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신 들린 천재 타자-57화 (57/200)

57. 리글리 필드의 괴물(3)

타순이 한 바퀴 돌면서 양 팀의 공격에 활로가 뚫릴 거라고 생각했지만, 다저스 타선은 4회 초에도 삼자범퇴로 물러났다.

“우리 삼자범퇴 처음 당해 보나? 내 기억이 맞는다면 아니거든?”

“타격 생각은 덕아웃 안에서만! 그라운드 위에선 수비만 생각하자!”

최고참이자 홈런 타자 클레망이 자리를 비웠지만, 다저스에는 분위기가 처지는 걸 막아줄 베테랑이 여럿 있었고.

수비를 위해 뛰어나가는 야수들의 목소리에서는 여전히 파이팅이 넘쳤다.

그러나 야수들이 집중력을 발휘한다고 해서 모든 실점을 막을 수 있는 건 아니다.

따아아아아악―!

컵스의 리드오프 타자가 살짝 낮게 들어간 하이 패스트볼, 그러니까 가운데 상단의 포심 패스트볼을 제대로 때려냈고.

야수들이 발걸음을 멈춘 가운데, 타구는 리글리 필드의 외야석에 떨어졌다.

“믿고 있었다고 젠자아아앙!!! 어제 안타 못 때렸다고 욕새서 미안해애애애!!!”

“우리 에이스 경기에서 선취점이 나왔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아냐?! 너네가 졌다는 뜻이다! 이 퍼랭이 놈들아!!”

평일 낮 경기임에도 관중석의 상당수를 채운 컵스 팬들의 환호성과 야유가 쏟아졌다.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서의 실점과 상대 선발한테 꽁꽁 묶인 타선.

시즌 초, 다니엘은 비슷한 상황에서 연달아 안타를 허용하며 일찍 무너지곤 했지만.

“아웃!”

이제는 비슷한 코스로 공을 던져 내야 플라이를 유도해낼 수 있는 투수가 되었다.

하이 패스트볼을 자주 구사하는 투수에게 홈런은 세금이나 마찬가지라지만.

그걸 마운드 위에서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느냐에 따라 보여줄 수 있는 퍼포먼스의 질이 다르지.

“아웃!” “아웃!”

컵스의 3번 타자에게 안타를 허용했지만, 투 스트라이크에서 사인 미스라도 났는지 삼진과 함께 도루 실패를 엮어내며 이닝 종료.

선취점을 내줬음에도 자기 페이스를 금방 되찾은 다니엘이었다.

‘쟤도 확실히 멘탈이 단단해지긴 했어.’

[인터넷 보니까 다니엘 혼자만 다른 팀에서 야구하고 있다고 그러더라.]

다저스 자체가 한국에서 인지도가 높은 팀이긴 한데, 최근 다니엘이 커뮤니티에 올라온 게시물 때문에 인기를 끌고 있다나.

시즌 첫 승을 거둔 뒤 활짝 웃으며 엄지를 치켜드는 사진에 ‘Ryu가 뛰었던 팀에서 오퍼가 들어왔다고요? 워런 스판 상을 받았던 그 Ryu? 당연히 가야죠!’라는 대사를 적어놓고는.

막상 도착해보니 리그가 달랐다는 비극적인 결말.

‘쟤 요새 한국어 DM 많이 온다고, 한국 팬들이 선물도 보내준댔다고 좋아하던데······.’

아무것도 모른 채 행복해하며 나한테 한국어 해석을 부탁하던 다니엘의 모습이 떠올라, 박도현과 나는 눈물이 앞을 가렸다.

그런 다니엘에게 시즌 2승째를 선물해주고 싶었지만, 경기가 중반을 향해 나아가는 시점에도 다저스 타자들은 여전히 존슨을 공략하지 못했다.

다만 아무것도 모른 채 당했던 경기 초반과는 달리, 상대의 전략을 얼추 파악하긴 했다.

“타순이 한 바퀴 도니까 포심 비중을 늘리더라고. 아까 땅볼 때렸던 게 어른거려서 손을 안 댔는데 가운데로 정직하게 들어오니까, 와······ 미치겠더라.”

“나는 초구랑 2구 전부 포심이었거든? 머릿속이 그냥 새하얘지면서 배트가 자동으로 나오는 거야.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체인지업이었는데!”

경기 초반은 특유의 미쳐버린 제구력을 바탕으로 투심과 싱커를 던져 범타를 양산하고.

중반부터는 머릿속에 강렬하게 남아 있을 투심과 거의 분간하기 힘든 포심으로 타자들을 교란한다.

“이게 진짜 제일 열받는 거 아니냐? 칠 수 있을 것 같은데 못 치는 거.”

타자로 뛴 지 얼마 되진 않았지만, 한 구단의 에이스급 투수들을 상대하다 보면 ‘저걸 어떻게 쳐?’라는 생각이 절로 들 때가 있다.

그 막막함이 압도적인 구속이나 구위 때문이라면, 조급해하지 말고 차분하게 실투를 기다린다는 생각으로 대응하면 된다.

만약 상대가 그런 공을 100구 넘게 던진다면, 그 사람은 이미 메이저리그의 전설일 테니 퍼펙트를 당해도 욕은 안 먹을 거다.

그런데 지금처럼 공 자체는 칠 만한 코스로 들어오는 경우, 침착함을 유지하기가 힘들다.

투심을 잘못 노렸다가는 범타가 양산되고. 그렇다고 지켜봤다간 정직한 포심이 들어오고. 여기에 이따금 섞여 들어오는 까다로운 변화구까지.

머릿속이 복잡해지면 아무것도 못 한다는 걸 타자들도 아니까 배트를 안 낼 수도 없는데, 지금까지는 아무도 안타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스트라이크! 아웃!”

다니엘이 5회 말 마지막 아웃카운트를 삼진으로 잡아내면서, 경기는 반환점을 넘어갔다.

5회까지 다저스 타자 중 아무도 1루를 밟아보지 못한 가운데, 6회 초 선두 타자로 타석에 들어갔다.

‘무슨 도서관도 아니고.’

한 시간 전까지만 해도 투수를 향해 열렬한 응원을 보내던 컵스 팬들이지만, 이제는 뜨문뜨문 박수 소리 정도만 들려온다.

아직은 갈 길이 멀긴 하지만, 어쨌든 슬슬 대기록을 의식하기 시작했다는 증거지.

게다가 현재까지 투구 수는 49개. 한 이닝당 평균 10개도 안 던졌으니, 가능성은 더욱 커졌고.

‘뭔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네.’

내가 사상 최초의 개막전 퍼펙트게임을 홈런으로 날려버렸다는 걸 저 양반이 모를 리는 없다.

그걸 의식해서 실투가 나온다거나, 제구가 좀 흔들린다거나 하면 좋겠지만. 적어도 겉으로는 티가 안 난다.

피부가 겁나 좋다는 것밖에 모르겠네. 낮 경기인데 땀도 거의 안 흘리고.

‘무조건 초구 스윙.’

지난 승부에서도 투심인지 싱커인지 알아보기도 힘든 공에 초구 아웃을 당했으니, 부담스럽지 않은 건 아닌데.

만약 포심을 흘려보내기라도 한다면 두 타석 연속 초구에 아웃당하는 것보다 더 타격이 클 것 같다는 계산이었다.

내가 팀을 옮기지 않는 이상, 이 사람이랑 오늘 보고 안 볼 것도 아닐 테니까.

쐐애애액!

머릿속에 남아 있는 첫 타석 초구의 잔상과 겹쳐 들어오는 듯한 착각이 드는 공.

헛스윙이나 범타로 이어지더라도 상관없다는 각오로, 늘 해오던 대로 온 힘을 끌어모아 스윙을 가져간 결과.

따아아악―!

손이 찡 울리는 느낌과 저릿저릿한 통증도 잠시.

멀리 뻗지 못하고 좌측 관중석에 떨어지는 타구를 바라보며 할 말을 잃었다.

‘배트가 밀렸어.’

구종도 코스도 예상대로였지만, 정작 구위에 밀려서 안타를 만들지 못했다.

초반에 투심과 싱커로 이른 타이밍에 아웃카운트를 많이 잡아놓았기에, 비축해둔 힘을 본격적으로 발휘하고 있다는 뜻.

투심과 포심을 구분하느냐 마느냐의 문제를 넘어서, 구분하고 나서도 잘 맞은 타구를 만들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가 새로 발생했다.

따아악!

이번에는 몸쪽으로 훅 들어오는 투심을 받아쳐 우측 관중석에 파울 타구를 보냈다.

그나마 타이밍이라도 얼추 맞은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하나. 안 그랬으면 또 맥없이 아웃당했을지도 모르니.

물론 생각이야 그렇게 했지만.

‘아, 별거 아니네. X밥이네.’

겉으로는 이제 감 다 잡았다는 듯, 코 밑을 문지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타구 뻗는 거 봤지? 과감하게 들어갔다간 퍼펙트 깨진다? 뭐 이런 시그널로 받아들이길 바라면서.

전에 비슷한 상황에서 이런 블러핑으로 좋은 결과를 얻어낸 기억이 있어 한 번 해봤는데.

“볼!”

씨알도 안 먹힌다.

결과적으론 볼이 되긴 했는데, ‘몸으로 말해요’의 선구안 보정이 없었다면 무조건 스윙했을 정도로 제대로 떨어트린 싱커볼.

개수작 부리지 말고 얼른 삼진이나 처먹고 들어가라는 다정한 배려가 느껴져 마음이 따뜻해졌지만.

“파울!”

“파울!”

“볼!”

타이밍이 맞아간다는 게 아예 쌩 블러핑은 아니다.

여전히 투심인지 싱커인지 구분은 안 가지만, 아무튼 비슷한 종류의 공을 한 타석에서 몇 번이나 마주치면 결국은 눈에 익을 수밖에 없지.

이 양반이 체인지업을 던지긴 하는데, 투심이나 싱커처럼 제대로 감기는 편은 또 아니라서 이런 상황에서 던지긴 부담스러울 테고.

6구째는 아예 하이 패스트볼을 선택했지만, 어지간히 코너웍이 좋지 않고서야 나한테는 안 통한다.

승부가 7구째로 이어지며 다저스 타자 중 가장 많은 공을 보게 됐고.

오늘 경기에서 처음으로 투구 전에 땀을 닦은 존슨이 와인드업에 들어갔다.

쐐애애액!

미리 맞춰둔 패스트볼 타이밍에 따라 시작된 스윙.

이번에도 존 중앙 쪽으로 날아오는 공에 순간 정신을 빼앗길 뻔했지만.

아무리 강심장이라도 타이밍이 맞아가는 타자를 상대로 가운데 포심을 집어넣을 리는 없다는 생각에, 머릿속에 남은 투심 궤적을 연상하며 상체를 돌렸지만.

부우웅!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그 예상했던 궤적보다도 더 빠르고 각이 크게 떨어지는 공에, 결국 배트가 헛돌았다.

전광판에는 싱커라고 떴지만, 타석에서 보기엔 슬라이더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움직임이 심한 볼.

“Yeahhhhhh!!! 바로 이거지!!!”

“다저스의 X밥 에이스랑은 많이 다르지?! 이게 진짜 에이스라는 거야, Koo!!”

숨죽인 채 지켜보던 컵스 팬들이 삼진 콜과 함께 우렁찬 환호와 야유를 쏟아냈지만, 그걸 신경 쓸 틈은 없었다.

‘몸으로 말해요’으로 보정을 받은 선구안으로도 공략할 수 없을 정도의, 그냥 정신 나간 무브먼트를 보이는 그 공에 온 신경이 쏠렸다.

‘한 번만.’

8번 타자 헨리가 기껏 늘려놓은 투구 수가 무색하게 초구에 아웃되는 걸 보면서도, 머릿속은 온통 그 생각뿐이었다.

‘딱 한 번만 더 보면, 감이 잡힐 것 같은데.’

감만 잡으면 다른 투수들보다 오히려 수월할 거라던 박도현의 말.

헛소리라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진짜일지도 모르겠다.

* * *

6회 초 투아웃 상황. 5회까지 던진 투수가 타석에 들어갈 차례.

필승조 불펜들이 쌩쌩한 경우, 지금 타이밍에 선발을 내리고 불펜 싸움에 돌입하는 것도 고려해볼 만하지만.

“스트라이크 아웃!”

감독님의 선택은 다니엘에게 자동 삼진을 지시하는 것이었다.

어떤 의중으로 내린 선택인지는 모른다.

유독 승리 운이 없었던 다니엘에게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남겨주고 싶었던 건지, 아니면 조금 긴 이닝을 책임지게 하고 싶었던 건지.

“베이스 온 볼스!”

다만 들어맞지 않았다면 그만한 책임이 따를 뿐.

따아아악―!

볼넷과 안타로 무사 1, 3루의 위기.

우익수 R.H.의 빠른 송구로 1루 주자의 추가 진루를 막은 게 다행일 지경이었다.

교체되지 않을까 싶었는데, 마운드를 방문한 건 포수뿐이었다.

타자들은 상대 투수한테 퍼펙트로 묶여 있고, 상위 타선을 상대해야 하는 절체절명의 상황인데도.

다니엘의 뒷모습에서는 초조한 기색이 보이지 않았고, 헨리의 마스크 너머에는 작은 미소가 맺혀 있었다.

따아악―!

말인즉슨, 야수들이 정신만 안 놓으면 걱정할 필요 없다는 것.

“아웃!” “아웃!”

더블 플레이를 잡아내는 사이 3루 주자가 홈인하면서 점수 차는 2점으로 늘어났지만.

“스트라이크 아웃!”

다음 타자를 삼진으로 잡아내며 이닝 종료.

다니엘은 자신의 피칭이 한결 단단해졌다는 것을 리글리 필드 구석 한 줌의 다저스 팬들에게 보여주었다.

“수고했어, 다니엘.”

가장 먼저 다니엘을 맞이한 투수 코치의 그 한마디로, 오늘 경기 다니엘의 역할은 끝났다.

6이닝 3피안타 8K 2실점의 퀄리티 스타트.

시즌 2승은 다음 경기를 기약하게 됐지만,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는 타자들을 향해 밝은 미소를 보내줬다.

[저거 지금 웃는 게 웃는 게 아니겠지?]

‘당연한 소리하고 있어.’

다니엘이 올해 막 합류한 투수였으니 망정이지.

안 그랬음 최소 일주일은 타자들을 하인으로 부려먹었을 거다.

* * *

퍼펙트게임에 운이 따르는 이유는, 9회까지 체력을 온존하는 게 불가능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A.D. 존슨 역시 체력 저하에 따른 위기를 맞았다. 외야 깊숙이 타구를 허용하거나, 너무 깊이 찔러서 까딱 잘못했다간 힛 바이 피치를 내줄 뻔했다거나, 뭐 그런 것들.

그럼에도 8회 초까지 퍼펙트가 깨지지 않았던 데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면.

[다들 영웅 스윙밖에 안 하네.]

다저스 타자들의 스윙 동작이, 박도현의 눈에 들어올 정도로 조금 커졌다는 것이다.

바로 어제 경기에서 배팅볼을 던져대던 투수 상대로 너도나도 장타를 날려댔으니, 자기도 모르게 그 이미지가 머릿속에 남았던 거겠지.

다저스 코치진도 그걸 파악했겠지만, 먼저 이야기를 꺼내긴 힘들 거다.

‘그걸 의식하면 의식하는 대로 망할 거니까.’

배트를 짧게 잡고 컴팩트한 스윙으로 대처해보자는 말은 누구나 할 수 있지.

그런 생각을 갖고 타석에 들어섰다는 걸 투수한테 들키지 않으면 상관없는데, 경험 많은 투수들은 타격 자세만 보고도 알아챈다.

심지어 메이저 투수 경력이 3년밖에 안 되는 나도 몇몇 타자들의 의향은 빠르게 파악할 수 있었으니까.

“타자 위치로!”

퍼펙트게임을 당하고 있는 9회 초, 하위타선으로 시작되는 정규이닝 마지막 공격.

원래대로라면 대타를 내야 하겠지만, 오늘 다저스의 7번 타자는 나다.

현재 다저스 야수 중 타율 1위를 기록하고 있고, 무엇보다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와의 경기에서 상대 퍼펙트를 홈런으로 날려버린 타자.

나를 향해 욕설과 야유를 퍼붓고 싶은 마음은 간절해 보이지만, 차마 입을 뗄 수 없어 괜히 앉았다 일어나기만을 반복하는 컵스 팬들.

어쩔 수 없이 조금 지친 기색은 보이지만, 여전히 위풍당당하게 서서 나를 맞이하는 컵스의 에이스.

오늘 경기 한 타석에서 가장 많은 공을 던지게 한 나를 향해, A.D. 존슨이 초구로 인사를 건넸고.

따아아아악!

구종에 대한 확신이 생기자마자, 있는 힘껏 배트를 휘둘렀다.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