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 어느 휴일
파드리스와의 2차전에서 연속 타수 안타 기록이 중단된 이후.
당분간 주춤하더라도 신경 쓰지 말라고 온 사방에서 말을 얹었다.
심지어 박도현까지도 비슷한 말을 하는 걸 보고 긴장했는데.
따아악―!
[Hyun―Ki Koo!!! 깔끔한 중전 안타! 2루 주자는 여유롭게 홈으로 들어옵니다!]
[1―2의 불리한 카운트였는데, 살짝 낮게 들어온 하이 패스트볼에 망설임 없이 배트를 돌렸어요. 대기록이 끝났는데도 여전히 타격감은 죽지 않았습니다!]
내가 너무 최악의 상황을 상상했던 걸까.
애리조나 디백스와의 3연전, 그리고 홈으로 돌아와서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와의 3연전.
그중 5경기에 출전해 16타수 5안타.
팀은 3승 3패로 조금 주춤하긴 했지만, 개인 성적은 그럭저럭 괜찮았다.
연속으로 안타를 때려내며 스탯에 잔뜩 쌓아둔 거품은 줄었지만, 그래도 충분히 위력적인 활약을 이어갔으니까.
[네놈이 멘탈 관리를 잘해둔 덕을 보고 있는 거다, 작은 꼬맹이.]
오랜만에 연락해온 훌리안이 해준 말이었다.
[타격감이 바짝 올라왔을 때는 공도 잘 보이고, 자세가 딱 잡히니까 타구 질도 좋거든. 근데 그게 끝나고 나면 불안해지니까 자꾸 헛짓거리하는 놈들이 많아.]
훈련량을 늘린다거나, 경기를 꼼꼼하게 복기한다거나 해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닌데도 자꾸 집착하게 된다는 것.
내가 애초에 이런 생각조차 갖지 않았던 건 투수로서의 경험 덕분이라고 봐야겠지.
긁히는 날과 안 긁히는 날의 차이에 별 근거가 없다는 걸 뼈저리게 아니까.
“파드리스 놈들 덕도 봤죠.”
[맞아. 그놈들도 등신이야. 너를 호구 잡으려면 이만한 찬스도 없었을 텐데.]
파드리스와의 3연전 내내 투수들은 볼넷을 남발하며 나를 철저히 피해 갔다.
기록에 신경 쓰지 말자고 마인드 컨트롤은 했어도, 알게 모르게 집중력을 꽤 낭비했던 걸까.
솔직히 평소보다 타석에서 좀 빡세다는 느낌이 없지 않아 있었는데.
알아서 피해 주는 동안 경기 감각도 다시 다지고. 연달아 도루에 성공하며 스탯도 쌓고. 그야말로 아낌없이 퍼줬지.
[정신 못 차리고 꼬라박고 있었으면 욕이나 해주려고 했는데 아쉽구만.]
도저히 칭찬으로 안 들리지만, 박도현 피셜 극찬이라는 그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으려던 훌리안을 불러 세웠다.
“훌리안, 요새 도대체 어디서 뭐 하고 살아요?”
대꾸 없이 전화가 끊기고 나서 10초 후.
리조트 선셋 체어에 드러누워 있는 셀카가 도착했다.
“오우, 씨.”
[말보다 행동이 앞서야 한다더니, 이딴 식으로 실천하네.]
인품으로 가득하던 배도 좀 홀쭉해지고. 한 철 일하고 나머진 노후를 즐기는 모습이 행복해 보이긴 한다만.
이딴 사진이 내 핸드폰에 남는 꼴은 못 보지. 바로 삭제다.
* * *
자이언츠와의 홈 3연전은 2승 1패의 위닝 시리즈로 마무리됐지만, 팀 분위기는 썩 흥겹지 못했다.
다니엘이 승리 투수 요건을 갖추고 내려왔던 3차전이 믿었던 필승조의 방화로 뒤집혔으니까.
“나의 사사로운 감정이 문제였던 거야. 야구를 승리를 위한 수단으로 삼았던 거지…….”
“불펜 놈들 어디 갔어? 얼른 데려와서 모가지라도 바쳐. 애가 점점 이상해지잖아.”
“경기 끝나자마자 진작에 도망쳤지.”
다니엘이 상태 안 좋아 보이는 얼굴로 뭐라 중얼거렸지만, 뒤도 안 돌아보고 쿨하게 퇴근했다.
지난 경기엔 6이닝 1실점을 하고도 패전을 안겨줬으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지만, 이번엔 사정이 다르다.
‘5회까지 4점 내줬으면 됐지, 필승조가 그걸 못 지켰는데 우리보고 뭐 어쩌라고.’
[너 예전에 투수 시절엔 1점이라도 더 쥐어짜야 하는 게 타자들의 숙명이라고…….]
‘내가? 언제? 몇 년 몇 월 며칠 몇 시 몇 분 몇 초?’
[으 개극혐. 넌 진짜 야구 안 했음 뭐하고 살았으려고 그러냐.]
박도현이랑 헛소리를 주고받으며 주차장으로 향하던 길에, 누군가가 뒤에서 달려들었다.
“Hey, Koo!”
뒷주머니에 내 사진을 넣고 다니는 변태이자, 다저스의 5선발 아드리안이었다.
“내일 클레망 집에서 저녁 먹는 거, 너도 가는 거 맞지?”
손목 부상으로 팀을 이탈했던 클레망은 재활을 무사히 마치고 다음 시리즈부터 복귀하기로 했다.
마침 동부에서 날아올 다음 상대의 일정 덕분의 하루의 휴식일도 생겼겠다.
선수들을 집으로 불러 저녁 식사를 대접하기로 한 거다.
“나도 가고 싶은데, 내일은 선약이 있어.”
“와우, 선약이라고? 혹시 제리가 들으면 기뻐할 만한 소식인가?”
내가 여자랑 잘됐다는 소식을 들으면 제리가 기쁨을 못 이겨 발광하겠지만, 아쉽게도 그런 용건은 아니다.
“돈 벌어야지.”
이번 시즌까지 계약을 체결해둔 각종 스폰서 및 광고 촬영.
올스타전 출전 가능성이 커지면서, 올스타 브레이크 때 처리하려고 잡아둔 스케줄을 조정해야 했다.
“좋겠다. 우리 에이전트는 그런 거 잘 안 물어오던데…….”
“요새 하던 대로만 하면 기업에서 제발 쓰게 해달라고 줄을 설걸?”
“그럼 시간 문제겠네! 네가 내 등 뒤를 지켜준다면 나는 뭐든 할 수 있으니까!”
야수로서 참 고마운 말을 해주는데도 도저히 웃을 수가 없다.
남의 사진을 엉덩이 밑에 깔고 다니지 않고도 그런 성적을 낼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텐데.
* * *
아침 일찍부터 에이전시에서 보내준 차를 타고 촬영이니 인터뷰니, 온갖 곳을 쏘다닌 끝에 도착한 마지막 스케줄.
스포츠 아우터 브랜드의 화보 촬영 현장이었다.
다른 모델과의 공동 촬영이었는데, 매니저 말로는 그쪽에서 양해를 해줘서 오늘 찍을 수 있었다나.
“좋아요! 이번에는 Koo가 메리의 어깨에 손을 얹고! 나는 뭐든지 할 수 있다! 이런 도발적인 표정으로! 네! 아주 좋습니다!”
주는 대로 갈아입고, 수십 개씩 포즈를 잡아가며, 되도 않는 표정 연기를 이어간 지 두 시간쯤 지났을까.
“좋아요, Koo! 고생 많았습니다!”
담당자의 오케이 사인과 함께 촬영이 끝났다.
더는 일정도 없겠다, 쭈뼛거리며 다가오는 스태프들에게 사인과 사진 촬영까지 해주고 나니.
아침부터 돌아다녔는데도 벌써 저녁을 훌쩍 넘겼다.
“저기, Koo.”
돌아갈 채비를 하던 나를 불러세운 건, 오늘 함께 촬영을 진행한 여성 모델이었다.
“아, 샤이먼 씨. 저 때문에 갑작스럽게 일정이 바뀌게 됐는데,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보답 삼아 앞으로는 메리라고 불러주세요. 저도 Hyun―Ki라고 부르는 게 좋을까요?”
“좋아요, 메리. 전 그냥 Koo라고 부르세요. 솔직히 부르기 힘들잖아요.”
촬영용 아우터를 입을 땐 몰랐는데, 육감적인 몸매가 드러나는 옷을 입은 여자 모델이 나를 향해 한 발짝 다가왔다.
“촬영 경험이 많으신가 봐요. 다른 스포츠 선수들이랑도 여러 번 같이 해봤는데, 이렇게 빨리 끝난 건 처음이에요.”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전에도 화보 촬영은 여러 번 해봤는데, 그땐 다른 스포츠 선수들과 별 차이 없었을 거다.
사고 이후 이런 기회 하나하나의 소중함을 깨닫게 됐고, 좀 더 열심히 임하게 됐을 뿐이지.
“내일 경기가 있다는 건 알아요. 그래도 함께 간단하게 식사라도 하고 가지 않을래요?”
오늘 함께 촬영한 이 여자는, 전국구 스타까지는 아니어도 스포츠 브랜드에서의 경력이 탄탄한 모델이다.
이 정도 급의 여자에게서 이런 제안을 받아보는 건 처음이었지만.
“아쉽지만 오늘은 안 돼요. 동료의 집에 초대받았는데, 지금 가면 디저트라도 얻어먹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이딴 멘트를 듣고도 표정을 유지하는 걸 보면, 연륜이라는 게 무시할 수 없는 거구나 싶다.
“아쉽네요. 다음엔 시간이 꼭 났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대꾸하며 일회용 커피 컵을 건네고는 방긋 웃더니 사라졌다.
무게가 전혀 느껴지지 않아 열어보니,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은 빈 컵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웬 아이디가 적힌 작은 포스트잇 하나만 붙어 있는 컵.
SNS 비밀 계정 같은 거겠지.
“Koo, 준비 다 끝났습니다.”
“네, 가시죠.”
때마침 매니저가 찾아왔고, 가는 길에 있던 쓰레기통에 컵을 버렸다.
[뭘 버리기까지 하냐? 한두 번 만나보기라도 하지.]
다른 사람이면 모르겠는데, 얘가 이러니까 코웃음밖에 안 나온다.
키우던 유망주들이 딴 길로 빠져서 몇 번째 리트라이하는 놈이.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야.’
마이너에 있을 땐 메이저리그만 올라가면 여자도 만나고, 즐길 거 다 즐기면서 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막상 올라가 보니 무슨 괴물들만 득시글대는 인외마경이더라.
하루하루 살아남는 것만 생각하다가, 연봉조정이 다가오고 나서야 이제 여유 좀 가져도 되겠다 싶었는데 그때 딱 사고가 난 거고.
미국에 온 이후로 제대로 된 연애도 못 해본 내 신세가 새삼 처량하긴 하지만.
‘지금도 기자들한테 시달리고 있는데, 파파라치까지 끌고 다닐 순 없지.’
지금은 명예의 전당이라는 새로운 목표를 향해 달려야 할 때.
투수에서 내야수 전향이라는 전무후무한 사건으로 임팩트는 확보했지만, 문제는 누적 스탯이다.
투수 시절 스탯은 사실상 의미가 없으니, 그만큼 시간이 촉박하다고 봐야겠지.
박도현의 재능을 더 많이 손에 넣어서, 인생을 야구에 갈아 넣지 않아도 지금처럼 활약할 수 있다면 모르겠지만.
‘나 연애하는 거 보고 싶으면 야구의 신한테 어떻게 말 좀 잘해서 이것저것 퍼주라고 해봐.’
[누구 좋으라고? 평생 독수공방하고 살아라.]
‘니가 나를 남한테 뺏기기 싫어하는 건 알겠는데, 니 마음이 그렇다면 말이라도 좀 이쁘게 해봐.’
[염병하고 있네. 아드리안이랑 이쁜 사랑이나 해라.]
‘너 진짜 뒤지고 싶냐?’
[응, 이미 뒤짐.]
떠드는 사이 집에 도착했다.
매니저를 돌려보내고, 늦은 저녁으로 먹을 소고기 덩어리를 팬에 올려두던 순간.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클레망네 집에 간 놈들이 자랑이라도 하려는 건가 싶어 확인도 안 하고 받았는데.
[오빠. 잘 지내지?]
오랜만에 들어보는 목소리였다.
박도현의 동생이자, 나한테도 동생이나 다름없는 박도아.
미국에 오고 나서는 1년에 한두 번 볼까 말까 했는데, 딱 사촌 동생 수준의 사이지.
“어, 나야 뭐 늘 잘 지내지.”
재작년 사고 때 박도현의 가족들이 유품이나 재산을 정리하러 미국에 왔을 때, 나는 병상에 있느라 만나지 못했다.
그 후로도 가끔 박도현의 부모님과는 통화를 했는데, 도아랑은 어째 연락이 닿질 않았고.
[요새 오빠 경기 엄마랑 아빠랑 같이 챙겨보고 있어. 보기 좋더라.]
“장사하느라 힘드실 텐데. 감사하다고 좀 전해드려.”
[나도 오빠 응원하고 있어. 딴 건 몰라도 박도현 기록은 죄다 깨버렸으면 좋겠어.]
누가 남매 아니랄까 봐.
고기가 타진 않나 매의 눈으로 지켜보던 박도현이 자기 욕하는 거 아니냐면서 귀신같이 돌아본다.
“너는 요새 대학 다니지? 대학 생활은 좀 어때?”
박도현이 사고를 당했을 때 도아는 하필 공부에 집중해야 할 수험생이었다.
작년엔 나도 재활에 온 신경을 쏟느라 연락도 제대로 못 해서, 어떻게 입시는 잘 치렀는지 궁금했는데.
[아…… 그거 말인데.]
말끝을 흐리는 걸 보고 아차 싶었다.
등신같이. 얘가 재수하고 있었으면 어쩌려고.
그런데 말을 제대로 못 하고 망설이던 도아는, 대뜸 폭탄을 던져버렸다.
[나 사실 9월부터 LA에서 대학 다니기로 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