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치킨게임 (3)
다저 스타디움 인근, 타 구단의 원정 숙소로 자주 쓰이는 호텔.
오전 2시를 훌쩍 넘긴 시간, 한 남자가 침대 위에서 뒤척이고 있었다.
내일, 아니 당장 오늘 낮 경기가 예정되어 있지만, 도저히 잠이 오지 않았다.
“망할…….”
한참을 뒤척이던 그는 결국 핸드폰을 꺼냈다.
메이저리그 포럼에 접속해, 기사들의 제목을 눈으로 훑었다.
[LAD―TOR 인터리그 시리즈, 연속 타석 안타 기록은 현재진행형!]
[유진 리빙스턴 10안타, 구현기 9안타! 대기록 달성 가능성에 배팅 사이트 ‘들썩’]
[Park이 우리에게 남겨준 기록, 드디어 깨지나?]
남자는, 유진 리빙스턴은 마지막 기사의 제목이 눈에 들어오자마자 핸드폰을 덮었다.
자신이 그의 기록을 넘보고 있다는 무거운 사실이 새삼 느껴졌다.
야구 선수로서, 박도현은 한 차원 위에 있는 선수였다.
무엇이든 해낼 수 있을 것 같았고, 시간이 더 있었다면 정말로 그랬을 거다.
그와 같은 팀이라 상대편으로 만나지 않는 게 다행일 정도로.
개인적인 친분은 없었지만, 그래도 같은 팀원으로서 서먹하진 않았고.
박도현이 3년 전 이 기록을 세우는 순간에도 함께 기쁨을 나눴다.
그 기록을 자기 손으로 갈아치운다는 것을, 지금껏 상상해본 적도 없었다.
“윽…….”
갈증을 느낀 유진은 물을 꺼내 마셨다.
평범한 유틸리티 선수에 불과했던 그였기에, 수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것은 처음이었다.
박도현은 항상 이런 부담 속에서 야구를 했던 걸까.
‘사실상 기록은 어제 끝난 거나 다름없어.’
실책의 충격에서 벗어나지도 못한 채 선두 타자로 투입되었던, 그날 경기의 세 번째 타석.
바깥쪽을 절묘하게 찌르는 두 개의 패스트볼로 노 볼 투 스트라이크에 몰리고 나서, 그는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배트를 돌렸다.
그리고 그 타구는 세 명의 야수 사이에 떨어지는 텍사스 안타가 됐다.
9회 초, 마지막 공격에서 다저스의 마무리 투수 새뮤얼을 마주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가운데로 몰린 실투를 받아치지 못했다면, 남은 카운트 안에 안타를 때려냈을 거란 확신이 없었다.
‘기록은 Koo 같은 선수가 세우는 거겠지.’
자신이 기록의 중압감에 눌려 실책을 저지르는 틈을 타, 구현기는 홈까지 쇄도해 득점을 올렸다.
오히려 주춤대는 동료들에게 먼저 다가가 하이파이브를 권하는 그 모습을 보며, 유진은 박도현이 살아 있을 때의 모습을 떠올렸다.
누구보다 많은 주목을 받으면서,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이 언론에 오르내리고, 근거 없는 비방이나 약물 의혹까지 나오는 상태에서도 자기 플레이를 해내는 모습.
‘나는 그렇게는 못 해.’
날이 밝으면 그는 리드오프로 경기에 나설 예정이다.
한 타석이라도 더 많이 서야 하지 않겠냐면서 감독이 제안했던 것.
그때는 얼떨결에 동의해버렸지만, 지금에 와서는 차라리 잘됐다 싶었다.
‘내 기록은 여기까지.’
기록을 빨리 끊어버리고, 경기에만 집중하자.
결론을 내리고 나서야 그는 겨우 잠들 수 있었다.
* * *
[구현기, 故 박도현 기록 13연타석 안타 도전 중… 현재 9연 타석 안타!]
[KBO 전문가들 ‘구현기 타자 전향’ 성공에 0, 실패에 100… 위풍당당 구현기, “이제 누가 전문가지?”]
[LA 다저스 구현기, MLB 한일전에서 대승 거둬… TOR 선발 소노다 상대로 2타수 2안타]
침대에 누워 한국 언론에서 올린 기사를 읽어보고 있자니, 박도현이 기가 막힌다는 듯 참견한다.
[무슨 그런 걸 찾아보고 있냐.]
“왜, 가끔 보면 재밌어.”
나랑 감정이 안 좋은 일부 기자들이나, KBO에서 한가닥 하는 양반들.
스프링캠프 때는 물론, 심지어 개막 로스터에 이름을 올리고 나서도 발악했지.
지들도 뱉은 말이 있으니 입 꾹 다물고는 있는데, 만약 내가 기록을 갈아치우고 나면 뭐라고 할지 궁금해 미치겠다.
[구현기 기록 달성, 토론토 블루제이스와의 3차전이 아니면 어렵다?]
또 무슨 제목 어그로인가 싶어 언론사와 기자를 확인했는데, 순간 잘못 본 줄 알았다.
내가 데뷔하기 전부터 팩트로만 기사를 쓰던 사람이었으니까.
[필릭스 오브라이언 감독은 구현기를 두고 “첫 풀타임 시즌을 보내는 타자에게 상위 타순을 맡기기엔 무겁다”라는 말을 여러 번 해온 바 있다.
오브라이언 감독이 마음을 바꿔 내일 구현기를 리드오프로 출전시킨다고 해도, 팀 타선이 받쳐 주지 않는다면 다섯 번째 타석이 돌아오리란 보장이 없다.
만약 4타수 4안타에 그쳐(물론 이것도 엄청난 활약이기에 ‘그친다’라는 표현이 부적절하다는 건 알지만) 신기록 달성 기회는 다음 시리즈로 넘어가는데, 공교롭게도 다음 일정은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와의 원정 3연전이다.
비록 본인들이 먼저 원인 제공을 했다지만, 다저스와의 초대형 난투극으로 주전 선수 상당수가 이탈하면서 최근 라이브볼 시대의 연패기록인 23연패를 경신한 파드리스이기에. 구현기와의 정정당당한 승부가 이뤄지리란 보장은 없다.]
제목은 어그로를 좀 끌긴 했는데, 내용은 역시나 팩트였다.
솔직히 좀 놀라기도 했다. 한국에 있는 기자인 걸로 아는데, 생각보다 정확한 분석을 내놓아서.
예를 들어 내일 경기에서 리드오프로 나갈 거라거나, 그러도고 다섯 번째 타석을 장담하기 어렵다는 것 등등.
[나 감독님 그렇게 어색하게 웃는 거 처음 봤어.]
“앞으로도 볼 일 없었으면 좋겠더라.”
5월 동안은 하위 타선에서 기용하겠다는 확답을 준 게 바로 전날이었는데, 손바닥 뒤집듯 말을 바꾸게 됐으니.
그래도 이건 감독님도 어쩔 수 없는 문제였다.
바로 오늘 경기에서, 8회 말 공격이 내 앞에서 끊기는 바람에 네 번째 타석에 들어서지 못했다.
반면에 유진은 행운이 따른 안타였다고는 해도, 어쨌든 두 개의 안타를 추가하며 나보다 한 걸음 앞서 나갔고.
물론 단장님의 강력한 의향이 있었다고 덧붙이긴 했지만, 본인이 납득 안 가는 기용을 프런트 지시사항이라고 무조건 따르는 감독은 아니니까.
[타순이 갑자기 바뀌는 건데, 적응에 문제는 없겠지?]
“음…… 상관없을걸. 아예 처음도 아니고.”
시범경기에서는 리드오프 출전을 여러 번 했었고. 지난 디백스전에서 상대 선발의 도발을 받아치는 의미로 한 번 나가기도 했었지.
아무리 상대 투수가 5선발이라고는 해도 리드오프 출전은 안타를 때려내기에 불리하다는 인식이 퍼져 있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첫 타석에서 기록이 끊기면, 덕아웃에서 감정을 추스를 생각이 생기는 거니까.
‘아니 뭐래. 벌써 실패할 생각부터 하고 있어.’
좀 전까지 동료들이랑 저녁 먹으면서 평소처럼 좀 하라고 구박했을 땐 언제고.
“으드드드득!”
반성의 의미로 관절을 비트는 요가 동작을 하고 있자니, 박도현이 안쓰럽다는 듯 쳐다본다.
[내가 웬만해선 이런 얘기 하기 싫은데, 다들 얼탱이가 빠졌어. 투수든 타자든. 지들 기록도 아니면서.]
어제 경기가 이겼으니 망정이지, 선수들의 집중력은 영 아니올시다였다.
병살도 세 번이나 나왔고. 투수들도 치명적인 실투를 남발하면서 안 줘도 될 점수를 내줬지.
그래도 이걸 니가 말하긴 좀 그렇지 않냐.
“왜들 그러는지 너도 알잖아.”
[뭐가?]
“니 기록이니까 그러지.”
박도현이 입을 다문다.
아무리 선수 시절의 기억이 희미해졌다고는 해도, 함께 뛰었던 동료들을 매일같이 보는데 모를 리가 없다.
자기들 잘못으로 유진에게 기록을 허용하면 어쩌나, 박도현이 남겨둔 기록이 정말 자기들 손으로 바뀌는 건가, 그런 생각이 발목을 잡아서 제대로 된 플레이가 안 나오는 거지.
박도현이 다저스에 남긴 흔적이 그만큼 크다.
“그러니까 이제 그딴 고민 할 필요 없게 만들어줘야지.”
박도현은 살아만 있었으면 명예의 전당에 무조건 첫 턴 입정을 확정한 선수.
내가 그런 재능을 전부 갖고 있진 않지만, 대신 나한테는 시간이 있다.
이번에 실패해도 다시 도전할 수 있는 시간이.
“니 기록 내가 다 먹을 거니까.”
* * *
토론토 블루제이스와의 인터리그 마지막 경기.
평소처럼 팬서비스를 하러 관중석에 다가가는데, 오히려 쫓겨나고 말았다.
“Koo! 사인은 됐으니까 가서 집중해요! 집중!”
“그래! 우리 사인 받으려고 여기 앉은 거 아냐! 경기를 가까이서 보고 싶었을 뿐이니까!”
팬들도 그렇고, 덕아웃도 그렇고.
분위기만 보면 무슨 포스트시즌인 줄 알겠다.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동료들의 성화에 멍하니 전광판만 쳐다보고 있자니, 오늘 선발 명단 소개 영상이 흘러나온다.
대기록에 도전 중인 두 명의 타자가 나란히 리드오프 출전.
어쩐지 감독님이 경기 시작도 전에 진이 빠져 있더라니, 질문 공세에 시달렸나 보다.
“플레이 볼!”
블루제이스의 리드오프 타자 유진 리빙스턴이 타석에 들어서자마자 사방에서 카메라 플래시가 터져 나왔다.
전날도 당연히 그러긴 했는데, 사실상 오늘이 성공과 실패를 가르는 날이 될 확률이 높으니까.
현재까지 10연타석 안타를 기록 중인 유진의 컨디션은 어떨지 궁금했는데.
‘아, 치겠다.’
투수로 뛰던 시절, 저런 타자들이 제일 짜증 났다.
그냥 다 내려놓고 들어오면 치고 아니면 말고, 이런 식으로 나오는 타자.
오늘 다저스의 선발 마리오 로드리고는 패스트볼의 구위는 좋지만, 코너웍이 다소 떨어지는 선수.
존 안에 넣고 빼고 하는 정도는 조절할 수 있어도 세밀한 컨트롤은 버거워한다.
‘그리고 오늘은 집어넣겠지.’
엄밀히 말하자면 볼넷이나 힛 바이 피치를 내줬을 때 더 치명적인 건 다저스 쪽이다.
그동안 박도현이 기록 달성에 직면했을 때, 다저스가 꾸준히 밀어붙여 온 ‘승부를 피하면 챔피언이 될 수 없다’라는 프레임.
레드삭스가 이걸 써먹어서 양키스를 압박해 기록의 희생양을 만들기도 한 만큼, 만약 우리가 피한다면 역풍이 더 거세게 불 거다.
따아아악―!
11연타석 안타를 기록했음에도 1루에서 장갑을 바꿔 끼는 유진의 표정은 평온 그 자체였다.
도대체 전날 무슨 짓을 했길래 사람이 저리 변했지.
“아웃!” “아웃!”
그러나 유진의 안타가 블루제이스의 선취점으로 변하는 일은 없었다.
2번 타자의 더블 플레이에 이어, 3번 타자는 맥없는 유격수 땅볼로 이닝 종료.
유진은 멀쩡해 보이는데, 정작 동료들이 부담감에 사로잡혀 어처구니없는 공에 배트를 돌리고 있다.
“나이스! 나이스!”
“오늘도 스윕하고 파드리스 놈들한테도 스윕해야지! 그럼 6연승이야!”
1회 초를 빨리 끝낸 건 좋은데, 하이파이브도 영 어색하고.
수비를 막 마치고 나서 타석에 들어가는 나를 걱정해주는 건지, 덕아웃을 나서는 짧은 시간 동안 물이니 음료수니 이것저것 챙겨주려고 한다.
“타자 위치로!”
주심의 목소리가 갈라져 있다.
판정 하나하나에 대기록이 달려 있는 셈이니, 베테랑 심판이라고 해도 긴장이 안 될 수는 없는 걸까.
여기가 다저 스타디움이니만큼 어쩌면 홈 어드벤티지를 기대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스트라이크!”
그런 건 없었다.
살짝 아슬아슬하지 않았나 싶었던 바깥쪽 포심에 얄짤 없이 올라가는 손.
‘못 치면 심판 탓. 못 치면 심판 탓.’
긴장감을 없애주는 마법의 주문을 외우면서 맞이한 2구.
“볼!”
헛스윙을 기대했는지 하이 패스트볼이 날아왔는데.
일단 내가 이 코스에 잘 안 속는 것도 있지만, 너무 뜬금없어서 오히려 손이 안 나온다.
어제 나온 4선발과 마찬가지로 심리 싸움과 타이밍을 뺏는 걸 주무기로 삼는 모양인데, 그보다는 머리가 살짝 덜 돌아가는 느낌.
쐐애애액!
자기가 똑똑한 줄 아는 투수는 이것저것 꼬아대길 좋아하지만.
지금처럼 공을 확 빼버리기 부담스러운 상황에서는 그게 오히려 독이 된다.
결국 고를 수 있는 공은 한정되어 있으니까, 코스만 좁히면 그만이지.
따아아악―!
살짝 낮게 들어오는 공을 제대로 후려갈겨 중견수 앞에 떨어뜨렸다.
[Hyun―Ki Koo, 10연타석 안타 달성!]
숨죽인 채 승부를 지켜보던 홈팬들이 우레와 같은 함성을 쏟아낸다.
“Koo!!! Koo!!! Koo!!! Koo!!!”
팬들의 절규와도 같은 외침에 응답하는 한편, 덕아웃의 동료들을 향해 주먹으로 가슴을 두드려 보였다.
하던 대로만 하면 우리가 이긴다.
기록 그까짓 거 신경 쓰지 말고 지가 겁나 똑똑한 줄 아는 이 투수나 괴롭히자.
그런 메시지를 보내고 나서 10분 후.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스트라이크 아웃!”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2번부터 4번까지 사이좋게 삼진 아웃.
허술하기 짝이 없는 사짜 볼배합에 연달아 속아 넘어가며 팬들의 속을 펑펑 터뜨렸다.
“수고했어요. 수비하러 가죠.”
“…….”
덕아웃으로 들어오는 내 눈을 피하는 동료들을 보며 깨달았다.
오늘 경기는 누가 먼저 정신을 차리느냐에 달린 멸망전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