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리글리 필드의 괴물(4) - 내용 추가
나를 포함한 다저스 타자들은 도대체 왜 이렇게 A.D. 존슨에게 꽁꽁 묶였던 걸까.
평소보다 날카로운 제구, 컵스 야수진의 집중력, 전날 연달아 장타를 터뜨리며 자기도 모르게 커진 스윙 등등이 있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투심인지 싱커인지 도통 모르겠는 저놈의 괴상한 공 때문일 거다.
투심과 싱커를 구분하는 건 투수 본인 아니면 기록원 맘대로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타자한테는 그게 그거처럼 보인다.
조금 덜 떨어진다거나, 움직임의 방향이 다르다거나, 그 정도의 차이가 있는데.
좋은 투수가 던진 공은 그런 조금의 차이로도 타구의 질이 달라지는 거고.
아무튼 중요한 건, 이런 구종은 투수가 부르는 대로 기록된다는 것.
지금까지 타석에 서 오면서는 물론, 투수 시절에도 왜 굳이 이걸 구분해서 던지는 건지 궁금해하진 않았는데.
두 번째 타석, 다른 싱커와는 확연히 다른 움직임을 보였던 마지막 공을 보면서 깨달았다.
‘타자를 교란하는 수법 중 하나다.’
비슷한 구질과 비슷한 무브먼트를 가진 여러 개의 공.
그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분명히 다른 하나의 공.
‘그 공은 보통 싱커처럼 대응하면 무조건 헛친다.’
투심과 포심을 구분해내는 것만 해도 벅찬데, 여기에 새로운 선택지가 추가되는 셈.
물론 전광판에는 싱커로 표시될 거다. 중계 영상으로 보면 조금 깊게 들어갔구나, 정도로만 보일 수도 있고.
그러나 타자가 보기엔, 적어도 내가 보기엔 거의 포크볼처럼 떨어지는 공이었다.
어쩌다 한 번씩 이런 공이 나오는 게 아니라, 의도적으로 조절하고 있을 거다.
지금까지의 성적이 그걸 증명한다.
‘이걸 진작 알고 연구해봤으면 투수로 뛸 때 도움이 많이 됐겠네.’
물론 지금의 존슨처럼 막대한 효과는 얻기 힘들었겠지.
투수 시절 내 결정구는 커브였으니까. 커브는 무슨 짓을 해도 그냥 커브지.
아무튼 지금 중요한 건 공을 던지는 게 아니라 받아치는 것. 와인드업에 들어가는 투수의 손끝을 주시하며 하체에 힘을 줬다.
쐐애애액!
존슨은 지금 나한테 포심을 못 던진다. 지금보다 힘이 덜 빠졌을 때도 큼지막한 파울을 허용했으니까.
그렇다고 투심 타이밍에 맞춘다? 포크볼처럼 떨어지는 괴상한 공에 범타로 물러날 위험이 있다.
후우우웅!
아예 포크볼을 상대한다는 생각으로 깊은 스윙을 가져가면서, 공을 끝까지 보며 움직임에 따라 대처한다.
지난 오프시즌 까다로운 포크볼을 던지는 투수를 상대하면서 터득한 요령이다.
‘또 왔다. 그 X랄맞은 공.’
제대로 의도하고 던졌는지, 아니면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지난 타석에서 봤던 것보다 훨씬 움직임이 더럽다.
당시 하이싱글 A, 지금은 더블 A로 승격된 에드윈의 포크볼보다는 확실히 위력적인 공.
그러나 노리던 구종과 코스가 적중한 지금이야말로 절호의 기회라는 생각에, 이 악물고 상체를 비틀어 스윙 궤적을 수정했고.
따아악―!
타구가 3―유간으로 가는 것만 확인하고, 1루를 향해 죽어라 뛰었다.
마침내 1루 베이스에 발이 닿은 순간, 아주 살짝 늦게 1루수의 포구음이 들려왔다.
“······아웃!”
비슷한 타이밍에 더해, 퍼펙트게임까지 진행 중이어서인지 1루심의 판정은 컵스의 손을 들어줬지만.
내가 어필하기도 전에 감독님이 덕아웃에서 나와 비디오 판독을 요청했다.
컵스 팬들은 물론, 옆에 선 1루수까지도 간절한 표정으로 전광판을 바라봤지만, 나는 이미 결과를 알고 있었다.
[메이저리그에서 안타를 기록했습니다.]
[40포인트가 지급됩니다.]
[현재 포인트: 4900]
판정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헤드폰을 벗은 심판이 양팔을 벌려 세이프를 선언하자마자 리글리 필드에 깊은 탄식이 내려앉았고.
바로 다음 순간 탄식은 격렬한 분노로 바뀌었다.
“Koo!!! 야 이 개······!!!”
“$^#^#&*&%#^~!!!!!”
온갖 저주와 욕설이 한데 뒤섞여 뭔 소린지 알아먹기도 힘들다.
아무리 컵스 팬들이 메이저리그에서 손꼽히는 강성 팬덤이라지만, 누가 보면 내가 번트라도 댄 줄 알겠네.
심판의 조용히 하라는 요청에도 소란이 가라앉지 않고, 판정 직후 1루를 향해 환호를 보내던 다저스 동료들의 표정이 굳어가던 그때.
A.D. 존슨이 잠시 마운드에서 내려오더니 글러브로 나를 가리켰다.
전광판 속 클로즈업된 얼굴에 작게 미소를 띤 걸 본 컵스 팬들의 아우성이 잦아들었다.
[와, 그 시끄럽던 양반들 바로 입 다무는 거 보소. 이게 카리스마인가?]
‘에이스의 품격인가 뭔가 하는 그건가 보지.’
헬멧을 살짝 들어 투수를 향해 경의를 보냈다.
대기록은 깨졌지만, 서로의 좋은 플레이를 인정하는 훈훈한 모습.
“괜찮아! 잘했어! A.D. 넌 컵스의 자랑이야!”
“Ace & Dominant! Ace & Dominant!!”
관중석의 소란이 에이스를 향한 응원으로 바뀌자, 한숨 돌린 심판은 경기를 재개했다.
“다들 집중해! 깔끔하게 막고 집 가서 쉬자!”
“Go Cubs Go!”
컵스 야수진도 서로서로 목소리를 높이며 집중력을 끌어올리는 가운데.
다저스에서는 대타를 내보냈다.
코뼈에 충격이 가서 며칠간 결장했던 벤 리히터의 복귀 후 첫 출전.
[그래도 다행이다. 컵스 팬들 진짜 지독한데. 생각보다 분위기 나쁘지 않네.]
벤이 타석에 들어서는 틈을 타 박도현이 말을 걸었다.
얘도 A.D.한테 강한 타자이다 보니, 강성 컵스 팬들한테 어지간히 시달렸으니까.
‘그러게. 분위기 좋아.’
경기는 막바지에, 대타는 유리몸 베테랑. 조금 전 1루 주자와는 서로의 플레이에 경의를 보내며 훈훈함을 연출했던 상태.
‘도루하기 딱 좋은 분위기야.’
[어? 그게 뭔······.]
인플레이 상황이 되며 박도현의 말이 도중에 끊겼다.
두 걸음 반 정도의 형식적인 리드에 자세도 설렁설렁 잡았지만, 원래 도루는 투수의 타이밍을 뺏는 게 가장 중요하다.
아예 가능성을 생각지도 않은 듯 투수가 와인드업을 시작하자마자 곧바로 태세 전환을 하며 2루로 뛰었고.
“세이프!”
포수가 송구를 포기하면서 여유롭게 2루에 안착했다.
첫 단독 도루의 결과는 완벽한 성공.
투수도, 유격수도, 심지어 2루심까지도 ‘이게 맞나’ 싶은 표정으로 이쪽을 쳐다봤지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그러게 끝날 때까지 집중했어야지. 아무리 9회라지만 2점 차이인데.
“야!! 이건 아니잖아!!”
“Koo!! 이 비겁한 자식 같으니라고!!!”
관중석에서 뜨문뜨문 야유가 쏟아졌지만, 큰 소란으로 번지진 않았다.
따악―!
분위기가 본격적으로 험악해지기도 전에 벤이 때려낸 깔끔한 중전 안타로 홈을 밟았으니까.
이적 후 첫 경기였던 디백스전에서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벤은 상대가 힘든 싸움 끝에 결실을 맺으려는 타이밍에 꼭 이렇게 초를 친다.
컵스 팬들의 야유에 안타를 친 벤보다 내 이름이 더 많이 섞여 있는 것 같기도 한데, 기분 탓이겠지.
[야, 너 어쩌려고······.]
‘응~ 어차피 올해 여기 다시는 안 와~’
박도현은 경악했지만, 나는 이 자식과는 다르게 상대 팀 팬들한테 욕먹는 걸 제법 즐기는 편이니까.
리글리 필드의 따스한 햇볕을 만끽하며 커피 한 잔 대신 게토레이를 기울였다.
* * *
[‘아깝다, 퍼펙트!’ 시카고 컵스 에이스 A.D. 존슨, 9이닝 2피안타 무사사구 10K 1실점 완투승]
[퍼펙트 깨진 직후 도루··· 불문율의 영역에 들어가는가? 현장에서도 갑론을박]
[시카고 컵스 매튜 빙햄턴 감독, “도루는 문제 될 게 없다. 만약 서로를 향해 존중을 보낸 직후가 아니었다면 말이다.”]
[LA 다저스 필릭스 오브라이언 감독, “경기에 끝까지 집중하는 자세야말로 진짜 존중이다.”]
[‘레코드 브레이커’ Koo의 위엄··· 이번 시즌 벌써 3개의 대기록 무산시켜]
[9회 초 도루 성공한 Koo, “2대 0으로 끌려가는 상황에서 승리 가능성을 높이기 위한 선택이었다. 경기 후반이라도 승패가 아슬아슬하다면 도루를 해도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잘못 알고 있었다면 사과하겠다.”]
[귀중한 완투승 거둔 A.D. 존슨, “도루 가능성을 생각하지 못한 건 내 실수다. 이 실수가 팀의 역전패로 이어지지 않은 것이 기쁘다.”]
내 도루와 벤의 안타로 한 점을 추가했지만, 끝내 추가점이 나오지 않으면서 경기는 2대 1로 패배했다.
오랜만의 루징 시리즈였지만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상대 타자들이 퍼펙트 진행 중인 투수 눈치를 보며 빠르게 아웃당해줘서 필승조도 아꼈고. 그 퍼펙트도 깨트려버렸으니까.
다만 투수 놈들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은 조금 묘해졌다.
“Koo, 역시 넌 내가 아는 선수 중 가장 악랄한 놈이었어.”
“솔직히 존슨 저 양반이 산전수전 다 겪은 에이스 아니었으면 집 가서 울었을 수도 있다.”
“만약 나였어 봐. 내가 잘못한 거니까 화도 못 내고, 다음 경기는 후반기에 잡혀 있으니 복수하면 쪼잔한 놈 되고······.”
다만 모든 투수들이 그런 건 아니었고, 좋아하는 투수들도 있었지.
“Koo. A.D.의 멘탈을 흔들어주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 잘 봤어. 저 정도의 에이스라면 크게 효과가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네 마음은 감사히 받을게.”
“뭐야 넌. 꺼져.”
A.D. 존슨과 5월까지도 이달의 투수를 놓고 경쟁을 벌이던 제리라던가.
“Koo, 나는 지금 아주 기분이 좋다.”
정말 오랜만에 만면의 미소를 보이는 로버트라던가.
같은 투심을 주 무기로 삼는 투수로서 자주 비교되어왔지만, 항상 상대편의 투심이 좀 더 위력적이라는 평가를 받아왔으니까.
투심 제구가 흔들리면서 커리어 최악의 성적을 찍고 있는 이번 시즌이니만큼 특히 그랬겠지.
“그렇게 기분 좋으면 이따 덴버 도착해서 비싼 밥이라도 사주세요, 로버트.”
“오늘은 안 돼. 다니엘이랑 선약이 있어.”
“조심히 다녀오세요.”
6이닝 2실점으로 패전투수가 된 다니엘.
멘탈이 가루가 되기 쉬운 이런 상황에서 잘 다독여주는 것도 베테랑의 역할이니까.
부디 이야기가 잘 통해서 다니엘이 야구 방망이를 들고 야수조 훈련장에 난입하는 일이 생기지 않길 바라며 내 자리로 돌아갔다.
[A.D.랑 로버트, 둘이 사이좋은 걸로 알고 있었는데······.]
‘사이가 좋으니까 저런 말도 할 수 있는 거지.’
둘이 같은 팀에 소속된 적은 없지만, 같은 에이전시라 그런지 컵스와의 경기가 잡히면 가끔 만나곤 한다나.
투수 대 투수끼리는 그렇게 훈훈한 분위기를 연출할 수 있지만, 나는 아니지.
‘다음에 만나면 적어도 오늘 경기보단 훨씬 수월하겠어.’
특정 구종의 이미지에 사로잡히지 않고, 내 감각에 따라 유연하게 대처하는 것.
A.D. 존슨뿐만이 아닌 다른 투수들에게도 먹히는지는 좀 더 시험해봐야겠지만, 이걸 자유자재로 할 수만 있다면 효과가 크겠지.
인터뷰에서는 겸허한 척했지만, 중계 끝나고 나서 덕아웃에 글러브 집어던지는 거 보니까 제대로 빡친 것 같던데.
다음에도 똑같은 전략으로 나온다면 내 얼굴만 봐도 빡치는 날이 올 거다.
* * *
원정 6연전의 다음 일정은 콜로라도 로키스와의 3연전.
낮 경기라고는 해도, 미 대륙의 절반쯤 되는 거리를 날아가야 했기에.
콜로라도 로키스의 홈구장 쿠어스 필드가 위치한 덴버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내일 경기를 생각하면 일찌감치 휴식을 취하는 게 당연하겠지만.
“내일은 텄다.”
“그러게요.”
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 매섭게 쏟아지는 폭우.
예보에 따르면 내일까지 온다고 하지만, 밤사이 그치더라도 그라운드 컨디션 때문에 경기가 미뤄지는 걸 걱정해야 할 수준이었으니.
[LAD―COL, 시리즈 첫 경기 우천 취소··· 이틀 뒤 경기 더블헤더 편성]
1차전이 예정된 날은 실내 훈련장에서 각자 몸을 풀고, 일찌감치 숙소로 돌아가 쉬었다.
예기치 못한 휴식에 컨디션이 회복된 건지, 아니면 지나치게 끌어올렸던 타격감을 다시 조절할 여유가 생겨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따아악―!
[Koo의 이 타구는 3루선상을 타고 굴러갑니다! 좌익수 급히 쫓아갑니다만! Koo는 2루! 2루에서 여유롭게 세이프! 랜디 콘트레라스 선수가 홈베이스를 밟으면서 1타점 적시 2루타!]
다음날 열린 1차전에서는 2루타를 추가하며 팀의 4대 0 승리에 한 점을 보탰고.
“Koo, 1차전은 경기 후반에 들어가는 거로 하지.”
2차전이자 더블헤더 1차전에서는 백업 선수가 대거 기용됐다.
원래대로라면 나도 백업 3루수로서 출전했겠지만, 감독님은 괜히 더블헤더를 풀로 돌렸다가 지금의 좋은 페이스가 떨어질까 걱정했던 모양이다.
[타구 높이 뜹니다! 그러나 멀리 뻗어가지는 못하는군요. 우익수가 한참을 기다려서 잡아내면서, 오늘 경기 남은 아웃카운트는 단 하나. Hyun―Ki Koo, 7회 초에 이은 두 번째 타석에서도 범타로 물러나고 맙니다.]
3루 수비에서 구멍은 만들지 않았지만, 두 번의 타석 모두 범타로 물러나면서 오랜만에 무출루 경기라는 성적표를 받아들었지만.
마지막 경기에서는 나를 포함한 다저스 타선이 다시 폭발했다.
[이 타구는! 제대로 맞았어요! 더블헤더 1차전에서는 결장했던 Koo, 2사 2루의 찬스를 제대로 살려내는 2점 홈런! 다저스가 2점을 추가하며 12대 5로 리드를 벌립니다!]
리빌딩 중인 로키스 마운드가, 극단적 타자 친화 구장인 쿠어스 필드에서, 내셔널리그에서 손꼽히는 무게감을 지닌 다저스 타선을 이겨내기는 어려운 일이었고.
내 성적은 홈런을 포함해 5타수 2안타.
좋은 기억을 간직한 채 홈으로 돌아와, 상대의 일정 때문에 하루 더 주어진 휴식일을 만끽한 다음.
“오늘은 무조건 이겨야겠네요, 앤서니.”
“당연하지, Koo.”
다저 스타디움에서 맞이하게 된 팀은, 이번 시즌의 첫 인터리그 매치업.
시즌 개막 직전 트레이드가 있었던 토론토 블루제이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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