 제대로 안 하면 나중에 훅 간다.”
“넵.”
“그런 상황에선 일단 가드로 머리 보호하면서, 가장 힘 좀 쓸 것 같은 놈한테 달려들어. 그리고 대가리로 명치를 들이받는 거야.”
“오.”
“뒤에 놈들이 올 때까지 시간을 벌어. 그리고 대충 다른 놈들이 달라붙을 거거든? 그때부터 밑에 깔리는 타이밍이 올 거야.”
“오오.”
“이때 밀리는 힘을 잘 이용해야 니가 마운트를 잡을 수 있다. 타이밍이 왔다 싶으면 무조건 다리부터 걸어. 마운트 잡고 몇 대 치다가 남들 다리 사이 틈이 보인다 싶으면 바로 빠져나와.”
“오오오!”
메이저리그 역대 최악의 난투극 랭킹의 상당수를 갱신한 살아 있는 전설의 참교육.
어디 가서 돈 주고도 못 배우는 강의에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하고 있자니, 등 뒤에서 박도현이 한숨을 쉰다.
[내가 알던 다저스는 대체 어디에······.]
* * *
파드리스와의 1차전은 8대 4의 스코어로 승리했다.
난투극의 여운과 갑작스럽게 대거 투입된 백업들의 영향으로, 양 팀 선수들 모두 여러 차례 실책이 나오면서 경기 후반은 타격전으로 흘러갔다.
그래도 6회까지 마운드를 책임진 제리가 1실점으로 막아내며 연승 및 연속 퀄리티스타트 기록은 이어졌다.
그리고 그날 밤.
사무국의 징계위원회 결과가 발표되었다.
[LA 다저스]
로버트 켈리 ― 출장정지 7게임 + 벌금(미공개)
구현기 ― 출장정지 5게임
R.H. 데이 ― 출장정지 3게임
앤서니 아우젤로 ― 출장정지 1게임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카일 캠프 ― 출장정지 7게임 + 벌금(미공개)
보 파커 ― 출장정지 3게임
매튜 에반스 ― 출장정지 1게임
대놓고 여러 선수에게 광역딜을 넣은 로버트와 나한테 스파이크를 신은 채 사커킥을 갈기려던 카일이 가장 큰 징계를 받았다.
어차피 등판 다음날 날뛴지라 로테이션을 한 번 걸러야 하는 로버트와 징계가 가벼웠던 앤서니는 항소를 포기했지만.
나와 R.H.는 즉각 항소를 하면서 파드리스와의 2차전에도 모습을 드러냈다.
‘다 모르는 사람들이구만.’
주루 중 부상을 당한 피터 콜린스를 필두로, 주전 유격수, 주전 3루수, 거포 대타 요원 등 총 4명이 60일 IL에 이름을 올린 파드리스.
팀 꼬라지가 이 모양인데도 2차전을 트라이한다면 진짜 노빠꾸 상남자로 인정했겠지만, 그럴 일은 없었고.
따아아아악!
[Hyun―Ki Koo! 어제에 이어 오늘도 첫 타석부터 홈런을 때려냅니다! 어제 퇴장당하기 전 마지막 타석과 연결하면 연타석 홈런이군요!]
[게다가 방금 보셨습니까? 방망이가 호쾌하게 하늘을 날았습니다! 배트 플립 금지가 과거의 불문율로 사라진 뒤에도 조용히 그것을 지켜오던 타자 중 하나였던 Koo가 오늘은 참지 않았습니다!]
따아아아아아악!
[배트에 공이 맞는 순간 외야수들은 걸음을 멈췄습니다. 커다란 아치가 담장을! 담장을! See! You! LAter! Koo의 오늘 경기 연타석이자 지난 경기 포함 3연타석 홈런!]
[오늘 경기에서 다저스 선수들이 벌써 네 개째 담장을 넘겼습니다. 그리고 허공을 날아다니는 배트의 수도 똑같군요! 파드리스의 투수는 Koo를 노려보는 대신 이 악몽에서 눈을 감는 편을 택한 듯합니다!]
전날 밤 피자 두 판을 수강료로 바치며 속성으로 배운 K―빠던을 마음껏 펼쳐보였다.
어지간히도 기가 질린 듯 애매하기 짝이 없는 공을 던져대던 파드리스 투수들을 응징하며, 다저스 타자들은 스탯 세탁기를 가동했다.
최종 스코어 16대 4.
지금껏 지독히도 없던 승운 탓에 무승 4패에 불과했던 3선발 다니엘이 드디어 시즌 첫 승을 수확하는 순간이었다.
“Koo. 당신이 폭력을 가한 선수들의 커리어가 위태로울 수도 있다는 제보가 들어왔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경기 종료 후, 기자회견장에서 분노에 가득 찬 소수의 파드리스 기자들을 맞닥뜨리기도 했지만.
내가 해줄 말은 이것밖에 없었다.
“남에게 부상을 입히려는 시도를 하려면, 본인도 부상을 입을 각오는 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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