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신 들린 천재 타자-73화 (73/200)

73. 타이틀 홀더 (3)

죽은 박도현이 나와 함께 다닌다는 비밀.

어차피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생각에 항상 입조심을 해왔다.

원래부터 그러긴 했지만, 혹시나 술에 취해 주절주절 나불댈까 봐 주량보다 과음하는 것도 피했고.

“오랜만이야, Park.”

크리스토퍼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말을 한 걸까.

야구의 신에 대해 뭔가 아는 게 있는지, 귀신이라도 보이는 건지, 아니면 그냥 별생각 없이 한 말인지.

그러나 이걸 캐묻는 건 뭔가 켕기는 게 있다고 실토하는 거나 마찬가지였고.

“Hey, Koo!”

“아직 안 가고 있었네? 마음이 바뀐 거야?”

“거봐. 입으로는 싫다 그래도 몸은 솔직하게 파인애플 피자를…… 어?”

늦게까지 남아있던 몇몇 선수들이 우르르 몰려오면서, 뭐라도 떠볼 타이밍은 완전히 사라졌다.

인기척이 들려온 순간, 크리스토퍼 엘리엇은 볼일이 끝났다는 듯 곧장 제 갈 길을 가버렸다.

“표정 왜 그래, Koo? 저 새끼가 너한테 뭐라 그랬어?”

“어, 아냐. 그냥 잠깐 인사만 좀.”

“인사했는데 무시하고 그냥 가는 건가? 하여튼 저 새끼 성격 진짜…….”

혼자 사는 사람들끼리 저녁이나 먹고 돌아가자는 걸 뿌리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박도현과 머리를 맞대고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궁리해봤다.

“너 뭐 실수한 거 아냐? 나랑 계약할 때도 아무것도 없는 데서 갑자기 나타나고 그랬잖아.”

[그건 진짜 아냐. 애초에 계약하고 나면 계약자 말고는 아무한테도 안 보여. 내가 조절하고 말고 그런 게 없다니까?]

밤늦게까지 머리를 굴려도 뚜렷한 답은 나오지 않았다.

만약 내가 누군가한테 야구의 신의 존재를 떠벌리거나 그러면 페널티가 있다고 하지만, 그런 것도 아니었고.

결국 당장은 신경 쓸 필요 없다는 애매한 결론을 내리고 침대에 들어갔지만.

“큰일인데 이거…….”

새벽 내내 잠들었다 깼다를 반복하며 잠을 설쳤다.

마이너리그 시절 야간 원정 버스에서도 머리만 댔다 하면 잠들었는데.

결국 기분도 몸도 찌뿌둥한 상태에서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뭐 어디 불편한 데가 있다거나 그런 건 아니지?]

‘어. 그냥 어제 경기 뛴 피로가 하나도 안 가신 느낌?’

[겁나 심각한 거 아닌가……?]

이른 오전의 다저 스타디움.

평소라면 훈련 시작 전 잠시 틀어박혀 눈을 좀 붙이면서 컨디션을 회복했을 텐데.

오늘은 또 하필 낮 경기라 소집 시간도 앞당겨졌다.

“Koo! 어서 와, 내 수호천사! 기분은 좀 어때?”

클럽하우스에서 가장 먼저 반겨준 건 오늘 선발 등판 예정인 아드리안이었다.

투수가 자기 등판일에 자기 컨디션을 신경 써야지, 왜 나한테 먼저 달려오는지는 도통 모르겠지만.

“나야 늘 그대로지. 넌 어때? 작년 상대 전적이 5대 1이었으니, 6대 0으로 돌려줄 준비는 됐어?”

일단 선발 투수의 기분이 우선이니, 평소대로 넉살 좋게 다가가며 어깨동무를 했는데.

아드리안이 급격히 심각해진 표정으로 내 팔을 내린다.

“Koo. 오늘 컨디션이 별로인가 봐?”

“어?”

“웃는 게 좀 부자연스러워. 5월 21일 4회 말 수비에서 네 실책 때문에 실점했을 때, 널 위로하던 클레망한테 보여주던 얼굴이랑 똑같아.”

만약 내가 투수를 하지 않았다면, 그래서 마인드 컨트롤을 꾸준히 단련하지 않았다면.

당장 이 자리에서 도망치거나 아드리안의 뺨따구를 후려갈기지 않았을까.

‘너 내가 5월 21일에 뭐 했는지 기억나냐?’

[미쳤어? 어제 먹은 저녁밥도 기억 안 나는데.]

‘그치? 이거 이상한 거 맞지?’

저놈에게 나란 사람이 도대체 어떤 존재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미지에서 오는 공포라는 게 이런 걸까.

“하긴, 내야수로 전향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매번 그런 수비를 보여줄 수 없는 게 당연하지. 컨디션이 안 좋은 날도 당연히 있을 텐데 말이야.”

내가 할 말을 잃은 사이, 아드리안은 혼자 고개를 끄덕이며 뭐라 중얼거리더니.

자애로운 표정을 지으며 내 어깨를 두드렸다.

“오늘은 나를 믿고 수비하면 돼. 지금까지는 내가 너를 믿고 좋은 투구를 할 수 있었지만, 이번엔 반대로 하면 되는 거 아니겠어?”

그렇게 혼자 결론을 내리더니 불펜 쪽으로 후다닥 사라져버리는 아드리안.

[투수가 야수를 믿는 거야 그렇다 쳐도, 야수가 투수를 믿으면 안 되지 않나?]

‘그러게. 뭘 어떻게 믿으란 거야. 삼진 잡아달라고?’

아드리안이 멘탈에 약점을 보이다 보니, 내가 제 컨디션이 아니랍시고 덩달아 와르르 무너지는 건 아닌가 싶었는데.

저렇게라도 의욕이 생긴다면 다행인 일이지.

5월 언제쯤인가의 내 얼굴이 어땠느니 하는 헛소리는 얼른 잊어버리기로 다짐하며 라커룸으로 향했다.

* * *

경기 전 훈련 시간은 상대 팀 선수들과의 만남의 장이 되기도 한다.

트레이드나 FA로 이적하기 전의 친정팀이라거나. 아마추어나 마이너리거 시절 같은 팀이었다거나.

학연과 지연으로 끈끈하게 연결되는 KBO만큼은 아니라도 어지간하면 팀마다 아는 사람이 한둘은 있지.

팀 간의 사이가 어지간히도 틀어져 있거나, 전날 경기가 큰 점수 차로 끝나지 않은 이상, 지인과 잠시 대화할 시간 정도는 충분하지만.

필라델피아 필리스에는 내 지인이 한 명도 없다 보니 개인 훈련에만 몰두하고 있었는데.

“Koo. 잠깐 시간 괜찮아?”

어젯밤 갑자기 박도현을 향해 인사를 건네면서, 밤잠을 설치게 만들었던 장본인.

다저스를 죽도록 싫어하는 다저스 유망주 출신 유격수, 크리스토퍼 엘리엇이 나한테 다가왔다.

“크리스토퍼…… 맞지? 쟤가 이쪽엔 왜 와?”

“와, 난 쟤 우리 선수한테 말 거는 거 처음 봤어.”

“Koo가 쟤랑 아는 사이였나?”

근처에 있던 동료들이 오히려 나보다 더 당황하고 있다.

도대체 왜 안 하던 짓을 하는 건지 그 속뜻이 궁금해 돌아버릴 지경이지만.

“어, 그래. 무슨 일인데?”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냥 평소 친분 없는 상대 선수를 대하듯 퉁명스럽게 대답하는 것뿐이었다.

“별건 아니고. 연락처 좀 알려줄 수 있나 해서.”

이번에는 어젯밤처럼 놀라거나 하는 실수는 저지르지 않았다.

차라리 달가운 상황이었다.

내가 먼저 다가가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부자연스러웠으니까.

“클러비한테 부탁해서 가져다주라고 할게.”

“고마워.”

볼일이 끝나자마자 크리스토퍼는 아무런 미련 없이 뒤돌아 사라졌고, 나도 훈련에 집중할 수 있게 됐다.

저놈이 어떤 소리를 지껄이든 결국은 경기가 끝나고 난 이후의 일.

도대체 쟤랑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는 질문 공세를 대충 흘려넘기면서, 몸을 푸는 페이스를 올렸다.

“플레이 볼!”

아드리안이 1회 초 첫 타자를 삼진으로 돌려세울 때까지만 해도 자기만 믿으라던 말을 지키려는 건가 싶었지만.

“베이스 온 볼스!”

8구까지 가는 승부 끝에 2번 타자가 1루에 나갔고, 3번 타자 크리스토퍼 엘리엇의 타석이 돌아왔다.

공을 받아 투구에 들어가기 전 뒷주머니에 손을 넣어 그 안에 든 무언가를(아마도 내 사진) 만지작거리는 루틴을 실행한 다음.

세트 포지션에서 자신만만하게 초구를 던졌지만.

따아악―!

전날 투 스트라이크까지 몰렸을 때의 결과가 안 좋았다는 걸 참고했는지, 크리스토퍼는 초구부터 벼락같이 배트를 돌렸고.

타구는 빗맞으면서 속도는 줄었어도 투수 옆을 스쳐 지나가는, 2루 베이스 쪽에 바짝 붙는 까다로운 코스로 날아갔다.

2루까지 거리는 좀 있어도 타구 속도를 고려하면 나름 해볼 만하다고 판단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아……!”

강한 바운드를 일으킨 공이, 쭉 뻗은 글러브 끝을 매정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발 빠른 2번 타자가 3루까지 향하면서 1사 주자 1, 3루.

기록원의 판단은 안타였지만, 만약 퍼스트 스텝이 더 빨랐으면 잡아낼 가능성은 충분했다.

[신경 쓰지 마. 오늘은 템포를 좀 더 낮춰. 부상 안 당하는 게 제일 중요하니까.]

박도현의 조언에 고개를 끄덕였다.

핸들링을 보정해주는 ‘손은 눈보다 빠르다’를 얻게 된 후로는 잘 나오지 않는 상황이었지만, 자존심 상한답시고 무리했다가는 큰일 날 수도 있겠지.

‘역시 재능이 만능은 아니었어.’

‘왕관의 무게’도 마찬가지다.

컨디션을 보정해준다는 건, 원래의 컨디션에서 어느 정도 늘려준다는 것에 불과했고.

기본적으로 컨디션이 좋지 않은 날에는 효과를 크게 볼 수 없다는 걸 알게 됐다.

“원 아웃! 원 아웃!”

내야수들의 외침에 호응하더니, 다시 4번 타자에게 집중하는 아드리안.

그러나 사인 교환이 생각보다 길어지고 있다.

‘서로 원하는 구종이 다른 건가?’

원아웃에 주자가 1루에 있으니 땅볼을 유도하는 게 가장 무난하겠지만, 아드리안이 자꾸 거부하는 걸 보니.

상대 타자가 그 수를 읽고 있다는 불안감 때문인지, 아니면 자기만 믿으라던 약속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삼진을 전제로 한 볼 배합을 요구하는 모양새였다.

베테랑 포수가 아니고서야 투수가 원하는 대로 던지게 할 수밖에 없으니, 결국 먼저 고집을 꺾은 것은 헨리였다.

“볼!”

“스트라이크!”

“스윙! 스트라이크!”

셋업 피칭으로 타자의 눈을 교란시킨 다음, 연달아 바깥쪽 변화구로 카운트를 잡는다.

제구가 괜찮게 되는 날의 아드리안이 자주 써먹는 패턴인데도 타자가 완전히 넘어갔다.

1―2의 유리한 카운트를 선점한 뒤, 잔뜩 긴장한 타자를 향해 날아간 4구.

구종은 하이 패스트볼.

바깥쪽 낮은 공에 연달아 반응을 보였던 타자가 속아 넘어가기 딱 좋은 코스.

그러나.

따아아아악―!

상대가 삼진을 원한다는 노림수를 타자가 이미 파악했고, 존 위쪽으로 과감하게 던지지 못한다면.

언제든 장타를 허용할 수 있는 구종이기도 하다.

“런! 런!”

팔을 돌려대는 상대 3루 코치의 지시에 따라 연달아 홈을 밟는 타자들.

2타점 적시 2루타가 터지면서 어제 경기에 이어 1회 초부터 선취점을 허용하게 됐다.

“아웃!”

“스트라이크 아웃!”

태그업으로 3루까지 허용하긴 했지만, 추가 실점 없이 힘겨운 1회 초가 끝났다.

덕아웃 분위기가 조금 처졌다.

선취점도 선취점인데, 안 풀리는 경기에서 진짜 죽도록 힘을 못 쓰는 아드리안이기에, 오늘 경기가 힘겹게 흘러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중이겠지.

얌전히 배트를 챙겨 대기 타석으로 나갈 준비나 하려는데.

“아! 진짜!”

별안간 아드리안이 목청껏 소리를 질러댔다.

갑작스런 돌발행동에 덕아웃에 긴장감이 흐르던 찰나, 아드리안이 뒷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어쩐지 이상하다 했더라니, 내 수호천사가 구겨졌잖아! 이러니까 내가 힘을 못 썼지!”

내가 수비하는 모습이 찍힌 사진.

신체를 따라 오려낸 그 사진의 목 부분이 접혀서 기괴하게 덜렁거리고 있었다.

“미리 예비용을 안 가져왔으면 진짜 큰일 날 뻔했네!”

신발 깔창 아래에서 뒷주머니에 있던 것과 똑같은 사진이 나왔고.

그 사진은 다시 아드리안의 뒷주머니에 쏙 들어갔다.

그제야 안심이 된다는 듯 가슴을 쓸어내리는 아드리안을 보며 다들 할 말을 잃었다.

“어…… 그…….”

“뭐…… 본인이 행복하다면 괜찮다고 생각해! 아마도!”

“자자! 어제처럼 바로바로 쫓아가자고!”

어차피 자기 일 아니라는 걸까. 아니면 이해하기를 포기하고 묻어두려는 걸까.

얼어붙었던 분위기는 순식간에 다시 화기애애해졌고, 나는 쫓겨나듯 대기 타석으로 떠밀렸다.

“아웃!” “아웃!”

첫 타석에서 나는 시즌 2호 병살타를 쳤지만.

지나치게 어처구니없고 초현실적인 일이 벌어진 덕분에, 박도현의 존재를 들켰을지도 모른다는 충격이 날아가 버렸던 걸까.

‘저딴 새끼도 있는 판국에, 귀신 보는 새끼 한둘 있는 게 무슨 대수겠어?’

[아니 나 귀신 아니라니까…….]

박도현의 항변을 무시하면서 날아드는 타구를 향해 몸을 던져 건져냈다.

“아웃!”

박도현을 향해 인사하던 크리스토퍼의 눈빛을 떨쳐내면서부터는 수비에서 얼빠진 모습을 보이지는 않게 됐고.

“스트라이크 아웃!”

수호천사를 교체한(?) 아드리안이 급속도로 마음의 안정을 되찾으며 5이닝 3실점으로 자기 역할을 마치면서.

[Philadelphia Phillies 5 : 6 LA Dodgers]

비록 나는 4타수 1안타를 기록하면서, 컨디션이 조금 떨어진 게 아닌가 하는 감독님의 걱정과 함께 8회 초 대수비로 교체됐지만.

경기는 역전의 역전을 거듭했고. 최종적으로 승리는 다저스의 차지가 되었다.

시리즈 스코어 2대 0으로 위닝 시리즈를 확보한 상황.

“예약이 돼 있을 텐데요.”

“아, 예!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낮 경기라서 유부남들은 일찌감치 가족과 시간을 보내러 사라졌고, 독신들끼리 뭉치자는 이야기가 나왔지만 거절해야만 했다.

“안녕. 수고했어.”

경기가 끝나자마자 연락해온 크리스토퍼 엘리엇.

그와의 식사 자리가 예정되어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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