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치킨게임 (1)
메이저리거들에게 팬서비스를 받기 위해서는, 유료 행사를 제외하면 그나마 경기 시작 전 훈련 시간에 요청하는 게 좋다.
경기 하나하나의 승패가 중요한 컨텐더 팀은 팬서비스에 박하다는 인식이 있지만, 다저스는 지구 1위를 수성 중임에도 자주 사인해주는 편.
그 이유는 생전의 박도현이 팬서비스에 아주 적극적인 선수였기 때문이다.
팀 타선의 멱살을 잡고 끌어올리는 타자도 팬들의 소중함을 아는데 니들은 뭐냐, 뭐 이런 소리 안 들으려고 자진 납세한 거지.
“Koo! 여기도 좀 와주세요! 여기!”
박도현이 떠난 이후에도 그런 기조는 바뀌지 않았고. 나도 투수 시절부터 팬서비스에 인색하진 않았으니.
경기 전 시간이 될 때면 늘 펜을 챙겨 관중석을 방문했다.
“작년엔 유격수 타석이 찾아오면 화장실에 다녀왔는데, Koo가 돌아오고 나서부턴 그럴 수 없게 됐어요. 어떻게 책임질 거예요?”
“음, 제가 너무 늦게 온 건 아니죠? 일단 가까이 오지 말아주셨으면 좋겠어요.”
“저기요, Koo. 우리 엄마는 야구를 좋아하고, 아빠는 풋볼을 좋아하거든요. 주말만 되면 뭘 보러 갈지 맨날 싸우시는데, 누구 편을 들어야 할까요?”
“그걸 야구 선수한테 물어보면 어떡하니? 차라리 변호사를 찾아가렴. 이 사인볼을 상담료 대신 받겠다는 변호사가 LA 시내에 수두룩할 테니까.”
“Koo!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네가 타자로 전향한다고 했을 때 허무맹랑한 소리라고 생각했어! 내가 미쳤지! 여기 와서 내 멍청한 머리통 좀 때려줘!”
“가족분들과 상의는 하셨나요? 했다고요? 그럼 이따 시간 남으면 때려드릴게요.”
요즘처럼 팀 분위기도 좋고, 내 컨디션도 좋은 날이면 이렇게 소소한 농담을 주고받기도 하지.
[야구는 진짜 잘하고 봐야 돼. 저딴 개그에도 웃어주는 거 보니.]
‘뭐래. 웰컴, 땡큐, 아이러브유. 팬들 앞에서 세 마디로 돌려막기하는 주제에.’
[그건 데뷔 초에나 그랬고. 나 죽기 전엔 그래도 영어 좀 했거든?]
물론 가끔은 영어를 쓸 필요가 없는 팬들을 만나기도 한다.
“구현기 선수! 구현기 선수!”
관중석에서 간절한 표정으로 공을 들고 서 있는 한국인 다저스 팬.
공을 달라고 손짓하자 감격에 찬 얼굴로 사인볼을 던진다.
“아, 저,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사인에 이름 좀······.”
“알아요. 전에도 와주셨잖아요. 박정훈 씨 맞죠?”
“허업······!”
이름을 기억하고 있으리라곤 생각 못 했는지, 눈을 크게 뜬 채 입을 틀어막는 팬.
[야, 뭐야. 너 팬들 이름 다 외우고 다녀?]
‘장난하나. 그걸 어떻게 외워. 하루에 만나는 팬이 몇 명인데.’
[그럼 저 사람은 어떻게 알아? 아, 한국인이라 그런가?]
‘4년 전인가? 코리안 데이 행사 때 저 사람 니 앞에서 통곡했었잖아. 그걸 어떻게 잊어.’
[어······ 아아아아! 이제 생각났다!]
반가운 듯 팬을 쳐다보는 박도현의 모습이 조금은 짠하다.
선수 한 명을 죽어라 키우고, 명예의 전당에 못 보낼 때마다 다시 처음부터 반복.
다저스에서 선수로 뛰던 시절의 자기 모습이 희미해진 걸까.
“여기 받으세요. 앞으로도 다저스 응원해주시고요.”
“가······ 감사합니다!”
떨리는 손으로 사인볼을 주섬주섬 집어넣는 한국인 팬.
그때, 배팅 케이지 쪽에서 타격 코치가 슬슬 와서 준비하라고 불렀다.
모여든 팬들을 향해 다음에 만나자며 인사를 건네고 뒤돌아서려던 찰나.
“저기, 구현기 선수!”
한국인 팬이 쩌렁쩌렁하게 외치는 소리에 나도 모르게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저, 저는 진짜로······ 메이저리그의 역사에 남을 위대한 선수가 될 거라고 믿어요! 진심으로!”
“하하, 감사합니다.”
응원은 고맙지만, 역사 같은 추상적인 얘기에는 관심 없다.
명예의 전당에 내 얼굴이 새겨진 동판을 남기는 것.
내가 원하는 건 오직 그것뿐이다.
그러기 위해선 하루하루가 내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며 죽어라 뛰는 수밖에.
* * *
토론토 블루제이스와의 2차전.
다저스의 선발 투수는 최근 3경기 연속 퀄리티 스타트를 기록했음에도 극악의 승운으로 시즌 1승 5패에 머무르고 있는 다니엘 슈미트.
“스트라이크 아웃!”
“아웃!”
“아웃!”
다니엘은 자기가 고작 1승에 만족할 투수가 아니라고 시위하듯 공 10개 만에 삼자범퇴로 이닝을 매조지었다.
“우리 욕심부리지 말자! 딱 어제만큼만 점수 내자고! 나머진 다니엘이 알아서 해줄 거야!”
“다니엘의 어린 아들이 너무 슬퍼서 아빠 경기를 못 보겠대!”
“어, 저기 나 아직 결혼 안 했는······.”
“자자! 파이팅! 파이팅!”
1회 말 다저스의 공격.
오늘 블루제이스의 선발 투수는 소노다 테루유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일본인 투수.
‘덕분에 어제 기자들한테도 엄청 시달렸지.’
메이저리그에 동양인이 드물다 보니 종종 묘한 방향으로 관심이 쏠리곤 한다.
한국인끼리 맞붙는 경기엔 코리안 더비, 일본인 선수와의 경기에선 한일전이라는 타이틀을 붙여 어그로를 끌지.
사이클링 히트라는 대기록을 세웠는데도, 어젯밤 인터뷰에서 일본인 투수와의 맞대결에 관한 질문이 여러 번 나왔을 정도니까.
솔직한 심정으로는, 상대가 일본인이든 뭐든 하나도 관심 없다.
국가대표로 뽑혀서 일본 팀을 상대하는 거면 기분이 좀 다를지도 모르겠는데, 여긴 메이저리그고. 국적이야 어쨌든 상대나 나나 똑같은 메이저리거.
당연히 인터뷰에서도 똑같이 말하곤 하는데, 이러면 안 좋아하는 사람들이 꼭 있다.
국대 뽑혀서 면제받으려고 언플한다느니, 국민 정서에 공감을 못 한다느니.
이제는 내 커리어에 털끝만큼도 도움 안 되는 그런 반응에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걸 안다.
‘결국 중요한 건 이 투수가 어떤 공을 던지느냐지.’
코너웍이 좋은 포심 패스트볼과 각이 큰 포크볼, 슬라이더와 체인지업을 활용하는 전형적인 일본산 좌완 피네스 피처.
패스트볼 최고 구속이 90마일에 불과해 불펜으로 쓰긴 애매하지만, 어쨌든 제구가 잘 되는 날은 땅볼을 양산하는 투수지.
토론토와 4년 최대 6,000만 달러의 계약을 맺었는데, 작년에는 4선발로서 딱 연봉 값쯤 되는 활약을 보여줬지만. 2년 차인 이번 시즌은 소포모어 징크스를 겪으며 다소 고전하는 중.
따아악―!
따아아악―!
오늘 경기에서도 파괴력이 있는 다저스 타선을 버텨내지 못하고 연달아 안타와 볼넷을 허용하고 있다.
중간에 병살이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1실점에 주자는 만루.
어제와 똑같이 7번 유격수로 출장했지만, 1회부터 타격 기회를 맞이했다.
‘거르진······ 않았고.’
어제 4타수 4안타에 만루 홈런까지 때려낸 나였지만, 아무리 그래도 자동 고의사구는 안 나왔다.
하긴 지금이 포스트시즌도 아니고, 그랬다간 저쪽 감독도 뒷감당이 어렵겠지.
“볼!”
“볼!”
그렇다고 해서 정면 승부를 들어온 것도 아니었다.
배트를 내밀 생각조차 들지 않는 코스로 연달아 들어온 슬라이더와 체인지업.
이럴 거면 자동 고의사구라도 내리지. 엄청나게 희귀한 기록이니까 보상이라도 나왔을 텐데.
마운드 위의 투수를 관찰했다.
만루이니만큼 긴장돼 보이기는 하지만, 딱히 자존심이 상한다거나 승부욕이 보이지는 않는 표정.
덕아웃이 어렵게 승부하라고 지시했다는 걸 확연히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다음 구종을 예측하고 자세를 잡았다.
그리고 3구는 내가 예상했던 그 구종이 맞았다.
쐐애애액!
주로 구사하는 변화구를 하나씩 던져서 타자의 반응을 살펴보는 수법.
만약 타자한테 휘두를 낌새가 보인다면, 그걸 기억해뒀다가 다음 승부에서 활용하는 거다.
나도 투수 시절 까다로운 타자를 만나면 이따금 써먹곤 했지. 가끔 한 번 더 꼬아서 하이 패스트볼을 섞기도 했고.
그러나 지금 카운트는 헛스윙이 돼도 상관없는 2―0.
투수가 던진 공은, 주력 변화구라는 포크볼에 맞춰 아래에서 퍼 올리듯 가져간 스윙 궤적에 걸려들었다.
따아악!
외야 중앙으로 날아가는 살짝 먹힌 타구.
그러나 장타를 대비해 뒤로 물러나 있던 중견수가 잡아내기는 불가능했다.
중견수가 다이빙 캐치를 시도하는 대신 무난하게 원바운드로 잡아내는 동안, 주자 두 명이 홈을 밟으며 2타점 적시타가 되었다.
‘사실 헛스윙도 각오했었는데.’
날아올 타이밍을 읽힌다면 위력이 급감하긴 해도, 제대로 떨어트린 포크볼은 여전히 헛스윙을 끌어내기 쉽다.
타석에서 마주했던 소노다의 포크볼도 각이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다만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상대하기가 수월했을 뿐.
‘존슨한테서 안타를 뽑아내고 나서부터 이랬던 것 같은데.’
공을 끝까지 보면서 스윙 궤적을 수정하는 것.
그때는 퍼펙트를 깨야 한다는 절박함 덕분인지 나도 모르게 성공했는데, 비슷한 코스와 구질을 상대해보니 조금씩 감이 잡힌다고 해야 하나.
게다가 존슨의 그 X랄맞았던 공보다는 확실히 덜 예리했고.
“Koo!!! Koo!!! Koo!!! Koo!!!”
조금 전 플레이를 복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금은 신나게 Koo 콜을 외쳐대는 팬들에게 인사를 보내야 할 때.
관중석과 덕아웃을 향해 손을 흔드는 동안, 1루 코치가 엉덩이를 툭 치며 축하의 말을 건넸다.
“잘했어, Koo. 오늘은 다시 내추럴인가?”
축하 인사치고는 좀 맵다. 블루제이스 1루수가 질색하면서 고개를 저을 정도로.
이틀 연속으로 사이클링 히트를 기록한다? 그럼 이달의 선수는 확정이나 다름없지. 블루제이스 팬들이 유니폼 소각 인증을 올리는 것도 마찬가지고.
“하하하! 무슨 자판기도 아니고. 기록이 누르면 나오는 줄 아십니까?”
“좀 그런가? 하하하!”
마주 보며 웃고 있는데, 갑자기 관중들의 환호성이 격렬해진다.
다음 타자는 헨리. 미안한 소리지만, 어제 안타 없이 병살타만 날렸던 만큼 이 정도의 환호를 받을 타자는 아닌데.
무슨 일인가 싶어 전광판을 쳐다봤더니.
[Hyun―Ki Koo, 7연타석 안타 달성!]
[구단 기록 & ML 기록: 13연타석(2034, Do―Hyun Park)]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기록의 절반을 넘겼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 * *
1루 코치가 바랐던(?) 내추럴 사이클링 히트의 가능성은 내가 4회 말 선두 타자로 나선 두 번째 타석에서 단타를 때려내면서 사라졌다.
[Hyun―Ki Koo, 8연타석 안타 달성!]
대신 다른 기록을 향해서는 한 발짝 더 다가가게 됐지만.
“아웃!” “아웃!”
최근 타격 페이스가 떨어지고 있는 헨리의 병살타로 덕아웃에 돌아오자, 동료들이 박수로 맞이해줬다.
“잘했어, Koo! 괜찮아! 다니엘이 잘 던지고 있잖아!”
“그래! 우리 오늘 다니엘 2승 만들어 줘야지! 집중하자고!”
그러나 말 끝에 묻어나오는 어색함은 도통 감출 수 없었다.
그럴 수밖에. 다른 사람도 아닌 박도현이 세운 기록인데.
‘13연타석이라.’
박도현은 5년간의 풀타임 시즌 동안, 다시는 깨지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여러 기록을 갈아치웠다.
그리고 지금 진행 중인 것 역시 그중 하나.
콜로라도 로키스와의 더블헤더 2차전에서 마지막 두 번의 타석에서 연속 안타를 때려냈고.
어제와 오늘, 지금까지 모든 타석에서 안타를 기록하며 전혀 의식하지 못한 사이 기록을 이어나간 것.
‘니가 달성할 때 상황이 어땠지?’
[아, 그거······.]
이 기록이 어려운 건, 연속 안타가 진행되는 동안 볼넷이나 사구가 나오면 중단되기 때문이다.
막말로 상대 감독에게 비난을 감수할 용기만 있다면, 선수 생활 끝물의 베테랑을 올려서 볼넷을 지시해버리면 그만이지.
[생각해보니 나도 인터리그 때였네. 양키스가 레드삭스랑 지구 우승 경쟁 중이었고.]
원래대로라면 어려운 타자를 피하기 위한 명분이 될 상황.
그러나 레드삭스 쪽에서 ‘기록이 무서워서 피하는 팀에게 챔피언의 자리는 어울리지 않는다’라며 어그로를 끌어주기도 했고.
그전 시리즈에 이미 연속 3안타를 적립해둔 상태에서, 1선발부터 3선발까지를 상대했었다.
양키스 프리미엄을 지키고, 포스트시즌을 앞두고 사기가 떨어지는 걸 막기 위해 울며 겨자 먹기로 승부해야 했다는 거지.
심지어 그렇게 승부한 결과 기록을 허용했고, 그 후유증인지 지구 우승도 레드삭스에게 넘겨줬다.
‘어찌 보면 이것도 운에 달린 거네.’
상대가 승부를 피하기 힘든 상황이 전제되어야만 도전해볼 수 있는 기록.
그렇다면, 나한테도 비슷한 행운이 찾아온 건지도 모른다.
따아아악―!
5회 초 수비로 이어진 경기.
블루제이스의 6번 타자 유진 리빙스턴이 큼지막한 타구를 날리면서 2루에 안착했다.
[Eugene Livingstone, 8연타석 안타 달성!]
상대 팀에 같은 기록에 도전 중인 타자가 한 명 더 있었으니까.
기록을 허용하는 게 무서워서 승부를 피하면, 우리 팀 타자의 기록도 그대로 끝난다.
피할 수 없는 치킨게임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