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신 들린 천재 타자-71화 (71/200)

71. 타이틀 홀더 (1)

“사실 언젠가 얘기해야겠다고는 생각했어. 근데 작년에는 좀…… 힘들었잖아. 오빠나 나나.”

미국 유학을 언제부터 결심했고, 여러 군데 붙었지만 최종적으로는 UCLA로 결정했고, 무엇을 전공할 거고, 구체적인 진로는 다니면서 생각해볼 거고 등등.

박도아가 무어라 계속 말하긴 했는데 솔직히 귀에 잘 들어오진 않았다.

사실 나한테는 그렇게 중요한 내용이 아니기도 하고.

“그러면 입학 전까지 집 비워주는 걸로 생각해도 될까?”

지금 중요한 건 여기가 내 집이 아니라 박도현의 가족 명의의 집이라는 거지.

월세 안 내고 사는 만큼 언제든 나갈 수 있다고 각오는 했는데, 막상 눈앞에 닥치니 조금 아쉬웠는데.

[아냐, 오빠! 그 집은 학교에서 거리도 좀 있고, 아빠도 워낙 성화라서 기숙사 들어가기로 했어.]

다행히 당장 이 집을 비워줄 필요는 없는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용케도 허락받았네.

원래부터 딸바보 기질이 있는 박도현네 아버지인데, 아들까지 먼저 떠나고 하나 남은 딸을 자기 품에서 떠나보내는 게 쉽진 않았을 텐데.

[입학식 전까지 한 며칠 동안 그 집에서 아빠랑 같이 좀 지낼 수 있을까 해서. 아무리 우리 집이라도 지금 사는 사람은 오빠잖아.]

“어휴, 당연하지. 어머니도 오시나?”

[한 명은 가게 봐야 하지 않겠냐고는 하시는데, 그때 가 봐야 알 것 같아.]

박도현이 다저스와의 계약금으로 부모님께 차려드린 식당 <도현이네 감자탕>.

원래부터 장사가 잘됐고, 사고 이후 각종 유산과 보험금 등을 수령하면서부터는 경제적 문제가 사실상 사라졌다고 봐도 되지만. 여전히 두 분이 직접 가게를 운영하고 있다.

나로서는 다행이지. 한국에 갈 때마다 들르는 장소가 사라지면 서운할 테니까.

“알았어, 도아야. 혹시라도 계획이 바뀌어서 여기 살게 되면 한 일주일 정도 전에만 미리 알려줄 수 있을까?”

[오빠가 나갈 필요까진 없는데. 일단 알았어.]

“어? 지금 뭐라고…….”

[거기 지금 밤이지? 얼른 들어가 쉬어. 내일도 파이팅하고!]

자기 할 말만 하고 전화 끊어버리는 건 남매가 아주 그냥 똑같다.

[야야야! 고기 탄다! 얼른 뒤집어!]

겉이 살짝 탄 소고기로 저녁을 때우는데, 솔직히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도 몰랐고.

그릇을 정리하는데 박도현이 불쑥 끼어들었다.

[이 새끼 아까 통화할 때부터 표정 이상하더니, 박도아랑 무슨 일 있냐?]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데, 생각은 좀 많아졌지.

애가 야무지긴 한데 타지 생활을 잘할 수 있나 걱정도 되고.

애들은 못 본 사이에 엄청 빨리 큰다더니, 한국 떠날 때까지만 해도 초등학생이었던 애가 자기 앞가림할 나이가 됐다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하지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동생이 부모님 품 떠나 이역만리까지 유학하러 온다는데, 집 생각부터 떠올린 나한테 현타가 좀 와서…….”

[집? 그냥 근처에 빈집 있으면 들어가. 아니면 아예 구장 근처로 가던가. 이젠 돈도 잘 벌면서.]

집세가 부담스러운 입장은 아니지만, 오래 살았던 집이라 나름 정이 들었으니까 그러지.

그리고 생각이 복잡한 건 다른 이유도 있다.

‘아니꼽게 보는 사람들이 없진 않을 텐데.’

유명인의 사생활을 속속들이 알아야 직성이 풀리고, 거기다 대고 참견할 권리가 있다고 믿는 미친놈들이 꼭 있으니까.

고민이 되긴 하는데, 지금은 딱히 내가 할 수 있는 일도 없다.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 가지고 벌써 신경 쓸 필요 있나. 설거지나 마저 해야지.

물론 걱정하던 일이 실제로 벌어지면 절대 가만 있을 생각은 없지만.

* * *

정오 무렵의 다저 스타디움.

언제나처럼 훈련 전 간단하게 요기를 하러 식당에 들렀더니, 평소보다 분위기가 좀 떠들썩하다.

“Koo! 여기 누가 왔는지 좀 봐!”

손목 부상으로 잠시 팀을 떠났던 클레망이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여전히 보호대를 차고 있는 걸 보면 완치까지는 아니더라도, 복귀가 가능하다고 판단했으니 온 거겠지.

“잘 지냈죠, 클레망? 어제 못 가서 미안해요.”

“아냐, 괜찮아. 요즘 완전 미쳤던데, Koo?”

오랜만에 만난 반가운 얼굴이었지만, 악수 한 번 할 틈도 없었다.

아깐 안 보이더니 언제 온 건지, R.H.가 호들갑을 떨며 내 등을 떠밀어 앉혔으니까.

“내셔널리그에서 가장 잘 치는 타자가 왔는데! 얼른 만찬을 가져다 바치지 못할까!”

“어, 저 훈련 전에는 조금만 먹는데.”

“조금?! 조그으으음?! 내가 지금 잘못 들은 건가? 설마 NL 이달의 선수가 X밥처럼 빼는 거 아니지?”

오늘 아침, 메이저리그 사무국이 양대리그의 5월 타이틀을 가져간 선수들을 발표했다.

그중 그 달의 최고의 타자를 선발하는 이달의 선수상에 이름을 올린 것은 나였다.

“맞다! 이번에 얘가 탔지? 축하한다, Koo! 한턱낼 거면 현금으로 줘!”

“오늘 아침에 발표된 거라 서프라이즈 파티 같은 건 준비 못 했으니까 기대하지 마!”

“어제 클레망 집에서 복귀 기념 파티했는데, 그때 네 수상도 축하한 셈 치지 뭐!”

동료들의 눈물겨운 애정은 기억해두겠지만, 사실 나도 100프로 수상을 확신하진 못했다.

메이저리그 역사에 남을 14연타석 안타라는 대기록을 세우긴 했지만, 출장정지와 휴식을 합해 다른 선수들보다 5경기를 덜 뛰었으니까.

만약 기록 달성 이후 급격히 페이스가 하락했다면 다른 선수에게 넘어가도 이상하지 않았다.

“제리, Koo의 점심은 이달의 투수도 못 탄 네놈이 갖다줘.”

“맞아. 타이틀도 없는 놈이 어디서 감히 앉아서 밥을 먹고 있어? 얘 의자도 뺏어.”

“아니 이게 뭔……!”

얌전히 밥 먹던 제리한테 불똥이 튀었다.

이달의 선수니, 이달의 투수니. 선수 본인한테는 영광스러운 일이긴 한데 결국 이것도 운이 따라줘야 받을 수 있다.

제리도 지난 5월에 5경기 등판해 40과 3분의 1이닝을 소화하는 동안 실점은 4점밖에 안 하는 미친 활약을 선보였지만.

손가락 물집으로 고작 한 경기 결장했다가 4월에 이어 5월에도 컵스의 에이스 A.D. 존슨에게 이달의 투수 타이틀을 뺏긴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그 양반은 퍼펙트 깨지더니 오히려 펄펄 날아다니더라.’

[내가 살아만 있었으면 기강 제대로 잡아주는 건데.]

‘우리 다음에 컵스 만나는 건 후반기 돼서거든?’

결국 진짜로 제리가 가져다준 점심을 먹으면서 선수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Koo 얘도 진짜 미친놈이긴 한데, 오늘 올 그 새끼도 솔직히 정상은 아니야.”

“이번 올스타전 선발 유격수도 그놈이겠거니 했는데, 솔직히 Koo가 계속 유격수로 나오면 어떻게 될지 모르겠더라.”

“예전 프런트는 왜 그놈을 트레이드해가지고…….”

투수들의 표정이 영 좋지 않다.

타선이 강한 팀을 상대할 때면 늘상 일어나는 일이지만, 오늘은 평소랑 좀 다르지.

오늘 상대할 팀은 필라델피아 필리스.

현재 내셔널리그 동부지구 선두를 달리고 있는 팀.

그리고 지난 시즌 다저스는 필리스와의 6경기에서 1승 5패로, 그야말로 제대로 호구를 잡혔다.

“보통은 원정에서보다 홈에서 더 잘하는 게 상식 아닌가?”

“필리건들은 지네 팀 선수가 조금만 실수해도 죽어라 물어뜯잖아. 원정이 더 마음 편하다는 놈들도 많아.”

“근데 그놈은 유독 여기만 오면 펄펄 날아다녔잖아. 안 그래요, 클레망?”

“글쎄, 그 친구 잘하긴 하는데, 다저 스타디움에서만 특히 잘했던 건 작년에만 그랬던 것 같은데…….”

필리스의 중심 타선에는 다저스 상대로 유독 강한 모습을 보이는 타자가 한 명 있다.

다름 아닌 다저스에서 마이너리그 생활을 하다가 트레이드로 떠났던.

다저스의 실패한 트레이드 순위를 매길 때면 언제나 1, 2위를 다투는 그 선수.

‘필리스가 내게 붙여준 모든 별명 중 내가 가장 사랑하는 것은 바로 다저스 킬러입니다.’

지난 시즌 골드 글러브 시상식에서 이딴 소리를 해서 벌금 징계까지 먹었던 필라델피아 필리스의 주전 유격수, 크리스토퍼 엘리엇.

[원래 덕후가 돌아서면 제일 무섭다고 그랬던가?]

‘혹시 모르지. 이 사람이 다저스에 계속 있었으면 너도 1년 만에 콜업되긴 힘들었을지도.’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 다저스는 드래프트 6라운드에서 캘리포니아주의 한 고졸 내야수를 지명했다.

글렌데일 태생으로 한평생을 LA에서만 살아온 그는 적은 계약금에도 기꺼이 입단을 결정했다. 다저스의 유격수가 되는 것은 그의 오래된 꿈이었으니까.

그러나 프런트가 그의 체격과 파워를 살리기에 유격수 포지션이 적절치 않다고 판단하면서부터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솔직히 자기 인생이 걸린 일인데, 나한테도 포지션 바꾸라고 그랬으면 무조건 버텼을걸?]

‘그때 단장이 취임한 지 얼마 안 된 시점이라 기강 잡으려는 의도도 좀 있었을 거야.’

결국 당시 우승 경쟁을 하던 다저스는 트레이드 데드라인에 맞춰 그를 유망주 무더기에 끼워 다른 팀으로 보내버렸고.

다저스의 유격수라는 꿈이 무너진 그는 오랜 시간 실력이 정체되며 여러 팀을 전전하다가, 마침내 필리스에서 재능을 만개하며 내셔널리그 신인왕을 차지한다.

[지금 단장님으로 바뀐 게 그 트레이드 때문이라는 말이 있던데.]

‘그것 때문만은 아니긴 한데, 영향이 크긴 할걸.’

여기까지만 보면, 재능을 몰라보고 헌신짝 버리듯 내친 친정팀에게 보란 듯이 성공해서 복수하는 뻔한 스토리 같지만.

문제는 한동안 유격수 기근에 시달리던 다저스 팜에서 뜬금없이 박도현이 나타나 메이저리그를 씹어먹었다는 거다.

그 선수로서는 다저스가 악당일 텐데, 악당이 벌을 받는 게 아니라 다른 데서 개쩌는 선수를 주워다 잘 먹고 잘사는 어처구니없는 해피엔딩을 맞이한 셈이지.

‘그 벌을 뜬금없이 작년 선수들이 받은 거고.’

박도현이 사고로 세상을 떠난 후, 그는 지난 시즌 골드 글러브와 실버 슬러거, All―MLB를 석권했고.

만약 박도현이 없었다면 내셔널리그 최고의 유격수는 크리스토퍼 엘리엇이라는 필리스 팬들의 외침을 현실로 만들었다.

그 과정에서 다저스를 잘근잘근 씹어먹은 건 덤이고. 작년 다저스 상대로 타율이 6할인가 그랬지 아마.

“Koo, 너도 투수 때 몇 번 만나지 않았냐? 난 솔직히 어지간하면 거르고 싶을 정도다.”

“뭐…… 그렇죠.”

그리고 부끄럽지만, 내가 호구를 잡혔던 몇몇 타자들 중 하나이기도 하지.

뭘 던져도 장타를 뻥뻥 때리니까 나도 모르게 주눅이 들었는지 자꾸 실투가 나오더라.

한때는 저놈이 다른 지구 팀인 필리스와 장기계약을 맺은 게 차라리 다행이라는 생각마저 들 때가 있었지만.

“그래도 이번엔 다를 겁니다. 유격수 자리에 카일 대신 제가 있을 테니까요.”

“Hell Yeahhhh!!! 역시 이달의 선수!!!”

“저 건방진 놈한테 진짜 유격수가 뭔지 보여줘, Koo!”

“그리고 가능하면 인터뷰에서 속도 좀 긁어주고!”

“경기 끝나고 피자도 사줘! 난 파인애플!”

이렇게 자신만만하게 구는 데는 나름의 근거가 있었다.

블루제이스와의 3연전 이후 뽑았던 두 개의 재능 중 하나를 계속 못 써먹고 있다가, 오늘 드디어 포장지를 벗길 기회가 왔으니까.

[왕관의 무게(C등급)―한정형]

○ 매 시즌, 매월 메이저리그 사무국이 주관하는 타이틀 홀더를 상대 팀으로 만날 때 효과가 발휘됩니다.

○ 상대 타이틀 홀더의 컨디션이 저하되며, 그만큼 계약자의 컨디션이 증가합니다.

○ 타이틀의 무게에 따라 효과는 차등 발휘되며, 타이틀별 효과는 중첩됩니다.

여기서 가장 집중해야 할 부분은, 여러 타이틀을 가진 선수가 있으면 그만큼 효과가 중첩된다는 것.

그리고 오늘 상대할 필리스 유격수 크리스토퍼 엘리엇은 지난 시즌 온갖 굵직한 타이틀을 쓸어 담았다.

‘오늘 경기가 미리 보는 올스타전 선발 유격수 결정전이라고들 하던데.’

올스타전 나가겠답시고 모처럼의 휴일에 스케줄도 몰아 처리했는데, 선발로 못 나가게 되면 섭하지.

호구 한 명 더 잡기 딱 좋은 날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