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신 들린 천재 타자-56화 (56/200)

56. 리글리 필드의 괴물(2)

퍼펙트게임이나 사이클링 히트 등등, 좀처럼 보기 힘든 기록을 세운다고 해서 그게 인생의 전환점이 되지는 않는다.

평소 실력과 인성이 좋아서 대중에게 사랑받는 선수였다면 그야말로 시대의 아이콘으로 급부상할 기회겠지만, 그저 그런 선수였다면 잠깐 반짝하고 마는 거지.

[저도 정말 안타깝습니다. 계약을 조금만 늦췄어도 총액 100만 불은 더 뜯어낼 수 있었을 텐데요.]

무보살 삼중살이라는 진기록을 세운 나로 말할 것 같으면, 피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얼마 전 대대적으로 들어왔던 기업 스폰 및 광고 촬영 제의들.

가장 좋은 제안들을 추려서 도장을 찍은 지 2주도 되지 않았는데, 이제 와서 몸값이 훌쩍 뛸 만한 기록을 세워버렸으니까.

“어떻게 좀 더 빨아······ 아니 일정을 추가할 순 없을까요? 올스타 브레이크 때 좀 더 빡세게 다닌다든지······.”

아쉬운 마음에 질척거려 봤지만, 데릭의 대답은 단호했다.

[어렵겠습니다. 오히려 지금 잡아둔 일정을 조정해야 할 가능성도 있으니까요.]

“네? 그게 무슨······.”

[올스타전 말입니다. 지금 페이스를 유지한다면 진지하게 생각해봐야죠.]

그러고 보니 올스타 브레이크에 광고 찍을 생각만 했지, 내가 나갈 거란 생각은 못 해봤다.

고기도 먹어본 놈이 맛을 안다고, 투수 시절에 올스타전에 뽑혀 봤어야지.

감독 추천으로 선발하는 투수와는 달리, 선발 야수는 총 2차에 걸친 팬들의 인기투표로 선정하는데.

‘이거 진짜 내가 뽑힐 수도 있지 않나?’

대형 교통사고를 극복하고 투수에서 유격수로 전향해 돌아왔다는 스토리도 있고, 무보살 삼중살이라는 대기록도 세웠으며, 빅마켓 팀 프리미엄까지 있으니까.

박도현이 풀타임 시즌 첫해부터 세상을 떠난 재작년까지, 올스타전 내셔널리그 선발 유격수 자리를 독식했던 것처럼.

[올스타전에 나간다고 해서 이미 예정된 촬영을 포기할 필요는 없습니다. 시간은 조정할 수 있으니까요. 다만 여기서 더 늘리는 건 불가능합니다.]

안 되는 걸 억지로 해달라고 땡깡을 부릴 수도 없으니, 결국 수긍하면서 전화를 끊었다.

침울해진 나를 보면서 박도현이 혀를 찼다.

[야, 너 나랑 계약한 지 얼마나 됐다고. 야구만 잘하면 돈은 알아서 굴러들어온다니까?]

그래, 박도현이랑 다시 만나지 않았으면 지금 이렇게 메이저리그에서 스폰서 계약 맺고, 연봉 500만 불 받고 그럴 일도 없었겠지.

맞는 말이다. 다 맞는 말인데.

‘그건 너처럼 3억 달러짜리 장기계약 맺은 선수한테나 그러지.’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너는 심지어 살아만 있었으면 야구 못하고 드러누워도 돈이 들어왔을 거 아냐.

100만 달러라는 구체적인 액수가 나오니, 그 돈을 마치 허공에 날린 것 같은 상실감이 찾아온다.

[당장의 100만 불이 눈앞에 어른거려서 다음 경기 준비도 안 하는 선수한테 장기계약을 제시할 구단이 있을까?]

박도현한테 그렇게 뼈를 맞고 나서야 겨우 정신을 차렸다.

그러나 선수단 합류 이후 시카고행 전세기에 올라탈 때까지 침울해져 있었던 게 남들 눈에는 다 들어왔던 건지.

비행기가 LA 상공을 날기 시작하자마자 누군가가 나를 호출했다.

“Koo. 이리 와 봐.”

어차피 출장정지도 남아 있고 로테이션도 한 번 거를 거라 LA에 남아 있어도 될 텐데, 함께 원정길에 오른 로버트였다.

팀 분위기 해치는 거냐고 한소리 하려는 건가 싶어 후다닥 달려갔는데.

“기분은 좀 나아졌냐?”

“네? 네! 괜찮습니다.”

“그래, 뭐. 아까 병원 가서 무슨 얘기 했는데?”

뜬금없이 괜찮냐고 물어보더니, 안 어울리게 다정한 말투로 사적인 일을 꼬치꼬치 캐묻는다.

새로 개발한 꼽 주는 방식인가 진지하게 궁금할 지경인데, 막상 본인도 좀 힘겨워하는 것 같고.

겨우 풀려나와 자리로 돌아가려는데 이번엔 다른 선수들에게 붙잡혔다.

“Koo, 한잔해야지. 이따 경기 있으니까 술 말고 콜라로!”

“마시고 잊자! 콜라 많이 마시면 머리 나빠진대!”

“너는 물 대신 콜라만 마시고 사나 봐?”

왁자지껄 떠들어대면서 가운데 빈자리에 강제로 주저앉히더니 음료를 따라준다.

기분 상할 일이 있긴 했는데, 그걸 이 양반들한테 말한 적은 없고.

단체로 상한 감자 샐러드라도 퍼먹었나 싶어 눈만 꿈뻑대는데.

“나는 Koo가 데뷔했을 때부터 되게 애늙은이 같다고 생각했거든? 이제야 좀 지 나이대 애들 같네.”

애는 무슨 애야. 한국 나이로 치면 20대 후반인데.

그런데 박도현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니가 부상당한 선수들 때문에 속상한 줄 아나 본데?]

파드리스와의 1차전, 주루 도중 다친 피터를 비롯해 몇몇 선수는 시즌 아웃까지 당했으니 내 멘탈을 걱정하는 것도 이해는 간다.

대기록 달성에 가려지고 상대 선수의 명백한 잘못이 입증되긴 했지만, 어쨌든 비난도 없진 않았고.

[지금 징징대는 게 돈 때문인 줄도 모르고, 하여튼 우리 팀원들 너무 착하다. 그치?]

‘닥쳐······.’

그런데 이렇게 생각한 게 선수들뿐만이 아니었나 보다.

[Koo, 다저스 구단 제휴 병원에서 벤 리히터와 함께 목격담 줄이어··· 파드리스 부상 선수들 방문했나?]

[(Photo)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에 스윕승 거둔 후 시카고로 이동하는 다저스 선수단, 출장정지 중인 Koo는 이동 내내 ‘침울’]

[LA 다저스 필릭스 오브라이언 감독, “Koo가 잔혹하다는 말에 동의할 수 없다. 자신과 동료를 보호하기 위한 행동이었을 뿐.”]

벤과 함께 피터의 병문안을 갔던 때와 선수단에 합류해 이동하던 때의 침울한 표정이 찍힌 사진을 근거로,

내가 파드리스와의 사건에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다는 논조의 기사가 줄을 이었다.

지나치게 깡패 같은 이미지는 명예의 전당에 오르는 데 독이 될 텐데, 이게 또 이렇게 풀리네.

[사람들이 니 본성을 좀 알아야 할 텐데······.]

‘남한테 빙의해서 기자회견이라도 해보던가.’

원래 모르는 게 더 아름다운 진실도 있는 법이다, 친구야.

* * *

파드리스와의 4연전 스윕을 포함, 6연승을 달리고 있는 다저스였지만. 잠깐은 주춤할 거라는 예측이 많았다.

시즌 개막 후 10개의 홈런을 날리며 한 방을 기대해볼 수 있는 클레망이 손목 부상으로 2주간 이탈하게 됐고.

로테이션을 한 번 거르게 된 로버트의 대체 선발감으로 딱히 눈에 띄는 자원을 찾기 힘들며.

한참 잘 치던 내가 갑작스런 실전 공백을 가지며 타격감을 잃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라나.

[LAD 5 : 6 CHC]

팀 밖에서 주절대는 예측이야 어쨌든, 우리는 컵스와의 1차전에서 패배하며 연승을 마감했다.

부상자 명단에 올라간 클레망 대신 트리플 A에서 긴급 콜업한 대체 선발이 4이닝 2실점으로 본인 역할을 해줬고, 앤서니를 비롯한 몇몇 투수가 멀티 이닝을 먹어줬지만.

4선발을 3이닝만 쓰고 내린 뒤 필승조를 올린 컵스의 승부수가 통하면서 아슬아슬한 패배를 당했다.

[LAD 14 : CHC 1]

반대로 2차전은 컵스에서 대체 선발을 내세웠다.

내줄 경기는 내주기로 마음먹은 모양인지, 컵스는 선발 투수가 연달아 장타를 내줬음에도 100개 넘는 공을 던지게 하며 꿋꿋이 4회까지 올렸고.

다저스 타자들이 초반에 경기를 터뜨리자, 지난 등판에서 한 차례 멘탈이 터졌던 제리도 언제 그랬냐는 듯 부활해 7이닝 무실점으로 보답했으며.

오랜만에 5번 3루수로 선발 출장한 나도 멀티 히트를 때려내며, 출전 정지로 인해 타격감이 무너질 거라는 전문가들에게 다시 한번 사짜 딱지를 선물했다.

“야! 컵스 클러비한테 갖다 주게 밀머니 받은 거 다 가져와! 배팅머신 사용료 미납했다가 블랙리스트로 찍히면 안 되잖아!”

“시카고는 손님 대접을 이렇게밖에 못 하나? 하루종일 디저트만 내주네! 너무 달달해서 이빨 다 썩겠어!”

1승 1패로 시리즈의 균형은 맞췄지만, 다저스 선수단은 마음껏 기세를 끌어올렸다.

컵스가 1차전에서 필승조 불펜을 대거 소모하면서 투수 운용에서 약간 불리해진 측면도 있고.

2차전에서 다저스 타자들이 안타를 뻥뻥 때려내며 제대로 타격감을 선보이기도 했지만.

‘사실은 억지로라도 기세를 끌어올리려는 거겠지.’

시카고 컵스의 에이스 A.D. 존슨.

사실 나야 투수로 뛰었을 때는 다른 투수들을 크게 의식하는 편이 아니었고.

그래서 이 양반에 대해 아는 거라고는 우리 에이스 못지않게 성질이 화끈하다는 것과 동명의 베이비 로션 광고를 찍었을 정도로 매끈매끈한 피부의 소유자라는 것 정도였다.

타자로 전향하고 나서야 존슨이 비범한 투수라는 걸 알게 됐지.

2042년까지의 장기계약으로 사실상 컵스 원클럽맨을 확정지은 순간, 내셔널리그 중부지구 팬들이 일제히 탄식했을 정도였고.

등록명 ‘A.D.’는 본명 ‘Allen Dennis’의 줄임말이지만, 컵스 팬들은 ‘Ace & Dominant’로 멋대로 바꿔 부르고. 특히 호구 잡히고 있는 파이리츠 팬들은 ‘존슨 같은 자식’을 심한 욕으로 사용하는 데다.

재작년 시즌 말에 토미 존 서저리로 팀을 이탈했고, 재활을 위해 작년은 통째로 날렸으며, 올해 막 복귀하고 나서는 거의 전성기에 육박하는 미친 활약을 보여주고 있으니까.

‘도대체 무슨 공을 던지길래 이러는 거야?’

리그를 지배하는 투수들은 강력한 패스트볼의 구위에다 자신만의 특화된 변화구를 조합해 알고도 못 치는 볼 배합을 만들어내는 게 보통인데.

A.D. 존슨은 거의 비슷한 움직임을 보이는 투심과 싱커를 섞어 던지고, 여기에 가끔 시속 98마일짜리 포심과 릴리즈 포인트를 읽어내기 힘든 서클 체인지업을 추가한다나.

비슷한 패턴을 데뷔 초부터 지금까지 고수하는데도 좀처럼 공략이 힘들다는 건, 그만큼 위력적이라는 뜻.

[나도 처음엔 되게 고생하긴 했는데······ 눈에 익으면 오히려 다른 투수들보다 수월할걸?]

전설을 찍었던 박도현의 풀타임 데뷔 시즌, 존슨은 이놈이 상대했던 내셔널리그 선발투수 중 유일하게 무출루의 클린 시트를 작성했던 투수였지만.

바로 이듬해부터는 오히려 만나는 모든 경기에서 멀티 출루를 허용하는 진기록을 세웠다나.

“플레이 볼!”

어떤 투수인지 알아내려면 직접 상대하는 게 유일한 방법.

전날 꼼꼼하게 읽어둔 자료는 일단 치워두고, 1회 초 공격에서 리드오프 중견수로 출격한 말릭에게 응원을 보냈다.

“아웃!”

그리고 곧바로 맞이했다.

리드오프로서는 삼구삼진보다도 뼈아픈 결과인 초구 내야 땅볼 아웃.

허탈한 표정으로 털레털레 돌아온 말릭은 첫 공에 대한 감상을 말해줬다.

“분명 가운데로 들어오는 것 같았는데, 움직임이 너무 더러워.”

볼끝이 더러운 공은 치기 힘들지만, 그걸 매번 던지기는 더 힘들다.

그러니까 차분하게 실투를 기다린다는 생각으로 접근하면 되겠지 싶었지만.

“스트라이크 아웃!”

“아웃!”

다른 타자들도 비슷한 결과를 내며 비슷한 감상을 말해준다면, 그것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는 뜻이겠지.

일단 당장 눈앞에 닥친 수비를 위해 글러브를 챙겨 1회 초 수비를 위해 그라운드로 나갔다.

오늘 다저스의 선발 투수는 시즌 1승 4패 ERA 3.89로,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만만한 3선발’이라는 우스갯소리를 듣는 다니엘 슈미트.

지난 경기에서 염원하던 첫 승을 거뒀지만, 지독한 승운답게 바로 다음 경기에서 상대 에이스랑 맞붙게 된 다니엘은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고.

따악!

초구부터 까다로운 코스의, 내야 안타가 되기 딱 좋은 타구를 허용했지만.

“아웃!”

타구의 방향을 빠르게 캐치한 덕분에 이미 공을 마중 나올 수 있었던 내가 1루수 랜디에게 안정적으로 송구하면서, 존슨과 마찬가지로 초구로 첫 타자를 잡았다.

“고마워, Koo!”

한결 표정이 밝아지더니, 다니엘은 상대 선발과 마찬가지로 8구 만에 삼자범퇴로 1회 말을 끝내버렸다.

기분 좋게 덕아웃으로 돌아가려다 무심코 원정 덕아웃 쪽으로 눈길이 갔는데.

글러브를 주무르면서 마찬가지로 이쪽을 바라보던 존슨과 눈이 마주친 순간, 등짝에 소름이 쫙 돋았다.

[살짝 빡친 로버트 같은 느낌인데?]

박도현의 감상이었다.

제가 뭘 잘못했다고 그러세요. 그쪽을 호구 잡던 다저스 유격수는 제가 아니라 이놈인데.

그러거나 말거나 경기는 계속됐고. 2회 역시 양 팀 선발투수가 삼자범퇴로 틀어막으면서 투수전 양상으로 진행되는 가운데.

3회 초 선두 타자로 타석에 서게 됐다.

마침 다니엘이 2회를 삼진과 뜬공으로만 막아주면서 호흡도 안정된 상태.

초구를 맞이해 와인드업을 하는 투수의 손끝을 지켜봤지만.

‘와, 디셉션 오지네.’

특유의 투구 폼 때문에 릴리즈 포인트 읽기가 힘들 거란 소리는 들었는데, 직접 눈으로 보니까 더하다.

결국 지켜보던가, 아니면 예상한 구종과 타이밍에 맞추는 수밖에 없는데.

일단 투심 타이밍이라고 생각하며 스윙을 가져가던 그 순간.

‘실투······?’

가운데로 먹음직스럽게 들어오는 공.

데이터상으로는 함정일 수 있지만, 이미 들어간 스윙을 거두기 어려울뿐더러, 저런 코스를 놓치면 두고두고 후회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강하게 사로잡혔던 건지.

하체에서부터 끌어모은 힘을 배트에 끝까지 전달했지만―

딱!

홈플레이트 근처에서 격한 움직임을 보이더니, 배트에 툭 갖다 맞고는 유격수 정면으로 향하는 공.

이번 시즌 처음으로 초구에 아웃당하는 순간이었다.

‘익숙해진다고? 이게? 진짜?’

덕아웃으로 돌아간 나는 동료들이 보여준 리액션을 그대로 따라할 수밖에 없었다.

다저스의 후속 타자들도 똑같이 물러나고, 컵스도 존슨의 자동 삼진으로 이닝을 끝내며 명품 투수전이라고 불러도 될 만한 경기가 이어졌지만.

경기의 흐름이 바뀌기 시작한 건 4회부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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