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신 들린 천재 타자-67화 (67/200)

67. 달려라 구현기 (2)

야구에서 도루는 홈런과 엮일 만큼 인지도와 중요도가 높은 플레이고, 그래서 수많은 야수 유망주들이 주루 훈련에 공을 들이지만.

막상 메이저리그에서 적극적으로 도루에 나서는 선수의 비율은 그리 높지 않다.

성공한다면 득점권에 주자가 나가지만, 실패했을 때는 기회가 날아가는 것이니만큼 팀에 단순한 아웃카운트 이상의 타격을 입히기도 하고.

무엇보다 특수한 상황이 아니고서야 슬라이딩이 전제된 플레이다 보니, 부상의 위험에서 안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부 지도자들은 몸값이 높은 선수들에겐 아예 주루 플레이를 지시조차 하지 않기도 하지.

시범경기 때의 나는 타자 유망주로서 평가받는 입장이었기에, 그린라이트까지 받아 가며 적극적으로 도루를 시도했지만.

막상 메이저리그 주전으로 격상하고 나서부터는 사인 없이 도루를 감행할 수 없게 된 것도 그래서다.

[Run Devil Run(B등급)―상시형]

○ 도루 타이밍을 읽어내는 능력이 보정됩니다.

○ 도루 시도 시 부상 확률이 대폭 감소합니다.

○ 도루 시도 시 상대 팀 선수들의 스트레스가 증가합니다.

당장 그린라이트를 얻어내기는 힘들겠지만.

이 재능을 활용해 성과를 낸다면, 좀 더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까.

그런 기대를 품으며 슬금슬금 거리를 벌렸다.

찌릿!

머릿속을 찌르는 듯한 강렬한 직감이 느껴지자마자 1루를 향해 몸을 던졌고.

“세이프!”

유니폼의 흙을 털어내며 새로운 재능의 효과에 감탄했다.

‘이런 식이구만?’

원래부터 나름의 근거를 갖고 견제구와 투구 타이밍을 구분하곤 했지만.

몸쪽 공에 대한 선구안을 보정해 주는 ‘몸으로 말해요’와 마찬가지로, 어떤 플레이가 나올지 직감적으로 머리에 때려 박히는 느낌.

시험 삼아 리드를 아주 살짝 더 벌리기로 했다.

“세이프!”

연달아 세 번 더 견제구가 날아왔고, 전부 세이프 판정을 받아내면서. 이 재능의 사용법에 대해 감을 잡았다.

핵심은 내 리드가 넓고, 투수의 견제구가 빠를수록 더욱 강렬한 직감이 찾아온다는 것.

굳이 뛸 생각이 없더라도, 극한의 타이밍까지 거리를 벌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투수를 흔들 수 있겠지만.

‘응, 오늘은 뛸 거야.’

투구판에서 발이 떨어졌는데도 견제의 예감이 찾아오지 않는, 바로 지금이 도루 타이밍.

촤아악!

“세이프!”

내야진이 허둥대는 것만 봐도 얼마나 대비를 안 했는지 알겠다.

애초에 타이밍도 빨랐고. 포수 송구도 터무니없이 들어왔으니, 루카스가 스윙 안 했어도 넉넉히 살았겠네.

타임을 요청하고, 그것도 못 막느냐는 홈팬들의 살벌한 야유를 만끽하면서 박도현에게 말을 걸었다.

‘이래서 니가 도루를 그렇게 자주 했구만?’

‘Run Devil Run’이 없었을 때도 도루를 안 했던 건 아니지만, 딱히 적극적이진 않았지. 실패의 페널티가 너무 크니까.

그런데 타이밍이 훤히 읽히는 이런 재능이 있다? 그럼 일단 뛰고 봐야지.

박도현의 통산 도루 성공률이 90%가 넘는 게 이해가 간다.

그리고 어쩌면, 이 재능은 내가 더 잘 써먹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박도현이 도루자를 기록한 상황은 거의 전부가 비디오 판독까지 갔을 만큼 아슬아슬한 차이였다.

주력에 큰 차이가 없으면서도 팔다리가 더 긴 나라면, 그 한끗 차이를 메울 수 있을 거다.

‘벌써 올라오면 어떡하냐. 오늘 힘들 텐데.’

1회는 안타 하나 빼고는 잘 막아내더니, 나한테 도루 하나 허용했다고 포수가 마운드를 방문했다.

베이스 근처를 어슬렁거리다가 옆에 있는 유격수한테 말을 걸어봤다.

“오랜만이다?”

못 볼 거라도 본 사람마냥 눈을 질끈 감고는 대답도 없이 떠나버린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어떻게 니가 나한테 이럴 수 있어.

한동안 마이너에 처박혀 있다가 카일이 시즌아웃된 덕분에 올라왔으면서.

[얘네 진짜 큰일이다. 독기가 하나도 없어.]

전에 벤과 함께 병문안에 갔을 때 듣기로는, 난투극으로 이탈한 선수들이 베테랑들의 공백을 틈타 선수단을 휘어잡으려던 놈들이라던데.

그놈들마저 없어지니까 팀이 아주 무주공산이 돼버린 모양이다.

대놓고 자극하는데도 먼저 꼬리 마는 걸 보니.

‘혹시나 했는데, 벤클 2차전은 안 열리겠다.’

[아쉬워하는 거 아니지……?]

아니, 뭐.

재능으로 부상 면역도 있겠다, 아예 너 죽고 나 죽자 식으로 나오면 굳이 피할 필요는 없지.

지금 이놈들보다는 오늘따라 살벌한 펫코 파크의 홈팬들이 훨씬 무섭다. 뭔 짓을 할지 모르겠어서.

“어. 네. 알았어요.”

“……그래.”

독기가 부족해 보이는 건 유격수뿐만이 아니었다.

마운드를 방문한 베테랑 포수가 어떻게든 투수의 기를 살리려고 최선을 다했지만, 이미 투수는 반쯤 넋이 나가 있었다.

결국 제한 시간을 꽉꽉 채운 끝에 포수가 내려갔고.

따아아악―!

팀은 연패 중에, 선수단 분위기도 개판인데, 야수들도 투수한테 신뢰를 못 준다?

투수더러 제발 실투 좀 던져 달라고 애원하는 수준이다.

“야!!! 이 개자식들아!!!”

“X발 유망주는 죄다 팔아먹고 왜 이제 와서 탱킹을 하는데!!!”

메이저리그의 새로운 역사, 27연패에 한 걸음 더 다가가는 선취점.

루카스가 2루에 안착하는 동안 여유롭게 홈을 밟은 나는, 동료들에게 머리와 엉덩이를 흠씬 두들겨 맞고 나서 가장 먼저 감독님을 찾았다.

“혹시 적절한 상황이 온다면, 한 번 더 뛰어봐도 괜찮을까요?”

평소 도루 욕심을 안 부리던 내가 이러는 게 의외였는지, 감독님은 조금 놀란 것 같았지만.

“그래. 대신 사인은 주고. 웬만해서는 수용하는 방향으로 할 테니까.”

“감사합니다.”

그린라이트는 아니어도 조건부 허가는 나왔다.

이게 언제까지 유효할지는 모르겠지만, 뛸 수 있을 때 최대한 뛰어둬야지.

‘감히 볼넷을 줘?’

남의 기록에 고춧가루를, 그것도 최선을 다하지도 않는 성의 없는 볼넷으로 뿌린 죄는 무겁지만. 그래도 나는 자비로우니까.

파드리스의 신기록 수립을 위해 기꺼이 한 몸 바칠 준비가 되어 있다.

* * *

루카스가 땅볼과 희생플라이로 홈에 들어오면서 2대 0으로 마무리된 2회 초.

잘 풀리는 날과 안 풀리는 날의 편차가 제법 큰 다저스 5선발 아드리안 빌라는 1회에 이어 삼자범퇴로 2회 말을 삭제해버렸다.

“Hey, Koo! 오늘 수비도 미쳤던데? 역시 난 네가 있어야 공이 제대로 긁히는 것 같아!”

컨디션이 좋은 날에는 쉴 생각도 안 하고 남을 붙잡고 떠들어대기도 한다.

중계 카메라에 이 모습만 잡히면 누가 얘를 선발 투수라고 생각할까.

그리고 미치긴 뭐가 미쳐. 오늘 2회까지 땅볼 딱 하나 처리했구만.

유격수로 나와서 1회부터 죽어라 굴러다닌 채드윅이 들으면 울겠네.

“저번엔 내가 유격수가 아니면 안 될 것 같다더니? 이제 난 네 수호천사가 아닌 거야?”

내가 안타성 타구를 몇 번이나 잡아내 주면서 커리어 첫 노히트노런을 달성한 뒤로, 아드리안은 한동안 껌딱지처럼 달라붙어 귀찮게 굴었다.

솔직히 그건 상관없는데, 과몰입하긴 했지. 내가 지 경기에 3루수로 나가니까 뭔가 좀 불안하다면서 와르르 무너졌으니까.

로버트한테 정신교육 받고 나서는 그런 소리 안 하던데, 뭐라 그랬길래 고쳤는지 솔직히 좀 궁금하다.

“그럴 리가! Koo, 네가 유격수 자리에 없어도, 경기에 안 나와도 나는 너와 늘 함께한다고!”

그러더니 뒷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들이민다.

순간 내 눈이 잘못된 줄 알았다.

내가 수비하는 모습이 찍힌 사진을 코팅해서 모양대로 따라 오려둔 거였으니까.

“이게 있으면 네가 내 등 뒤를 항상 지켜주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마치 노히터를 했던 그 날처럼 말이야!”

아니야.

우린 그걸 엉덩이로 깔아뭉갠다고 부르기로 했어. 그건 사회적 약속이야. 등 뒤를 지켜주고 있다고 받아들이면 곤란해.

저 흉물에 손이라도 닿았다간 오늘 경기를 망칠 것 같아 목이 마른다면서 재빨리 자리를 떴다.

‘이 세상엔 모르는 게 나은 사실이 있다는 걸 깜빡했다.’

[왜, 보기 좋은데.]

‘닥쳐.’

[주머니에 사진 넣고 던지는 투수들 많지 않나? 가족이나 애인 사진 같은 거.]

‘한마디만 더 해봐. 앞으로 우리 집에 배달 오는 피자는 평생 민트초코 피자가 될 테니까.’

[…….]

그제야 마음의 평화가 찾아왔다.

꼭 이렇게 기강을 잡아야 말을 들어요.

* * *

2회부터 2실점을 했는데도 의외로 상대 선발은 다시 일어섰다.

1번 타자부터 시작되는 3회를 삼자범퇴로 막아냈으니까.

“베이스 온 볼스!”

다만 4회 초, 선두타자 R.H.를 상대로는 볼넷을 내주면서 시작했고. 무사 1루의 상황에서 타석에 들어섰다.

이미 한 번 거른 판에, 아예 자동 고의사구가 나올지도 모른다고 판단했지만. 의외로 배터리는 승부를 택했다.

기껏 3회를 잘 막아놓고, 다시 득점권에 주자를 내보내면 기세가 끊길 거라고 판단했나 보다.

따아악!

그렇다고 해서 딱히 만만하던 투수가 다시 무서워지지는 않는 법이다.

무사 1, 3루가 되며 거르느니만 못한 결과가 나왔고.

연속 타석 안타 기록은 끊겼지만, 연속 타수 안타 기록은 15타수로 이어가게 됐다.

‘타석 기록과 타수 기록이 엄연히 다른데, 이건 따로 보상은 없는지……?’

[양심 있냐?]

야구의 신도 어처구니가 없었던 걸까.

파드리스는 6번 타자 루카스를 자동 고의사구로 내보내며 만루 작전을 감행했고.

7번 타자 랜디가 투수 앞 땅볼을 치며 홈 병살을 만들었고, 뒤이어 헨리의 뜬공으로 무사 만루 찬스가 날아갔다.

“Yeahhhh!!! 이게 야구지!!!”

“퍼랭이 놈들아!! 니들이 야구 선수냐? 트리플 A에서 갓 올라온 놈들한테서 무사 만루 무득점이라니!!”

신나서 날뛰는 홈팬들의 소음 공해는 덤이었다.

26경기 연속으로 지고 있는 지들은 야구 선수인가.

그리고 갓 올라왔다고 하기엔 너무 양심 없지 않나. 10경기 넘게 주전으로 나섰으면 뭘 보여줬어도 한참 전에 보여줬어야지.

“저딴 소리 신경 쓰지 마, 아드리안.”

“맞아. 우리가 미안하다. 점수 더 냈어야 하는데.”

타자들은 아드리안을 격려했지만, 아무리 이기고 있다고 해도 무사 만루에서 추가점이 안 나왔는데 감정의 동요가 안 일어날 투수는 없을 거다.

따아아악―!

4회 말, 승부를 원점으로 돌리는 투런포가 터지고 말았다.

“후우……!”

마운드에서 숨을 몰아쉬면서 감정을 다스리려고 노력하던 아드리안은, 갑자기 뒷주머니에 손을 넣고 꼼지락거렸다.

설마. 아닐 거다. 내가 생각하는 그건 아니어야 한다.

저놈의 손과 엉덩이 사이에 끼어 있는 게 뭔지 몰랐다면 차라리 나았을 텐데.

“잠깐!”

아드리안이 주머니에서 뺀 손을 글러브에 집어넣자마자, 상대 덕아웃에서 감독이 달려 나오더니 주심에게 뭔가 어필했다.

고개를 끄덕이던 주심은 심판진에게 손짓하면서 마운드를 방문했다.

“주머니 좀 확인해봐도 되겠나?”

“예?”

“상대 팀에서 어필이 들어와서 말이야. 혹시 이물질이 아니냐면서.”

뒷주머니에 들어간 주심의 손에 딸려 나온 것은, 당연하게도 코팅된 내 사진이었다.

동료의 뒷주머니에서 나온 내 사진을 중계 카메라가 비추고 있는 이 시간을, 지옥이라는 단어 외에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심지어 부정의 여지가 없는지 확인하는 바람에 곧바로 집어넣지도 못했다.

“이게 그…… 규정 위반은 아니지?”

“제가 알기론 아닐 겁니다.”

잠깐의 논의 후 내 사진은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갔고. 경기도 다시 시작됐다.

등 뒤를 지켜준다던 수호천사의 존재를 다시금 느꼈는지, 동점을 허용했는데도 아드리안은 씩씩하게 투구에 나섰고.

“스트라이크 아웃!”

“아웃!”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삼진 두 개를 곁들여 깔끔하게 이닝을 마쳤지만.

아드리안과 강제 어깨동무를 하며 덕아웃으로 돌아가면서 내가 느낀 건, 뭔가 소중한 것을 영영 잃어버린 듯한 공허함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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