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잘... 지내지? (3)
내가 예상한 투수의 레퍼토리는 바깥쪽 슬라이더로 한 번 간을 보고, 몸쪽 날카로운 패스트볼로 선구안을 흩뜨리는 것.
대놓고 빠져나가는 공이라면 도중에 스윙을 멈추면 그만이고. 제대로 꺾여서 헛스윙이 되더라도 상관없다.
그만큼 다음 공에서 더 과감한 승부를 던질 거라고 봤으니까.
쐐애애액!
그런데, 막상 들어온 공은 살짝 가운데로 몰린 슬라이더.
패스트볼을 생각하고 있었다면 헛스윙이나 범타가 될 수도 있었겠지만, 바깥쪽 변화구를 의식하고 있는 타자한테는 말 그대로 대놓고 치라고 주는 공.
후우우웅!
기록을 의식했다면 제대로 된 스윙이 안 나왔을지도 모르지.
바깥쪽 공을 밀어쳐서 장타를 만들 수 있을까, 좌익수 앞에 떨어지면 단타인데, 뭐 이런 잡다한 생각은 어정쩡한 스윙을 만드는 주범이다.
그러나 나는 메이저리그 최고의 유격수랑, 그를 키워낸 코치한테 지난겨울 내내 쪼여가며 그 안 좋은 습관을 완전히 떨쳐냈고.
따아아아아악―!
1루에 거의 도달한 시점에서 3루심이 보내는 페어 사인.
외야 구석을 향해 빠르게 굴러가는 타구를 좌익수와 중견수가 쫓는 사이, 내 몸은 2루 베이스에 거의 도달해 있었다.
‘갈 수 있나?’
평소라면 갈 수 있다, 가 아니라면 2루에서 속도를 줄였겠지.
하지만 지금은 욕심을 좀 부려도 되지 않을까.
스코어 8대 2에 3타수 3안타다. 내가 타점만 5점을 올린 마당에 주루사 한 번 당한다고 누가 나한테 돌을 던질까.
팍! 팍! 팍!
2루에서 가속을 붙이며 외야를 슬쩍 보니, 좌익수가 펜스를 맞고 튀어나간 타구를 놓치는 게 눈에 들어왔다.
중견수가 바로 근처에 커버를 들어가 있었지만, 이미 돌아가기엔 너무 늦었다.
갑작스런 혹사로 쿵쾅대는 심장을 무시하며 3루 베이스를 향해 슬라이딩에 들어갔고.
“세이프!”
중견수가 다이렉트 송구를 포기하면서, 3루 베이스에 안착했다.
생애 두 번째, 메이저리그에서는 처음으로 달성한 사이클링 히트.
3루 코치와 피스트 범프를 나눌 때만 해도 내가 진짜로 해낸 건가 싶었지만.
[메이저리그에서 사이클링 히트를 기록했습니다.]
[3,000포인트가 지급됩니다.]
[메이저리그에서 3루타를 기록했습니다.]
[80포인트가 지급됩니다.]
[메이저리그에서 한 경기 4안타를 기록했습니다.]
[300포인트가 추가 지급됩니다.]
[현재 포인트: 8980]
시스템 메시지가 연달아 포인트를 뱉어내기 시작했고.
[Hit for the cycle!!!]
다저 스타디움의 전광판에 기록 달성을 축하하는 문구가 떠오르고.
“Koo!!! Koo!!! Koo!!! Koo!!!”
홈팬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일사불란하게 Koo 콜을 쏟아내기 시작하자, 점차 이 모든 게 현실이라는 게 느껴졌다.
시범경기도, 연습경기도 아닌 메이저리그에서.
한 구단의 3선발과 셋업맨, 마무리를 상대로 네 개의 안타를 뺏어냈다는 것이.
“와아아아아아아아!!!”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Koo 콜을 보내주는 팬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 인사를 보낸 뒤.
가슴팍의 다저스 로고를 주먹으로 두드리며, 이 유니폼에 어울리는 선수는 바로 나라는 어필을 보냈다.
오늘 경기를 비추는 수많은 카메라 중 하나쯤은 나를 비추고 있을 테니까.
* * *
[Hyun―Ki Koo, 2037시즌 메이저리그 2호 ‘Hit for the cycle!’]
[시범경기의 내추럴 힛 포 더 사이클은 행운이 아니었다! Koo, “마지막 남은 안타가 3루타였기에 마음을 비웠다. 다만 안타를 때리고 싶다고 절실하게 생각했을 뿐.”]
[다저스의 에이스 로버트 켈리, 기나긴 부진 끝에 6이닝 1실점으로 시즌 2승째 수확! 인터뷰에서 ‘다저스의 모든 구성원에게 감사를’]
[유진 리빙스턴, 친정팀 다저스 상대로 4타수 4안타로 맹활약… 다저스 팬 연합, 프런트 안목에 ‘의심의 눈길’]
[힛 포 더 사이클의 마지막 3루타 허용한 블루제이스 마무리 에두아르도 산토스, “공교롭게도 나는 마운드에서 공을 던지는 Koo를 만나본 적이 한 번도 없다. 그가 투수였다는 것이 믿기 힘들다. 그는 그냥 타자다. 그것도 상대하기가 아주 까다로운 타자.”]
* * *
경기 시작 전 다저스 선수들과 식사 약속을 했던 유진은 다음에 꼭 만나자며 발을 뺐다.
팀이 9대 2로 대패했는데, 아무리 친정팀이라고 해도 상대 선수들과 자리를 갖는 건 부담스러웠겠지.
결국 이날 식사 자리는 기록 달성을 기념한답시고 반쯤 강제로 내가 계산하게 됐다.
“아오, 죽겠네.”
MVP 인터뷰에, 기자회견에, 기념행사 논의에, 금방 파했다고는 해도 저녁 식사 자리까지 다녀오니 평소 잠드는 시간을 훌쩍 넘겼다.
“내일 낮 경기인데, 내일 먹자니까 굳이굳이 오늘 얻어먹어야겠다고, 참…….”
낮 경기를 치르려면 오전 중에 출근해야 하니, 자고 일어나서 바로 나가야 한다.
돈도 엄청 깨졌고, 내일 컨디션도 걱정이지만, 그래도 그만한 가치가 있는 하루였지.
“근데 난 솔직히 이번에도 재능 뽑기권 주지 않을까 했었거든? 어쨌든 메이저리그에서도 보기 힘든 기록이잖아.”
아니, 뭐. 3000포인트면 홈런 30개 쳐야 하는데, 아쉽다는 건 절대 아닌데.
달성한 기록 자체는 똑같은데 보상에 차이가 있으니까.
이게 그 자연산만 취급하는 뭐 그런 건가 싶기도 하고.
[여기가 횟집이냐? 자연산을 따지게?]
그렇게 황당해하면서도 알려줄 건 다 알려준다.
[기록이라는 게 사실은 운과 실력이 전부 필요한 거잖아.]
똑같이 보기 드문 기록을 세우더라도, 운이 상당수 개입하는 기록은 실력만으로 달성 가능한 기록에 비해 덜 후하게 쳐준다나.
내추럴 사이클링 히트나 무보살 삼중살 때처럼 아예 엄청나게 희귀한 기록을 세우면 또 얘기가 다르지만.
[그리고 이 기록이 대단한 건 맞는데, 덮어놓고 기뻐하기만 할 일은 아니야.]
그건 맞지.
행운이 따라야만 하는 기록이라고는 해도, 어쨌든 사이클링 히트는 강타자의 상징.
투수들이 나를 거르거나 유인구 위주로 승부할 수 있는 확실한 명분이 생긴 거나 마찬가지니까.
시범경기 때 내가 미칠 듯한 타격 페이스를 올리면서도 투수들이 정면 승부를 고집했던 건, 내가 투수에서 타자로 전향한 지 얼마 안 됐기 때문이다.
안타를 허용해도 투수 같지도 않다는 매도를 듣는 판에, 안타 맞는 게 무섭다고 피한다는 이미지라도 생기면 세상이 끝나는 줄 알았겠지.
개막 후 지금까지는 어떻게 약빨이 갔는데, 이제는 그것도 끝이라고 봐야지.
‘Koo의 투수 시절 모습은 그냥 잊어야 한다! 그냥 쟤는 X나 규격 외의 천재라서 예외로 쳐야 한다! 저게 사람이냐!’
안 그래도 이런 여론이 슬금슬금 나오던 중이었는데, 이번 기록이 결정타를 날릴지도 모른다.
“너는 어떻게 했냐? 너도 똑같았을 거 아냐.”
박도현도 메이저 콜업 직후 같은 전철을 밟았다.
마이너 생활을 1년도 안 한 타자. 투수들에게 맞붙어서 안타 맞으면 등신, 피하면 더 등신이 되는 진퇴양난에 빠트렸던 것도 잠시.
‘얘는 걸러도 된다’라는 인식이 생기고 나서부터는 경기당 고의사구 하나씩은 기본으로 얻어냈었지.
[음, 일단 그린라이트를 받아서 무조건 뛰었어.]
지금은 은퇴한 전임 1루 코치가 인터뷰에서 말하기로는 받은 게 아니라 거의 강탈했다고 했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고.
박도현은 고의사구로 나가면 무조건 도루를 시도했고, 아주 높은 확률로 성공했다.
그러자 이번엔 주자가 1루에 나가 있는 상황에서 거르는 걸로 노선을 바꿨다.
정말 어처구니없게도, 그게 더 실점 확률이 낮다는 통계가 나오기도 했다. 이 미친놈은 냅두면 3루까지 뛰니까!
“당장 내 상황에서는 그러기 힘들지.”
일단 그린라이트를 얻는 것부터가 힘들 거다.
그 시절의 박도현이야 지금의 나보다 훨씬 어리기는 했어도, 어쨌든 리틀야구 시절부터 내야수로 경력을 쌓았다.
그에 비해 나는 투수 이외의 포지션을 경험해본 적이 한 번도 없었던 선수.
프런트로서는 지금 나를 유격수로 쓰는 것도 조마조마할 텐데, 여기서 도루까지 한다? 진짜 단장님 뒷목 잡고 쓰러질지도 모른다.
[좀 벗어나는 공도 컨택해서 정타를 만드는 법을 익히는 것도 도움이 많이 될 거야.]
지난겨울 내내 훌리안 밑에서 구르며 배운 것 중 하나가 바로 히팅 존 넓히기였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보통 타자 수준까지 끌어올린 거였고. 이것만 해도 ‘미친놈’이라는, 박도현 피셜 훌리안에게 있어 최상급의 칭찬을 끌어낸 업적이었으니.
한두 번의 시행착오로는 답이 안 나오는 문제다.
“일단 부딪쳐 봐야지. 정 답이 안 나오면 훌리안한테 상담도 해보고.”
[훌리안 영감님이랑 계약했던 기간은 오프시즌 동안까지 아니었냐?]
“감자탕 사준다고 불러내면 나오지 않을까?”
[미친놈…….]
* * *
저녁 경기 후 이런저런 약속에 불려 다닌 뒤, 바로 다음날 낮 경기를 치르는 빡센 일정이었지만.
마이너 시절부터 베개에 머리만 대면 잠들던 나였기에, 짧게나마 숙면을 취하고 제법 괜찮은 컨디션으로 출근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나서 가장 먼저 방문한 곳은, 이제는 눈 감고도 찾아갈 수 있는 감독님과의 면담실.
“어제 잠은 푹 잤나? 흥분해서 잠을 못 이루거나 그러진 않았지?”
“저를 흥분시킬 수 있는 건 감독님의 칭찬뿐입니다.”
“안 하던 헛소리를 하는 걸 보니 수면 부족인가 보군. 오늘 경기는 벤치에서 시작하는 게 어떤가?”
피차 빙빙 돌리는 걸 싫어하는 성격.
전날 기록에 대한 칭찬은 약식으로 끝내고, 감독님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자네의 타순에 대해 코칭스태프 일동이 치열하게 논의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으면 좋겠어.”
그 말뜻은, 지금 당장은 내 타순을 앞당기지 않겠다는 것.
감독님은 혹여 내가 실망할까 봐 재빨리 덧붙였다.
“우리는 4월 한 달 동안 자네에게 빅리그 내야수로서의 자질이 있는가를 평가했고, 이번 5월은 주전으로 뛰면서 체력 이슈가 없는지를 평가하기로 했지.”
다른 주전 선수들과는 달리, 나는 휴식과 타 포지션 경험을 명확하게 보장받았다.
물론 얼마 전 출장정지로 인해 뜻하지 않게 며칠간의 휴식을 얻으면서 최근엔 휴식 없이 출전하고 있지만.
“나는 사실, 지금도 한 명의 투수를 내야수로 바꾸기 위해서는 더 많은 여유가 필요하다고 생각해. 자네의 빛나는 재능이 그 기간을 앞당기고는 있지만, 여기서 더 서두르는 건 위험하다는 게 내 솔직한 생각이야.”
어제 경기처럼 대기록이 걸린 상황이라면 타석 하나하나가 아쉽겠지만, 그건 날이면 날마다 오는 기회가 아니다.
당장의 성적보다는 선수로서의 성장을 선택해주는 감독님을 만난 건 행운일지도 모른다.
“상위 타순에 대한 욕심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코칭스태프들의 판단을 믿고 따르겠습니다. 적어도 타격에 대해서는 저보다 훨씬 전문가들이니까요.”
“이해해줘서 고마워, Koo.”
감독님과 나는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서로의 역량과 판단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선수와 감독의 이상적인 관계라고도 볼 수 있는 모습.
그렇게 오늘 경기에서도 7번 유격수로 출전하게 될 거라는 통보와 함께 면담을 마쳤다.
그러나 이런 훈훈한 분위기가 무색하게.
다음날 경기에서 나는 리드오프 유격수로 출전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