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 타이틀 홀더 (4)
“여기 괜찮네. LA에선 외식할 일이 별로 없었는데, 또 와도 괜찮겠어.”
“다행이네.”
“다음에 다저스가 원정 오면 내가 좋은 데 소개해줄게. 필리 스테이크 말고도 괜찮은 게 많아.”
경기 종료 후 연락을 받았을 때, 혹시라도 이상한 소리를 할까 봐 룸을 예약했는데.
막상 하는 이야기라고는 죄다 평범한 것들뿐이었다.
그것도 인터뷰 때마다 다저스를 향해 악담을 퍼붓는 그놈이랑 같은 사람이 맞는지 의심이 될 정도로 정상적인 태도로.
[일단 나한테 시선은 안 오고 있거든?]
음식에 정신 팔려 있던 놈이 하는 소리라 신빙성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저놈한테 박도현이 안 보이는 게 사실이라면.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박도현한테 인사를 건넸던 걸까.
“우리는 진작 친해질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어. 네 팀이 X 같은 다저스가 아니었다면 말이야.”
식사 자리 내내 이어지던 호의적인 태도는 코스가 끝나갈 때쯤 바뀌었다.
“다저스를…… 어지간히도 싫어하나 보네.”
“당연한 거 아냐? 그때 난 그 망할 하이 A 감독에게 제발 유격수로서 경쟁할 기회라도 달라고 애원했어. 하지만 돌아온 건 트레이드였지.”
솔직히 공감이 안 가는 이야기는 아니다.
만약 마이너 시절 제대로 된 기회도 없이 불펜행을 통보받았다면 나도 팀에 정이 뚝 떨어졌겠지.
왜 내가 이런 얘기를 듣고 있어야 하는지는 여전히 모르겠지만.
“다저스 선수를 누르고 신인왕을 차지하고, 그 일로 다저스 단장 모가지가 날아갔을 땐 정말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어.”
예전 기억이라도 떠올리는 건지 크리스토퍼의 눈망울이 반짝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Park이 나타났지.”
그 후로 크리스토퍼가 한 이야기는 별로 옮기고 싶지 않지만, 굳이 요약하자면 ‘박비어천가’라고 할 수 있겠다.
그 작은 체구에서 얼마나 강한 힘을 뿜어내고 얼마나 아름다운 스윙이 나오는지, 타구가 첫 바운드를 일으키는 순간 이미 모든 코스가 머리에 입력된 것처럼 움직이는 수비가 얼마나 대단한 건지 등등.
한시도 입을 쉬지 않는 그 얼굴은 최애에 대해 열변을 쏟아내는 덕후 그 자체였다.
[빨리 일어나면 안 되냐? 나 체할 것 같어.]
심지어 박도현 본인도 못 견뎌 하고 있었다.
“솔직히 내 재능을 못 알아본 다저스를 비웃었지만, 진짜 재능이란 건 저런 거구나 싶었지. 그래도 Park이 입은 그 증오스러운 유니폼 때문에 괜히 먼저 다가가긴 싫었어.”
[그랬나? 어쩐지 올스타전에서 마주치면 똥 마려운 개처럼 얼쩡대다 사라지더라니.]
사실 먼저 다가갔더라도 친해지긴 힘들었을 거다.
애가 심각한 수준의 다저스 빠돌이라서, 평소부터 다저스 악담을 일삼는 크리스토퍼에 대한 감정이 썩 좋지 않았으니.
“불쾌한 소리라는 건 나도 알지만, Park의 사고 소식을 들었을 때 엄청나게 후회했어. Park의 수비 장면을 분석하면서 많은 걸 배웠는데, 정작 제대로 된 대화도 못 나눠 봤으니까.”
“어, 그래.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대체 뭔데?”
어지간하면 들어주겠는데, 논점이 이탈하다 못해 아예 맨틀을 뚫고 사라지는 것 같아 결국 끼어들었다.
“이런, 내가 너무 내 얘기에만 몰입했네.”
딱히 미안해하는 것 같지는 않은 태도로 내게 손을 내밀며, 크리스토퍼는 목소리를 낮춰 속삭이듯 물었다.
“다시 만나서 반가워, Park. 새로운 몸에는 잘 적응하고 있어?”
다시 말하지만, 나한테 손을 내밀고 있었다.
내 옆에서 입가에 머금은 주스를 주르륵 흘리는 박도현이 아니라, 나한테.
“그…… 크리스토퍼. 나는 Koo거든?”
“크리스라고 불러줘. 그래. 나도 알아. 지금은 그렇겠지.”
“좋아, 크리스. 그러니까 네 말은 지금…… 사고가 나서, 나랑 Park이랑 영혼이 뒤바뀌었다는 뭐 그런…….”
“오, 아냐. 굳이 입으로 말할 필요 없어.”
하지 마.
다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여유로운 웃음 짓지 마. 입가에 검지손가락 가져가지 마. 니가 생각하는 게 뭔진 모르겠지만 일단 하지 마.
“이것부터 분명히 말할게. 나는 네 편에 서고 싶어. 이 사실이 밝혀지는 게 곤란하다는 걸 충분히 이해하고 있고. 내가 남들 앞에서 널 Park이라고 부르는 일도 없을 거야.”
Koo라고 부르는 일도 없었으면 좋겠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이 자식이 내 앞에 서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돌겠네 진짜. 이거 그냥 인터넷 중독 음모론자들이랑 다를 게 없는 놈이었잖아?]
‘사고로 죽은 박도현의 영혼이 구현기의 몸을 차지해 다시 메이저리그에서 뛰고 있다.’
내가 내야수로서 개막 로스터에 오른 순간부터 꾸준히 제기되어 온 음모론이다.
대부분의 음모론이 그렇듯, 진지하게 받아들이기보다는 일종의 밈으로 소비되는 편인데, 그건 사람의 영혼이 뒤바뀌는 일은 상식적으로 일어날 수 없다는 걸 다들 알기 때문이다.
그럼. 당연히 알지. 어지간한 빡통대가리가 아니고서야. 그치?
“도대체 그딴 생각을 하는 근거가 뭔데?”
만약 내가 나도 모르게 박도현을 힐끔힐끔 쳐다보거나 해서 귀신 보는 거 아니냐는 오해를 산 거라면 조심이라도 할 텐데.
도대체 나한테서 뭘 보고 영혼이 바뀌었다는 개소리를 지껄이는 건지 궁금해졌다.
“내 입으로 말하긴 부끄럽지만, 일단 나는 촉이 아주 좋아.”
아니야.
그 촉이 지금까지의 네 인생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아주 개똥촉이란 건 확실해.
“나는 상대하기 힘든 적을 만났을 때 그 사람의 아우라를 예민하게 느끼거든. 그 때문에 플레이에 약간 지장이 가기도 하고. 그런데 수비하러 나온 너를 보는 순간, Park 수준의 강자라는 걸 바로 알 수 있었어.”
그건 아우라가 아니라 ‘왕관의 무게’의 효과다.
박도현이랑 마주쳤을 때 똑같은 감각을 느꼈다는 걸 보니, 상대 선수한테 뭔가 압박을 주는 비슷한 재능이 있는 모양인데.
소 뒷걸음질 치다 쥐 잡은 격으로 얼추 비슷한 결론을 내린 거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그토록 부러워했던 반응속도와 순발력. 물론 원래의 몸이었다면 더 잘했겠지만, 적어도 얼마 전까지 투수였던 사람이 보여줄 수 있는 재능은 아니지.”
나처럼 눈치 빠른 사람은 의심했을 거라구, 뭐 이런 개소리를 덧붙이는 크리스토퍼는 일단 무시하고.
‘내가 순발력이랑 반응속도 쪽 재능은 못 뽑은 걸로 아는데.’
[그렇지. 내가 말했잖아. 너 타구 판단 자체는 잘한다고. 기본기가 개판이라 그렇지.]
내가 갖고 있는 수비 관련 재능은 핸들링을 보정하는 ‘손은 눈보다 빠르다’뿐. 나머지는 내가 훈련으로 쌓아온 것들이다.
그렇다면 내야수로서 필수적인 순발력과 반응속도는, 적어도 골드 글러브 유격수 크리스토퍼가 보기에도 뛰어날 정도로 폼이 올랐다는 걸까.
‘칭찬이라면 칭찬인데 왜 기분이 더럽지?’
[이거 듣고 기분 좋아졌다면 내가 너랑 거리 뒀을걸.]
혹시라도 나와 박도현의 계약에 대해 뭔가 알아챈 건 아닐까 잠깐이라도 긴장했던 내가 등신이지.
내 앞에 놓인 음식들을 빛의 속도로 흡입한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늘 즐거웠다. 내가 데려온 가게니까 계산은 내가 할게. 내일도 잘해보자고.”
저녁도 일찍 먹었겠다. 유튜브 보면서 뒹굴다가 일찍 잠이나 자야겠다고 다짐하며 나가려던 찰나.
크리스토퍼의 한마디가 내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새로운 몸에 맞는 수비가 필요하지 않겠어?”
“뭐?”
“아니, 별 뜻은 없어. 지금도 잘하지만, 예전보다 몸이 많이 커져서 그런지 조금 어긋나는 부분이 있지 않나 해서.”
너 때문이야 등신아.
니가 한 헛소리 신경 쓰느라 밤잠 설쳐서 컨디션 폭망했다고.
그렇게 쏘아붙이고 싶은 생각은 간절했지만,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구체적으로는?”
“스텝이나 포구할 때. 무릎에 부담이 갈 수도 있는 자세가 종종 나오더라고.”
“무릎이라…….”
[뭐해. 안 가고.]
타고난 인대와 관절의 내구도가 나쁘지는 않다고 의사들한테 듣곤 해도, 그게 언제까지고 영원할 거란 보장은 없다.
통증까지는 아니지만, 시즌 초랑 비교하면 다리에서 느끼는 피로감이 심해졌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눈앞에 있는 놈은, 비록 음모론급 헛소리를 진심으로 믿는 등신이지만, 유격수로 몇 년이나 뛰면서 장기 부상을 한 번도 겪지 않은 선수.
게다가 체격 조건은 191cm에 98kg으로, 나와 거의 똑같다.
“큰 체구에 맞는 수비에 대해 몇 가지 알려줄 수 있어. 네가 원한다면 말이야.”
골드 글러브 유격수에게 조언을 들을 수 있는 기회는 분명 소중하지만.
중요한 건 대체 왜 얘가 이렇게까지 나오는지다.
“뭔가를 바라는 건 아냐. 단지 난 너의, 아니 Park의 플레이를 보면서 많은 걸 배웠고. 그걸 갚을 기회가 왔는데도 입을 싹 씻는 뻔뻔스러운 선수는 되고 싶지 않을 뿐이야.”
[야, 가자니까. 너 설마…….]
‘쉿.’
박도현의 말을 끊으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부상 없이 꾸준히 활약한 빅사이즈 유격수는 드문데다가, 지금이 아니면 다음에 만나는 건 올스타전이나 후반기뿐.
지금 당장 얘기를 들어봐서 손해 볼 건 없다는 게 내가 내린 결론이었다.
“내가 사고로 영혼이 바뀌었다는 건 전부 헛소리야. 하지만 나는 Park의 가장 친한 친구였지.”
[아니, 내가 있는데 뭘 굳이…….]
“그러니까 나한테 뭔가 알려준다면, Park에게 받은 도움을 갚아주는 거나 마찬가지지 않겠어?”
그러자 크리스토퍼가 여유로운 미소와 함께 악수를 권한다.
“앞으로 날 크리스라고 불러준다면, 얼마든지.”
벌써 손절하고 싶다.
* * *
크리스토퍼와 함께 원정 숙소 통금까지 시간을 보내고 난 다음날.
3차전을 앞둔 이른 아침의 다저 스타디움, 고맙게도 클레망이 내 부탁에 응해 아침 일찍 훈련장으로 나와줬다.
“고마워요, 클레망.”
“아냐, 어차피 요새 러닝 때문에 새벽에 일어나고 있거든.”
클레망은 내 수비 훈련을 도와주는 한편, 피드백을 통해 지금의 수비 스타일을 완성하는 데 큰 역할을 해줬다.
수비 관련 상담에 이보다 더 어울리는 사람은 없지.
“수비에서 시험해보고 싶다는 게 뭔데?”
“어…… 일단은 자세를 좀 봐주셨으면 좋겠어요.”
클레망을 앞에 두고 어젯밤 수도 없이 연습했던 걸 보여줬다.
가상의 타구를 향해 달려가고, 글러브에 담아내는 기초적인 수비 동작.
다만 달라진 게 있다면, 대기 자세와 포구 중 무릎을 굽히는 정도가 확연히 줄어들었다는 것.
‘내가 알려주는 모든 것의 전제는, 무게중심을 낮춰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는 거야.’
무게중심을 낮추는 자세의 필연적인 부작용은, 무릎에 가해지는 부하가 늘어난다는 것.
가뜩이나 키가 큰 선수들은 땅볼 처리 때 무릎을 굽히는 각도가 큰데, 이런 습관이 들면 선수 생명이 그만큼 줄어들 확률이 높다고 한다.
그보다는 차라리 타구를 향해 더 빠르게 도달한 다음, 포구 지점을 공중에서 조금 더 높은 위치로 설정한다는 생각으로 임해보라는 게 핵심이었다.
“음…….”
내 동작을 지켜보던 클레망은 바구니와 배트를 가져와 직접 땅볼 타구를 날려줬다.
처음 몇 개는 어쩔 수 없이 허리와 무릎에 부하가 갈 수밖에 없는 느린 땅볼이었지만.
따아악―!
바운드가 큰 펑고를 받으면서 새로운 수비 방식을 시험대에 올릴 수 있었다.
허리보다 약간 아래쯤 되는 위치까지 떨어진 타구를 몸 오른편에서 잡아낸 다음, 스텝을 한 번 밟으며 가상의 1루를 향해 던진다.
같은 동작을 몇 번씩 반복하고 나서 클레망이 배트를 내려놓고는 다가왔다.
“Koo. 내가 알려준 방식도, 지금 네가 하고 있는 방식도 정답은 아니야.”
야구에 정답은 없다.
미국 유소년이 야구를 배울 때 종종 듣곤 하는 말이다.
“네가 했을 때 편한지, 그리고 실전에서 실수 없이 해낼 수 있는지만 생각하면 돼.”
수비 동작을 바꾸는 게 말처럼 단순한 게 아니다.
괜히 변화를 주려다가 이도 저도 아닌 동작이 나오거나, 자기만의 리듬을 잃어버리는 경우도 수두룩하지.
어쩌면 시즌 도중 스트라이드 폭이나 릴리스 포인트에 변화를 주는 것만큼이나 미친 짓일지도 모르겠지만.
“일단 편하긴 해요.”
신기하게도, 지금까지처럼 무릎과 허리를 굽혀 가며 수비했던 모습이 잘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몸에 빠르게 달라붙었다.
잘 안 맞는 옷을 벗고 딱 맞는 옷으로 갈아입은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 일개 선수가 알 정도면 수비 트레이너는 당연히 파악했어야 할 거 아닌가…….]
‘여기서 트레이너 탓하는 건 선 넘은 거지.’
얼마 전까지 투수였던 사람한테 내야 전 포지션의 수비 기본기를 쌓게 하는 것부터가 미션 임파서블이다.
이런 세세한 조정까지 바라는 건 양심에 털이 제대로 난 심보라고 봐야겠지.
박도현은 현역 때 부상이란 걸 아예 모르고 살았던 데다가, 나랑 체격 조건의 차이가 꽤 커서 실감하지 못했던 걸지도 모르고.
위대한 선수가 위대한 지도자가 되리라는 법은 없으니까.
“그러면 남은 건 실전에서 써먹을 수 있는지뿐이네.”
클레망의 말대로였다.
오늘 경기는 필라델피아 필리스와의 전반기 마지막 경기.
은혜를 원수로 갚기에 딱 좋은 날이다.