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달려라 구현기 (1)
LA 다저스와 토론토 블루제이스의 3차전이 끝나고, 양 팀 선수단이 대기록의 열기만을 남긴 채 다저 스타디움을 떠난 늦은 오후.
MLB를 다루는 모든 스포츠 채널에서는 앞다투어 이날 경기의 영상을 틀어놓고 이러쿵저러쿵 떠들어댔다.
“굿데이 베이스볼 시간이 돌아왔습니다. 지금 제 옆에 있는 분들이 얼굴에 뭘 붙이고 있는데요, 신경 쓰지 마세요. 이분들도 남들 앞에 얼굴을 드러내고 다니는 것보다는 이게 더 마음이 편할 겁니다. 그렇죠, ‘자칭’ 전문가 여러분?”
‘Phony(가짜의, 허위의)’라고 적힌 큼지막한 가면을 쓰고 있는 남자들이 대답했다.
“네, 뭐. 나쁘지 않습니다.”
“여름이 되면 좀 습기가 찰 것 같긴 한데, 지금은 딱 좋네요.”
이 프로그램에서 구현기를 다룰 때마다 항상 벌어지는 촌극.
구현기가 메이저리그의 주전 내야수가 되려면 마이너에서의 담금질이 필요하다던 수비 전문 패널은 아예 부르지도 않았다.
물론 오늘 수비 이야기는 별로 나올 일이 없어서 안 부른 것일지도 모른다.
“왜 우리가 ‘데이’도 아닌 이 시간에 긴급 편성으로 이 자리에 모였는지 모르는 사람은 없을 거라 믿습니다. 더 말해 봐야 입만 아프니, 영상으로 만나 보시죠.”
콜로라도 로키스와의 더블헤더 2차전부터, 토론토 블루제이스와의 3차전까지.
4경기 동안 구현기가 들어선 14개의 타석에서의 모습이 연달아 재생됐다.
“이 어마어마한 영상을 우스꽝스러운 가면을 쓰고 봐야 하는 건 너무 불쌍하니까, 본격적인 분석에 앞서 특별히 벗는 걸 허락해드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갑작스러운 추가 근무에다 가면까지 쓰고 있자니 서러웠는데 그나마 위안이 되는군요.”
“맞아요. 오늘 아침에 긴급 편성 연락을 받고 자료를 정리하느라 이 경기를 직관하지도 못했는데 말이죠.”
비록 최근엔 사짜라고 놀림받고 있지만, 이들은 엄연히 메이저리그 선수 혹은 코칭스태프 출신의 전문가들.
몸쪽 공에 대한 대응력, 게스 히팅의 적중률, 타석에서의 집중력 등등, 기록의 원동력이 되어준 구현기의 다양한 능력에 대한 상세한 분석이 이어졌고.
얼마 후, 프로그램의 마지막 챕터가 찾아왔다.
“Koo는 지금껏 기적 같은 일들을 우리에게 수도 없이 보여줬죠. 그러나 아마 메이저리그 팬들에게 가장 큰 충격은 이게 아닐까 싶습니다.”
진행자의 말을 이어 화면에 자막이 떠올랐다.
[Park의 기록이 깨졌다!]
“2030년부터 2035년까지의 짧은 시간 동안, Park은 메이저리그를 지배했던 선수입니다. 그의 불꽃은 짧게 타올랐지만, 아주 강렬한 자국을 남겼죠. 그리고 오늘 그 자국 하나가 새로 덧씌워졌습니다.”
연속 경기 안타, 연타석 홈런, 단일시즌 안타 및 볼넷 등등.
박도현이 남기고 간 기록들이 주르륵 떠오르는 가운데.
그중 맨 아래의 연속 타석 안타 기록이 구현기의 것으로 바뀌었다.
“이 기록들은 그를 메이저리그의 상징으로 만들어줬지만, 항상 즐거운 일만 있었던 건 아니죠. Park은 데뷔 후 세상을 떠나던 그 날까지 수많은 의혹에 시달렸습니다. 수없이 도핑 테스트를 받았고, 사생활을 침해당했으며, 그로 인해 연인과의 불화를 겪기도 했죠.”
기록들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박도현과 구현기의 사진이 나란히 떠올랐다.
“Park의 기록을 뛰어넘으면서 슈퍼스타로서의 본격적인 검증을 받게 될 Koo 역시 그런 일을 겪게 될지도 모릅니다. 야구 외적인 일에서 오는 스트레스로 성적이 떨어질 수도 있죠.”
그러자 가면을 손에 든 타격 전문가가 고개를 저었다.
“Koo는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겁니다.”
“왜죠?”
그는 이미 구현기에 대한 예측에 한 번 실패한 바 있지만, 같은 실패를 반복할 멍청이는 아니었다.
“스트라이크를 던지지 못하게 됐는데도 메이저리그에 돌아온 선수는 무엇이든 할 수 있으니까요.”
* * *
경기 종료 후, 모든 인터뷰를 마치고 라커룸으로 돌아온 나를 반긴 것은 반도핑 기구에서 긴급 파견된 검사원들이었다.
[이분 아직도 퇴사 안 했네. 팀장 X 같다면서 하소연하더니.]
오늘처럼만 꾸준히 활약한다면, 박도현처럼 이 사람들과 사적인 얘기도 나눌 만큼 자주 보게 되겠지.
채취용 용기를 받아들고 간이 가림막 안에서 바지를 벗었더니.
쫑알쫑알 떠들어대던 박도현이 입을 다문다.
‘왜 그렇게 자신감이 쪼그라들었냐. 여기가 샤워실도 아닌데.’
[응, 안 부러움. 너 그거 몇 번이나 써먹었냐? 곰팡이 슬었겠다.]
‘폼은 일시적이라도 클라스는 영원하다는 거 몰라?’
[…….]
프로필상 180cm인 박도현이 생전 메이저리그를 씹어먹었던 걸 보면, 야구는 피지컬이라는 게 헛소리 같기는 한데.
일단 피지컬이 좋으면 살면서 써먹을 데가 많지. 딸리는 친구를 놀려먹기에는 더할 나위 없고.
그렇게 자괴감에 빠진 박도현을 슬슬 긁으면서 다시 라커룸으로 돌아가자마자 눈에 들어온 것은.
“너네 오늘 초반에 X나 심각했던 거 니들도 알지?”
오랜만에 선수단 전체 집합을 건 로버트였다.
야수조 선수들 뒤쪽으로 잽싸게 끼어들었다.
“5회 넘어서는 그래도 집중 좀 하던데, 블루제이스 놈들이 똑같이 삽질 안 했으면 너네가 정신 차렸을 것 같아?”
“아닙니다!!!”
그나마 경기 끝까지 얼빠진 플레이가 계속 나왔던 건 아니어서인지, 전성기 때처럼 라커룸을 다 까 뒤집고 그러진 않았다.
목소리가 쩌렁쩌렁한 걸 보면 경고의 의미가 더 크겠지. 분노의 5단계로 따지면 ‘소노’ 정도라고 해야 하나.
“경기 중에는 경기만 생각해. 팬들도 눈이 달려 있으니까 어떤 새끼가 설렁설렁 하는지 다 보인다. 알겠어?”
“알겠습니다!!!”
“그래. 그리고 Koo. 나와 봐.”
최대한 구석 자리에 있었지만, 선수단 전체를 흝어보던 로버트의 레이더망을 피할 순 없었다.
아무리 대기록을 세웠다지만, 저지른 짓이 있는데. 이런 자리에서 그냥 넘어가긴 어렵겠지.
얼른 달려가서 앞에 서자, 로버트가 R.H.를 가리킨다.
“너는 쟤가 개자식으로 보이냐?”
“아닙니다!”
“왜, 가서 놀아주고 개껌도 갖다주고 그러지.”
“죄송합니다!”
짓궂은 농담을 받아치면서 경직된 분위기가 풀리긴 했지만, 이런 일이 반복되면 기강이 풀어지는 건 시간문제다.
지목받은 R.H.도 근엄한 척 팔짱을 끼며 나를 쏘아본다.
“베테랑들이랑 격의 없이 지내는 거 좋지. 그래도 지켜야 하는 선이 있는 거야. 안 그래?”
“맞습니다!”
“넌 내가 지켜본다. 행동 똑바로 해. 들어가.”
“예!”
자리로 돌아가기 전, R.H. 앞에 서서 정중하게 사과를 건넸고.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고서야 들어갔다.
이렇게 남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훈계하고 나면, 로버트는 그 일을 다시 꺼내지 않는다.
내가 R.H.를 진짜로 만만하게 보고 그런 게 아니라는 걸 알아서겠지.
[오랜만에 정신교육 들어가는 줄.]
‘끔찍한 소리 하지 마.’
‘정신교육’, 이름은 살벌해도 사실 별거 없다.
그냥 경기가 끝날 때까지 덕아웃에도 못 들어가고 부동자세로 탈탈 털리는 거지.
나도 풀타임 첫 시즌이었나, 3회에만 실책이 두 개 나오면서 비자책 4실점으로 강판당했던 날 성질 못 이겨서 글러브 패대기쳤다가 한 번 당했다.
‘내가 그날 이후로 좀 겸손해졌지.’
[지금도 대놓고 안 그럴 뿐이지 싸가지는 충분히 모자란 것 같은데…….]
로버트의 훈계가 끝나고.
다저스 선수단은 조금은 굳어진 분위기 속에서 샌디에이고행 원정길에 올랐다.
물론 혼나서 그런 건만은 아니고. 정확히 말하자면 다들 은근히 긴장될 만한 이유가 있었다.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1889년 루이빌 커널스의 26연패 타이기록 달성! 신기록 여부는 다저스전에 달려 있다!]
다저스와의 초대형 벤치 클리어링 이후, 주전 선수들이 이탈하며 파드리스는 그야말로 폭삭 주저앉았고.
리빌딩 중인 로키스한테도 서열정리를 당하며, 데드볼 시대의 연패기록과 끝내 타이를 이루고 말았다.
“이번 시리즈 내내 숙소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갈 생각하지 마라.”
감독님의 그 말은 과언이 아니었다.
[FXXK YOU, Dodgers!]
[펫코 파크가 파란 피로 물들 것이다!]
[그라운드에서 갱스터 행세하던데, 진짜 갱스터의 방식을 알려줄까?]
원정 숙소 근처에서 반쯤 정신이 나간 파드리스 팬들이 온갖 육두문자가 적힌 피켓을 들고 어슬렁거리고 있었으니까.
얌전히 방 안에 틀어박힌 다저스 선수단 덕분에 원정 숙소만 때아닌 룸서비스 호황을 맞았지.
동년배 야수들끼리도 오늘은 자중하자고 합의를 했으니, 혼자 룸서비스로 저녁을 해결하고 나서 오늘 경기의 보상을 확인했다.
[히든 업적 달성!]
[하나의 안타를 때려내기 위해 타자가 소모하는 정신력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그 고통은 여러 번 반복된다고 해서 익숙해지지 않죠. 다만 당신보다 투수가 훨씬 고통스러워질 뿐입니다. 이제 투수들은 타석에 선 당신만 보면 스트레스를 받을지도 모르겠네요!]
[재능 뽑기권이 지급됩니다.]
[3,000포인트가 지급됩니다.]
[현재 포인트: 12,110]
지금까지는 히든 업적을 달성했을 때 뽑기권만 주어졌던 것과는 달리, 포인트가 추가로 지급됐다.
‘왜 평소보다 보상이 후한 거지? 니 기록을 깨서 그런가?’
[글…… 쎄?]
박도현도 고개를 갸웃했다.
반응으로 미루어보아, 여태껏 얘가 키워온 유망주들 중 박도현의 기록을 넘봤던 타자는 없는 모양이다.
뭘 퍼주면 왜 주냐고 따지기보다는 잘 써먹는 게 인지상정.
깨끗이 목욕재계도 마쳤고. 무슨 맨날 피자만 먹느냐고 징징대는 박도현을 위해 코리안 바비큐도 시켜줬고.
모든 준비를 마친 뒤, 두 개의 재능을 연달아 뽑았고.
“음…….”
[오우…….]
박도현과 내 입에서 동시에 애매한 리액션이 흘러나왔다.
첫 뽑기에서 D급 재능을 뽑았을 때도 이런 분위기였던 것 같은데, 그런 상황은 아니다.
[아니, 잘 뽑았거든? 이거 꽤 괜찮아.]
“그치. 당장 써먹기가 힘들 뿐이지.”
기껏 뽑은 재능을 한동안 봉인해두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인생사 새옹지마라 했던가.
바로 다음날 경기에서 써먹을 기회가 찾아왔다.
* * *
파드리스와의 1차전에서 나는 5번 3루수로 출전했다.
사실은 전날 경기에서도 3루수로 나가는 게 좋지 않겠냐고 권유를 받긴 했는데. 그건 내가 거절했다.
다른 투수들에 비하면 영향을 덜 받는 편이긴 했는데, 어쨌든 나도 투수 출신이라 루틴에 좀 구애받는 게 없지 않아 있어서.
타선이랑 포지션이 동시에 바뀌면 오히려 안정감이 없을 것 같았으니까.
‘이제부터는 보너스 스테이지지.’
14연타석 안타를 때려내며 이미 기록은 달성했지만, 더 이어갈 기회는 남아 있으니까.
오늘 파드리스의 선발이 2선발이긴 하지만, 최근 3경기 연속 5회까지 버티지 못하고 일찍 내려왔다는 걸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고.
그렇게 마음을 편하게 먹으며 2회 초 선두 타자로 타석에 들어섰지만.
“베이스 온 볼스!”
헛웃음을 지으며 투수를 쳐다보니, 얼른 1루로 꺼지라는 듯 턱을 까닥인다.
평소라면 가까운 원정길이니만큼 다저스 팬들의 야유가 쏟아졌겠지만, 오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을 거라 예측했는지.
펫코 파크를 메우는 건 홈팬들의 박수와 조롱뿐이었다.
‘이렇게 끊기네.’
투수가 일어서지만 않았을 뿐이지, 아예 방망이를 낼 수가 없는 스트레이트 볼넷.
기록을 대놓고 끊어버리는 건 부담스러워도, 이미 세운 기록을 중단하는 건 부담이 덜하다 이거지.
강력한 타자와는 어렵게 승부해야 한다는 명분도 있고.
“저 XX놈들이 쫄아서 튀네?!”
“고맙다! 샌디에이고 치킨스! 가슴살은 내가 먹을게!”
분노하는 동료들을 향해 진정하라는 제스처를 보낸 뒤.
1루 코치에게 간결한 사인 하나를 전달했다.
‘뛰어도 돼요?’
작전이 아닌 상황에서의 단독 도루를 딱히 선호하지 않는 오브라이언 감독님이지만, 이번만큼은 곧바로 OK 사인이 나왔다.
내 도루 성공률이 높기도 하고. 지금 파드리스의 포수는 노쇠화로 어깨가 많이 약해지기도 했으니까.
딱 그 정도 기대하에 내려진 판단이겠지만.
‘써먹을 때가 왔네. 새 재능.’
기대를 웃도는 결과를 내놓을 자신이, 나한테는 충분히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