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 잘... 지내지? (2)
[메이저리그에서 만루 홈런을 기록했습니다.]
[300포인트가 지급됩니다.]
[현재 포인트: 5560]
3회 말 1사에 스코어 7대 0.
선발 투수의 투구 수도 60개를 훌쩍 넘기면서, 슬슬 롱릴리프를 투입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지만.
블루제이스 벤치에서는 움직임이 보이지 않았고. 투수도 8, 9번 타자를 연달아 잡아내면서 겨우겨우 이닝 종료.
덕아웃으로 돌아오자마자 흠씬 두들겨 맞아 아직까지 후끈대는 엉덩이를 부여잡고 그라운드로 뛰어나갔다.
“7대 0이다! 오늘 지면 로버트도 할 말 없을걸?”
“팀명에 ‘블루’가 들어간다고 유세 떠는 놈들한테 진짜 퍼랭이가 누구인지 알려줘야지!”
“만루 요정! 네가 어떤 놈인지 수비에서도 제대로 보여주자고!”
야수들이 마음껏 분위기를 끌어올리는 가운데.
남한테 자기 말고는 아무도 안 부르는 이상한 별명 붙여주기를 좋아하는 R.H.가 그렇게 말하더니, 내 엉덩이를 글러브로 후려치고는 저 멀리 외야로 도망쳤다.
시범경기면 몰라, 메이저리그에서 만루 홈런은 이번이 처음인데 무슨 놈의 만루의 요정이야.
[니가 만루에서 수비 집중력이 괜찮은 편이잖아. 칭찬이야, 칭찬.]
‘아니, 공격도 아니고 수비하러 나갈 때 그런 말을 하면 어쩌자는 거야…….’
야구의 신은 이렇게 자만하면서 여유를 부리는 선수에게 ‘깝치지 마라’라는 메시지를 보낸다는 걸 망각했던 걸까.
즐거운 분위기 속에서 공수 교대가 이뤄지고 나서 대략 10분 후.
“로버트!!! 도대체 뭐가 문제야?!”
“지난 시즌까지만 해도 우리 좋았잖아! 서운한 게 있으면 말로 해!”
로버트는 홈팬들의 분노를 묵묵히 받아들이며 땀을 닦아내고 있었고.
원아웃에 주자는 모든 베이스를 채운, 내가 그랜드슬램을 때려냈던 3회 말과 똑같은 상황을 맞이했으며.
타석에는 지난 타석에서 깔끔한 안타를 뽑아냈던 다저스 출신의 내야수 유진 리빙스턴.
보이진 않지만, 지금쯤 R.H.도 외야에서 괜한 소리를 했다며 진땀을 빼고 있겠지.
“볼!”
아무래도 지난 시즌에 비해 투심의 위력이 줄어든 게 가장 큰 문제일 거다.
제구가 흔들리면서 유인구로 써먹기 힘들어지기도 했고. 구위 자체도 예전 같지 않으니 제대로 던져도 안타를 아예 억제하기가 힘들 테고.
“볼!”
투심에 비교하자면 커브는 여전히 괜찮은 편이었고. 존 근처에서 기가 막히게 공을 떨어트렸지만, 유진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경기가 잘 안 풀리는 날의 로버트가 유인구성 커브를 자주 써먹는다는 걸, 몇 년 동안 한솥밥을 먹으며 알아내서겠지.
‘아까랑 똑같네.’
1사 만루. 2―0의 카운트. 바로 지난 이닝 공격에서 홈런이 나왔던 그 타이밍.
다저 스타디움을 가득 채운 살벌한 긴장감 속에서 로버트는 와인드업에 들어갔고.
따악!
기다렸다는 듯 받아 때린 타구가 배터 박스 바로 앞부분을 맞고 튀어올랐다.
멀리 뻗지 못한 내야 땅볼. 더블 플레이를 만들기에 최적의 타구이긴 한데.
‘아니, 이게 뭔…….’
거대한 바운드를 일으키더니, 마운드 위를 훌쩍 넘겨 떨어지고는 2루 베이스를 향해 굴러가는 타구.
로버트가 어떻게든 잡아보려고 펄쩍 뛰어봤지만 택도 없었다.
그야말로 내야수들을 암울하게 만드는 타격이었지만.
“랜디!”
첫 바운드가 일어난 직후, 나는 이미 2루 베이스 쪽으로 스타트를 끊었다.
굴러가는 타구를 맨손으로 붙잡아 1루수 랜디를 향해 러닝 스로.
랜디가 거의 제자리에서 송구를 받아낸 순간,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1루심에게 쏠렸다.
“세이프!”
홈팬들의 야유 속에서 감독님이 곧바로 챌린지를 요청했다.
그러나 전광판에 리플레이가 나오기도 전부터, 잠잠한 시스템 메시지를 보며 결과를 직감했다.
‘이게 아웃이었으면 호수비 포인트가 들어왔을 거야.’
타자 주자와 송구가 거의 같은 타이밍에 도착하는 리플레이 영상이 3분 내내 흘러나온 끝에 내려진 결론은 원심 유지.
내야 안타로 3루 주자의 득점이 인정되며, 오늘 경기 로버트가 첫 실점을 하는 순간이었다.
1사 만루의 위기 상황도 여전하고.
“괜찮아! 괜찮아! 원 아웃!”
“잘했어, Koo! 지금처럼만 해!”
그러나 다저스 내야진의 분위기는 오히려 조금 전보다 더 활발해졌다.
여전히 7대 1로 크게 앞서 있기도 하고. 무엇보다 끝까지 집중력을 잃지 않고 허슬 플레이를 선보였으니까.
베테랑 타자라면 단단한 조직력을 보여주는 내야진을 의식하지 않고 자기 플레이에 집중할 수 있겠지만.
지금 막 타석에 들어오는 블루제이스의 7번 타자는 작년에 데뷔한 파릇파릇한 루키.
“아웃!” “아웃!”
거의 움직이지 않고 잡아낸 땅볼을 2루수 조지에게 토스하며 더블 플레이를 완성했다.
마운드에서 좀처럼 리액션을 보이지 않는 로버트의 글러브 박수와 함께 이닝이 종료되었고.
“아웃!”
“아웃!”
내야진의 수비력에 영향을 크게 받는 로버트는, 5회와 6회를 통틀어 단 한 번의 출루만을 허용하며 펄펄 날아다녔다.
투구 수 88개로 여유는 있었지만, 좋은 분위기에서 마무리하는 게 어떻겠냐는 투수 코치의 제안을 받아들이면서 로버트의 역할은 여기까지.
6이닝 3피안타 2사사구 5K 1실점으로 호투한 에이스를 향해 홈팬들의 박수가 쏟아졌다.
* * *
다저스가 3회 말의 그랜드슬램 이후 추가점을 내지 못하면서, 블루제이스는 일찍 무너진 선발에게 생각보다 오래 마운드를 맡겼고.
6회 말이 되어서야 두 번째 투수를 올렸다.
구위는 괜찮지만, 경험이 부족해서 아직 계산이 안 서는 루키 투수.
선두 타자로 타석에 들어가면서 투수의 얼굴을 살폈다.
당장은 선발 경쟁에서 밀렸지만,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는 선수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탐욕스러운 눈빛.
나도 메이저 콜업 첫해에는 저런 위치에 있었지.
‘나도 루키 때 저랬을까?’
[글쎄? 근데 넌 티가 안 나는 편이라고 로버트가 그러긴 했어.]
아무튼 예전의 나는 날고 기는 메이저 타자들에게 기죽지 않기 위해 ‘너는 X밥이다.’라는 주문을 외웠다.
그런데 이게 지나쳐서 ‘나는 최고다.’가 되면 곤란하지.
자신감을 갖는 것과 스스로를 과신하는 건 분명히 다르니까.
쐐애애액!
자기 자신에게 취한 투수는 선구안이 괜찮은 타자에게 초구로 포심 패스트볼을 쑤셔 박는 실수를 하곤 한다.
따아악―!
[메이저리그에서 안타를 기록했습니다.]
[40포인트가 지급됩니다.]
[현재 포인트: 5600]
외야 중앙에 떨어지는 깔끔한 중전 안타.
중견수의 대처가 빨라 2루까지는 노려볼 수 없었지만, 다저 스타디움의 분위기는 더할 나위 없이 달아올랐다.
점수 차이가 6점인 마당에 단순히 안타 하나 더했다고 이러는 건 아니고.
“Koo!!! Koo!!! Koo!!! Koo!!!”
“Hit for the!”
“Cycle!!!”
첫 타석에 2루타, 두 번째 타석에서 홈런. 그리고 이번엔 단타.
사이클링 히트에 3루타 하나만을 남겨둔 상태니까.
‘하필이면 3루타야.’
같은 장타라도 2루타나 홈런에 비해 3루타는 뽑아내기가 훨씬 힘들다.
3타수 3안타도 굉장한 활약이긴 한데. 여기까지 온 이상 욕심을 안 낼 수는 없는 노릇이고.
“아웃!” “아웃!”
김칫국부터 마시지 말고 플레이에 집중하라는 야구의 신의 계시일까.
투 스트라이크에서 히트 앤 런 사인을 받아 도루를 감행했지만, 헨리의 타구가 2루수 직선타로 잡히며 더블 플레이가 되었다.
투수 타석에 대타로 나선 메이슨도 범타로 물러나며 7회 초 수비로 이어진 경기.
“와아아아아아아아!!!”
다저스의 두 번째 투수는 앤서니 아우젤로.
블루제이스의 선두 타자는 앞선 두 타석 모두 안타를 때려낸 유진 리빙스턴이었다.
개막 직전 서로 트레이드 대상이 된 두 선수의 맞대결에, 관중석 여기저기서 환호성과 카메라 플래시가 쏟아졌다.
“파울!”
“볼!”
초구를 받아쳐 큼지막한 파울 타구를 날린 데 이어, 상당히 날카로운 움직임을 보인 슬라이더를 골라낸 유진.
로버트처럼 익숙한 투수를 상대하는 것도 아니니, 타격감이 올라왔다는 증거로 봐도 되겠지.
그리고 이런 타자는 한가운데 몰린 실투를 절대 놓치지 않는다.
따아아아아악―!
체인지업을 받아쳐 그대로 중월 솔로포를 쏘아 올린 유진은 배트를 얌전히 내려놓고 빠르게 베이스를 돌았다.
비록 상대 선수의 홈런이었지만, 친정팀에 대한 존중에 다저스 팬들도 박수를 보냈다.
“잘했다! 이 나쁜 놈아! 기왕이면 다른 데서 치지 그랬냐!”
“앤서니! 신경 쓰지 마! 쟤 이번이 시즌 4호 홈런이래! 기부한 셈 쳐!”
등판 직후 홈런.
멘탈이 흔들리기 딱 좋은 상황이지만, 경험 많은 투수 앤서니는 금방 털어내고 다시 승부에 나섰다.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아웃!”
“스트라이크 아웃!”
삼진 두 개를 곁들여 상대 7―8―9번 타자를 무사히 잡아내는 데 성공한 것.
다저스 선수들은 불의의 홈런에도 끝까지 이닝을 책임져준 앤서니를 박수로 맞아줬다.
“괜찮아, 앤서니! 저 친구가 원래 눈치가 좀 없어!”
“그래! 어차피 팬들은 Koo가 기록을 달성하느냐 마느냐에 집중하느라 네가 맞은 홈런 따위는 아무도 신경 안 쓸 거야!”
“음. 고마워, 친구들. 위로해주는 거 맞지?”
무슨 그런 걸 물어보고 그러시나. 당연히 아니지.
그래도 팀이 크게 앞서 있고, 앤서니도 이적한 지 얼마 안 됐음에도 팀 내 입지가 나름 탄탄하니 홈런 맞은 걸로 놀려먹을 수도 있는 거다.
물론 웃어넘길 수 없는 사람들도 있지.
누구나 홈런을 때릴 수도, 허용할 수도 있지만. 하필이면 트레이드로 맞교환한 선수끼리의 승부에서 홈런이 나온데다가.
타 팀에 보낸 선수가 친정팀 상대로 3타수 3안타를 기록하고 있으니, 프런트 입장에서는 속이 쓰릴 수 있다.
‘야구로 보답하겠다는 말을 써먹을 때가 있긴 하네.’
프런트의 속내야 다를 순 있지만, 어쨌든 유진을 보내면서 내 자리가 생긴 것도 사실.
유진과의 비교 대상이 됐던 건 앤서니뿐만이 아니라, 나도 마찬가지란 거다.
그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보여줘야겠지.
기록을 욕심내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생겼다.
* * *
8회 말 1사 주자 없는 상황.
7회 말 공격으로 한 점을 추가해 스코어는 8대 2가 됐지만, 블루제이스는 마무리 투수를 올리는 강수를 뒀다.
게다가 당겨치기 위주의 좌타자를 상대하는 외야 시프트까지.
“Fake Blue 놈들아!!! 너네 마무리는 참 한가한가 보다?!”
“Koo가 기록 세우는 게 그렇게 열 받냐?! 마무리한테 연투까지 시키게?!
다저스 팬들의 야유가 쏟아졌지만, 블루제이스 덕아웃에서는 일말의 반응조차 없었다.
전광판에 오늘 내 타격 성적이 떠오르자 관중석의 반응이 더 격렬해진다.
[1회 말: 2루타]
[3회 말: 홈런]
[6회 말: 단타]
‘딱히 상위 타순에 욕심낸 적은 없는데, 오늘은 좀 아쉽네.’
백업으로 시작해서 그런가, 꼭 상위 타순으로 올라가야만 한다는 절박함은 느껴본 적이 없다.
그런데 오늘 만약 앞 순번이었다면 타석이 한 번 정도는 더 돌아왔겠지.
이미 지나간 일엔 신경 끄기로 하고. 눈앞의 투수를 노려봤다.
‘지금 상황이 꼭 나쁘진 않아.’
시프트를 펼쳤다는 건, 어쨌든 볼넷으로 기록을 저지하는 치졸한 짓은 안 하겠다는 뜻.
더구나 왼쪽에 3루수와 좌익수만을 배치해둔 지금, 투수는 오히려 바깥쪽 승부에 약간의 지장이 생긴다.
내가 기술적으로 밀어 친 타구로 장타를 만들어낼 능력이 있다는 것쯤은 블루제이스도 알고 있을 테니까.
‘대신 3루타가 나올 가능성은 확실히 줄어들지.’
아예 펜스를 때리거나, 야수가 없는 방향으로 타구를 보내는 것뿐.
과연 투수의 선택은 어느 쪽일까.
타격 루틴을 가져가며 빠르게 머리를 굴리다가, 한쪽을 선택하며 자세를 잡았다.
초구를 던지기도 전부터 땀을 닦아내던 투수가 와인드업을 하고, 릴리스 포인트가 눈에 들어온 순간. 머릿속의 스윙 궤적을 확정했고.
하체로부터 올라온 힘을 배트에 실어내면서, 내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직감했다.
따아아아아아아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