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신 들린 천재 타자-65화 (65/200)

65. 치킨게임 (4)

경기 초반 흐름을 요약하자면 기묘한 투수전이라고 할 수 있겠다.

3회가 끝나는 동안 양 팀 선발의 투구 수가 60개를 넘겼지만, 스코어는 1대 1.

[2루수 유진 리빙스턴! 타구를 잡아 2루로 토스! 그리고 1루! 아웃! 무사 1, 2루의 기회가 순식간에 2사 3루로 돌변합니다! 다음 타자가 투수 마리오 로드리고임을 고려하면 공수 교대가 될 확률이 높겠군요.]

[헨리 데이비슨이 이번 시리즈 들어 특히 부진하네요. 특유의 정교한 배트 컨트롤이 최근 들어 전혀 나오지 않으면서 더블 플레이만 네 개째입니다!]

3연속 삼진으로 이닝이 끝나질 않나, 선취점 찬스를 병살로 날려먹질 않나.

평소라면 이딴 경기를 보려고 돈 주고 온 줄 아느냐며 팬들이 들고일어났겠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타석엔 블루제이스의 6번 타자 엔리케 마쉬! 기습 번트! 아니?! 이 타구가 투수 글러브에 빨려 들어갑니다! 마리오 로드리고, 1루를 향해 토스하며 더블 플레이! 본인도 지금 이게 뭔가 싶나 보네요!]

[총체적 난국입니다. 투수는 멍 때리고 있다가 그냥 얼굴 쪽으로 오는 공을 얼떨결에 잡았고, 1루수는 그걸 또 놓칠 뻔하고, 주자는 타구를 확인도 안 하고 달리다가 비명횡사했어요. 혹시 오늘 선수들의 식사를 제공하는 업체에서 무언가 치명적 실수라도 저질렀던 걸까요?]

상대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한쪽만 망가졌다면 승패가 일찍 결정됐을 텐데, 양 팀 모두가 그러니 기적적으로 밸런스가 맞춰졌고.

‘투수가 안타를 맞고, 야수가 실책을 하면, 타자가 병살을 친다.’라는, X밥 싸움의 공식과도 같은 경기가 탄생했다.

“그래! 어디 한번 갈 때까지 가보자! 우린 승리한 X신이 될 거니까!”

“그래 X발! 100점을 내주든 1,000점을 내주든 알아서 하고! Koo만 안타 치면 돼! 우린 어차피 그거 보러 왔어!”

그라운드를 내다보던 다저스 오브라이언 감독은 한 팬의 외침을 듣고 경악했다.

‘되긴 뭐가 돼.’

3회 초와 3회 말.

기록을 이어가던 두 명의 타자는 나란히 안타를 때리며 기록 경신에 대한 기대감을 끌어올렸지만.

이대로 가다간 구현기의 기록 달성은 어렵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었다.

“와아아아!!! ……아아아악!!!”

방금 플레이를 보면 누구라도 그렇게 판단할 거다.

상대 타자는 9번 투수. 타구는 3루 쪽에 치우친, 스핀을 많이 먹긴 했지만 빠르진 않은 땅볼.

평소 리그 상위권의 수비력을 자랑하며 경험이 적은 구현기와 채드윅의 짐을 덜어주던 켄은, 오늘따라 수비 범위가 쪼그라들었고.

그 부담은 고스란히 구현기에게 넘어갔다.

“랜디!”

물론 구현기는 경기를 뛸수록 수비가 빠르게 늘고 있는 선수다.

방금도 3루수가 놓친 타구를 뒤에서 건져내는, 기본에 충실한 플레이를 해냈고.

“앗!”

그러나 클레망의 이탈로 주전 1루수로 출전 중인 랜디가 숏바운드 송구를 잡아내지 못하면서, 결국 타자 주자가 살아 나갔다.

숏바운드가 보통 송구보다는 까다롭다고는 해도, 메이저리그 1루수라면 잡아줬어야 하는 공.

“미안! 미안!”

랜디의 사과를 받아주긴 했지만, 구현기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결과는 안 나오는, 베테랑 야수라도 제정신을 유지하기 힘든 상황.

5회 초인 지금, 구현기는 비슷한 상황을 세 번이나 겪었다.

‘그리고…….’

타석에 들어오는 타자는, 현재 12타석 연속 안타를 이어오고 있는 유진 리빙스턴.

안타를 치고 1루 베이스에서 발이 풀릴 뻔했던 전날과는 완전히 딴판이었고.

연달아 벗어나는 두 개의 공에 미동조차 하지 않고 차분하게 기다리다가, 자기 존에 들어온다고 판단했는지 3구째는 힘차게 방망이를 돌렸다.

따아악!

유격수 구현기가 뛰어올랐지만, 아무리 뛰어난 유격수라도 자기 키를 훌쩍 넘기는 공은 잡을 수 없다.

13연타석 안타.

박도현의 기록에 먼저 발을 걸치게 된 것은 유진이었다.

자신은 동료들의 얼빠진 플레이를 커버하느라 죽도록 뛰고 있는데, 상대는 먼저 타이기록에 도달했다?

멘탈이 강한 타자라고 해도 안 흔들리기가 어려운 상황이다.

“아웃!” “아웃!”

다행히 자기 앞으로 오는 무난한 땅볼로 더블 플레이를 합작하는 걸 보면, 아직은 집중력이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다만 5회 말, 구현기는 이닝의 두 번째 타자로 나선다.

‘실패는 해도 된다.’

구현기가 이번 한 번의 실패에 무너지지 않는 선수라는 건 그 역시 잘 알고 있다.

블래스 신드롬이라는 더 큰 실패를 딛고 메이저리그까지 올라오지 않았나.

문제는 유진에 의해 기록이 덧씌워졌을 때, 팀의 사기가 와르르 무너질 수 있다는 것.

여기에 구현기의 기록이 중단된다면, 자신들의 실책을 커버하려 뛰어다닌 게 원인이라고 생각하는 선수들이 나올 테고.

그러면 팀 전체의 위닝 멘탈리티에도 영향이 갈 수 있다.

‘어쩐다…….’

아직 5회임에도 교체 카드까지 만지작거리며 온갖 경우의 수를 떠올리던 오브라이언 감독의 귀에.

“Hey, Koo.”

가만히 지켜보던 한 베테랑의 목소리가 날아와 꽂혔다.

* * *

5회 초 수비가 끝났다.

“수고했다, 마리오.”

선발 마리오 로드리고의 역할은 여기까지.

5이닝 1실점으로 결과만 놓고 보면 나름 호투했음에도, 마리오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그리고 그건 다른 다저스 선수들도 마찬가지였다.

[분위기 살벌하네.]

‘경기가 이리 개판인데, 이빨 보이면 큰일 나지.’

오늘 우리가 펼치고 있는 경기는 야구가 아니라 코미디나 다름없었다.

5회 초까지 양 팀의 실책 개수를 합해 6개.

실책으로 기록되진 않았지만, 넋이 나갔다고밖에 볼 수 없는 플레이는 그보다 더 나왔지.

[괜찮아? 너 얼굴색이 너무 안 좋은데.]

‘괜찮아.’

더 이상 투수로서 공을 던질 순 없게 됐지만, 투수 시절 죽어라 다져왔던 멘탈은 여전히 내게 힘을 줬다.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끝까지 집중의 끈을 놓지 않는 능력.

이게 없었다면, 박도현의 재능을 전부 가지고 있었더라도 절대 여기까진 못 왔을 거다.

[그 능력을 타석에서만 쓸 수 있으면 참 좋을 텐데…….]

그러게나 말이다.

다들 긴장해서 전날 잠도 제대로 못 잤는지, 오늘따라 다들 몸이 무거워 보인다.

덕분에 다른 날보다 수비하기가 더 부담스럽다. 웃으면서 파이팅 불어넣는 것도 한두 번이지.

‘만약 클레망이 있었으면 진짜 오랜만에 성질 부렸겠는데?’

손목 부상이 많이 나아져 재활 중인, 곧 팀에 합류할 야수조 최고참 클레망 파로.

실책은 용서해도, 팬들이 실망할 만한 플레이를 하는 건 용납하지 않으니까, 진지하게 화냈을지도 모른다.

[로버트가 뭐라고 할 줄 알았는데.]

‘아마 경기 끝나고 난리 나지 않을까.’

로버트는 기본적으로 본인 등판일이 아니면 경기 중 야수들의 플레이에 간섭하지 않는다.

대신 경기가 끝나면 가차 없지만.

계속 이따위로 흘러가면 오랜만에 라커룸이 뒤집어질 수도 있지.

솔직히 힘이 빠진다.

많은 거 안 바란다고, 제발 정신 차리고 평소 하던 대로만 하자고, 시원하게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그러나 다저스 주전 야수들 중 나보다 저년차 선수는 랜디와 말릭뿐이다.

내가 성질부렸다가는 뒷감당도 힘들고. 자기 기록 때문에 남을 다그친다는 이미지도 떠안게 되겠지.

[저쪽 투수 바꾸려나 본데?]

블루제이스 덕아웃이 4이닝 만에 선발을 내리기로 하며, 그나마 여유가 조금 생겼다.

바꿔야지. 두 타순까지는 어거지로 넘어갔지만, 눈에 익으면 절대 위협적인 투수는 아니니까.

그래도 잠깐 동안이라도 최대한 빨리 호흡을 가다듬으려던 그때.

“Hey, Koo.”

누군가가 갑자기 어깨동무를 하며 체중을 기대왔다.

주전 우익수이자, 항상 파파라치들을 붙이고 다니며 ‘언럭키 데릭 지터’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R.H.

평소 어린 선수들을 휘어잡기보다는 놀려먹기를 좋아하는 R.H.가 웬일로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X 같지?”

“아닙니다.”

“그래? 나는 X 같은데.”

보기 드물게 R.H.의 입에서 비속어가 흘러나오자, 순간 덕아웃에 긴장이 감돈다.

R.H.는 어깨동무를 한 채로 고개만 돌려서 동료들을 향해 일갈했다.

“너네 진짜 심각해. 타구는 쫓아갈 생각도 안 하고. 상대 투수의 X신 같은 볼 배합에 배트나 붕붕 휘두르고 있고. 너네가 생각해도 욕 처먹어도 싸지 않냐?”

그렇게 말하면서 이의 있는 사람을 찾았지만, 제정신이 아닌 이상 여기서 손을 들 리가 없었다.

그러자 R.H.가 내 어깨를 끌어당기며 동료들을 가리켰다.

“Koo. 이놈들한테 욕 한번 시원하게 박아줘.”

“……예?”

“내 권한으로 오늘 하루 너한테 욕설 자유이용권을 발급하겠어. 나보다 아래 연차 선수한테는 부모 욕 제외하고 뭐든지 허락한다.”

그제야 무슨 의도인지 알겠다는 듯 선수들의 표정이 풀린다.

R.H.는 내가 기록을 의식하되, 집착하지는 않는다는 걸 파악한 거다.

정확히 말하자면, 자기가 나서서 덕아웃 분위기를 환기시킨다고 해도, 자기 기록에 신경 안 써준다고 삐질 일은 없단 걸 알아챈 거지.

“나는 전부터 궁금했어. 얘가 각 잡고 욕하면 얼마나 살벌할까?”

“가족 욕하면 안 된다? R.H.가 분명 얘기했다?”

얼어붙었던 분위기에 조금씩 금이 가고, 선수들의 얼굴에 기대감 어린 미소가 떠오른다.

R.H.는 근엄한 척 재촉한다.

“저쪽 투수 몸 다 풀어간다. 빨리 해. 내가 지정해줘? ‘나 혼자 야구하냐, 이 개자식들아!’ 실시!”

“싫어, 개자식아.”

내가 입을 열기만 기다리던 선수들이 동시에 빵 터졌다.

R.H.가 상황을 파악하기 전에 잽싸게 품에 파고들었다.

선 넘는 농담은 이렇게 하는 거다. 빠르고 간결하게 끝내고, 3초 안에 수습하기.

“제가 사랑하는 거 알죠? 이따 안타로 보답할게요.”

다른 선수들과 마찬가지로 배꼽 잡고 웃던 R.H.는 내 몸을 밀어내면서 잡고 속삭였다.

“너, 너는 이따…… 안타 못 치면 두고 보자.”

내 경험상, R.H.는 이런 상황에서 절대 빈말을 하지 않는다.

무조건 안타를 쳐야만 하는 이유가 또 하나 늘었다.

* * *

8회 초 블루제이스의 공격.

마운드를 지키고 있는 투수는, 바로 지난 시즌까지 블루제이스 유니폼을 입었던 앤서니 아우젤로.

1차전에서 유진에게 통한의 솔로포를 얻어맞으며 1이닝 1실점을 기록했던 앤서니는, 이닝의 선두 타자를 향해 힘차게 공을 뿌렸고.

딱!

1―1의 카운트에서 던진 유인구성 슬라이더에 타자의 방망이가 끌려 나왔고.

앤서니는 본인 앞으로 굴러온 공을 침착하게 랜디에게 송구하며, 첫 아웃카운트를 잡아냈다.

“아웃!”

1루심의 콜이 떨어지자마자, 다저스 팬들은 우레와 같은 함성을 쏟아냈다.

지금 이건 단순한 아웃카운트 하나가 아니었으니까.

[유진 리빙스턴, 연타석 안타 기록 13안타로 종료!]

오늘 경기에서 유진 리빙스턴이 기록한 첫 아웃이자, 기나긴 연타석 안타의 행진이 끊어지는 순간이었다.

아웃이 확정됐음에도 최선을 다해 1루까지 달려가던 유진은, 묵묵히 원정 덕아웃으로 돌아가 동료들의 환대를 받았다.

그러나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함성은 잠시 후 멎어버렸다.

“아…….”

담담하게 덕아웃 의자에 돌아가 앉은 유진이, 얼굴을 감싼 채 고개를 숙였던 것.

그리 좋다고만은 할 수 없는 화질의 전광판으로도, 그 어깨가 떨리고 있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그 눈물의 이유가 단순히 기록 중단이 분해서만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드는 건, 여기가 다저 스타디움이기 때문이겠지.

이곳은 유진과 박도현이 함께 뛰었던 구장이니까.

“괜찮아! 잘했다!”

“거기서 몸 잘 만들어라! 그래야 내년에 다시 FA로 데려오지!”

한동안 팬들의 따뜻한 응원이 쏟아지고 나서 다시 시작된 경기.

“아웃!”

“아웃!”

오늘 경기 내내 실책과 범타를 남발하던 블루제이스 타선은, 앤서니의 노련한 피칭을 이겨낼 수 없었고.

다저스의 8회 말 공격.

4대 1로 앞서 있는 스코어로 미루어보아, 정규이닝 마지막 공격이 될 가능성이 높다.

사실 큰 기대는 없었다.

선수들의 체력이 떨어졌을 경기 후반. 거기다 6번 타자부터 시작하는 공격.

7회 말 안타를 때려내며 타이기록까지는 도달했지만, 신기록 달성의 기회는 샌디에이고 원정으로 넘어가는구나 싶었지.

분명 그랬는데.

따아악―!

따아아악―!

연속 안타에 이어, 스트레이트 볼넷까지.

1사 만루라는, 상대 투수가 나를 거를 수 없는 상황이 만들어졌다.

“아까 한 말 기억하지?”

대기 타석으로 나가기 전 R.H.가 속삭였던 게 떠올라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저 양반은 내가 치길 바라는 건지 망하길 바라는 건지 모르겠네.

[할 수 있겠냐?]

대기 타석에서 벗어나 타석으로 향하는 동안, 잠시 입을 다물고 있던 박도현이 불쑥 그렇게 말했다.

자기 기록이 깨질지도 모르는 순간인데, 참 태평한 말투로.

‘해야지.’

팬들이나, 동료들이나. 내가 무조건 해낼 거라는 믿음을 갖고 조용히 숨을 죽이는 지금.

그런 믿음을 배신할 만큼 눈치가 없지는 않다.

만약에, 아주 만약에, 오늘 실패하더라도, 내가 메이저리그에 몇 년이고 붙어만 있으면 기회가 또 오지 않겠어.

쐐애애액!

물론 지금 하면 더 좋겠지만.

“흐읍!!!”

따아아아아아악―!

* * *

[Park의 금자탑에 생겨난 균열! 새로운 기록의 주인공은 14연타석 안타를 쳐낸 ‘Hyun―Ki Koo’]

[경기 직관한 다저스의 한 올드팬, “다저스의 유격수는 영원히 Park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Koo가 그 자리를 대체할 순 없겠지만, 함께 채워줄 순 있지 않을까.”]

[13연타석 안타로 기존 기록 타이기록 달성한 유진 리빙스턴! 인터뷰서 “신기록은 중요치 않다. Park과 같은 자리에 이름을 남길 수 있어 영광이다.”]

[Koo, “다저스의 모든 구성원을 향해 진심 어린 사랑과 감사를 보낸다. 특히 항상 날 아껴주는 R.H.에게.”]

[R.H. 데이, “Koo의 말은 틀렸다. 나는 그저 미천한 개자식일 뿐이다. 그의 기록 달성을 축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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