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치킨게임 (2)
LA 다저스 마이크 올리버 단장.
그는 한창 플레이가 진행 중인 경기장을 내려다보았다.
와아아아!
원정팀 응원석에서의 다소 초라한 환호성.
5회 초 1사 상황. 블루제이스의 8번 타자가 날린 플라이에 3루 주자가 홈을 밟았다.
스코어가 1대 3으로 바뀐 전광판에는 막 덕아웃으로 돌아가는 주자의 얼굴이 클로즈업됐다.
‘유진 리빙스턴.’
4년 전 트레이드로 데려올 때만 해도 내야 유틸리티였던 선수.
다저스 이적 후 외야 수비에도 빠르게 적응하면서 전천후 유틸리티로서 가치를 올렸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수비에서의 이야기.
타격 측면에서는 성장을 기대하기 힘들다고 판단했지만.
[Eugene Livingstone, 8타석 연속 안타 달성!]
조금 전, 다저스 구단 홍보팀이 급히 제작해 올린 문구가 올리버 단장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기록은 언제든 깨질 수 있다.
그 역시, 자신이 데려온 선수가 메이저리그의 오래된 기록을 갈아치우는 것을 몇 번이나 지켜봤으니.
그렇지만, 기록이 깨졌을 때 치명적인 상황이 있고 그렇지 않은 상황이 있다.
‘지금은 위험하지.’
5년 조금 넘는 짧은 시간 동안 메이저리그의 전설로 군림했던 박도현의 기록.
그것이 바로 얼마 전까지 다저스 소속이었던 선수에 의해, 다저스를 상대로 깨진다?
치명적인 타격이 될 것이다.
팀에게나, 자신에게나.
‘혹시라도 잘못된 방법을…….’
올리버 단장은 생각하다 말고 고개를 저었다.
하도 믿기 어려운 상황이다 보니 어처구니없는 의심까지 하게 된다.
유진 리빙스턴이 반도핑 기구의 무작위 테스트에서 음성 판정을 받았던 것이 고작 2주 전.
‘플루크일 것이다.’
다저스에서 유틸리티로 출전했던 것과 달리, 주전 포지션을 확정했다는 데서 오는 안정감.
그리고 이번 시즌 종료 후 FA 자격을 획득하기에 저절로 끌어올렸을 집중력.
이러한 심리적 요소로 인한 플루크라는 결론을 내렸지만, 문제는 그게 언제 꺼지느냐다.
“와아아아아아아아아!!!”
쏟아지는 다저스 팬들의 환호성에 올리버 단장의 상념이 멈췄다.
공수교대를 위해 들어가는 다저스 야수들.
그리고 글러브에서 공을 빼내 던지는 것은, 다름 아닌 유격수 구현기였다.
조금 전의 유진과 마찬가지로 8타석 연속 안타를 달성하며 기록을 이어 나가는 중인 선수.
그는 피식 웃었다.
쓸데없는 걱정을 하느라 수비 장면을 놓쳤다.
“Koo, 자네는 정말…….”
자신에게 기적 같은 일을 수도 없이 보여줬다.
투수가 아닌 내야수로 메이저리그에 돌아온 것은 물론, 시범경기에서의 내추럴 힛 포 더 사이클, 무보살 삼중살, 거기에 바로 어제의 힛 포 더 사이클까지.
공수겸비의 유격수라는, 박도현 이후 찾아볼 수 없었던 그 호칭을 붙여도 어색하지 않았다.
만약 이 기록을 갈아치우는 것이 구현기라면.
그땐 정말로, 박도현의 시대가 끝나버렸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 * *
켄이 볼넷을 얻어냈지만, 점수로는 이어지지 못했던 5회 말 공격 이후.
“아웃!”
다니엘은 첫 타자를 6구 승부 끝에 내야 뜬공으로 잡아냈지만.
“세이프!”
“베이스 온 볼스!”
두 명의 타자에게 연달아 출루를 허용한 뒤, 투수 코치의 제안을 받아들여 오늘 등판을 마쳤다.
5와 3분의 1이닝 1실점에, 누상에는 두 명의 승계 주자.
덕아웃에 남아 있는 선수들과 밝게 인사하고는 있었지만, 속이 말이 아니라는 건 내가 누구보다 잘 알지.
두 명의 주자가 모두 홈을 밟으면 시즌 2승의 기회는 또 다음으로 미뤄질 테니까.
‘그럴 수야 없지. 다니엘의 어린 아들이 지켜보고 있을 텐데.’
[아니 쟤 결혼 안 했다니까.]
‘결혼을 안 했으면 아들이 없으면 안 돼? 그건 너무 전통적인 가족관념이 아닐까?’
[개소리야…….]
농담을 주고받으며 적당히 긴장도 풀었으니, 이제는 다시 집중력을 끌어올릴 차례.
마침 두 번째 투수로 올라온 고든도 연습구를 마쳤고.
언제든 뛰쳐나갈 수 있도록 준비하면서 타자와의 승부를 지켜봤다.
따아악―!
2―1의 카운트에서 타자가 풀스윙을 갈겼고, 높고 빠른 타구가 내 쪽으로 날아왔다.
제자리에서 가볍게 스텝을 밟다가 훌쩍 뛰어올랐지만.
툭!
글러브 끝부분을 맞고 튀어 나간 타구.
좌익수 말릭이 재빨리 쫓아갔지만, 이미 주자들은 두 베이스씩 나아가면서 스코어는 2대 3.
투수에게 진정하란 제스처를 보내면서도 머릿속으로는 내 플레이를 복기했다.
‘실책은 아니었어.’
방금은 상대가 좋은 타구를 날려서 안타가 됐다는 걸 머리로는 안다.
여기서 아웃카운트까지 만들었다면 슈퍼플레이지만, 놓쳤다고 해서 내가 잘못한 게 아니지.
그런데도 내가 조금만 빨리 반응했으면 잡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자꾸만 드는 건―
‘나도 의식하고 있나 보네.’
좀 아까 덕아웃에서는 내 앞에서 뚝딱거리는 동료들을 보며 속으로 자기들 기록도 아닌데 왜 저러나, 라고 생각했었다.
투수 시절부터 마인드 컨트롤은 잘하는 편이었고, 지금도 잘 가라앉히고 있는 줄 알았는데. 이런 식으로 새어나오네.
따아악!
생각이 복잡해지기 전에 바로 수비 기회가 찾아온 게 오히려 다행일지도 모른다.
조지가 거의 제자리에서 잡아낸 타구를 나한테 토스했고, 2루 베이스를 터치한 다음 1루에 송구하며 더블 플레이.
다니엘의 승리투수 요건을 지켜냈다.
“Yes! Yes! Yes!”
조지와 나는 덕아웃에 돌아가자마자 곧바로 다니엘한테 끌어안겼다.
괜찮은 척은 혼자 다 하더니, 속으로는 엄청 빌고 있었나 보네.
우락부락한 사내놈들 품에 오래 있어 봐야 득 될 것 없으니 슬쩍 빠져나와서 상대 덕아웃을 곁눈질했다.
토론토가 원래부터 약간 덕아웃에서 개인 플레이를 자주 하는 팀인 건 알고 있었는데, 오늘도 마찬가지.
클리닝 타임으로 생긴 잠깐의 틈에도 모여서 뭔가를 의논하기보다는 각자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특히 연속 타석 안타 기록을 이어가고 있는 유진의 주변에는 개미 새끼 한 마리도 없다.
저 정도면 거의 호투 중인 선발 투수급 대우다. 누가 보면 왕따당하는 줄 알겠어.
“시간 됐다, 준비하자!”
“루카스, 랜디! 니들이 Koo 앞에 레드카펫을 쫙 깔아놓으란 말이야, 알겠어?”
“레드는 별로야. 왠지 퇴장당할 것 같단 말이야. 다른 예시로 바꿔줘.”
“루카스, 내가 피파 적당히 하랬지? 헛소리 말고 빨리 나가기나 해.”
반면 다저스 덕아웃은 소란스러운 편.
억지로 분위기를 끌어올리는 것 같긴 한데, 어쨌든 신경 써 주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
어쨌든 조금이나마 긴장은 풀렸고. 블루제이스의 두 번째 투수가 연습구를 마치면서 루카스가 타석으로 나갔다.
“아웃!”
레드카드가 떠오른다면서 재수가 없느니 어쩌느니 하더니 결국 유격수 땅볼로 아웃된 루카스.
“베이스 온 볼스!”
그러나 랜디가 10구까지 가는 끈질긴 승부 끝에 볼넷을 골라내면서, 1사 1루 상황에서 세 번째 타석을 맞이하게 됐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내가 덕아웃 밖에만 나와도 신나게 날뛰던 홈팬들도 어느새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연속 타석 안타 기록 진행 중: 현재 8연속 타석]
전광판에 대놓고 이런 메시지가 흘러나오고 있는데. 야구 잘 몰라도 눈치가 있으면 떠들기 힘들겠지.
그래도 덕분에 투수와의 승부에 집중하기가 수월해졌다.
마운드 위의 투수는 어제 경기에는 올라오지 않은, 고든과 마찬가지로 필승조로 분류되는 불펜 투수.
“볼!”
초구는 바깥쪽으로 제법 빠지는 볼.
주심의 판정이 떨어지자마자 온갖 야유가 투수를 덮친다.
“야!!! 지금 기록 허용하기 싫다고 도망치냐?!”
“이럴 거면 블루제이스가 아니라 블루치즈 치킨윙스로 팀명 바꿔, 이 개자식들아!!!”
입술을 깨물며 겨우 평정심을 유지했다.
왜, 도대체 왜 집중력이 필요한 상황에서는 꼭 이런 소리가 귀에 쏙쏙 날아와 박히는 걸까.
“볼!”
2구째는 좀 더 가까워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스윙을 끌어내지는 못했다.
조금 전보다 더 격렬하고 살벌해진 야유.
투수가 유니폼으로 얼굴의 땀을 찍어내면서 긴장된다는 티를 팍팍 냈지만,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진짜 흔들렸으면 포수가 올라갔겠지.’
바깥쪽 공을 눈에 새겨두기 위한 빌드업이자.
내가 볼넷으로 기록을 놓칠까 봐 초조해지는 걸 노리는 수작이다.
장단에 어울려주기 위해, 배트를 바라보며 한숨 한 번 세게 뱉어준 뒤 자세를 잡았다.
쐐애애액!
바깥쪽 공 두 개 다음 올 만한 공은 하이 패스트볼, 혹은 몸쪽 깊숙한 포심.
그러나 여기서 하나를 더 빼는 건 투수한테도 부담이 크다.
그렇다면 남는 선택지는 하나뿐.
따아아악―!
‘몸으로 말해요’가 있는 한, 맞출 각오 없이 들어오는 몸쪽 패스트볼은 배팅볼이나 다름없다.
우측 라인 쪽으로 빠르게 굴러가는 장타성 타구.
보기보다 발이 빠른 랜디가 홈에 들어가기엔 충분했다.
2루 베이스를 밟고 관중석을 향해 양팔을 치켜드는 순간, 전광판의 연속 타석 안타 기록이 9개로 늘었고.
[메이저리그에서 2루타를 기록했습니다.]
[60포인트가 지급됩니다.]
[현재 포인트: 9140]
한 박자 늦게 시스템 메시지가 나타났다.
사이클링 히트로 얻은 포인트 덕분에, 새로운 재능을 뽑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물론 지금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경기에 집중해야겠지만.
“……크흠.”
유진과 키스톤을 꾸린 블루제이스 유격수도 근처에서 어슬렁거릴 뿐, 차마 말을 걸지 못한다.
엎치락뒤치락하며 기록을 이어가는 두 명의 타자.
그 사이에 낀 양 팀의 다른 선수들도 죽을 맛이겠지만.
“…….”
가장 긴장하고 있는 건 나와 유진, 본인들이겠지.
그러나 슬쩍 곁눈질로 확인해본 유진의 얼굴은 완전한 무표정이었다.
이적하고 나서 득도라도 했나 싶을 정도.
따악―!
그게 억지로 만들어낸 표정이라는 것을, 헨리가 때려낸 땅볼 타구 덕분에 알 수 있었다.
조금 까다롭긴 했지만, 집중만 제대로 했다면 충분히 처리할 수 있는 타구.
그러나 유진은 한 박자 늦게 퍼스트 스텝을 밟았고.
“앗……!”
결국 포구에 실패하면서, 글러브 끝에 맞은 타구가 옆으로 튀었고.
그걸 보자마자 바로 시동을 걸어 홈베이스까지 돌파해버렸다.
1루에 입성한 헨리를 쳐다보다가, 글러브로 얼굴을 덮고 하늘을 올려다보는 유진.
“아웃!” “아웃!”
대타로 나간 벤의 타구를 1루수가 환상적인 점핑 캐치로 잡아내며 이닝을 끝내지 못했더라면, 아예 폭삭 주저앉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이걸로 확실해졌다.
‘쟤도 엄청 의식하고 있네.’
어쩌면 나보다도 훨씬 더.
사실 당연하지. 유진도 박도현과 함께 선수 생활을 했으니, 이 자식의 기록을 넘보고 있다는 게 실감이 잘 안 났을 거다.
내가 9안타째를 때리며 한 걸음 먼저 앞서가게 된 것 때문인지, 아니면 실책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제는 걸음걸이마다 그 사실의 무게가 느껴질 테고.
타격감이든 뭐든, 아무튼 서로가 가진 능력은 죄다 쏟아부었다.
지금부터는 누구의 집중력이 더 오래가는지.
아니면 행운의 여신이 누구를 향해 웃어주는가의 싸움이 되겠지.
‘니가 치면, 나도 친다.’
어디 언제까지 칠 수 있나 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