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신 들린 천재 타자-69화 (69/200)

69. 달려라 구현기 (4)

보통 원정 시리즈에서 저녁 경기가 끝나고 나면 클럽하우스에 마련된 음식들로 늦은 식사를 하는 경우가 많다.

시간이 시간이니만큼 따로 갈 만한 데도 없고. 돈도 다 지불한 거니까. 그냥 거리낌 없이 먹고 가면 되는 건데.

아무리 그래도 상대를 27연패의 수렁에 몰아넣은 날 굳이 남아서 눈칫밥을 먹고 싶어 하는 선수는 없다.

“먹다 부족할 것 같으면 빨리 말해라. 일찍 시켜야 리듬이 안 끊기니까.”

“잘 먹을게요, 로버트.”

“감사히 먹겠습니다!”

로버트에게서 저녁 먹지 말고 자기 방으로 오라는 말을 들었고, 도착해보니 룸서비스로 시킨 음식이 한 상 가득했다.

한 대여섯 명 오는 줄 알았는데. 내 뒤를 이어 제리가 도착하자마자 다 왔으니 먹자고 그러더라.

나름 또 마음을 써준 건지, 로버트가 내 앞으로 끌어다 준 접시는 코리안 바비큐였다.

[아오, 이거 어제 먹었는데. 딴 거 먹어야지.]

‘제사상 앞에서도 반찬 투정할 새끼네 이거.’

[그놈의 제사상, 나는 맛도 못 봤어. 죽자마자 다저 스타디움에 처박혀 있었는데.]

머릿속으로는 박도현이랑 투닥거리면서 접시를 빠르게 비워가던 도중.

일찌감치 포크를 내려놓은 로버트가 제리에게 물었다.

“야, 제리. 너는 어떻게 해야 에이스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냐?”

뜬구름 잡는 질문에 제리의 눈동자가 빠르게 흔들렸다.

“음. 꾸준한 활약을 보여주면서 동료들과 팬들에게 믿음을 주고. 등판하는 경기마다 지켜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그런…….”

“알았다. 그럼 Koo, 너는?”

당황하면 떠벌이가 되는 제리의 말을 끊더니, 로버트의 시선이 내 쪽으로 향했다.

저런 개똥철학이나 듣고 싶어서 하는 질문이 아닐 테지.

대답은 한마디면 충분하다.

“팬들이 에이스라고 불러주면 에이스가 되는 거죠.”

에이스의 절대적인 조건은, 팬들을 야구장에 불러들이는 강력한 티켓 파워를 가진 선발 투수여야 한다는 것.

선수들이 에이스처럼 따르는 선수가 따로 있다고 해서, 팬들한테 ‘저희는 얘가 에이스라고 생각하는데요’라고 따질 수도 없지 않나.

내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로버트의 입이 열렸다.

“3차전에 내가 나가고 나면 로테이션이 고정될 거다.”

제리의 표정이 굳었다.

시즌 도중 이런저런 사정으로 로테이션이 바뀌는 거야 흔한 일이지만, 보통은 올스타 브레이크 전후로 제자리를 찾는 경우가 많다.

즉, 구단에서는 실질적 에이스로 활약해온 제리에게 1선발의 자리를 주는 게 맞다고 판단했다는 뜻.

[아니, 솔직히 지금 로버트 성적이 에이스급이 아니긴 한데…… 이래도 되나?]

자존심이 강한, 거기다 장기계약을 맺고 오랫동안 활약해온 투수라면.

불만을 가지는 데서 끝나지 않고 성적에도 영향이 갈 수도 있는 상황이지만.

“야, 제리.”

“네!”

“너는 어떤 에이스가 되고 싶냐?”

이건 아마도 로버트가 고민해서 내놓은 결론이겠지.

자신의 시대가 슬슬 끝나간다는 걸 받아들이는 투수라면, 오히려 새로운 에이스의 탄생을 응원해줄 수 있을 거다.

“저는…… 로버트 같은 에이스가 되고 싶습니다. 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요.”

제리가 이러는 것도 이해는 간다.

요즘 시대에 보기 드문 올드스쿨식 원칙으로 투수조를 이끄는데도, 로버트를 진심으로 따르는 투수들이 많지.

같은 편일 땐 한없이 든든해도 상대 팀일 땐 엄청나게 껄끄러운 사람이니까.

“너, 그럼 어제 내가 그랬던 것처럼 선수들 싹 다 모아놓고 X랄할 수 있냐?”

“어, 그건…….”

할 수 있을 리가 없지.

평소 여유로운 척은 오지게 하면서, 막상 정색해야 할 타이밍에는 마이너 애들한테도 큰소리 못 내는 놈인데.

“그럼 Koo. 너는?”

“기회만 주신다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내가 경력이 없는 거지 성질이 없는 건 아니니까.

“봤냐, 제리? 애들 잡는 건 이 싸가지 없는 놈한테 맡기고 너는 고고한 에이스 컨셉으로 가는 게 맞는 것 같다.”

“오…….”

팀의 정식 캡틴인 클레망도, 실질적 캡틴인 로버트도 이번 시즌을 마지막으로 장기계약이 끝나는 선수들.

오랫동안 몸담은 팀의 다음 세대를 나름대로 그려보고 싶은 걸지도 모른다.

그건 본인의 자유고, 나한테도 나쁜 얘기는 아니지만.

“다저스가 저희한테 성의를 보여준다면야, 얼마든지요.”

팀에 대한 충성심 때문에 클레망처럼 호구 수준의 장기계약을 맺을 생각은 없다.

내 성격을 잘 아는 로버트는 굳이 한 번 더 찔러보는 대신 제리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야. 너희 둘 다 다저스에 남을 방법을 알려줄까?”

“예? 그게 뭡니까?”

“올해 사이 영 상을 타고, 이 새끼랑 연장계약 안 하면 FA 때 무조건 이적할 거라고 드러누워 버려.”

“오……!”

와우.

솔직히 구단 쪽에서 프런트 자리를 빌미로 뭔가 입질을 던져보라고 꼬신 건 아닌지 아주 살짝 의심했는데, 너무 미안해진다.

만약 우리가 FA가 되는 내년 시즌까지 지금처럼 활약한 다음, 이 폭탄을 터뜨리면 단장님 머리털 다 빠지겠네.

‘샌디에이고의 폭동이 오늘 하루로 안 끝나겠는데?’

[내일 저녁도 룸서비스로 먹어야겠네.]

로버트의 제안을 듣고 눈빛이 초롱초롱해진 제리.

소개팅이 잘 풀릴 때나 가끔 나오는 저런 눈빛으로 경기에 나설 때마다, 제리는 상대 타자들을 죽도록 괴롭히곤 한다.

* * *

다음날 경기에서 제리는 예상대로 무시무시한 집중력을 발휘했다.

[배트 돌아갑니다! 스트라이크 아웃! 제리 헤이즈택의 커터가 오늘도 제대로 긁히고 있습니다!]

[5회 말을 마친 지금, 벌써 두 자릿수 탈삼진을 기록했습니다. 본인의 최다 탈삼진 기록까지는 앞으로 세 개!]

단장과 감독이 동시에 날아간 지난밤의 참극이 나름 각성제가 되었는지 파드리스 타자들도 죽을힘을 다해 달려들었지만.

캘리포니아 로컬보이로서 늘 동경해오던 다저스의 원클럽맨이 되어, 고고한 에이스로서 마운드를 책임지는 상상에 도취된 제리를 공략하기엔 역부족이었다.

7이닝 2피안타 무사사구 13K 무실점. 연속 경기 퀄리티스타트 기록도 이어졌다.

[아…… 크게 빠지면서 오늘 경기 두 번째 볼넷입니다. 굉장히 오랜만에 Koo의 무안타 경기가 나올지도 모르겠군요.]

[첫 타석에선 큼직한 희생플라이를 날렸고, 세 번째 타석에선 유격수의 호수비가 있었죠. 연속 타수 안타 기록은 끝났지만, 여전히 집중력은 살아 있습니다.]

반대로 나는 2타수 무안타 2볼넷으로 어제보다는 조금 주춤했다.

15타수까지 이어졌던 기록이 끊기자마자 혹시라도 내가 흔들릴까 봐 감독님을 비롯한 코칭스태프들이 안절부절못하던데. 그냥 이렇게 막히는 날도 있는 거지 뭐.

그래도 희생플라이로 타점을, 도루로 2루까지 나가며 득점도 기록했으니.

[LA Dodgers 6 : 1 San Diego Padres]

2037년의 샌디에이고 파드리스가 적어나간 연패기록을 28연패로 늘리기에는 충분했다.

“우리에게 더는 후퇴란 없다. 포스트시즌에 나가는 심정으로, 모든 투수가 불펜에서 대기하며 총력전을 벌일 것이다.”

감독 대행을 맡게 된 파드리스 수석 코치는 결연한 표정으로 인터뷰에 나섰지만, 이미 늦어도 한참 늦었지.

단장과 감독을 자른 것도 사실은 더 빨리 결단을 내렸어야 할 문제고.

연패 과정에서 연장전까지 가는 승부나 9회 역전패 등등, 이길 듯 말 듯 아슬아슬한 경기가 자주 나온 덕분에 구단주의 정신이 나가버리기라도 했던 걸까.

아무튼 3차전 선발로 등판한 로버트는, 이를 악물고 덤벼드는 파드리스 타자들에게 생각보다 조금 고전했지만.

많은 팬들이 보이콧을 선언하며 관중석을 비웠던 2차전보다도 훨씬 빈자리가 많았던 펫코 파크의 덕을 톡톡히 봤다.

[아, 투수 코치가 마운드를 방문합니다. 오늘 경기 로버트 켈리의 역할은 여기까지네요. 현재 5와 3분의 1이닝 무실점. 1루와 2루에 책임 주자를 남겨놓았습니다.]

[1회를 제외한 매 이닝 주자를 내보냈지만, 역시나 베테랑다운 위기 관리 능력을 보여줬어요. 호수비를 여러 차례 연출한 야수들의 집중력도 날카로웠습니다.]

반대로 총력전을 예고한 파드리스 투수진은 아예 뒷 순번 선발까지 끌어다 쓰며 다저스 타자들을 압박했다.

나도 자동 고의사구 하나를 포함해 볼넷을 세 개나 얻었지만, 9회까지 홈을 밟아보지 못했으니 말 다 했지.

그러나 파드리스와 우리 팀 사이의 가장 큰 차이점은, 주전과 백업 사이의 실력 차가 비교적 적다는 것이었다.

따아아아악―!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꼭 한 방씩 날려주는 벤이 9회 초 대타로 투입됐고 어김없이 홈런을 때려냈다.

“와우, 벤! 축하해요! 그치만 빨리 들어와요!”

“쟤네 어떡하지? 이미 자른 단장을 한 번 더 자를 수 있나?”

“어떻게 잘 하면 되지 않겠어? 잔여 연봉 지급을 안 한다든가 해서.”

공교롭게도 벤은 불과 얼마 전까지 파드리스 유니폼을 입었던 선수.

친정팀의 29연패를 확정 짓는 결승타에, 그나마 펫코 파크를 지키고 있던 한 줌의 팬들은 재가 되어 사라졌다.

[LA Dodgers 1 : 0 San Diego Padres]

다행히 결승타를 날린 게 벤이었기에, 다저스 선수단은 친정팀에 대한 존중을 핑계로 인터뷰를 초고속으로 끝마쳤고.

샌디에이고가 불지옥으로 변모하기 직전 아슬아슬하게 다음 원정지인 애리조나로 탈출할 수 있었다.

[펫코 파크 외벽, 온통 팬들의 절규가 담긴 계란 세례로 물들다!]

[샌디에이고 원정 다저스 팬 2명 폭행 피습… 다저스 팬들, 경찰 비호 아래 전시 상황 방불케 하는 탈출 작전 벌어져]

[LA 다저스, “파드리스 팬들의 폭력 소요에 대해 깊은 유감을 표명한다. 사무국에 이 문제에 대해 정식으로 항의를 제기하겠다.”]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팬 포럼 관리자, 독단으로 사이트 폐쇄! “우리는 29경기를 견뎠다. 무능한 프런트와 코치들이 팀을 좀먹는 동안. 도대체 우리에게 무엇을 더 바라는 건가?”]

기내 와이파이로 샌디에이고의 참상을 확인하면서 선수들은 혀를 내둘렀다.

남 일처럼 넘어갈 순 없는 노릇이지. 우리 팬이 거기서 폭행을 당했다는데.

시대가 바뀌었다지만 스포츠에 과몰입해서 주먹 들고 설치는 놈들은 근절되지를 않는다.

“X신들이 꼴갑 떨면 어쩔 건데? 우린 지금 6연승이라고!”

물론 몇몇 선수들은 다음 시리즈를 위해 분위기를 끌어올리기도 했다.

“맞아! 한 시즌에 연패기록이 나왔으니 연승기록도 나와줘야 균형이 맞지!”

“22연승? 26연승? 뭐든 상관없어! 29연패를 하는 팀도 나왔는데 그거라고 못 할 거 같아?!”

엄밀히 따지면 클리블랜드의 22연승이 정확한 기록이지.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전신 뉴욕 자이언츠가 기록한 26연승은 중간에 무승부가 하나 끼어 있는 기록이고.

둘 중 뭐든 상관없으니 깨부숴주겠다며 호기롭게 날뛰던 다저스 선수단의 모습을 미디어 담당자가 촬영했지만, 그 모습이 다저스 포럼에 실리는 일은 없었다.

파드리스와의 3연전에 온 힘을 쏟아낸 다저스는,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와의 1차전에서 거짓말처럼 패배를 당했다.

“괜찮아, 괜찮아. 야구를 하다 보면 이기는 날도 있고 지는 날도 있고, 뭐 그런 거지.”

6이닝 1실점으로 패전투수가 되며, 시즌 2승 5패를 기록하게 된 다니엘은 타자들을 향해 자애로운 미소를 지어줬지만.

그날 하루가 끝날 때까지 눈을 마주치는 타자는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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