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 타이틀 홀더 (2)
“다저 스타디움에서의 경기는 저에게 아주 소중한 행복입니다. 필리스 팬들에게 선물을 줄 수 있으니까요.”
오늘 경기 시작 전 인터뷰에서 필라델피아 필리스 주전 유격수 크리스토퍼 엘리엇의 말씀이시다.
인터뷰에서 저런 말을 서슴지 않고 하는데도 입만 산 놈이라는 소리를 듣지 않는 건, 저 인간이 자기 말을 실천에 옮길 줄 알기 때문이다.
저 미친놈은 데뷔 이후 지금까지 다저 스타디움에서의 원정 경기 중 무안타 경기가 단 하나도 없다.
“아니, 뭐. 서운한 건 알겠다 이거야. 근데 아무리 그래도 뒤끝이 너무 긴 거 아냐?”
경기 전 훈련 시간.
옆에서 스트레칭을 하던 랜디가 불쑥 그런 말을 꺼냈다.
“본인 말로는 홈 디스카운트로 계약금도 많이 양보했다, 뭐 그러던데.”
“FA도 아니고 마이너리그 계약에 홈 디스카운트? 애초에 6라운드면 받을 만한 금액도 뻔한데.”
“그 코딱지만한 돈에서 절반 넘게 깎았다더라고.”
“어우, 그건 선 넘었지.”
“예전 프런트 진짜 미친놈들이었네.”
“나였으면 ‘X 까쇼’ 하고 대학 갔어.”
어떤 팀을 너무 사랑하더라도 계약 전에는 절대 티를 내선 안 된다는 걸 새삼 느낀다.
안 그러면 호구 계약을 맺기 십상이니까. 클레망이나 박도현처럼.
“그리고 불화 때문에 먼저 요청하지 않는 이상, 트레이드는 원래 다들 싫어해.”
“켄 너는 트레이드된 적도 없잖아. FA로 왔으면서.”
“우리 중에 트레이드로 온 사람이라 하면······.”
선수들의 시선이 얼마 전 파드리스에서 온 벤을 향해 쏠렸다.
“벤, 솔직히 파드리스한테 서운한 감정 있어요?”
“딱히.”
물어볼 사람한테 물어봐야지.
장기 부상으로 역대급 먹튀짓을 하다가 일부 연봉 보조까지 받아 가며 온 건데.
물론 저런 특수한 경우가 아니라면야 트레이드는 선수 입장에서 꺼려지는 게 맞다.
나도 마이너 시절 트레이드 가능성을 다룬 기사가 심심치 않게 나왔는데, 그걸 보는 것만으로도 꽤 스트레스를 받았으니.
“나는 솔직히 쟤 저러는 거 컨셉인 줄 알았거든? 근데 라울 얘기 들어보니까 아니더라.”
“라울? 그 밀워키로 트레이드돼서 눌러앉은 걔?”
“어, 걔. 우리 팀에 있을 땐 마주칠 때마다 찬바람 쌩쌩 불더니, 유니폼 갈아입고 나니까 그렇게 서글서글할 수가 없다는 거야.”
자기 팀으로 이적한 것도 아니고, 다저스 유니폼만 벗어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다고?
사적으로 대화해본 적이 없어서 판단하기 어렵긴 한데, 만약 사실이라면 제대로 미친놈이다.
‘크리스토퍼 걔, 너한테도 그렇게 싸가지 없게 굴었냐?’
인터뷰에서 다저스를 까기 바빴던 크리스토퍼 엘리엇이지만, 박도현이 자기보다 뛰어난 유격수라는 건 인정했다.
박도현이 사고를 당했을 때도 굉장히 슬퍼했었고.
그때 다저스와의 관계가 아주 살짝 나아졌다가, 작년에 우리를 후드려 패면서 다시 원상복구됐었지.
[걔? 몰라. 별로 안 친했어.]
‘하긴 만날 기회도 별로 없었겠네. 다저스 원정 오면 호텔 밖으로 안 나가는 놈이니.’
[어. 기껏해야 올스타전 정도? 그때도 별 얘기 안 했어.]
떠드는 사이 훈련 시간이 지나갔고, 이제는 원정팀을 위해 그라운드를 비워줘야 할 차례.
크리스토퍼 엘리엇이 원정 덕아웃에서 나오자마자 몇몇 과격한 홈팬들의 비난이 쏟아진다.
“크리스토퍼 개자식아!! 인터뷰에서 남의 속 긁으려고 야구 시작했냐!!”
“많은 거 바라는 게 아니잖아! 야구장에선 야구만 해! 여기가 무슨 니 대선 출마 기자회견인 줄 알아?!”
살벌한 와중에도 실력 얘기는 절대 안 나오는 게 좀 서글프다.
본인도 다저스 팬들을 향해서는 눈길도 안 주면서 소수의 원정팬들에게 다가가 팬서비스를 해주느라 바쁘고.
LA와 필라델피아가 거의 미 대륙의 끝에서 끝인데도 원정 응원석이 제법 차 있는 건, 작년에 다저스 원정에서 날아다녔던 저 인간의 역할이 크겠지.
‘다저 스타디움에서 안타 못 치는 날도 하루쯤 있어야지.’
오늘 크리스토퍼가 무안타로 묶이면 저 팬들의 반응이 과연 어떨까.
팀을 포스트시즌으로 이끈 영웅도 삼진 하나에 역적으로 만들어버리는 필리건들의 역정이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 * *
훈련과 행사가 끝나고 마침내 시작된 경기.
오늘 경기 다저스의 선발 투수는 4선발 마리오 로드리고.
재작년 9월, 내가 선발진에서 이탈하면서 대신 기회를 얻었고, 작년까지는 하위 선발로써 로테이션을 꾸준히 돌았지만.
따아아악―!
타고난 구위에 비해 코너웍이 어설프다는 단점을 계속 공략당하는 최근 추세답게, 선두 타자부터 큼직한 2루타를 얻어맞았다.
“후우!”
마리오가 크게 한숨 한 번 쉬고는 다음 타자를 노려봤다.
초반 실점하는 경기가 많아도 조기 강판 자체는 적은 데는 다 이유가 있다.
무사에 득점권이라는 위기를 맞아도 와르르 무너지진 않는 멘탈 덕분이지.
따악―!
1―0의 카운트에서 몸쪽 깊숙한 공을 무리하게 잡아당긴 2번 타자의 타구가 내 쪽으로 향했다.
빗맞았지만 스핀이 먹히면서 괴상한 바운드를 일으킨 타구를 일찌감치 마중 나가 글러브에 담아냈고.
오랜만에 다저 스타디움의 1루 베이스를 지키게 된 클레망의 글러브에 정확한 송구가 틀어박혔다.
“아웃!”
2루 주자는 3루까지 갔지만, 오늘 경기 첫 아웃카운트가 잡혔다.
“나이스 플레이, Koo!”
“역시 이달의 선수야!”
내야수들의 기운찬 칭찬이 이어졌지만, 그것보다 반가운 일은 따로 있었다.
‘오늘 컨디션 장난 아닌데?’
새로 얻은 재능 ‘왕관의 무게’의 컨디션 보정 효과.
작년 한 해 온갖 유격수 관련 타이틀을 독점했던 크리스토퍼 엘리엇에게서 컨디션을 빼앗은 데다가.
여기에 온종일 다른 일을 하긴 했지만, 어쨌든 훈련과 경기에서 하루 해방되면서 회복된 몸이 더해지니. 과장 좀 보태서 타구가 슬로모션처럼 보일 지경이다.
타석에서는 어떨지 궁금하네.
“우우우! 우우우우우!”
“와아아아아!!!”
잠시 딴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 필라델피아 필리스의 3번 타자가 야유와 환호를 동시에 등에 업고 나타났다.
6월 초인 지금, 팀 내 타율과 홈런 1위를 질주하면서 그 드물다는 ‘거포 유격수’의 칭호에 부족함이 없는 활약을 보여주는 크리스토퍼 엘리엇.
재능 효과 설명에 따르면 지금 컨디션에 너프를 먹은 상태이나, 일단 겉으로는 티가 나지 않아 보였는데.
[어? 쟤 뭐냐?]
크리스토퍼는 타석에서 발을 고르면서, 투수는 안 쳐다보고 뜬금없이 나한테 시선을 고정했다.
찔리는 게 있긴 한데, 그걸 쟤가 알 도리는 없으니. 한 손을 허리에 얹고 마주 쏘아봤다.
그러자 고개를 갸웃하더니 다시 타격 준비 자세로 돌아갔고.
“볼!”
평소보다 컨디션이 하락한다는 말뜻의 의미를 몸소 보여줬다.
터무니없이 떨어지는, 평소라면 눈길도 안 줬을 공에 배트 헤드가 살짝 움직였으니까.
인상을 살짝 찌푸리더니 고개를 저으며 다시 집중을 다지려는 듯했지만.
“파울!”
이번엔 한가운데까진 아니라도 살짝 안쪽으로 몰린, 보는 나조차도 등골이 오싹해지는 포심 실투에 컨택이 늦어지며 파울을 만들었다.
저런 공을 못 받아먹으면 자기 전에도 생각날 텐데.
“마리오! 오늘 공 좋다! 자신 있게 해!”
다만 한 가지 불안 요소가 있다면, 마운드의 투수한테는 여전히 저놈에게서 강타자의 이미지가 더 강렬하게 다가온다는 것.
이닝이 끝나고 나면 저놈 오늘 컨디션 별로인 것 같으니 적극적으로 승부 들어가라, 뭐 이런 식으로 작업이라도 쳐보겠는데. 지금은 힘들지.
“흡!”
카운트 1―1. 인터벌을 길게 가져가던 마리오가 마침내 3구를 던졌고.
따아아악―!
타격음이 울려 퍼지자마자 마리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고개를 떨궜다.
실투를 절대 놓치지 않는 강타자의 호쾌한 스윙을 보고 홈런을 직감한 거겠지.
그러나 실망하기에는 너무 빠른 타이밍이었다.
“마리오! 고개 들어!”
내 외침에 뒤를 돌아 상황을 확인한 마리오의 얼굴이 순식간에 환해졌다.
타자 주자는 덕아웃 쪽으로 발걸음을 돌리고, 외야에서 2루 쪽을 향해 공이 날아오고 있었으니까.
“세이프!”
3루 주자가 태그업하면서 선취점은 내줬지만, 치명적인 실투를 던지고도 1타점 희생플라이면 엄청나게 싸게 먹힌 거지.
주자 없으니 한 명만 잘 잡고 얼른 끝내자며 마리오를 격려하는 한편, 속으로는 혀를 내둘렀다.
‘새로운 재능 아니었으면 바로 넘어갔겠네.’
타이밍이 약간 밀렸는데도 거의 펜스 근처에서 잡히는 큼지막한 타구가 나왔다.
컨디션이 떨어진다고 해서 그 선수가 원래 지닌 파워가 억제되지는 않는다 이거지.
[쟤 또 저러네.]
3루 주자와 함께 원정 덕아웃으로 들어가던 크리스토퍼는 갑자기 뒤돌아보더니 나를 한번 쓱 훑어봤다.
켕기는 게 있다 보니 괜히 부담스럽다. 티는 절대 안 낼 거지만.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자신감이 붙었는지, 마리오가 이닝의 세 번째 아웃카운트를 삼진으로 잡아내면서 공수 교대가 찾아왔다.
1회 말 오늘 다저스의 첫 공격.
평소 같았으면 얌전히 덕아웃에 앉아서 체력을 회복했겠지만.
오늘은, 아니 오늘부터는 대기 타석으로 바로 나가야만 한다.
“Koo!!! 감독이 드디어 정신을 차렸구나!!!”
“지금 이 자리가 딱 어울려!! 공포의 7번 타자가 사라진 건 아쉽지만!!”
감독님은 내 타순 조정을 진지하게 의논해보겠다던 약속을 지키셨고.
오늘 경기 시작 전, 개인 면담에서 당분간은 주로 2번 타자로 출전하게 될 거란 통보를 들었다.
선구안이 괜찮고 발이 빨라 테이블 세터에 어울리기도 하지만, 오랫동안 3, 4, 5번 타순을 지켜온 선수들을 밀어내기는 어렵다는 게 이유였지.
중심 타선의 무게가 떨어져 변화가 필요하다면 모를까, 그것도 아니니까.
따아악―!
원래 리드오프로는 말릭과 루카스가 번갈아 나섰지만, 앞으로는 2루수 조지가 기용될 거라고 했는데.
본인도 이 자리에 욕심이 있었던 만큼, 1번 타자로서는 오랜만에 출전했는데도 깔끔한 우전 안타를 뽑아냈고.
무사 주자 1루라는, 오랜만의 무사 찬스에서 첫 타석에 들어가게 됐다.
“Koo!!! 누가 진짜 다저스의 유격수인지 보여줘!!!”
“네가 여기 있는데, 저딴 놈은 줘도 안 받아!!! 아니 그냥 주면 받겠지만!!! 아냐!!! 역시 필요 없어!!!”
동료들의 응원과 팬들의 오락가락하는 구애 속에서 이루어진 첫 승부.
투수는 연달아 두 개의 볼을 던지더니, 시선을 피하며 로진백을 만지작거렸다.
‘이런 느낌이구나?’
‘왕관의 무게’의 진정한 효과.
컨디션도 컨디션인데, 그보다는 멘탈 쪽 효과가 더 크다고 해야 하나.
투수 시절, 크리스토퍼 엘리엇한테 단단히 호구 잡혔던 것처럼. 반대로 어떤 타자는 내가 호구를 잡기도 했지.
분명 한 팀의 중심 타선을 책임지는 타자인데, 유독 내 공에 타이밍을 전혀 못 맞추다 보니 나중엔 타석에서 얼굴만 마주쳐도 힘이 솟았다.
‘그럼 반대로 크리스토퍼는 내 얼굴만 봐도 짜증이 솟구친다는 건가?’
예전의 그 엿같은 기분을 이렇게나마 돌려줄 수 있다면 행복할 텐데.
이딴 생각을 하다가도, 투수가 투구 준비에 들어가자 곧바로 집중 상태에 돌입할 수 있었고.
따아아아악―!
공이 수박만하게 보인다는 게 어떤 건지 처음으로 느껴봤다.
결을 따라 가볍게 밀어친 타구가 다저 스타디움의 좌측 불펜에 떨어졌으니까.
“감히 그딴 밋밋한 공을 던져?! 우리 Koo가 아직도 투수인 줄 알아?!”
“고맙다 필리스!! 너희들의 작은 선물!! 소중히 간직할게!!”
“Koo!!! Koo!!! Koo!!! Koo!!!”
1회 초부터 허용한 선취점을 순식간에 무위로 돌리는 역전 투런포.
이번 시즌 13번째인 이 홈런은 오늘 경기의 결승타가 되었다.
* * *
필리스와의 시즌 첫 경기는 5대 3 신승으로 기선을 제압했다.
오늘 경기 내 성적은 3타수 2안타 2볼넷 1홈런.
수비에서도 실책 없이 내야를 탄탄하게 지켜냈고, 타점과 득점 스탯도 쏠쏠하게 쌓았다.
반대로 작년의 좋은 기억을 근거로 호기롭게 인터뷰에 응했던 크리스토퍼 엘리엇은 4타수 무안타로 침묵한 끝에 9회 대타로 교체됐고, 실책도 하나 저질렀다.
첫 타석에서의 희생플라이 때까지만 하더라도 응원 섞인 욕설을 퍼붓던 필리건들이었지만, 응원을 제거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필리스의 주전 유격수 자리는 아무나 차지하는 게 아니죠. 그러나 그건 다저스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인터뷰에서 속을 긁어달라던 동료의 요청도 기분 좋게 들어줬고.
내친김에 피자도 사라는 제안은 단칼에 뿌리치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돌아가려던 길.
추가 훈련이라도 진행했던 건지 땀에 젖은 얼굴로 원정팀 전용 복도에서 나오던 크리스토퍼 엘리엇과 마주쳤다.
피차 나눌 만한 말은 없었지.
애초에 저놈은 다저스 선수들을 철저히 무시하는데다, 인터뷰에서 그리 입을 털어놓고서 졌는데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그런데 뜻밖에도 먼저 인사를 걸어온 건 그쪽이었고.
“오랜만이야, Park.”
그 말에 순간 움찔하고 말았던 건, 내가 두고두고 후회할 만한 실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